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의 칼럼】구미의 새로운 경제 사령탑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前구미회 부회장, 새로넷방송 시청자 위원>
구미시는 지난 6월 3일 경제기획국장을 개방형 직위(공무원이 아닌 경력이 인정되는 민간인) 공모를 통해 10월 12일, 서울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민관합동 스마트공장추진단·한국자동차부품산업 진흥재단 기술위원, 한국스마트제조융합기술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양기철씨를 지방4급 서기관으로 임명했고, 지금 구미시에서 경제관련 사령탑으로 일을 하고 있다.
필자도 구미시민의 한사람으로 좋은 변화라고 받아들인다. 아마 대부분 구미시민들도 이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기대할 것이다. 구미시는 아주 오래전부터 경제관련 분야 업무만큼은 개방형으로 갔어야 했다. 국제적으로, 국내적으로 경제 환경은 급격하게 변화하는데, 지방공무원에서 출발한 공무원들이 맡기에는 한계가 분명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구미시 경제기획국장을 개방형 직위로 선발한다는 공고가 뜨자, 당시 구미시 공무원 노조에서는 반발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4급 공무원 자리 하나가 뺏긴 것과 같기 때문에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는 우스게 소리로 “늘공(항상 공무원 신분)자리가 어공(어쩌다 공무원)”에게 빼앗겼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이러한 구미시 공무원들의 반발과 저항을 알면서, 경제기획국장 자리를 개방형으로 선발하겠다는 구미시장의 의지와 행동에 필자는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저항과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파하는 용기는 지방자치 단체장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리더십이다. 이런 측면에서 저항과 불만에 맞서 구미시장의 용기 있는 행동은 구미가 조금은 변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구미시의 특성은 제조업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공업도시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구미는 1995년 지방자치가 실시될 때부터, 20년 동안 제조업의 지속된 호황으로 별 다른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경제적 급성장을 했다. 따라서 구미시 경제관련 분야에 항상 공무원인 “늘공”들을 앉혀도 별 문제가 없었다. 구미시 경제관련 행정은 “자료정리와 통계”만 잘 내면 만사형통(?)이었다.
이런 원인으로 구미시는 미래에 닥쳐 올 국제적·국내적 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예측·예견할 수 없었다. 외국과 국내의 글로벌 환경 변화에 둔감한 구미시 공무원들은 “자료정리와 통계, 중앙정부의 예산”에만 목을 빼고 기다린 결과, 구미는 호황의 도시에서 불황의 도시로 바뀌어 갔다. 구미시의 어느 누구도 “유비무환(有備無患)”을 몰랐던 것이다. 구미시가 미래를 대비하지 않고, 예측하지 못한 결과로, 구미시민들은 차디찬 겨울 눈보라보다 더 차가운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
지금 코로나19로 전세계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인간의 생활환경과 경제지도(economic map)가 상상하지 못한 미래로 가고 있다. 경제는 행정의 범주에 속박되는 순간 “서리 맞은 식물”이다. 지금 세상은 우리가 예측 불가능한 사회로 가고 있다. 그래서 좀 잔인하게 말하자면, 늘 앉아서 통계나 내고, 자료 정리하는 공무원은 집으로 “고 홈(Go Home)”해야 하는 시대에 와 있다.
구미시의 경제기획국장을 개방형으로 선발한 것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경제기획국장이 일을 잘 할 수 있는 환경을 구미시 공무원들은 자발적으로 만들어 줘야 한다. “늘공 속 어공이 왔다”는 식으로 배타적인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한다면, 구미시 경제 사령탑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피해는 곧바로 구미시와 구미시민에게 돌아 올 것이다.
맹자(孟子)에 보면 “천시지리인화(天時地利人和)”라는 구절이 나온다. 맹자는 전쟁에서 하늘이 준 시간인 즉 천시(天時)보다는, 지리적 이점(地利)이 낫고, 지리보다는 단결과 화합(人和)이 낫다고 했다. 그래서 맹자는 전쟁의 승패는 단결과 화합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금 구미는 단결과 화합을 해도 살아남을까! 죽을까! 하는 상황이다. 밥그릇과 자리싸움을 하면 다 같이 죽자는 것이다. 새롭게 구미경제의 사령탑을 맡은 인물은 구미시민들이 많은 기대와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이사(李斯)의 의견과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다고 하겠다. 진나라는 이민족 사회였기 때문에 엄격한 법이 필요했다. 진나라가 시행하는 법을 지키면,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부와 출세를 할 수 있는 제도를 확립했기 때문에 진나라가 중국 최초로 통일을 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진시황이 이러한 정책을 펴도록 만든 인물이 이사(李斯)이다. 이사는 목숨을 무릅쓰고 진시황에게 천하의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사람을 포용해야 한다는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올린다. 이사가 진시황에게 올린 간축객서에 나오는 그 유명한 “태산불양토양 고능성기대(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하해불택세류 고능취기심(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왕자불각중서 고능명기덕(王者不却衆庶 故能明其德)”이야기이다.
해석하면 “태산은 한 움큼의 흙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높은 산을 이룰 수 있고, 큰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의 냇물이라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야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으며, 왕은 어떠한 백성도 뿌리치지 않아야 자신의 덕을 천하에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사는 진시황이 출신성분과 사람을 가리면 반드시 중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룰 수 없다고 간언한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재를 가리지 않고 등용하고, 포용한 사회와 조직은 흥했다는 것을 역사와 정치는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구미시도 많은 인재를 등용하고 포용하는 조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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