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의 칼럼】 지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인가?
<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새로넷방송 시청자위원>
2월 4일, 음력 절기로 봄이 되었다는 입춘(立春)이었다. 모두들 입춘(立春)을 맞이하여 크게 길(吉)한 운(運)이 들어오고, 한 해 동안 좋은 일과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라는 뜻의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을 대문 앞에 붙이거나, 지인들에게 좋은 한 해가 되라는 뜻에서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보통 이야기 한다.
올해 입춘을 맞아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虯)가 흉노 땅으로 시집가서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어 살았을 왕소군(王昭君)의 심정을 상상하며 지었다는 “소군원(昭君怨)”시에 나오는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시로 노래한 구절이 요즘 따라 많이 생각이 난다.
그러나 날씨는 입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겨울보다 더 매서운 추위를 자랑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마음과 몸도 역시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 같다. 구미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꽁꽁 얼어붙은 기분이 든다. 4월 15일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지만, 왠지 "춘래불사춘"처럼 "봄이왔건만, 봄이 아니구나!"라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 일까?
동방규의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이 표현이 지금 구미에 살고 있는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이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구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시의 한 구절이지만, 동방규가 시로 쓴 이후 “기다리는 시절이나 기회가 왔는데도 전혀 그 느낌을 느끼지 못할 때” 주로 쓰는 표현이 되어 버렸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들(李白, 동방규)이 왜 왕소군(王昭君)을 생각하며 시를 지었을까 모두들 궁금할 것이다. 왕소군은 중국 역사상 4대 절세미인 초선, 서시, 왕소군, 양귀비 중 한명이었다.
천하를 놀라게 할 아름다움 때문에 오히려 평탄하지 않은 한과 슬픔이 많은 삶을 살다 죽은 절세미인 왕소군에 대해 당나라 때 시인 동방규와 이백이 그녀를 위해 시를 지어 노래했다.
이백(李白)의 시 왕소군(王昭君)을 한번 보자. 昭君拂玉鞍 (소군불옥안) 소군이 옥안장을 털고, 上馬啼紅頰 (상마제홍협) 말 위에 올라 붉은 두 뺨에 눈물을 흘리네. 今日漢宮人 (금일한궁인) 오늘은 한나라의 궁녀이지만, 明朝胡地妾 (명조호지첩) 내일 아침에는 오랑캐의 첩이 되겠네.
중국 4대 절세미인이라고 한다면, 양귀비의 미모는 꽃을 부끄럽게 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해서 양귀비를 수화(羞花) 양귀비라고 한다. 는 당나라 현종 때의 양귀비(楊貴妃)이다.
얼마나 미모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악기 연주에도 출중하여 시아버지가 며느리의 미모에 반해서 그녀와 불륜을 저지르고, 아들에게서 양귀비를 빼앗아 왕비로 삼았지만, 안록산(安祿山)의 난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삼국지에 나오는 초선(貂蟬)이 때문에 동탁과 여포의 갈등이 시작되면서 중국은 삼국으로 갈라진다. 그래서 한나라는 삼국으로 나뉘어져 천하를 통일하려는 위, 촉, 오의 경쟁을 삼국지에 기록하고 있다. 초선이 한나라 말기의 충신 왕윤(王允)의 수양딸이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가져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인이었다. 왕윤의 계획으로 동탁과 여포사이에서 서로의 마음을 빼앗아 이간질을 시킨다.
결국 초선이의 이간질로 천하제일의 장수 여포가 동탁을 제거하면서 후한(後漢)이 완전히 망하고, 중국 천하가 위, 촉, 오로 세 개의 나라로 나뉘어져 천하통일을 위해 경쟁하게 된다. 삼국시대를 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경국지색의 여인 초선이가 있었다.
초선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에 숨었을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초선의 아름다움에 달이 구름뒤에 숨었다 하여 “폐월초선(閉月貂蟬)”이라는 말이 생겼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사자성어는 춘추전국시대의 오나라 부차와 월나라 구천 사이에 서로에 대해 복수를 다짐하면서 생긴 말이다. 서시는(西施)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나무꾼의 딸로 태어났지만, 그녀의 미모가 엄청나서 월나라 범려(範蠡)는 그녀를 이용해 서시를 한번 보는데, 사람들에게 돈을 받았는데 돈이 산만큼 쌓일 정도였다고 한다.
월나라 범려는 이 돈으로 오나라를 치기 위해 무기를 구입하고, 병사를 훈련시킨다. 한편 범려는 서시를 3년간 스파이 훈련을 시켜 평소 여자를 좋아하던 오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바친다. 서시가 물속을 보았는데, 서시의 아름다움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고, 가라앉아 죽었다고 해서 침어서시(侵魚西施)라는 말까지 생겼다고 한다.
오나라 부차는 한순간에 서시의 미모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서시가 좋아하는 뱃놀이를 즐기기 위해 운하를 판다. 운하를 파게 되면서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과 강제노역을 시키면서 국력이 급속도로 쇠퇴하게 된다.
이러한 오나라의 국력 쇠퇴는 월나라 구천(勾踐)에게 패배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오나라는 전쟁에서 구천에게 패배하게 되면서 오나라는 결국 망하고, 부차는 스스로 자결한다. 결국 서시의 아름다움은 오나라를 망하게 했던 것이다.
중국 최고의 시인 이백이 중국 최고의 미인을 생각하며 지은 왕소군은 본명이 왕장(王牆)으로 중국 전한(前漢) 말기의 원제(元帝)때 18세의 나이로 궁에 들어가 원제의 후궁이 되었다.
원제는 3천명의 후궁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왕소군도 그 중 한명의 후궁이었다. 후궁이 워낙 많다보니 일일이 후궁을 만나 볼 수 없어 그림을 그리는 화공들을 시켜 후궁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으려고 후궁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초상화를 그리는 화공에게 뇌물을 받쳐야 예쁘게 그려달라고 청탁을 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집이 가난하여 뇌물을 받칠 수가 없다. 화공 모연수(毛延壽)는 왕소군이 뇌물을 받치지 않자 절세미인 왕소군을 못생기게 그리고, 얼굴에도 없는 큰 점을 그리고 말았다. 그래서 궁에 들어 온지 3년 동안 황제의 얼굴을 아예 볼 수가 없었다.
당시 한나라의 국경을 침략하던 흉노족 서역도호부사인 감연수(甘延壽)가 북흉노를 정벌하자 남흉노의 호한야(呼韓邪)가 한나라 황제 원제에게 극진하게 신하의 예로 청해왔다. 그래서 원제는 호한야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환영하였고,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제안하자 곧 바로 원제는 승낙했다.
한나라 황제가 자신의 위엄을 자랑하기 위해 연회에서 지금까지 총애를 받지 못한 후궁들은 차례로 나와 호한야에게 술을 권하라는 명을 후궁들에게 내렸다. 후궁들 중에 한명이 호한야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호한야는 황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되는 것도 좋지만, 공주가 아닌 황제의 후궁을 준다고 해도 괜찮다고 하자 황제 역시 그렇게 하라고 호한야에게 이야기 한다.
호한야는 이미 술을 권하던 후궁 중 왕소군을 점찍어 두고 있었다. 호한야가 지명한 사람은 왕소군이었고, 그야말로 천하절색이며, 나라도 망하게 할 정도의 절세미인이었다. 황제인 원제 역시 순간 왕소군의 미모에 반해버렸다.
왕소군처럼 저렇게 절세미인이 어떻게 해서 아직까지 황제인 짐의 총애를 받지 못했나 해서 후궁들의 초상화를 살펴보았는데 왕소군의 초상화와 실물이 완전히 달랐다. 황제는 자기를 속인 화공 모연수를 곧바로 참형에 처했다.
황제는 왕장을 놓치기 싫어 혼수 준비라는 명목으로 사흘의 시간을 얻어 천하 절세미인 왕장과 사흘 밤낮을 보낸다. 황제는 왕장에게 한나라 왕실과 황제를 빛나게 해 달라는 뜻으로 소군(昭君)이란 이름을 하사한다. 이래서 왕장이 왕소군이 된 것이다. 왕소군을 흉노 호한야에게 시집보내고, 난 뒤 한나라 황제 원제는 왕소군을 그리워하다가 그만 3개월 뒤에 죽고 만다.
왕소군이 흉노 땅으로 떠나면서 이별 곡을 비파로 연주하는데,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왕소군의 모습을 보느라고 날개 짓하는 것을 잊어버려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왕소군을 떨어지는 기러기란 뜻에서 낙안(落雁)이라고 부른다.
왕소군이 떠나자 3개월 만에 한나라 원제가 죽고, 황후인 태황태후의 조카 왕망(王莽)이 난을 일으켜 신(新)나라를 세워 한나라를 망하게 한다. 신(新)나라 이전을 전한(前漢)시대라고 한다. 이에 한나라와 화친관계에 있던 흉노가 왕망이 세운 신나라를 인정 할 수 없다고 국경을 자주 침범하고 침략하여 전쟁이 일어난다.
흉노가 왕망의 신나라와 싸우는 것을 보면서 왕소군은 35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왕소군은 원래 한나라와 흉노의 화친의 제물로 희생된 여인이었다. 자신을 희생한 보람도 없이 한나라가 무너지고, 신나라가 세워졌다.
그리고 신나라와 흉노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컸을 것이다. 여자로서 한이 가슴 깊이 맺혔을 것이다. 그녀의 한이 맺혀서인지 왕소군의 무덤에는 서리가 내려도 풀이 죽지가 않았다고 해서 왕소군의 무덤의 풀을 청총(靑塚)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미인인 경우 그 아름다움 때문에 자기의 삶이 뒤엉켜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미인박복이란 말이 이런데서 나왔다고 하겠다.
날아가던 기러기가 떨어질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진 왕소군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구미는 평균연령이 38세로 산업적으로 너무도 매력적인 도시임에도 대기업들로부터 어느 순간부터 외면받고 있었다. 그동안 구미는 기업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결과가 "몰락과 위기"라는 두 단어만 남겨졌다.
4월 15일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구미경제의 새로운 방향과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도래할 수 있다. 그러나 지역의 정치권은 그렇게 미래를 제시하지 못할 것 같아 보이는 것은 왜일까?
왕소군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랑캐 땅에 시집보낸 황제 원제처럼 슬퍼하다가 그냥 죽을 것인가? 이번 기회에 구미의 정치인들이 왕소군만한 재능을 지닌 구미의 장점을 알아보고, 구미를 재도약 시킬 수 있는 밑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 그리고 구미시민의 4월 15일 총선의 선택은 구미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다.
구미시민들의 잘 못된 선택은 동방규가 왕소군을 위해 지은 시처럼 "봄이 왔건만, 봄이 아니구나!"라는 "춘래불사춘"만 선거철이 되면 계속 읊어야 한다.
계절적으로, 정치적으로 "봄은 왔건만, 봄이 아니구나"라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지금 필자가 살고 있는 구미지역에 딱 맞는 이야기인 것 같아 적어 보았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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