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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칼럼

【김기훈의 명문가와 인물】 송당 박영(松堂 朴英)은 역사적으로 구미·선산의 학문을 재정립한 인물이다.

이순락기자 0 3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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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회 이사, 구미새로넷방송 시청자위원>


선산에서 해평으로 넘어가는 일선교를 지나기 전에 선산읍 생곡리가 있다. 그리고 좌측으로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선산읍 신기리에 송당정사(松堂精舍)가 나온다. 여기가 바로 조선시대 선산·구미지역의 학문의 발원지가 되는 송당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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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당 박영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공부한 송당정사>


송당정사는 송당 박영 선생이 당대의 최고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학하던 곳이다. 송당정사 옆으로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 힘차게 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 떼처럼 송당 박영을 만나기 위해 필자는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하겠다. 


필자는 앞전 칼럼에서 신당 정붕(新堂 鄭鵬)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있다. 송당 박영(松堂 朴英) 선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신당 정붕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신당 정붕이 속한 사림파는 1504년 연산군과 임사홍(任士洪)이 일으킨 갑자사화의 중심 표적이었다. 사림파 신당 정붕은 평소 올곧고, 청련한 처신과 생활로 사림파가 대거 숙청되는 과정에서 죽음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성리학의 학통(學統)과 도통(道統)을 잇던 신당 정붕의 스승 한훤당 김굉필(寒暄堂金宏弼)은 갑자사화의 최대의 피해자가 된다. 갑자사화를 만든 연산군과 임사홍은 사림파의 중심인물들을 키워낸 김굉필을 잔인하게 죽인다. 김굉필의 제자인 정붕 역시 사림파란 이유로 곤장 형을 받고 영덕으로 유배를 가는 형벌을 받는다.


정붕은 영덕으로 비록 유배는 갔지만, 이것은 김굉필의 학문을 이어 받은 정붕이 송당 박영을 다시 만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무인(武人) 박영이 학문을 하는 학자로 대변신을 하는 계기를 만든다. 그리고 이들 정붕과 박영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양에서 고향이 같은 선후배로 알고 지내고 있던 사이였다. 

 

조선성리학은 고려 말 정몽주 → 길재 → 김숙자(김종직의 아버지) → 김종직 → 손중돈·정여창·김굉필로 이어졌다. 경주의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墩)에게로 이어진 성리학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을 거쳐 퇴계 이황(退溪 李滉)으로 이어져 퇴계학파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김굉필은 → 조광조으로 이어지는 경기도와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학파를 만든다. 동시에 선산 출신이면서 한양에서 김굉필 문하에서 학문을 배운 신당 정붕이 있게 되면서 우리지역의 학문은 다시 살아 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인 삶에서 학자의 삶으로 대전환을 한 송당 박영은 이러한 신당 정붕의 학통(學統)을 이어받게 되면서 당시 조상들이 살았던 선산·구미지역의 성리학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김종직의 학통과 도통을 계승한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이들 5명은 1610년 광해군 때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지정되어 유교를 만든 공자의 위패가 모시고 있는 성균관 문묘에 이들 5명의 위패가 나란히 배향되어진다. 


이것은 결국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계속된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 속에서 사림파의 승리로 귀결되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부터는 사림파 내부에서 처음에는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져 싸우다가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졌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져 4색의 붕당이 형성되어 치열하게 대립·갈등하는 당쟁이 시작된다. 


정붕과 송당은 무척 각별하였는데, 정붕이 청송부사를 할 때 박영의 집을 찾아 박영의 학문이 어느 정도 나갔는지 확인하고 가르침을 전했다. 특히 정붕은 박영에게 대학(大學) 공부를 강조했는데, 박영은 혼자 스스로 대학을 공부하기란 어려워하였다고 한다. 


무인이었던 박영은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하면 백발백중의 실력을 소유했다. 그래서 박영은 정붕에게 “담장 밖의 솔방울을 활을 쏘아 맞추는 것은 쉬워도 대학의 심오한 이치를 알기는 어렵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당 정붕과 송당 박영 사이에 그 유명한 “냉산문답(冷山問答)” 또는 청산문답, 청산대학(靑山大學)이 있다. 정붕이 박영을 보면서 해평 냉산을 가리키며, “저기 푸른 산 밖 넘어 무엇이 있겠는가?” 물으니 박영이 답변하지 못하였다. 이에 정붕은 박영에게 좀 더 학문에 매진할 것을  당부한다. 


그날 이후 정붕의 지적에 부끄러움을 느낀 박영은 집밖으로 나오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집중하였다. 이후 다시 만나 정붕이 박영에게 묻자, “이 산 바깥에 다시 산이 있을 것입니다.”이렇게 박영이 답하자, 정붕은 박영의 학문이 크게 발전하였다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박영이 정붕과의 냉산문답, 청산문답을 통하여 대학을 깨달았다고 해서 청산대학(靑山大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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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 정붕과 송당 박영 냉산문답을 했다는냉산의 모습>


정붕은 김굉필의 학통이 단절되지 않고, 본인을 통하여 박영에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서 신당 정붕과 송당 박영은 진정한 사승(師承)관계를 맺는다.


정붕의 딸과 박영의 아들이 결혼하여 사돈관계를 맺을 정도면 정붕과 박영의 관계를 굳이 말과 글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박영과 정붕은 나이로 4년 차이밖에 나질 않았지만, 박영은 평생토록 정붕을 스승으로 공경하고 스승의 예로 대하였다.


정붕이 강조한 대학을 박영은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는데, 대학의 지선명덕(至善明德)을 박영은 시로 지었다. “첨피기오(瞻彼淇澳)한대, 녹죽(綠竹)이 의의(猗猗)로다! 유비군자(有斐君子)여, 낚대를 빌리렴, 우리도 지선명덕(至善明德)을 낚아볼까 하노라!” 


이것을 해석을 하면 “ 저 기수의 물굽이를 보라! 푸른 대나무가 가냘프고 아름답구나. 멋진 군자여! 낚시대를 빌려다오! 우리도 지선과 명덕을 낚아 볼까 하노라!” 박영의 학문의 궁극적 목적이 “지극히 착한 것에 머물고,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라는 지선명덕(至善明德)에 있다고 보았다.


1512년 청송부사를 하던 정붕이 죽자, 정붕의 학문을 이어받은 송당 박영은 슬픔을 뒤로 한채 밤낮없이 노력하여 그의 학문이 선산·구미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게 된다. 당시 지역의 명문가의 자제들은 모두 송당 박영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다고 보면 된다. 


동고 이준경(東皐 李浚慶)은 명종 때 영의정에 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러니 이준경은 박영보다 훨씬 후배가 된다. 이준경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치열하게 싸우게 될 것을 예언한 인물이다. 이준경은 죽을 때 붕당(朋黨)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곧 생겨날 붕당을 사전에 막고, 타파해야 한다는 것을 죽어가면서 상소를 임금에게 올린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 있는 원로대신의 상소는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이준경의 죽으면서 올리는 마지막 상소는 신진 사류들인 서인의 대표적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동인의 대표적인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등으로부터 규탄을 받고 무시당하면서 임금조차 무시한다. 그러나 이준경의 예언을 조정에서 무시했던 결과는 이준경의 예측대로  동인과 서인의 붕당이 되어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앞을 내다 볼 줄 알았던 동고 이준경은 신당 정붕과 송당 박영을 높이 평가하고 김굉필 → 정붕 → 박영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계보를 인정하였다. 박영은 동방오현에 들어가는 회재 이언적과 깊은 교류하였다. 당대 최고의 학자인 이언적은 박영의 학문을 인정하고 도학자로서 높이 평가하였던 것이다.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불만을 품은 이징옥(李澄玉)이 함길도에서 난을 일으킨다. 송당 박영의 증조부 박호문(朴好問)은 계유정난이 일어나면서 함길도병마도절제사 관직을 수양대군으로부터 제수 받는다. 


박호문은 함길도병마도절제사를 직책을 받고, 이징옥의 난을 진압하러 함길도로 가던 중 이징옥에게 죽었다. 조부는 안동대도호부사 박철손(朴哲孫)이었고,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한 박수종(朴壽宗)이며, 어머니는 양녕대군의 딸이었다. 


박영은 3세살 때부터 무예를 즐겼고, 활을 쏘았다 하면 백발백중이었다고 하여, 아버지 박수종이 이름을 영(英)이라 지었다고 한다. 박영의 아버지는 양녕대군의 사위가 되며, 박영은 양녕대군의 외손자가 되는 것이다. 송당 박영(松堂 朴英)은 1471년 성종 2년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밀양박씨(密陽朴氏)이며, 박영의 집안은 대대로 무인(武人)집안이었다.


그러나 어린 박영에게도 시련이 다가오는데 그것은 가족들의 계속된 죽음이었다. 박영이 5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7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이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어 3년 상을 마치니 12세밖에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 삼년상을 마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부지런히 익혀 16~17세 때에 박영의 무예실력과 그의 담력과 용기는 한양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박영은 이러한 가족들의 죽음을 잊기 위해 저작거리에서 기생들과 술판을 자주 벌렸고, 그의 호방한 성격과 무술 솜씨는 장안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 박영이 술과 여자에 빠져 살고 있다는 소문은 성종 임금에게까지 들어가게 되어 성종은 박영을 조용히 부른다. 


박영의 어머니가 바로 양녕대군의 딸이라서 넓게 해석하면 박영도 왕실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종은 박영을 불러 네가 지금하고 있는 행동들은 집안과 왕실을 욕보이는 것이니 당장 정신을 차리라는 질책을 한다. 


그리고 성종은 박영에게 무예가 출중하니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워보라는 명을 내리니, 이후 박영은 더더욱 열심히 무예를 연마하여 여진족을 정벌하는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나선 이극균(李克均)의 휘하에 들어가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후 1492년 성종 2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왕을 호위하는 선전관에 오른다. 


박영은 양녕대군의 외손자로 집이 부자였다. 박영은 젊어서부터 호방하고 풍류를 즐기는 사내대장부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말을 타고 칼을 찬 박영의 모습은 그야말로 사내대장부처럼 보이니 모든 여성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충분했다.

어느 날 박영이 말을 타고 길을 가고 있는데 눈에 유독 들어오는 한 여인이 박영에게 추파를 던졌다. 박영은 젊은 혈기에 그 여자의 유혹을 피할 수 없어, 말에서 내려 그녀가 안내하는 은밀한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런데 여자는 박영의 귀에다 작게 속삭이기 시작한다. 


“조용히 하시고 그냥 제 말을 들어주세요.” “당신은 보통 사람 같지 않아 보이고, 무예가 출중해 보여 이렇게 모신 것입니다. 그러니 저의 청을 제발 거절하지 마시고, 제 청을 들어주세요.” “자칫하면 나리는 오늘 밤 저 때문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여인의 말에 무예가 출중한 박영이라 할지라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여인은 박영에게 “사실은 사람들을 유혹한 건, 저의 뜻이 아닙니다. 도적이 저를 시켜 사람을 유혹해 오라고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밤중에 잠이 들면 유혹한 그 사람을 죽이고, 그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유혹하여 도적질하기를 몇 년이나 됐습니다. 저는 도적들의 감시 때문에 탈출하고 싶어도 탈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저의 탈출을 도와주십시오.”

이러한 간절한 여인의 부탁에 박영은 잠잘 방의 벽의 두께를 확인하기 위해 칼로 벽을 찔렀다. 그 중 가장 약한 곳을 알아 두었다가 그리로 탈출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인과 잠자리에 드는 척을 하고 있을 때, 천장에서 밧줄이 내려왔고, 도적들은 여인의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박영은 여인을 안고 벽을 박차고 담을 뛰어 넘어 탈출에 성공했다.


이날 이후 박영의 생각이 달라졌다고 한다. 말하자면 자기의 인생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혈기만 믿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옷을 보니, 옷소매가 찢어져 떨어져 나가고 없었던 것이었다. 이후부터 박영은 좋고 호화로운 옷을 입지 않고, 여자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1494년 성종이 승하하자 가족을 데리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전념했다. 박영의 곁에는 항상 이 소매가 찢어진 옷을 걸어 놓고 그 옷을 보며 마음을 다스렸고, 훗날 자녀들에게도 소매가 찢어진 옷을 본보기로 삼았다고 한다. 


이 때 박영의 나이 24세였는데, 대궐에서 숙직 근무를 하다가 한숨을 지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 달리고 칼 쓰는 것을 익히는 것은 한갓 용감한 사내의 일이다. 사람으로서 배우지 않으면 어찌 무엇으로 군자가 되겠는가?”라고 탄식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을 닦을 마음의 준비를 한다. 


1494년 성종이 승하하면서 다음 보위는 연산군이 오르게 된다. 연산군은 성종이 살았을 때 키우던 사슴을 활로 쏘아 죽이는 것을 본 박영은 곧바로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전념한다.

송당 박영의 학문은 기본적으로 주자학에 토대를 둔 도학(道學)을 표방하였지만, 박영은 주자학 일변도의 고지식한 분위기를 벗어나 공부하는 것을 즐겼다. 이것은 한 세대이후 주자학자들 특히 퇴계 이황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한다.


조선 중기를 넘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등이 나타나면서 조선의 성리학은 주자학적(朱子學的) 도그마(dogma), 즉 주자학에 대한 비판이 허용되지 않으며, 유학자(儒學者)는 무조건적으로 주자학만을 공부해야 한다는 의식이 널리 퍼진다. 


이러한 주자학 도그마는 주자학의 원리와 근본에 벗어나 있는 학문적 분위기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박영은 퇴계 이황보다 30년 앞선 선배 학자였지만, 주자학의 입장에서 벗어나 공부한 것에 대해 때로는 퇴계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이 키우던 사슴을 활로 쏘아 죽인다. 이것을 직접 목격한 박영은 곧 조정에 닥쳐 올 큰 화(禍)를 예측했다. 1504년 연산군은 많은 국고를 탕진하여 국고를 채우기 위해 생모인 폐비윤씨의 복수를 앞세워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파까지 대거 숙청하는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고향으로 돌아 온 박영은 경치 좋은 낙동강가에 송당정사(松堂精舍)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박영은 정붕과 박경(朴耕) 등과 어울리면서 사우(師友: 스승으로 삼을 만한 벗)관계를 맺고, 대학을 중심으로 학문에 전념한다.

이때에 낙향하여 무인에서 문인으로의 삶의 목표를 바꾼 박영의 학문을 질적으로 향상 시킨 인물이 바로 신당 정붕이었다. 정붕은 박영에게 대학(大學)을 공부하여 성(誠)·경(敬)을 통한 도덕군자의 길을 갈 것을 권유하면서 박영은 학문에 전념한다.


그리고 박영은 당시 의서(醫書)를 통달하고, 경험방(經驗方)과 활인신방(活人新方) 같은 의서를 지어 지역의 백성들에게 의술을 베풀었다. 박영의 의술이 남쪽지방의 의원들에게 퍼져 박영의 진찰하는 방법은 하나의 중요한 교과서가 되어 전승되었다고 한다. 


송당 박영은 정붕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에 전념하고, 발전하는데, 이것은 김굉필 → 정붕 → 박영으로 이어지는 학통과 도통을 선산·구미지역 뿐만 아니라 전라도 지역까지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구미·선산지역의 역사가 깊은 가문의 조상들 대부분이 송당 박영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영이 선산에 내려와 송당정사를 짓고 학문을 시작할 무렵부터 전라도 나주 출신의 박경과 학문을 논했다는 것은 박영의 이름이 이미 전라도에까지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숭선지(崇善志)를 저술한 선산출신 노경임(盧景任)은 한국 도학의 계보를 정몽주 → 길재 → 김숙자 → 김굉필 → 정붕 → 박영으로 강조하고 정리한다. 김굉필의 적통을 정붕과 박영으로 본 것이다. 


송당학파가 만들어지는 계기는 1519년 진사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상경하던 용암 박운(龍巖 朴雲)이 송당 박영을 만나보고는 그의 학문과 인품에 감복하였다. 그리고 송당 박영은 용암 박운에게 진락당 김취성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한다. 


박운은 곧 고향으로 돌아와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을 찾아가 송당 박영은 당대의 유학자(儒學子) 중에 그의 학문을 따를만한 자가 드물고 없으니, 우리가 질문하고 토론하여 송당 박영의 제자로 나가는 것이 어떠하겠냐고 김취성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김취성이 박운의 말을 듣고 따르려 하지 않자, 박운은 김취성을 보고 소년들이 높은 체 하는 병통이 바로 이것이니, 모름지기 이러한 병통을 떨쳐버려야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다고 꾸짖는다. 그러자 김취성은 송당 박영을 만나자는 박운의 제의에 흔쾌히 승낙하고, 송당 박영을 만나기로 한다. 


이후 1519년 4월 김취성은 박운과 함께 월파정(月波亭)에서 송당 박영의 도학강론을 듣는다. 그 후 김취성은 박운에게 “만약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거의 헛된 삶을 살 뻔했다.”고 하였다. 이후 용암 박운과 진락당 김취성은 송당 박영에게 성리학을 배우는 제자가 되면서 송당학파가 만들어진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송당 박영이 진락당 김취성을 박운에게 소개시켜 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것으로 봐서 진락당 김취성의 학문은 이미 선산이라는 지역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하겠다. 


제자 박운은 송당 박영을 “동방 리학(理學)의 종장(宗匠)”이라고 한다. 이는 곧 “도학의 정통”이라는 의미하였다. 월파정에서 만난 진락당 김취성과 용암 박운은 송당 박영의 학문을 따르고, 잇는 가장 큰 제자들이 되었다. 1537년 박운은 명경당(明鏡堂)을 짓고, 박영, 이언적, 김취성을 초대하여 함께 시를 지으며 학문을 논한다. 가장 연장자는 송당 박영이었다. 


이 4명이 모여 학문을 논하면서 시를 읊는 장면은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의 모임이었다고 평가 할 수 있겠다. 회재 이언적은 조선에서 알아주는 대학자의 반열이었다. 당시 이언적이 이렇게 3명과 어울려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었다는 것은 이들의 학문이 대단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명경당 모임에서 박영은 본인의 학문적 철학을 시로 읊는데 “유상비위유(有象非爲有)  형상이 있다하여 있는게 아니고, 무형불시공(無形不是空)  형체가 없다하여 없는게 아니로다. 실중지시실(實中知是實)  진실과 적중해야 진실을 알게 될지니, 공외막심공(功外莫尋功)  스스로 쌓은 공외에 공을 찾지 마라”라는 시를 보았을 때 허상보다는 실재와 진실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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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당에서 송당 박영이 읊은 시이다>


박영의 학문은 인간의 삶이 허상보다는 실재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박영은 대학의 지선명덕(至善明德)을 강조하여 대학동자(大學童子)로 불리게 된다. 박영이 지은 대표적인 시를 보면 그의 그것을 알 수 있겠다.

선산지역의 학풍은 박영이후 대학을 강조하는 학풍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후 나타나는 선산을 대표하는 유학자 두곡 고응척(杜谷 高應陟)과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등의 성리학자들은 대학을 강조하게 된다. 


박영은 성리학에만 머물지 않고, 가난한 백성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의학을 공부하고, 의서를 직접 쓴다. 박영의 학문적 업적도 중요하지만, 그가 아픈 많은 병자들에게 의술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박영이 직접 의술을 베풀었다는 것은 학문의 궁긍적 목적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중 1509년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좌에 앉히는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중종은 왕을 호위하는 선전관에 임명하지만, 박영은 선전관을 거부한다. 


그러나 1년 후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여진족을 토벌한 경험이 있는 박영을 조방장(助防將)에 임명한다. 박영은 지금의 창원으로 가서 왜란을 평정하고 진압한다.

그러나 박영은 가난하여 치료를 받지 못하는 백성들을 치료를 위해 조방장의 벼슬을 사직한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 온 박영은 낮에는 백성들을 치료하였으며, 저녁에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1512년 박영 자신에게 학문하는 방법을 일깨워 주었던 청송부사 신당 정붕 선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우 슬픈 나날을 보냈다. 1년 후에 조정에서는 삼포왜란 때 적을 물리친 공을 참작하여 황간현감에 임명된다. 


박영이 황간현감의 벼슬을 받은 이유는 백성들의 삶을 직접 보살피고, 다스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받은 것이었다. 박영은 황간현감이 된 이후 아전들이 장난쳤던 세금을 단순화시키고, 세금을 낮추는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3년 동안 선정을 베풀어 황간의 백성들은 모두가 박영을 존경하였다. 이러한 박영의 능력을 인정하여 조정에서 다시 강계부사로 임명한다. 강계부사로 있을 때 이곳에서도 선정을 베풀어 그의 명성이 더 높아지자, 조정에서는 박영에게 의주목사를 임명한다. 


그러나 박영은 의주목사를 사양한다. 중종과 조정의 대신들은 박영이 학문에도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 동부승지를 임명한다. 이렇게 박영은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1519년 중종 14년 병조참판에까지 오른다. 박영이 병조참판에 올랐을 때 조정에서는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를 중심으로 사림파의 개혁세력들이 중종반정의 반정공신들과 대립하던 시기였다. 


박영은 김굉필의 학문을 이어받은 정붕에게 사승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김굉필의 학문을 이어받은 조광조와는 학통(學統)상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영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급진 개혁세력들이 주장하는 정치가 곧 많은 적을 만들어, 그 화가 사림파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예측을 한다. 


박영의 직접 쓴 송당문집(松堂文集) 3권에 도통상승차제도(道統相承次第圖)와 문인록(門人錄)에 박영 본인의 학통을 언급하며 정몽주 →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정붕 → 박영이라는 계보를 제시한다. 그리고 박영은 17년간 고향 선산지역에서 강학활동을 하면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가 지은 문인록에는 총 16명의 제자를 기록해 두고 있다. 


박영의 문인록에 나오는 걸출한 16명의 제자들은 이항, 성운, 김취성, 박운, 김취문, 신계성, 박소, 박집, 노수함, 임건, 최응룡, 길면지, 최해, 최심, 안명세, 권응인 등이다. 송당 박영의 제자들 가운데 특히 남명 조식(南冥 曺植)과 학문적 교류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중에서 성운, 신계성, 이항, 최응룡, 권응인은 조식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송당학파의 학자들은 스승 박영의 영향으로 대학(大學)을 강조하였고, 도학(道學)에 대한 자각심과 스스로 깨닫는 자득(自得)의 공부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조식의 학풍 역시 마음으로 도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였으며, 경(敬)과 의(義)를 강조하였다. 남명 조식은 이와 배치되는 퇴계이황의 학풍을 비판하였다. 


남명 조식은 제자들에게 항상 자득(自得)과 심득(心得)을 강조했다는 것으로 볼 때 송당 박영의 학풍과 남명 조식의 학풍이 많이 같거나 비슷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조선 역사에서 삼처사(三處士)가 있는데,  그 삼처사가 바로 조식(曺植), 서경덕(徐敬德), 성운(成運)들이다.

이들은 학문은 높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자연에 은둔하여 찾아오는 사람들과 학문을 논하는 것을 즐겼다.  박영의 제자 성운이 바로 삼처사 가운데 한명이다. 성운을 통하여 송당 박영의 학풍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노수함은 여헌 장현광의 자형이 된다. 여헌 장현광은 9세에 노수함으로부터 사서삼경을 13세까지 배운다. 장현광은 송당 박영이 죽은 이후 태어난 인물이다. 여헌 장현광의 스승이자, 자형인 노수함은 송당 박영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익힌 학자였다. 노수함 역시 스승인 박영의 호인 송당(松堂)을 본인의 호로 썼을 정도로 스승인 송당 박영을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박영의 학풍이 자연히 장현광으로 이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토양과 영향으로 장현광은  독창적인 “이기경위설(理氣經緯說)”을 주장하고, 여헌학(旅軒學)을 완성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여헌 장현광은 퇴계와 율곡을 비롯한 어느 누구의 사상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고, 그만의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영남학파의 학자들로부터 때로는 매서운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장현광은 박영이 낚시를 즐기던 낚시터를 찾아 시를 짓고, 박영과 관계된 문인들의 묘갈문(墓碣文)을 썼다는 것은 박영을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종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왕권이 약했다. 진성대군을 왕위에 올린 박원종(朴元宗)일파인 훈구세력들이 조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종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 개혁적인 사림세력들을 이용해 훈구세력들을 견제하였다. 


당연히 훈구세력들은 조광조에게 위기감을 느끼고, 조광조와 사림세력들을 견제하는 동시에 조정에서 이들을 쫓아낼 계책을 하는데, 조광조는 중종에게까지 도학(道學)에 기초한 학문을 해야 하며 군왕도 도학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자 중종 역시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다. 


조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박영은 조정에 큰 화(禍)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병을 핑계로 고향에 내려가 치료를 해야겠다고 사직을 청한다. 그러나 박영에 대한 신뢰가 높던 중종은 고향에 내려가지 말고, 집에 가서 몇 달 쉬라는 명을 내린다. 집에서 쉬고 있던 박영은 중종의 명을 받아 명나라 황제 사절단으로 명나라로 떠난다. 


진성대군을 중종으로 앉힌 박원종과 홍경주가 실질적인 조정의 실권자였다. 1519년 홍경주의 딸 희빈홍씨가 중종의 총애를 받게 되자, 홍경주와 훈구세력들은 사림파와 조광조를 숙청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다. 훈구파가 조광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지만, 오히려 중종은 조광조를 숙청시킬 명분을 찾고 있었다. 


훈구세력들은 조광조와 사림파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는데, 그것이 바로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이다. 궁궐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네 글자 모양으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이 발견된다. 왕인 중종이 조광조를 전라도로 유배를 보내고, 이후 사약을 보내 결국 조광조를 죽인다. 


주(走)와 초(肖)자를 합치면 조(趙)자는 조광조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주초위왕은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이것 “주초위왕”은 훈구파의 조작이던 아니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종은 이미 조광조에게 지칠대로 지쳐있음으로 조광조를 제거할 명분을 찾고 있던 와중에 “주초위왕” 사건이 발생했음으로 오히려 중종에게는 더 없이 고마운 일이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죄목은 “당파를 만들어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은 천거하고, 반대세력은 배척했으며 서로 연합하여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것이었다. 송당 박영도 사림파라는 것 때문에 중국에서 돌아와 김해부사로 좌천된다.


박영은 김해부사를 역임하면서 아픈 사람들에게 의술을 펼치고,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일 세금의 항목을 줄이고, 세금의 낮추는 일을 우선적으로 시행하며, 관할지역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김해부사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자자하던 때에 박영은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 기묘사회가 일어 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모사건은 가볍게 다루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조정은 다시 한번 혼란스러웠다. 이때 사림파에 속했던 관료나 학자들은 조금만 약점을 보이면 가차 없이 숙청하였다. 


김해사람 김억제라는 자가 박영과 경부부윤 유인숙이 역모를 꾸몄다는 상소를 올리면서 박영은 한양 의금부로 압송되어 17차례의 국문을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박영은 중종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여 경부부윤 유인숙과 함께 절대 역모를 꾀하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박영과 유인숙, 김억제 삼자대면을 통한 대질신문에서 김억제의 말이 전부 거짓으로 판명되어 박영과 유인숙은 무죄로 풀려났다. 


고향으로 돌아 온 박영은 16년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고, 후학들을 가르치고, 고향의 아픈 환자들에게 의술을 펼쳤다. 박영은 선산향교에서 제자들에게 자기가 갈고 딱은 학문을 강론하면서 지역뿐만 아니라, 타 지역에서도 박영의 학문을 배우고자 많은 선비들이 찾아온다.


조광조를 이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고자 했던 중종은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정치에 피로감을 느끼게 되어 사림파와 조광조를 숙청하였지만, 그 대가는 고스란히 다시 중종에게로 돌아왔다.

다시 조정은 김안로(金安老)를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과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형제를 중심으로 하는 외척간 치열한 권력다툼이 전개되면서 정국은 혼란에 빠진다.


이렇게 정국 혼란 때에 1537년 남쪽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건주위 여진족 토벌과 삼포왜란 때에 혁혁한 공을 세운 박영을 적임자로 추천한다. 중종뿐만 아니라 대신들까지 적임자라며 만장일치로 박영을 찬성한다. 따라서 중종은 문무를 겸비한 그대의 탁월한 역량을 가진 박영에게 경상 좌도병마수군절도사로 임명한다. 박영의 나이 이 당시 67세였다.


박영의 직책은 영남지역의 군사를 움직이고,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야전사령관인 것이었다. 한마디로 영남의 군권을 한 손에 거머쥐는 벼슬이 경상좌도병마수군절도사이다. 박영은 벼슬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왜적이 쳐들어왔는데 뚜렷한 명분이 없어 거절하지도 못했다. 


박영은 나이가 비록 늙었음에도 최선을 다해 영남지방의 해안을 경계하고, 방비를 철저히 하면서 왜구들의 침략이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던 중 1540년 박영은 70세로 경상좌도병마수군절도사 병영이 있는 울산에서 숨을 거둔다. 


송당 박영이 죽고 200년이 지난 1747년 조선 영조 때 박영은 문목공(文穆公)의 시호를 영조에게 하사받는다. 도와 덕이 있고, 문학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덕(德)을 펴고 의로움을 잡는 것을 목(穆)이라 하여 문목공(文穆公)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그래서 박영의 불천위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름이 문목사(文穆祠)이다.


박영의 신도비는 남인(南人)의 영수였으며, 조선에서 전서체(篆書體)를 가장 잘 썼다는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글씨체이다. 글씨가 예술이라는 것을 박영의 신도비를 보면 알 수 있다.

미수 허목의 호는 “눈을 덮을 정도로 눈썹이 길어” 호를 미수(眉叟)라 지었다고 한다. 전국의 이름있는 서예가라면 박영 신도비의 미수 허목의 글씨를 보기 위해 먼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 올 정도이니 얼마나 예술적 가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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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 박영의 신도비인데, 글씨는 전서체로 미수 허목이 썼다.>


송당정사는 임진왜란 거쳐 소실되었던 것을 다시 짓는데, 영남의 대학자 상주의 입재 정종로(立齋 鄭宗魯)가 지은 “송당정사 중건기(松堂精舍重建記)”에 “박영은 비봉산 아래 낙동강가의 오래된 마을로 내려와 집을 한 채 짓고 살면서 대학서목(大學書目)을 취하여 문을 닫고 독서하였다.”라고 글을 지었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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