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사설칼럼 > 김기훈칼럼
김기훈칼럼

【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학문과 인품으로는 세상을 뒤덮을 수 있었던 선비, 경암 노경임(敬庵 盧景任)을 찾아가다.

이순락기자 0 44184

1cdfbda3336281bb2e942368762b60e9_1604389739_8839.jpg


<필자:경북대 정치학박사, 前구미회 부회장, 새로넷방송 시청자 위원> 


필자가 접한 경암 노경임(敬庵 盧景任)은 알면 알수록 그의 학문과 인품은 저녁하늘에 강력한 빛을 발하는 북극성과 같았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시공간은 전쟁·동서분당·건강하지 않은 삶 등으로 얼룩졌다.

노경임, 그가 태어난 시대의 환경은 전쟁과 정치적 대결의 시대였지만,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학문과 인격을 기르고 다듬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1569년(선조2년)에 경암 노경임은 지금의 선산 독동리에서 안강 노씨(安康盧氏), 송암 노수함(松庵 盧守咸)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난다.  


선산을 가로지르는 낙동강가의 자리하고 있는 독동리는 옛날에는 “글 잘 하는 선비가 많다”는 뜻에서 문동(文洞)골이라 불려졌다. 문동골이란 지명은 세태를 거듭하면서 오늘날에는 지역 사람들이 “민동골”이라 부른다. 그래서 지역에 살고 있는 안강노씨를 "민동골 노씨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0a9e1a59a279dbaf7538d731e72a619c_1604299738_4763.jpg
<경암 노경임이 벼슬길에 물러나 학문연구와 후학들을 교육하던 해평 송곡리에 있는 냉악정사>


노수함은 도학자 송당 박영(松堂 朴英)의 걸출한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조선중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송당학파의 학문적 위상과 저력은 전국적이었다. 그러나 송당 박영과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 죽음으로 송당학파의 학문적 좌표와 방향성을 상실하면서 화려했던 명성을 뒤로한채 쇠락의 길을 걷는다. 이들의 죽음은 곧 선산지역 성리학의 위기를 의미했다. 


노경임의 아버지 송암 노수함 역시, 송당 박영의 제자 중 한사람으로서 영남에 내로라하는 선비 중 한 사람임에는 분명했다. 노수함은 장현광의 자형(姊兄)이었다. 또한 노수함은 9세 어린 장현광에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가르친 인물이다. 어린 장현광에게는 비록 노수함이 자형이었지만,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었다.

송당학파의 쇠퇴는 곧 안동의 퇴계학파의 부흥을 알리는 것이었다. 안동의 퇴계학이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인동지역에서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이 열정과 집념으로 당대에 많은 대가와 선비들 앞에 장현광 그만의 성리학인 여헌학(旅軒學)을 세상에 내놓고 던졌다. 


장현광은 그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성리학 연구에 접근하여 체계화하고 집대성한다. 이로써 한국유학사에 대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여헌학파(旅軒學派)와 여헌학(旅軒學) 등장한다. 여헌학은 낙동강 선산·인동과 낙동강 중류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면서 주목을 받았다. 

 

여헌 장현광은 훗날 성리학의 최고 지위에 올랐지만, 그의 어린 시절을 가르치고 키워준 사람은 바로 자형 송암 노수함이었다. 이러한 노수함은 어린 아들인 노경임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노수함은 5세의 어린 노경임을 가리켜 “이 아기가 장차 커서 큰 인물이 될 것이니, 지금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하고 임종했다고 하니,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비범함을 일찍부터 알아보았다고 하겠다.


어린 노경임은 아버지가 죽은 이후, 시간이 흘러 외삼촌이었던 장현광에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어 많은 학문적 성취를 거듭한다. 어린 장현광 자형인 노수함에게 배웠듯이, 어린 노경임은 외삼촌 장현광에게서 학문의 첫걸음을 나갔던 것이다. 인동장씨와 안강노씨는 피로 맺어지며 학문으로 맺어진 인연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두 가문의 인연은 이어진다고 하겠다.


노경임은 외삼촌 장현광에게 나아가 학문을 거듭한 다음,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수제자 중 한명이었던 조선시대 명재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에게 나아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었다. 


잠깐 여기서 류성룡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은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사람 보는 안목은 조선최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있기 1년 전인, 1591년(선조24년)에 당시 형조좌랑(刑曹佐郎)이던 권율을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정읍현감(井邑縣監)이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全羅 左水使)로 천거하고 발탁한다. 이러한 권율과 이순신의 발탁은 류성룡에게 조선시대를 통틀어 명재상으로 칭송받게 하였다. 


이순신은 류성룡 때문에 정읍현감에서 전라 좌수사로 최고속 승진한다. 이것은 지금의 위관급 장교 대위에서 바로 지금으로 말하면 투스타(two stat) 소장(小將)으로 이순신을 진급시킨 것이다. 한 고을을 책임지고 있던 사또에서 이순신은 조선 해군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는 전략 사령관으로 발탁된 것으로 보면 된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인사발탁이었다. 이러한 류성룡의 이순신 발탁은 이순신의 둘째 형인 이요신(李堯臣)과 막연한 친분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도 있겠다. 류성룡의 이순신의 발탁은 외적의 침략으로 꺼져가는 조선의 운명을 살리는 교두보를 확보한 샘이 된다. 

 

따라서 이순신의 고속 승진은 자연적으로 군내에 적이 많았을 수밖에 없었고, 당시 시기·질투가 난무했다. 류성룡의 이순신과 권율의 발탁은 곧 다가올 임진왜란을 예측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여튼 류성룡에게 이러한 발탁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한 사람이 선산 사람인 두곡 고응척(杜谷 高應陟)이라고 할 수 있다. 


두곡 고응척은 류성룡과 함께 퇴계 이황에게 함께 공부한 선후배사이였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고응척은 1590년 류성룡이 우의정에 오르자, 그가 저술한 인재등용에 관한『전인보감(銓人寶鑑)』을 류성룡에게 전달한다. 


조선시대 사람 보는 눈이 최고였던 류성룡은 노경임을 보고 “내가 많은 사람을 봤지만, 매사에 충실하고, 온후하며, 차분하기가 이 사람과 같은 이를 본 적이 없다”라고 평가 했다. 

이러한 류성룡의 평가를 보면 노경임은 학문적 재능뿐만 아니라, 인격과 성품 자체가 매우 훌륭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고 하겠다. 노경임은 류성룡 만나 학문을 배울 때 당시 미혼이었다. 노경임의 학문과 인간됨을 단번에 알아보고 있었던 류성룡은 노경임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결정을 한다. 


노경임은 안동의 하회마을 풍산류씨(豐山柳氏)의 적장자인 류성룡의 맏형 겸암 류운룡(謙庵 柳雲龍)의 딸과 결혼하여 풍산류씨 집안의 사위가 된다. 오늘날에도 그렇겠지만, 조선시대는 그 사람의 학문과 인품도 중요하고, 어느 집안과 혼인했다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시대였다. 


류성룡과 노경임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류운룡의 사위가 되면서 단번에 혈연관계로 바뀌었다. 류성룡의 노경임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류성룡은 셋째 아들 16세의 수암 류진(修巖 柳袗)을 노경임에게 배우게 하는 결정을 내린다. 이것으로 볼 때, 노경임의 학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정도라고 봐야 한다. 아버지 노수함이 임종 할 때 가족들에게 남긴 말이 적중했다고 하겠다.


노경임은 당대 최고의 스승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장현광과 류성룡에게서 여헌학(旅軒學)과 퇴계학(退溪學)을 배웠다. 그래서 노경임은 영남의 주류학문인 여헌학과 퇴계학을 만나게 한 장본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당연히 당대 최고의 학문과 스승을 만났음으로 그의 학문 역시 정점에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노경임은 22세, 1591년에 문과 병과 12등으로 급제를 하고,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정9품)을 거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정9품)가 되어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곧바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경임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을 지키기 위해 선산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0a9e1a59a279dbaf7538d731e72a619c_1604300255_2541.jpg
<경암 노경임이 죽고 남 이후 100뒤에 나온 경암문집>
 

노경임은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와 의병장에는 노경임, 부장 건재 박수일(健齋 朴遂一), 장서 인재 최현(訒齋 崔晛)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 금오산을 중심으로 왜군과 맞서 싸운다. 이들은 3명 아버지 모두 송당 박영에게 배운 송당학파의 아들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 당시 특이할만한 상황이 벌어지는데, 두곡 고응척(杜谷 高應陟)의 아들인 고한운(高翰雲)은 장원급제하여 전라도 부안현감을 하고 있었다. 고한운은 고향 선산에 왜적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하들을 이끌고 선산 의병에 참여한다. 안타깝게도 나라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 고한운은 왜군의 사주를 받은 조선인에게 칼에 찔려 죽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난다. 


선산에서 거병한 의병들은 금오산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화력과 작전 면에 있어서 왜군에 비해 절대적 약세였다. 그런 와중에 밖으로는 왜군과도 싸워야 했고, 안으로는 전염병과 싸워야 했다. 의병의 진지인 금오산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당시 최대 격전지 중 하나는 상주 북천(北川)전투였다. 왜군이 상주를 거쳐 문경세재를 넘으면, 손쓸 틈이 없기 때문에 상주 북천 전투는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그러나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관군 60명을 급조하여 상주에 도착한다. 이일은 인근 지역에서 병사를 끌어 모아 800명의 군대를 급조한다. 


순변사 이일은 왜군은 화승총으로 중무장했다는 것이 무슨 개념인지 모르는 장수였다. 순변사 이일은 칼과 창으로 싸우는 진법을 군사들에게 펼칠 것을 명령한다. 오히려 이것은 왜군이 집중사격을 하여 쉽게 승리하도록 만들어 준 꼴이었다. 


그리고 사전에 김천 개령출신의 농민이 왜군이 진격하고 있다고 급하게 고하자, 군사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명목으로 참수한다. 또한 첩보병을 이용하여 적의 동태를 파악하지 않는 가장 어리석은 전략을 펼침으로서 상주 북천에 모였던 군사들은 순식간에 전사한다. 순변사 이일은 장군으로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상주 북천에서 신립(申砬)장군이 기다리고 있던 탄금대로 도망친다. 


상주 북천 전투는 북상하는 왜군의 진로와 시간을 늦추고 차단하는 목적이었지만, 전쟁을 책임진 장수의 어리석음으로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왜군은 파죽지세로 신립장군이 결사항전하기 위해 머물고 있던 탄금대와 임금과 벼슬아치들이 있던 한양으로 향한다.


이후 신립장군이 이끄는 기마부대가 충주 탄금대에서 왜군에게 결사항전을 하였지만 대패한다. 험준한 산악을 이용한 문경새재인 조령에서 왜군을 막지 않고, 확 터인 충주 탄금대에서 기마전을 펼치려는 작전은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한 작전이었다.

선조가 머물고 있던 한양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로써 선조는 “신립마저 무너졌단 말인가?”말을 남기고, 한양으로 진격하는 왜군을 피하기 위해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몽진(蒙塵)길에 오른다. 선조가 몽진에 오르면서 버려진 백성들이건 벼슬아치건 제각각 삶의 방도를 찾는 각자도생(各自圖生)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산에서 의병장을 맡고 있던 노경임에게 선조는 “내 그대를 강원도순무어사(江原道巡撫御使)에 명하노니 성심으로 과인을 도우라.”라는 어명을 내린다. 어명을 받들기 위해 노경임은 의병장을 내려놓고 급히 강원도로 향하여 순무어사로 활동한다. 순무어사 노경임은 삼척부사 홍인걸(洪仁傑)의 “부사 홍인걸 왜적참급 허위보고사건”을 조정에 보고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수만 명의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갔으나, 포로로 잡혀가던 조선인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도망쳐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들은 왜적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1595년(선조 28) 삼척부사 홍인걸은 도망쳐 나온 조선인을 참수하고, 왜적을 죽였다고 허위보고했다는 소문이 돌게 되자, 순무어사 노경임은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여 조정에 보고한다. 이 사건은 장기 미제사건으로 조정내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던 사건이었다.


노경임은 순무어사의 임무를 수행하는 느끼고 깨달은 점들을 10가지로 정리해 선조에게 올린다. “민심이 날로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의 근본이 흔들림을 의미합니다. 전하, 부디 매사와 범사에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소서. 쇠하는 것을 일으키고 어지러운 것을 바로 잡는 길이 오직 바른 정사에 있음을 유념하소서.”라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있을 때, 노경임을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종사관으로 임명한다. 도체찰사는 당시 모든 병권과 행정권을 모두 가지는 막강한 직책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전시작전권을 가진 합참의장정도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한마디로 도체찰사에 임명되면 임금도 마음대로 못하는 위치였고, 사실이었다. 이원익은 노경임의 일처리 하는 능력을 보고 장차 “큰 그릇”이 되겠다고 하였다.


도체찰사 이원익이 어떤 사람인가를 필자의 칼럼, 인재 최현(訒齋 崔晛)에서 언급한 적이 이었다. 이원익이 평가하기 위해 다시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당시 도제찰사는 이원익은 지금으로 말하면, 전시작전권을 행사하는 합참의장 겸 계엄사령관의 위치에 있었다. 당시 도체찰사 이원익은 이순신 장군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목숨을 살려는 주는 역할을 한다. 

 

임진왜란 하면 우리는 반드시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고 기억에 떠 올릴 것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지만, 이순신 역시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1593년(선조 26)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협상을 하는 와중에, 고니시 유카나가(小西行長)의 부하 요시라(要時羅)라는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언제쯤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조선수군을 이용해 가토 기요마사를 생포하라”는 거짓정보를 김응서에게 전달한다. 


이에 김응서는 곧 바로 조정에 이 거짓정보를 올리자, 선조와 조정은 이것이 기회다 싶어 이순신에게 바다를 건너오는 가토 기요마사를 생포하라고 명령한다. 고니시 유카나가는 개인적으로 가토 기요마사와 철천지원수였다. 고니시 유카나가는 조선을 이용해서 가토 기요마사를 제거 하는 한편, 조선 수군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일거양득을 노리는 거짓 정보를 조선 조정에 전달한 것이다.


이순신은 고니시 유카나가가 조선에 흘린 정보가 거짓이며, 일본의 계략임을 알았지만 부득이 출동한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조선에 온지 오래되었다. 전쟁 중에도 조정 내에 서인과 남인의 싸움은 치열했다.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바로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었기 때문에, 서인(西人)들인 김응남(金應南)·윤두수(尹斗壽)과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 등이 이것을 기회로 이순신을 문제삼아 남인(南人)인 영의정 류성룡과 남인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싶어하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그래서 서인들은 집중적으로 이순신과 류성룡에게 대한 불만을 성토한다.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평소에 이순신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이 많았던 것을 이것을 기회로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고, 한편으로 조정대신들에게 로비작전도 펼친다. 

 

당시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연전연승하고 있는 이순신에게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한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백성들에게 이미 이순신이 영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내심 이순신이 연전연승에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있었다. 그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이순신은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서 왜적과 싸워 계속적 승리를 하니, 속으로 몹시 불쾌했던 것이다. 백성들의 관심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보다는 열악한 환경에서 싸우는 이순신에게 열광하고 있었다.


영웅이 된 이순신에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선조는 폭발한다. 선조의 이러한 심리는 전쟁 상황도 모르면서 이성을 잃고 원균의 상소만 믿고,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늦게 했다는 죄목으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시키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1개월 동안 혹독한 조사와 심문을 받는다. 


류성룡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 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라고 선조에게 간절하게 청했지만, 이미 이순신에게 마음이 떠난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들여 국문할 것을 명령한다. 조선은 전쟁 중에 수군 최고지휘관에게 도움을 줘도 모자라는 판에 책임자를 투옥시키고 심문하는 어쳐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남 지방의 전시상황을 파악하러 온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이순신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치계(馳啓)를 올린다. 또 좌의정 약포 정탁(藥圃 鄭琢)이 “이순신이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만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라고 적극적으로 이순신을 변호하고 나왔다.


또한 이조참판 이정형(李廷馨)은 “원균을 통제사로 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으니, 경솔히 하지 말고 자세히 살펴서 해야 합니다”라고 정탁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순신을 변호한다.  


이러한 변호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1개월 동안 혹독한 조사와 신문을 받는다. 민심은 불안해지기 시작했으며, 백성들은 여전히 이순신 편이었다. 1차 신문과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순신을 구명운동에 전면에 나서는 사람이 바로 약포 정탁이었다. 좌의정 정탁은 이원익의 계획과 밑그림에 따라 움직이는 유일한 조정내에 대신이었다.


전시상황을 총괄하는 당시 합참의장 겸 계엄사령관이 이원익이었다. 이순신의 신문과 조사를 총괄하는 사람은 당연히 도체찰사를 맡고 있던 오리대감으로 유명한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을 살리느냐, 죽이느냐를 결정은 이원익의 조사와 결정에 달렸던 것이다.

 

기록에 보면 선조는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빨리 이순신에 대한 조사와 결과를 가져오라고 불만을 전한다. 이원익은 선조의 다그침에 빨리 결과를 내놓아야 했지만, 이원익은 이순신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끌며,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해줄 사람을 찾는데, 그가 바로 약포 정탁이었던 것이다.


이원익의 이순신 살리기 계획은 정탁이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선조와 조정대신들에게 이순신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호하면서 조정의 분위기는 변화시겼던 것이다. 이원익과 정탁이 펼친 이순신구명작전은 죽음의 턱밑까지 같던 이순신을 살릴 수 있었다. 

 

결국 이순신은 살아나 백의종군하여 조선수군을 다시 이끌게 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나라를 구했지만, 도체찰사 이원익은 이순신을 구했다. 이순신이 살아서 제기할 수 있었던 숨은 스토리(story)가 있었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는 항상 영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자기 주변에 어떠한 사람이 있느냐,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도와주느냐를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는 지인을 사귀고, 교류해야 한다. 이순신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역사상 가장 잘 싸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동서고금에서 친구와 지인들을 가장 잘 사귄 사람이었다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순신을 살린 이원익은 한눈에 노경임이 훌륭한 인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이원익은 노경임에게 무한 신뢰를 보내며 노경임을 승승장구하게 만든다. 이원익의 무한 신뢰를 받던 노경임은 홍문관 교리(校理)와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의 내직을 거쳐, 예천군수·공주목사·풍기군수·영해부사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맡으며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선조때부터 사림파 내부에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진행되고 있었다. 크게는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분열되었다. 동인 안에서는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으로 나뉘어졌다. 이 당쟁의 격화는 노경임에게도 비켜갈 수 없는 일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8년 광해군이 선조를 이어 다음 왕이 되자, 광해군을 적극 지지한 정인홍(鄭仁弘)이 전면에 나선다.


정인홍에게는 항상 따라 다니는 화려한 수식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수제자·임진왜란의 의병장·북인 정권의 영수·왕의 남자”였다. 정인홍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58세의 고령의 나이로 직접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608년 광해군이 왕이 될 때, 정인홍은 70세였지만, 광해군 즉위의 일등공신이었다. 어떻게 보면 광해군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이유는 정인홍이 광해군을 왕으로 직접 세웠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정인홍의 위상과 권력의 수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인홍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 노경임은 성주목사(星州牧使)였다. 그런데 스승이자 외삼촌인 장현광이 노경임에게 정인홍(鄭仁弘)을 만나는 심부름을 시킨다. 아마 이것은 장현광이 정인홍이 어떤 인물인가를 알아보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정인홍의 명성과 달리 노경임은 정인홍을 “간사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한다. 정인홍에 대한 노경임의 “간사하다”는 평가는 정권을 쥐고 있던, 정인홍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정권을 쥐고 있던 정인홍은 곧바로 노경임을 성주목사직에서 파직한다. 파직된 노경임은 벼슬살이에 회의를 느끼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와 낙동강 변에 영귀정(永歸亭)을 짓고, 평생하고 싶었던 학문에 심취한다. 


이미 류성룡과 장현광이 그의 학문과 인간됨을 평가했듯이 두 말할 것이 그의 학문과 인품은  높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문제는 건강이었다. 대체로 안강노씨 집안 형제들이 오래 살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1620년(광해군 12년)에 노경임 역시 52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0a9e1a59a279dbaf7538d731e72a619c_1604299907_5373.jpg
<해평면 낙산리에 있는 경암 노경임의 묘소 전경>

 

외삼촌이자 스승이었던 장현광이 노경임이 순무어사를 맡고 있을 때, 노경임의 형인 생질 노경필(盧景佖)이 죽으면서 안강노씨 집안과 노경임의 건강을 걱정하는 글을 전한다. 장현광의 「나의 생질 경암(敬菴) 노경임(盧景任)에게 주다」 의 글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안기찰방(安奇察訪) 노경필(盧景佖)이 별세함은 애통하고 애통하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소. 이제 이 사람을 잃었으니, 안으로는 우리 한 집안과 밖으로는 우리 친구들이 모두 텅 비게 되었소. 공사간(公私間)에 애통함이 더욱 심하고 더욱 심하오. 


영구(靈柩)를 즉시 운반하여 이미 고향의 산에 임시로 장례하였으나, 다만 농번기라서 영구히 장례하지 못하였소. 그러나 가을과 겨울을 기다려 개장(改葬)하더라도 또한 심히 어렵지 않을 것이니, 부디 너무 염려하지 마오.


노수함(盧守諴)의 부인인 누님께서는 아직 몸을 지탱하고 계시나, 다만 우거하는 곳이 피차간에 모두 합당한 곳이 없으니, 우선 탄지(炭池)에 머물면서 어사(御史)인 생질 노경임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도모하여 조처하여야 할 듯하오.

           

대개 노경임의 형제가 상패(傷敗)하여 몸을 손상함은 모두 심려를 지나치게 하였기 때문이오. 응중(凝仲)이 가장 이 병이 심하였기 때문에 가장 먼저 요절하였고, 안기찰방 또한 이 병 때문에 사망하였으며, 이제 노경임만이 세상에 남아 있는데, 형제가 모두 이 병이 있었으니, 노경임은 스스로 생각하여 과연 그러한가를 스스로 살펴보오.


사람의 혈육(血肉)과 정신(精神)이 얼마나 된다고 날마다 지지고 볶는다면 어찌 오래 지탱하겠소. 비록 금석(金石)처럼 견고하고 강한 자질이라도 반드시 녹아 없어짐을 이기지 못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소.


부디 이후로는 마음속에 묵묵히 경계하여 온갖 근심을 되도록 흘려보내어 회포에 관여하지 않게 하며, 마음을 너그럽고 한가롭게 가져 충만하고 편안히 하는 것을 공부의 근본으로 삼아야 하니, 이 어찌 다만 양생(養生)하는 지극한 방법일 뿐이겠소. 십분 유념하기를 지극히 바라고 지극히 바라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경북미디어뉴스]의 모든 기사와 사진은 저작권법에 따라 무단전재시 저작권료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
0 Comments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