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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의 역사와 인물】조선의 모든 선비가 존경했던 야은 길재(冶隱 吉再)는 과연 누구인가?

이순락기자 0 22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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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 박사,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회 이사, 구미새로넷방송 시청자위원>

필자는 어렸을 때 야은 길재! 야은 길재! 이야기를 엄청나게 듣고 자랐다. 그런데 막상 야은 길재에 대해 이야기 하라면 별로 꺼내놓을 수 있는 이야기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위대한 야은 길재를 위해 조금의 시간을 내어 연구하고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금오산을 따라 수백년 전 길재가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그의 절개와 지조를 지킨 정신을 만나러 한번 가 보자!


구미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구미 금오산 산행을 위해 정상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금오산 입구의 길재의 회고가(懷古歌)의 바윗돌을 만나게 되고 우측편으로 시냇가를 지나 채미정(採薇亭)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고려 말 삼은(三隱) 중 한분인 야은 길재(冶隱 吉再)가 고려왕조가 망해가는 과정을 눈앞에서 보며 자기가 배우고 알았던 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해 낙향하여 세상과 단절하고 제자들에게 강학을 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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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산 채미정 입구의 야은 길재의 회고가(懷古歌)>


바로 이 채미정에서 조선왕조 500년 동안 “조선인재 반은 영남에서, 영남인재 반은 선산에서 난다”는 말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야은 길재는 고려의 신하였지만, 그가 키우고 가르친 제자들은 조선의 신하가 되어 조선의 동량이 되었으며, 고려의 신하인 “야은 길재”를 조선에서 더욱 빛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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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금오산 채미정>


1453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기 전단계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킨다. 계유정난은 조정에서 단종을 보좌하며 지키고 있던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 여러 대신들을 수양대군과 한명회가 중심이 되어 제거하는 난을 일으킨다.

선산출신 사육신 단계 하위지(丹溪 河緯地)는 계유정난이 일어날 당시 하위지는 직제학(直提學)의 벼슬을 하다가 다리를 절며, 뼈가 시리고 아픈 병을 얻어, 경상도 영산의 온천에 가 치료를 위해 사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하위지는 몸을 치료하는 도중, 수양대군과 한명회(韓明澮)가 계유정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고, 치료를 중지하고 급하게 한양으로 올라가는데 고향 선산 길재의 묘소를 찾는다. 

하위지는 길재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평소 절의(節義)를 지킨 야은 길재를 존경하며 흠모하고 있었다. 하위지는 길재의 묘소 앞에서 단종을 지키다 죽는 충신이 되겠다는 다짐한다. 

야은 길재의 묘소에서 단종을 끝까지 지킬 것을 맹세한 단계 하위지는 절의(節義)로서 단종을 지키다가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와 함께 결국 사육신(死六臣)이 되었다.

 

조선유학사의 거목이며 성리학을 더욱 발전시켜 퇴계학(退溪學)으로 발전시킨 33세의 젊은 청년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한양의 성균관에서 유학하다가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경세재를 넘어 곧장 안동으로 가지 않는다.

이황은 발길을 돌려 야은 길재가 태어난 선산 봉계(鳳溪)마을을 찾는다. 이유는 퇴계 이황 본인이 공부하는 성리학 즉 도학(道學)을 조선사회에 자리 잡게 하고 번성하게 만든 야은 길재의 고향 봉계마을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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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은 길재 선생 영정>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宣祖)는 중종의 서자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이었다. 명나라는 이러한 중종의 서자출신이 조선의 왕이 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 사신들을 보낸다. 선조의 왕위계승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들을 갖은 트집을 잡았다. 트집 잡기 위해 조선 온 명나라 사신들 앞에 나가서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조선의 신하들은  당시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리고 명나라 사신들 앞에서 잘 못 말했다가는 자신의 목이 달아나거나 유배를 가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조선에서 학문적으로 손꼽히던 퇴계 이황이 명나라 사신 그들 앞에 나간다. 그 때 명나라 사신이 퇴계 이황에게 조선 성리학의 학통을 묻게 된다.


퇴계 이황은 그 자리에서 바로 고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 야은 길재(冶隱 吉再) →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 점필재 김종직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라는 조선의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제시한다.  


이러한 조선 성리학의 학통(學統)과 도통(道統)이 전개되고,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야은 길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야은 길재는 비록 조선의 제도적 틀 속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의 학문은 고려에서 출발한 성리학이 조선으로 넘어 가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에게 정착될 수 있게 한 장본인인 것이다. 


만약 야은 길재가 없었다면 조선의 성리학은 그렇게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들에게 확산되고 발전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야은 길재가 없었다면, 특히 영남의 사람들은 성리학을 제대로 혹은 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성리학은 고려 충렬왕 때 회헌 안향(晦軒 安珦)이 원나라로부터 도입한다. 안향이 도입한 성리학은 고려 말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를 통하여 체계적으로 발전되어지고, 신진사대부 계층의 학문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고려의 신하들 중 급진적인 개혁을 원하던 세력은 조선건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또 고려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신진사대부들은 새 왕조인 조선건국에 참여 하지 않는 두가지 양상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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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목은 이색>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고려 신하들이 두문동에 72명 모여 살았다 하여, 이들을 두문동 72현(賢)으로 부른다. 조선왕조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두문동(杜門洞)이었고, 그 마을 앞에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가 있었다. 두문동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두문불출(杜門不出)에서 유래하였고, 부조현은 “조정에 나오지 않은 사람들의 고개”란 뜻을 가지고 있다.


고려말 하면 흔히들 야은 길재를 포함하여 삼은(三隱)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고려말에 조선왕조에 참여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구은(九隱)이 있었다.

송은 박천익(松隱 朴天翊), 목은 이색(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야은 길재(冶隱 吉再), 성은 김대윤(成隱 金大尹), 동은 이재홍(桐隱 李在弘), 휴은 이석주(休隱 李錫周), 만은 홍공재(晩隱 洪公載) 이들이 구은(九隱)이었다.


 이중 구은(九隱) 중에서 야은 길재는 특히 송은 박천익과 목은 이색을 존경했다. 길재는 송은 박천익에 대해 “옥처럼 깨끗하고 얼음처럼 맑아서 더 보탤 것이 없다.”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송은 박천익은 “리학(理學)의 종주이고, 도의(道義)가 엄숙하다” 평가했다. 송은 박천익은 태조가 다섯 차례나 불렀지만, 고려의 신하로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여 나가지 않은 인물이다.


야은 길재는 비록 고려의 신하였지만, 야은 길재의 학문은 훗날 조선의 초석을 다지고 지탱하게 하는 학문으로 변신하게 된다. 야은 길재의 학문을 이어받은 율정 박서생(栗亭 朴瑞生),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등은 조선 지식인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림파를 이끌면서 야은 길재는 조선 주자학의 시조(始祖)로까지 숭배되어진다.


퇴계가 주장한 이 조선의 도통에서 가장 주목할 사람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선산·구미에서 태어나 고려의 신하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으로 고대 중국 주(周)나라 무왕이 은(殷)나라 주왕을 멸하자,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를 본받아 고향 금오산에서 은거하며 제자를 가르치고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산 야은 길재이다.  


길재의 본관은 해평길씨(海平吉氏)이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2년에 선산 봉계리(鳳溪里)에서 종3품 길원진(吉元進)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고아읍 봉한리이다. 구미에서 선산 방향으로 가다가 현일 중·고등학교를 조금 못가서 좌측편이 야은 길재가 태어난 봉계리다.


길재는 어려서부터 산림이 풍족하지 못해 8세 때부터 산에서 나무를 하고, 염소를 키우며 농사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11세에 해평 도리사에서 글을 배우면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낮에는 논밭을 갈고 힘든 농사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길재는 그러한 처지를 비관하거나 슬퍼하지 않았고, 오히려 의연하게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기 위해 10년 동안 주경야독한다.  


18세의 길재는 상주의 박분(朴賁)에게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배우면서 길재는 제대로 된 학문을 접하게 된다. 스승 박분이 개경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길재 역시 깊고 넓은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선산 시골에 머물러서는 그의 원대한 꿈을 이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승 박분을 따라 개경으로 간다. 


길재는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계시는데도 찾아가지 않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개경으로 떠나는 박분을 따라 개경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태종 17년에 길재가 학문에 눈을 뜨게 했던 스승 박분이 죽자, 길재는 3년 동안 제자의 예로서 모든 일을 삼가고 근신하는 심상(心喪)의 예를 다한다.


길재는 22세에 성균관 생원초시에 합격하여 고려 최고학자들이 모인 성균관에 들어가 당시 성균관 최고학자들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양촌 권근(陽村 權近),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 등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대로 된 성리학인 주자학(朱子學)을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목은 이색은 당시 고려말 지식인 그룹의 최고 수장이었다. 당시 성리학을 공부하는 학자에게는 이러한 당대 최고의 학자를 만났다는 것은 길재에게 있어 더 없는 행운이었다.


길재는 31세 우왕(禑王) 9년에 사마감시에 합격하면서 그의 학문은 더욱 일취월장하였다. 특히 길재는 양촌 권근에게 지도를 받았는데, 권근은 “내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사람들 중에 길재가 제일이다”할 정도로 길재의 학문은 뛰어나고 인정을 받았다. 훗날 권근이 죽었을 때 길재는 3년 동안 심상(心喪)을 함으로써 제자의 예를 다 한다. 


34 때 길재는 진사에 합격하고, 청주 사록(司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는다. 이때 길재는 조선왕조 건국의 발판을 만든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李芳遠)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같이 공부하며 매우 친하게 지냈다. 이후 길재는 성균학정(成均學正)과 순유박사(諄諭博士)를 하다가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한다.


우왕 14년, 이 시기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자인 이인임(李仁任)을 제거하면서 고려는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정치적 사건이 연일 일어난다. 3개월 후 최영은 요동정벌, 5월 위화도 회군, 6월 우왕 퇴위 및 창왕 즉위를 시작한다. 야은 길재는 이 때 성균관에서 고려의 앞날을 예감하는 시를 짓는다. 


용수정동단장(龍首正東傾短墻), 수근전반유수양(水芹田畔有垂楊), 신수종중무기특(身雖從衆無奇特), 지칙이제아수양(志則夷齊餓首陽)  용수산 동쪽에 낮은 담장은 기울어졌고, 미나리 밭두둑엔 푸른 버들 늘어졌네. 몸은 비록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지만, 뜻만은 수양산의 백이숙제라네. 


길재는 이 시를 통하여 고려의 몰락을 짐작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려가 망하는 것을 역사의 숙명으로 받아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길재는 고대 중국 은나라 백이숙제처럼 은둔의 삶을 살기로 미리 시에서 예고하고 있다.


우왕에서 창왕(昌王)으로 바뀐 해에 길재는 종 7품의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된다. 그러나 창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하자 길재는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구실로 벼슬을 사직하고, 길재의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금오산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키다 죽은 백이숙제의 삶을 지향한다.


당시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신진사대부들은 묵은 이색(牧隱 李穡)을 중심으로 학문적·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들 신진사대부들은 소수의 권문세도가들이 권력과 토지를 독점하는 정치·경제체제를 개혁하고자 했다.

 

그리고 신진사대부들은 반명친원(反明親元)의 외교정책, 불교의 폐단을 청산해야 한다는 명제 아래 안향(安珦), 백이정(白頤正), 권보(權溥), 우탁(禹倬), 이제현(李齊賢) 등이 수용한 주자학이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묵은 이색을 따르던 신진사대부는 본격적으로 고려후기부터 주자학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우왕(禑王) 13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무장 세력과 신진사대부 세력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세웠다. 곧 또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킨다. 이 과정에서 정몽주는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것에 대해 찬성하였다.

야은 길재는 정몽주와 뜻을 달리했다. 그래서 야은 길재는 본인이 섬겼던 우왕과 창왕을 폐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 금오산으로 내려와 백이숙제처럼 은거하였다. 아마 길재와 정몽주는 서로 개인적으로 불편한 관계였을 것이다. 


신진사대부와 신흥무장세력은 토지개혁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온건개혁파와 급진개혁파로 나누어졌다. 이성계의 신흥무장 세력인 우재 조준(吁齋 趙浚)이 토지제도의 개혁안을 내놓는다.

신진사대부의 정도전, 남은, 남재, 조인옥, 윤소종 등은 고려의 기득권을 가진 보수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급진적으로 개혁하고 혁명까지 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이색, 권근, 이임, 우현보, 변안렬, 유백유 등은 토지개혁을 반대하며 보수적 입장을 견지했다. 정몽주는 급진적 개혁파와 토지개혁 반대파 사이에서 중도적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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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정몽주는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는데 이성계와 뜻을 같이 했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함께 흥국사에 모여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므로, 왕씨 성을 가진 임금을 세워야 한다는데 의견일치를 보고 공양왕을 옹립한다.

이 시기에 길재는 자기 본인이 모시고, 섬겼던 우왕과 창왕을 마음대로 폐하는 이성계와 정몽주가 너무 싫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낙향하는 길재는 스승 목은 이색을 찾아가 낙향한다는 뜻을 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길재는 정몽주에게는 작별인사를 하지 않는다.


길재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승이자, 정신적 지도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탄핵을 받고 물러나 있던 장단(長湍)을 찾아가 스승 이색과 하룻밤을 보내며 낙향의 뜻을 전한다.

목은 이색은 “오늘날을 당해 각자 자기의 뜻대로 행할 뿐이다. 나는 대신(大臣)이라 나라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해야 하므로 의리상 떠날 수가 없으나, 그대는 떠날 수가 있다.”라고 격려한다. 


목은 이색은 젊고 절의가 있는 길재가 떠나는 안타까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벼슬은 우연히 오는 것이라 서두를 것 없고, 기러기 한 마리 아득한 하늘에 날아가네!” 이 시에서 목은 이색은 38세의 젊은 학자 야은 길재를 한 마리 기러기에 비유했다. 


그런데 길재는 스승의 예로 스승이 죽었을 때 심상(心喪)을 올린 사람은 박분(朴賁)과 권근(權近) 두사람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고향으로 낙향할 때 유일하게 목은 이색(牧隱 李穡)을 찾아간다.

정몽주가 죽었을 때 길재는 심상(心喪)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길재가 모시고 섬겼던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는 과정에 정몽주가 깊숙이 관여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오히려 길재는 정몽주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길재는 고려가 비록 망해 가지만, 길재 본인이 섬겼던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辛旽)의 아들이라는 신씨(辛氏)라는 이유로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우는 작업에 이성계와 정몽주가 관여했기 때문에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심상(心喪)으로 스승의 예로 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기록에 보면 길재가 낙향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노모를 봉양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길재는 “이제 와서 불행하게 하늘의 변고를 만나 십년공부가 사라지고 말았다.”라고 탄식한다.

젊은 시절 가난에도 불구하고 학문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본인이 모시는 임금을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어 태평성대를 열겠다는 꿈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꿈이 좌절된 젊은 길재는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 죽었기 때문에 그가 강의하던 정자를 고사리 미(薇)자에, 캘 채(採)를 써서 채미정(採薇亭)이라 이름 붙였다.


벼슬을 사직하고 길재가 고향 선산 봉계에 돌아와 있을 때 공양왕 3년 고려조정에서는 길재에게 벼슬을 잇달아 내리지만 길재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길재가 모시고 섬겼던 우왕이 유배되어 사사되자, 길재는 거친 음식을 먹으며 3년 복을 입고 신하의 예를 다해 그의 절의를 표현한다. 


1392년 고려가 완전히 망하고, 조선왕조가 드디어 세워지자, 고려의 신하였던 친구들이 조선왕조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길재는 백이숙제의 마음을 잃지 않기를 다짐한다.

당시 길재는 가난하여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하고 살기에 굉장히 열악하였다. 길재의 부인은 생계가 어려워지자 길재의 처가인 충청도 금산에 가서 살자고 했지만, 부인의 제의에 개의치 않고 길재는 효도에만 전념하였다. 


태조 4년 군사(郡事) 정이오(鄭以五)가 길재의 어려운 형편을 듣고 쓸모없이 묵은 밭을 제공해 주면서 이것을 기반으로 길재의 생활은 안정되어 갔다. 이때부터 길재는 충청도 금산으로 이주할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어머니 봉양과 인근의 제자들을 모아 학문 탐구에 전념한다.

이 때 훗날 야은 길재를 빛나게 할 제자들인 율정 박서생(栗亭 朴瑞生),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가 있었던 것이다. 자고로 학자는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해야 스승의 명성이 빛나게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서 배출한 제자들을 봤을 때 길재가 최고이다.


그러던 중 정종 2년,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조선의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던 세자 이방원은 삼군부(三軍府)를 통해 길재를 몇 차례 한양으로 불렀다. 부를 때마다 길재 역시 거절했다. 이방원은 고려 때 길재와 함께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하며, 한마을에 살아 막역하게 지낸 친구사이였다.

태종 이방원은 이 때 길재를 칭찬하면서 “길재는 곧은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함께 배웠는데 보지 못한지 오래되었다.”라고 했다.마침 선산 출신 장원급제자 전가식(田可植)이 있어 태종은 전가식에게 길재의 근황을 묻는다.

전가식은 길재는 고향에서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며 효행을 다한다고 말하자, 태종 이방원은 선산 군수에게 길재가 개경까지 타고 올 수 있는 말과 마차를 보내어 빨리 길재를 보낼 것을 선산군수에게 독촉을 한다.

태종을 명을 거역했다가는 선산군수의 목이 달아 날 상황이었다. 그래서 선산군수의 성화에 못 이겨 길재는 어쩔 수 없이 개경으로 가게 된다. 이 때 한양은 왕자의 난 때문에 정치적으로 너무 어수선하여 잠시 조선왕조의 조정은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가 있던 시기였다.

길재는 관아에서 준비해 준 말과 마차를 이용하여 개경까지 도착한다. 길재가 고향으로 낙향했다가, 다시 개경에 돌아 온 것은 10년만이었다. 38세에 개경을 떠났고, 48세에 다시 개경에 돌아온 것이다.길재는 너무도 많이 변해 있는 개경을 본 것이다.

길재가 본 것은 산천은 예 모습 그대로 였지만, 폐망한 나라의 도읍지,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친구들과 사람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때 길재가 개경을 돌아보며 그 유명한 회고가(懷古歌)를 짓는다. 


“오백년(五百年)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도라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되 인걸(人傑)은 간데없고,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재가 개경에 올라오자, 이방원의 건의에 따라 정종은 길재를 만나가도 전에 봉상박사(奉常博士)에 임명한다. 그러나 길재는 벼슬하러 개경에 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시 실질적인 권력자이며 친구인 이방원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낸다. 


“제가 옛날에 저하와 더불어 반궁(성균관)에서 『시경』을 읽었는데, 지금 신을 부른 것은 옛정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씨 조정(우왕, 창왕을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이성계와 정몽주가 폐함)에서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왕씨(공양왕)가 복위하자 곧 고향에 돌아가서 장차 몸을 마치려 하였습니다. 지금 옛일을 기억하고 부르셨으니 제가 올라와서 뵙고 곧 돌아가려는 것이지, 벼슬에 종사하는 것은 저의 뜻이 아닙니다.” 


이에 태종 이방원은 “그대가 말하는 것은 바로 강상의 바꿀 수 없는 도리이니, 의리상 뜻을 빼앗기가 어렵다. 그러나 부른 것은 나요, 벼슬을 시킨 것은 주상(主上)이니, 주상께 사면을 고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이방원은 길재에게 글을 보낸다.

이방원은 정치적 정적이거나 걸림돌인 정몽주와 정도전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고 제거하였다. 그리고 태종의 왕위에 올라서도 자신의 권력행사에 방해되는 인물은 누구를 망론하고 가차 없이 제거했다. 


그러나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록 자신과 다른 길을 가더라도 관대하게 포용해 주었다. 길재는 이방원과 개인적으로 막역한 사이였지만, 자기가 갈 길이 다르다는 것을 이방원에게 보여주었고, 이방원 역시 다른 길을 가는 길재를 인정하며 포용해 주었다. 


따라서 길재는 정종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했는데, 신은 초야의 미천한 몸으로 고려에 몸을 바쳐 과거에 응했고 벼슬을 받았습니다. 이제 다시 새 왕조에서 벼슬을 하여 명교(名敎)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길재는 조선왕조가 제시하는 곧 바로 벼슬을 사양한다. 이에 정종은 길재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며 길재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그런데 정종은 경연에서 길재의 스승 권근에게 “길재가 절개를 지키고 벼슬하지 않으니, 예전에 이런 사람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 하면 좋을지 물었다. 


권근은 길재에게 작록(爵祿)을 더 올려주되 그가 끝내 떠나고자 한다면 억지로 붙잡아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권근은 제자 길재와 같이 절개를 지키는 신하를 높이 받들어야 후세 신하들의 귀감이 될 수 있다는 뜻을 정종에게 아뢰었다. 사실 권근은 길재의 스승이지만, 길재보다 1년 더 나이가 많았지만, 길재를 가르쳤다.


태종은 형인 정종을 퇴위시키고 즉위하자마자, 궁궐에 화재가 일어나면서 민심이 흉흉해지다보니, 민심을 수습할 대책을 권근에게 명한다. 권근은 민심수습책으로 6조목을 올린다.

권근이 올린 민심수습책 다섯째 항목이 절의를 지킨 사람들을 선양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권근이 선양해야 할 사람으로 추천한 인물이 정몽주(鄭夢周), 김약항(金若恒), 길재(吉再)였다. 

 

권근이 이렇게 선양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새 왕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새 왕조를 세운 이후에는 자신들과 뜻이 맞지 않아 맞섰던 적들까지도 끌어안는 포용과 통합의 정치가 필요했다. 


충신을 만들어야 새로운 왕조의 신하들에게 본보기를 보임으로서 신하들에게 일종의 충성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절의(節義)정신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왕조 조선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신하들의 절개와 지조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태종 이방원은 본인이 직접 죽인 정몽주와 젊은 시절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했던 막역한 친구 길재를 조선의 모든 선비와 신하가 본받아야 할 인물로 만드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간다. 이것은 태종에게 그치지 않고, 세종 때에 와서 더욱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진행된다.


태종 9년 고려 성균관에서 1년 선배이며 스승이던 권근이 죽자, 길재는 “옛날에는 백성들이 군사부(君師父) 세 그늘 아래 살았으므로 섬기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오늘날은 임금과 아비의 복은 입어도 스승을 위해 복을 입는 사람이 없다.”면서 3년 동안 심상(心喪)을 지냈다. 


그리고 길재는 살림이 비록 궁핍하지만, 부모님 제사 때는 쌀 한 톨을 먹지 않고, 종일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했다고 한다. 일가친척이 상(喪)을 당하면 예로써 다하였다. 그리고 비록 그 신분이 미천할지라도 조금의 음식을 먹으며 모든 것을 조심하고 삼가했다. 


1418년 태종이 상왕(上王)으로 물러나고, 세종이 즉위한 후 세종은 경상도관찰사에게 길재의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길재의 자손 중에 재주와 행실이 있는 자를 보고하도록 명을 내린다. 그 결과 길재의 아들 길사순(吉師舜)이 선산에서 한양으로 상경한다. 세종은 길사순에게 쌀·콩·식물·의복·신발을 하사한다. 


그리고 세종은 “사순이 서울 안에 도움을 줄만한 친족이 없다고 하니, 장가를 들게 하여 살아 갈 수 있도록 해 주라”고 명을 내린다. 세종은 길재의 아들 길사순의 장가까지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길재를 존경하는 세종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길재는 세종이 불러 벼슬길에 나가는 아들 길사순에게 다음과 같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임금이 먼저 신하를 부른 것은 삼대 이후에 드문 일이다. 네가 초야에 있는 몸으로 임금의 부름을 받았으니, 비록 작록을 얻지 못했더라도 그 은혜와 의리는 어쩌다 신하가 된 다른 사람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너는 마땅히 내가 고려에 기울인 마음을 본받아서 조선의 임금을 섬겨라. 네 아비의 마음은 이 밖에 더 바랄 것이 없다.”라고 길재 본인은 고려의 신하이지만, 너는 조선의 신하니 조선에 충성하라고 가르친다.


1419년 세종 원년, 4월 12일 길재는 67세로 세상을 떠난다. 병이 위독하여 부인이 길사순을 부르려고 하자 길재는 “임금과 아비는 일체이다. 이미 임금에게 가 있으니 부고를 듣고 오는 것이 옳다.”라고 하면서 길사순에게 죽고 나서 알리도록 했다.

세종은 길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쌀과 콩 15석과 종이 1백권을 보내고, 선산군수에게 길재의 상이 어려움 없이 잘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물자와 사람들을 보내라고 명한다. 


세종 8년에 세종은 길재를 추증(追贈)하라고 지시를 한다. 추증이란 죽은 이후 관작을 내리는 것인데, 길재에게 관작을 내렸다는 것은 고려의 신하 길재를 조선의 신하 길재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듬해 길재에게 통정대부, 사간원좌사간대부,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으로 추증된다. 세종 12년 세종은 춘추관에 충신 이름을 뽑아 올리라고 명을 내리자 길재가 유일했다. 


세종은 신하들과 경연 자리에서 오랑캐 나라인 금나라가 망할 때도 절의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고려 말에는 충신과 의로운 선비가 아주 적었음을 아쉬워하며 “유독 정몽주·길재가 능히 옛 임금을 위하여 절개를 굳게 지키고,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뒤에 벼슬을 추증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종은 “정몽주는 죽기까지 절개를 지키고 변하지 않았으며, 길재는 절개를 지켜 마음을 바꾸지 않았고, 상소해서 물러가기를 청했다.”라면서 세종13년에 부제학 설순(偰循)에게 충신 선양사업의 결정판으로 정몽주와 길재를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충신도(忠臣圖)에 정몽주와 길재를 넣도록 세종이 지시한 것이다. 


『삼강행실도』는 세종 16년 직제학 설순이 세종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와 중국의 충신·효자·열녀 각각 35명씩, 모두 105명이 실리게 된다. “정몽주의 죽음”이라는 몽주운명(夢周殞命)과 “길재의 곧은 절개”라는 길재항절(吉再抗節)이라는 제목으로 「충신도」에 들어가게 된다.

정몽주와 길재는 세종에 의해 고려와 조선의 최고 충신의 반열에 올라갔던 것이다. 삼강행실도는 유교 윤리를 널리 보급할 목적으로 만든 일종의 도덕 교과서가 되었던 것이다. 세종의 정몽주와 길재의 영웅 만들기는 이후 조선왕조에서 계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성종도 “절의의 선비가 많지 않은데, 고려 오백년 동안 오직 정몽주와 길재 두 사람뿐이다.”라고 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조선의 관료와 선비들이 길재에 대해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하며, 그들을 숭배했다.

폭군 연산군마저 홍문관 관원들에게 “길재의 높은 절개는 두 가지 마음이 없었다.”란 주제로 시를 지어 바치게 했던 것으로 볼 때, 세종이후 얼마나 많은 임금들이 길재를 극찬하고 예우했는가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것이다. 


이러한 조선 왕들의 길재에 대한 노력들은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왕위에 앉히는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조선의 사림파 유학자 속에서 길재는 충절의 표상에서 조선 주자학의 도통(道統)을 잇는 전승자로 부각되어지기 시작한다.

길재를 도통의 전승자로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중종 10년 때 왕도정치와 개혁정치를 주장하던 사림파의 우두머리 격인 34세의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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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


중종은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기를 왕위에 올린 훈구세력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갈수록 비대해지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서는 새로운 동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중종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를 중용하여 훈구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러한 중종의 사림파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훈구세력을 어느 정도 견제하는데 사림파는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사림파는 자기들의 정치적 권력을 뒷받침할 학문적·이념적 정통성을 확보해야 그들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사림파의 첫 번째 일이 정몽주를 문묘(文廟)에 종사하고, 조선 유학의 도통을 확립하고자 했다. 조광조와 사림파는 조선을 도학(道學)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에게 주자학을 실천하는 도학정치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조광조의 스승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이었다. 김굉필의 도학을 펼치기 위해서는 도통론(道統論)의 도통의 시조가 필요했다. 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포은 정몽주였다. 


원래 고려말 도통은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 목은 이색(牧隱 李穡) → 양촌 권근(陽村 權近)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사림파들에게는 이러한 도통관은 부적절하다고 평가했다. 그들은 정몽주를 도통의 시조로 세우는데, 결정적 근거를 목은 이색에서 찾았다.


정몽주의 충절뿐만 아니라 그는 고려·조선의 주자학의 시조(始祖)로 평가 받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고려 말 대학자 목은 이색이 정몽주를 우리나라 "리학(理學)의 시조"로 평가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설명이 필요 없게 되었다.


조선의 도학자들 역시 목은 이색의 학문이 정몽주보다 더 높다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목은 이색이 정몽주를 "리학(理學)의 시조"로 평가했다는 것은 정몽주를 사림파가 주장하는 도통의 시조로 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학문의 최고 권위자가 정몽주를 "리학의 시조"라고 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종 때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는 정몽주에서 김굉필로 이어지는 정몽주 → 김굉필이라는 도통관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김굉필의 스승 김종직, 김종직의 스승 김숙자, 김숙자의 스승 길재가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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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을 모시고 있다.>


그래서 정몽주 → 길재 → 김종직 → 김굉필이라는 공식화되고 명문화된 도통관이 성립되었다. 여기에 사림파는 더 나아가 조광조를 포함하여 정몽주 →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통관을 공식화한다.

이것은 사림파가 왕도정치와 개혁정치를 조선왕조에서 실현시키기 위한 명분을 이 도통관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에서 주자학을 공부하는 모든 선비들과 관료들은 이것을 불변의 진리처럼 수용해야 했고, 받아들였다.


길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조선에 없어서 안될 인재와 조선의 정치를 개혁하고자 했던 선비들을 많이 배출했다는 것이다. 학문을 하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가장 영광일 것이다. 맹자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맹자의 세번째 즐거움이라고 했는데, 어찌보면 길재는 맹자의 세번째 락(樂)은 얻었던 인물이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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