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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칼럼

【김기훈의 구미역사·문화】 구미는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왕조를 열었던 곳이다.

이순락기자 0 28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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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경북대 평화문제소 연구위원, 구미 새로넷방송 시청자 위원

 

우리가 살고 있는 구미지역의 지명 중 고아읍(高牙邑)이 있다. 후삼국 마지막 통일전쟁이 일이천 전투, 지금의 고아읍 지역에서 고려 후백제를 멸함으로서 고려왕조가 탄생하게 된다.  그래서  고려(高麗)의 높을 고(高)자와 어금니 아(牙)자를 붙여 "고아"라고 한다.

어금니는 사람이 가진 치아 중 가장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한다. 그만큼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해서 “고려의 어금니”라는 뜻에서 “고아”라고 붙여졌다. 그리고 아(牙)자는 그 옛날 전쟁에서 “대장기”를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고아(高牙)는 “고려의 대장기”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아읍 지역에서 낙동강에 가장 근접하고 있는 산이 “매봉산”이다. 당시 왕건의 고려군은 한반도 북쪽을 기반으로 형성된 군사들이다. 이들은 당시 사냥하는 매를 길들여 전쟁에 이용했다. 상대 적의 동태를 파악하여 신속하게 매를 띄워 그 소식을 본진으로 알렸다.

고려 왕건의 매가 매봉산에 앉았다고 해서  매봉산이 되었다고 한다. 신검의 후백제군은 매봉산 근처, 지금의 고아읍 송림리 지역에서 치명타를 입었다. 이로서 45년간의 후삼국시대는 막을 내리고, 475년 간의 고려왕조가 시작되었다.


왕건이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고아읍 관심리 앞의 들판을 “어갱이들”이라고 한다. 어갱이들은 어검(禦劒)평에서 나왔다. 어검의 뜻은 후백제 신검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막을 어(禦), 신검의 검(劒) 합쳐 진 말이다. 신검은 전투가 불리해지자 주둔군의 위치를 송림리 지역에서 괴평리 지역으로 군사를 옮긴다.

신검을 점령했다는 의미에서 점검(占劒)평이 점갱이들이 되었다. 결국 구미의 지산동 앞들과 신평동 사이에서 신검을 사로잡기 위해 발본색원 했다고 해서 발검(拔劒)들이 되었고, 발검들은 “발갱이들”로 아직까지 노래와 민요가 지산동에 전승되어 오고 있다. 


과거 우리지역은 천년전부터 일선군(一善郡) → 숭선군(崇善郡) → 선주군(善州郡) → 선산군(善山郡) 등으로 불려졌다. 1000년이 넘는 동안 우리 지역 지명에는 항상 착한 선(善)자가 들어갔다. 그 만큼 이 지역의 과거 도시 정체성이 어질고 착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구미는 옛부터 "조선인재 반은 영남, 영남인재 반은 선산"이라는 말이 있으며, 고려 왕건이 구미 일이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후삼국을 통일한다. 따라서 구미에서 벌어진 일리천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475년 간의 고려왕조가 세워진 것이다. 이처럼 구미는 과거 고려 초석을 다진 곳이고, 조선사회에서는 인재를 공급한 곳이다.

고려말 조선초에 시작된 한국의 성리학은 우리지역 구미에서부터 출발한다. 야은 길재(再) → 강호 김숙자(江湖 滋) → 점필재 김종직(直)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弼)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맥이 처음 출발한 곳이다. 따라서 구미에서 조선 유학의 씨가 뿌려졌는 것은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에 따라 1969년 구미공단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구미공단은 한국 전자산업의 메카였으며, 2000년도까지 한국 제조업의 심장부와 같았다. 비록 지금은 대기업의 해외이전과 지방 이탈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모두가 위기를 계속 위기로 받아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이제는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그 첫번째가 긍정의 마인드를 갖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준비하고, 도전하여 구미가 새로운 미래로 나갈 수 있는 도시가 되었으면 하는 개인적 바램이다.


따라서 우리 구미는 문화적·역사적으로 어느 도시보다 자긍심과 긍지를 느낄만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정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소비지향적 문화에만 집중되었고, 소비하고 즐기는 풍토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관(官) 주도의 구미의 역사·문화는 봄바람처럼 불다가 사라지는 한낱 잔치에 불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동안 알맹이는 없는 껍데기식의 역사와 문화를 주도했다. 그저 역사와 문화를 수식어로 모든 것에 갖다 붙이는 말장난만 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제부터 구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필요하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대중과 시민이 모르는 역사와 문화가 과연 역사와 문화라고 할 수 있는가?

역사적·문화적 콘텐츠가 너무도 많음에도 어디하나 뚜렷하게 세상 밖으로 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 구미의 실정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짧은 지식으로 구미의 역사와 문화를  시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알리고자 하는 목적에서 "구미의 역사와 문화", "명문가와 인물"이라는 주제로 칼럼을 쓰는 것이다.


고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왕조를 열었던 구미의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힘찬 물살을 가르고 헤엄치는 강물속의 잉어처럼 천년전으로 역사의 강물을 헤엄쳐 역사의 여행을 떠나기로 하겠다. 어떻해서 구미가 고려왕조를 열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천년전으로 역사 여행을 떠나보자.

 
통일신라 말 서기 892년 진성여왕 6년에 신라는 백성에 대한 과도한 세금과 지배층의 수탈로 국가붕괴의 위험에 직면한다. 이러한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경북 상주·문경지역 호족 아자개의 아들 견훤(甄萱)이 완산주, 지금의 전주를 도읍으로 정하고 후백제를 건국한다. 


그리고 지금의 강원도와 경기도를 중심으로 신라 진골 출신의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다가 결국 왕건(王建)세력에게 축출된다. 그리고 왕건은 918년 국호를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高麗)로 정한다. 바야흐로 신라, 후백제, 고려가 한반도에서 각축전을 벌이는 후삼국시대가 열린다.


약세인 신라를 점령하기 위해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이 주도권을 쥔 전투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927년에 있었던 바로 현재의 대구 팔공산에서 있었던 “공산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고려군의 중심 장수들과 많은 군사를 잃는 뼈아픈 패배를 맛 본다.

그 중심인물이 신숭겸(申崇謙)·김락(金樂)장군과 전이갑(全以甲)·전의갑(全義甲) 형제 들이었다. 후백제군에게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이후 공산 전투를 잊지 않기 위해 신숭겸·김락과 전이갑·전의갑 형제를 포함한 개국공신 8명을 잊지 않고,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공산에다 ‘팔’을 붙여 “팔공산”으로 이름 짓는다. 


이 공산전투에서 견훤의 매복 작전에 걸려 왕건은 대패하면서 위기에 처한 왕건을 살리기 위해 신숭겸 장군이 대신 왕건의 옷을 갈아입고, 왕건의 백마를 타고 달리는 사람이 왕건으로 오인하게 하고, 착각을 불러 일으켜 후백제군을 유인하면서 후백제군 진영에 혼선을 줘 고려 왕건은 공산전투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결국 신숭겸·김락 장군과 전이갑·전의갑 형제가 후백제군에게 잡혀 죽게 되며 왕건은 무사히 탈출에 성공하지만, 왕건은 고려군의 대부분을 잃는 뼈아픈 패배를 맛보고, 계속 후백제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왕건은 가장 아끼는 장수인 신숭겸 장군이 자기를 위해 대신 잡혀 죽으니 그 비통함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견훤은 신숭겸의 충성에 감복하여 죽은 시신을 왕건에게로 보냈다. 왕건은 우리나라 10대 명당 중 한곳인 강원도 춘천에 그의 묘를 만들었다. 신숭겸 장군은 이후부터 평산신씨(氏) 시조가 된다.


쫓기던 왕건은 지금의 선산 해평 태조산 도리사에 잠시 머물게 된다. 왕건이 머물렀다 해서 해평 냉산을 “태조 왕건”을 뜻하는 태조산(太祖山)으로 이름지어졌다.

신라 경애왕(景哀王)은 고려와 좋은 관계를 형성하면서 후백제를 견제하고 있었다. 따라서 견훤은 고려에 우호적인 경애왕을 죽이고, 신라왕실을 욕보인 이후 권력적 기반이 약하고 힘없는 경순왕(敬順王)을 세운다. 따라서 특히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던 신라호족 세력들은 견훤과 후백제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나빠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선산과 해평의 호족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역시 고려와 왕건에 대한 심리적 감정은 좋았다. 후백제 군에 쫓기던 왕건은 해평 도리사에 당도하여 머물렀다. 그러나  왕건이 후백제에 쫓겨 도리사에서 피신하여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를 따르는 군사들 수는 얼마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전투를 하기에는 피로에 지쳐 육체적으로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왕건은 도리사에서 낙동강을 내려다 본 순간,  훗날 최적의 전쟁터는 저 넓은 평야와 낙동강 그리고 전투하기에 유리한 지형 산을 가졌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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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평 도리사에서 낙동강을 내려다 본 모습>

팔공산전투의 대패로 해평 도리사에 머물고 있던 왕건에게는 바로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기에는 군사와 식량이 역시 턱없이 부족했다. 지역 사람들을 불러 모아 군사로 이용하려 했지만, 그 역시 쉽지 않았다. 이 때 나타난 두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신라 왕족의 후손들인 김선(金宣)이었고, 김훤술(金萱述)이었다. 


평소 활쏘기에 능한 김선에게는 왕건이 쓰던 활과 화살을 하사하는 동시에 활을 의미하는 궁(弓)자를 이름에 하사하여 김선궁(金宣弓)이 되며, 선주백(善州伯)에 봉해진다. 맏 백(伯)을 쓰는 선주백이란 당시 구미지역 전체의 최고 우두머리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김훤술에게는 왕건이 자신이 쓰던 칼을 하사하고,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진다. 이것으로 알수 있는 것은 김선궁과 김훤술 두 사람이 왕건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을 손아귀에 넣지 않고는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후부터 이지역을 맡는 두사람인 김선궁은 일선김씨(一善金氏) 시조가 되고, 김훤술은 해평김씨(海平金氏)의 시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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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리 고분군과 낙동강 유역>


군사력이 약할 대로 약한 고려 왕건은 해평에서의 싸움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김선궁·김훤술에게 해평 낙산리 냉산을 병풍삼아 성을 쌓게 하고, 군량미와 무기를 보관할 7개의 창고를 짓게 하여 나중에 있을 전쟁에 만반의 준비를 한다.

이 산성이 바로 숭신산성이다. 자기를 위해 아깝게 죽은 신숭겸을 기리기 위해 숭신산성(崇申山城)으로 이름 짓는다. 현재 낙산리에 가면 당시 7개의 창고를 지었다는 칠창(七倉)이라는 마을이 오늘날까지 있다.

선산·구미에서 오래 사신 분들은 낙산리를 여지(麗地)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고려의 땅”이라는 뜻이다. 고려의 려(麗)와 땅 지(地)가 합쳐져 “여지”가 되는 것이다. 낙산리에 사는 일선김씨들을 지역에서 오랜동안 여지 김씨라고 하며 지금 그렇게 부르는 어른들이 많다.


낙동강을 건너 낙산리 맞은편 지명 중 “태조 방천”있고, 태조 왕건이 머물렀던 곳이 있어 어성정(御聖停)이라 한다. 여지(麗地)와 지금의 일선교 주변은 고려와 후백제의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一利川)의 승리를 위하여 전략 거점지역으로 이미 왕건이 미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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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부 옛지도>


왕건은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냉산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진 일리천(一利川)은 왕건 본인으로 봐서는 후삼국을 통일하는 마지막 전투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그 동안 후백제와 대결하던 모든 것에 종지부를 찍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래서 먼 훗날의 마지막 전쟁을 펼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김선궁과 김훤술에게 맡겼던 것이다.

고려 왕건은 다시 고려의 수도인 송악으로 돌아가서 군사를 확보하여 훈련시키면서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한 아픔과 충성스러운 부하를 잃은 슬픔을 달래고, 다가오는 고창전투를 위해 열심히 군사력을 준비하고 계획한다.


그리고 930년 고려왕건과 후백제 견훤은 쐐기를 박는 일대 전투를 벌이는데 그것이 바로 “고창전투”이다. 고창은 지금의 안동이다. 이 전투에서도 고창지역 사람들을 설득하여 고려 왕건에게로 투항하고, 군사들에게 식량을 지원한 혁혁한 도움과 공을 세운 지역의 젊고 유능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김선평(金宣平), 김행(金幸), 장정필(張貞弼)이다. 


고창전투이후 김선평은 안동김씨의 시조가 된다. 그 중 가장 공이 많은 김행은 고려 왕건이 “능히 일의 기틀을 밝게 살피고 권도를 적절히 결정하였다”는 치하와 함께 권씨 성을 내린다. 이것은 권력(權力)을 준다는 의미 또한 담고 있다. 이렇게 해서 김행은 권행(權幸)이 되며 안동권씨의 시조가 된다. 그리고 장정필은 또한 안동장씨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태조 왕건으로부터 이후 공이 크다고 하여 이 세 사람을 태사(太師)의 높은 벼슬을 받는다. 이들 삼태사(三太師)를 기리는 태사묘(太師墓)가 지금도 안동에 있으며, 현재에도 삼태사의 자손들이 함께 모여 삼태사를 기리고 제를 올리고 있다. 천년가까이 이들 세 성씨는 안동 지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절대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짐작된다.

안동김씨와 안동권씨는 같은 김씨(金氏)에서 출발한다. 역사적으로 두 가문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지금도 안동지역에서는 안동김씨와 안동권씨가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왕건은 고창(古昌)을 안동(安東)으로 지명을 고치는데, 고창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크게 승리함으로서 그 동안 팔공산 전투에서 불안하였던 마음을 동쪽 고창에서 편안하게 하였다 하여 “동쪽의 편안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안동(安東)으로 이름 짓고,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태조 왕건은 안동지역 인재들을 고려에 등용하는 정책을 펼치는데, 이러한 정책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왕조 때까지 계속 이루어진다.


고창전투에서 대패한 934년 후백제 견훤은 당시 68세의 나이로 운주성(지금의 당진) 전투에서 갑사 5000명의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지만, 고려의 유금필(庾黔弼) 장군은 기동력을 갖춘 북방의 유목민을 전투에 참여시켜 운주성 전투에서 후백제 군에게 승리한다.

고려 왕건은 고창전투와 운주성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여세를 몰아, 견훤의 후백제군을 완전히 괴멸시킬 작전을 구상하고 계획한다. 그곳이 바로 지금 현재 선산 앞을 흐르는 감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역 “두개의 천이 하나로 만나는 일이천”이었던 것이다. 


해평 낙산리 일대를 가보면 옛날 큰 무덤인 고분군이 많이 있다. 이것은 후삼국 이전에도 낙동강과 선산지역의 넓은 평야에서 생산되는 식량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수 있겠다. 그리고 낙산리는 낙동강을 이용한 수로를 확보하며 육로가 만나는 군사적 요충지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곳이다.

자연적으로 이러한 기반으로 일대 호족들은 번성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고려 왕건에게는 이러한 지형적·경제적 요건들이 훗날 일어날 전쟁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는 것을 벌써부터 예견한 것이다. 이것으로 고려 왕건은 지역 호족을 손쉽게 흡수하면서 군사적 전략요충지를 확보하는 것을 봤을 때 군왕의 자질을 가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935년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고려 왕건에게 신라 왕조를 받치며 항복하고, 후백제 내에서는  권력 승계문제로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이 이복동생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김제에 있는 금산사에 유폐를 시킨다. 견훤의 입장에서는 동생을 죽이고, 자신의 왕위마저 빼앗은 아들 신검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견훤은 사위 박영규의 도움을 받아 몰래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의 왕건에게 귀순한다. 


돌아가는 상황이 후백제와 신검에게 불리해지자, 936년 신검은 고려 왕건과 주도권을 놓고 마지막 총력을 기울여 전투를 감행한다. 왕건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왕건은 고려의 8만 7천 500명의 군사를 모아 천안을 거쳐 오랜 시간 동안 전쟁을 준비한 선산 땅 일이천으로 이동한다.

즉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구미시의 낙동강과 감천이 만나는 일이천 지금의 고아읍 관심리 지역에 고려군을 주둔시킨다. 후백제 군은 고아읍 송림리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상상만으로도 당시 이 일대는 쑥대 밭이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후삼국의 모든 군사가 마지막 대결을 위해 집결했으니 말이다.


고려의 왕권에게 귀순한 견훤도 고려군을 지휘하여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것은 후백제군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였고,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않고 먼 거리를 달려 온 병사들은 지쳐있었다. 특히나 후백제군이 어제까지 모셨던 견훤이 고려군 지휘를 맡아 전투에 참여하니 후백제 군사들에게는 정신적 혼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후백제의 전투에서 패배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검 이끄는 후백제는 전략적·지리적 요건의 불리함도 있었고,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 온 군사들의 사기가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일이천에서 시작된 전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패배의 그림자가 후백제에 드리워졌다.

후백제 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발생하게 되면서 신검의 후백제 군은 후퇴를 거듭하다가 결국 신검의 후백제군은 항복한다. 이것으로 일이천의 잔인한 전투는 막을 내리며, 후삼국을 통일하는 전쟁은 끝이 난다. 아버지 견훤과 아들 신검의 대결도 끝이 난다.


일이천 전투는 왕건의 고려군이 전쟁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왕건은 주변의 지형과 지물을 이용하여 작전을 전략적으로 계획하여 전투에 임했다. 하지만 신검의 후백제는 아무 계획도 없이 왕건이 기다리고 있던 일이천으로 쉽게 들어왔기 때문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 구미 고아읍 앞 들판에서 펼쳐진 일이천 전투에서 고려 왕건이 승리함으로써 475년 사직의 고려왕조를 열게 되는 것이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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