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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열지 정초(悅之 鄭招), 농사직설(農事直設)로 “천하의 큰 근본”을 만들다.

이순락기자 0 17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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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 박사, 구미회 이사>

 

몇 달 전 영화관에서 세종이 노비출신의 장영실 대호군에 임명하여 조선의 역법(曆法)을 만드는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를 보았다. 영화에서 조선은 신분과 계급이 뚜렷한 국가사회였다.

그러나 세종은 신분사회를 뛰어넘어 노비출신인 장영실(蔣英實)을 발탁·기용하여 천문대인 간의대(簡儀臺)와 혼천의(渾天儀)를 설치하고, 하늘을 관측하여 조선만의 새로운 “역법”을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자격루(自擊漏)인 물시계, 그리고 해시계를 만들어 “조선의 시간”을 갖고자 숨은 노력을 최대한 한다. 


당시 조선은 새로운 왕조를 탄생시켰지만, 순수한 자주국가가 아닌 중국 명나라의 속국과도 같은 처지였다. 따라서 조선은 언어에서부터 시간까지 모두 중국의 것을 차용·모방했으며, 사회의 모든 기초단위를 중국의 것을 따랐다. 이것으로부터 탈피하고자한 노력한 왕이 바로 조선의 세종대왕이다. 


그러나 조선 내부적으로 주체성이 없이 중국을 받들어 섬기는 태도인 문화사대주의(文化事大主義)에 빠진 사대부와 신하들로부터 저항과 견제를 받는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중국 명나라의 끊임없는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조선 만의 시간과 글을 갖는다는 것은 어느 국가의 종속을 받지 않는 완전한 자주국가를 의미한다. 세종은 이러한 자주국가 건설이라는 대명제 앞에, 뜻을 같이 하는 젊은 엘리트를 기용·발탁하는 것을 첫번째 과제로 선정한다. 세종의 뭄부림은 조선의 초석과 기틀을 다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중국문화를 받들고 동화된 문화사대주의 빠진 신하에게 세종은 “천문”이라는 영화에서 “너는 어느 나라 신하더냐?”라고 직설적으로 호통을 친다. 실제로 역사에서 조선의 군주 세종은 자주 국가, 조선을 세우려는 그의 야망과 정책에 신하들의 많은 반대에 부딪친다.  

 

이러한 것은 조선시대 농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국가와 사회의 기초인 농업마저도 중국의 농법과 농업서적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조선의 기후와 토양이 맞지 않아 백성들의 삶은 궁핍하고 초라했다. 세종은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지 않으면 국가의 기틀과 근간이 무너진다고 보았다. 


세종은 백성의 삶이 풍요롭고, 안정되어야 나라가 잘 다스려 질 수 있는 첫 번째가 농업의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세종은 “밥이 하늘”이라는 생각으로 중국의 농법을 탈피하여 조선에 맞는 농업을 개발하고자 한다.

그래서 세종은 정초(鄭招)과 변효문(文)에게 조선 실정에 맞는 농업을 연구하고, 그것을 책으로 만들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농사직설(農事直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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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명을 받들어 정초가 저술한 농사직설>


필자는 중·고등학교를 역사·국사 시간에 『농사직설』을 그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모르면서 배우고, 외웠던 기억이 난다. 이 조선 농업혁명을 이끌었던 『농사직설』이 우리 고장 선산출신의 열지 정초(悅之 鄭招)가 만들었던 것이다. 


모든 기록과 자료에 정초가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모든 자료와 기록에는 출생연도 미상에서 세종 16년에 죽었다는 것밖에는 없다(?∼1434(세종 16), 필자가 역사를 공부하다가 우리고장 출신 『농사직설』을 저술한 정초를 만났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바람이 불면 날아 갈 정도”의 기록과 자료 밖에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의 농업혁명을 이끌었던 정초를 찾아,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바람이 불면 날아 갈 정도의 기록과 자료지만, 그를 다시 현재의 시간 속에 끄집어내고 싶은 것이 필자의 마음이다. 조선의 농업혁명을 이끈 정초를 찾아 한번 역사여행을 시작해 보자.


정초는 고려 공양왕 당시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던 정희(鄭熙)아들로 선산 영봉리(迎鳳里)에서 태어난다. 지금의 선산읍 이문리 일대에서 태어난다. 영봉리(迎鳳里)는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만 15명이나 배출되었으며, 이중 장원급제가 7명, 부장원 2명이 나와 장원방(壯元坊)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인재가 많이 나왔던 곳이다. 영봉리(迎鳳里) 지명의 뜻은 “봉황을 맞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조선인재 반재영남, 영남인재 반재선산( 朝鮮人才 半在嶺南, 嶺南人才 半在善山)말이 생겨난다. 곧 조선 인재 반은 영남(嶺南)에서 나고, 영남 인재 반은 선산(善山)에서 났다.”는 뜻이다. 우리고장 선산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조선시대 인재의 산실, 즉 인재를 배양하는 인규베이터(incubator)였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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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선산부(善山府) 지도>


정초의 본관은 하동정씨(河東鄭氏)이며, 기록에 보면 호(號)는 알 수 없으며, 자(字)가 열지(悅之)이다. 정초는 태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434년(세종 16년) 때까지 예조참판(禮曹參判), 공조판서(工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을 두루 거친다. 


그런데 조선시대 이렇게 화려한 이력을 가졌음에도 기록과 자료가 희귀하다는 것이 필자의 최대 의문점이다. 정초의 이러한 이력은 조선시대 벼슬을 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로망이었다.

그것도 조선시대 최고의 요직만을 섭렵했다. 정초의 이력은 곧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그의 정무(政務)에 대한 능력뿐만 아니라 학문(學文)에 있어서까지 탁월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정초에 대한 평가는 조선시대 야사·일화 등을 모아 엮은 책인 『대동야승(大東野乘)』 해동잡록에 나오는데, “총명하기가 보통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서 무릇 서적을 한 번 보면 문득 외웠다. 태종 때에 다시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으로 세상에 떨쳤다. 세종이 명하여 간의대(簡儀臺)를 짓게 하였으며, 벼슬은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일찍이 원수(元帥)의 막부에 있었는데, 군졸 수백 명을 한 번 보고 모두 그 얼굴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귀신같음에 탄복하였다.” 청조를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정초에 대한 평가를 봤을 때 정초는 아마 보통 사람을 뛰어 넘는 기억력을 가진 인물인 것 같다.


그리고 정초는 선산 출신의 수차(水車)를 개발하여 밭 농업 중심에서 논 농업 중심으로 이끈  율정 박서생(栗亭 朴瑞生)과 함께 조선 실학(實學)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다. 정초는 무엇보다도 수리(數理)와 역법(曆法) 그리고 중국어에 아주 능했다는 것으로 봐서는 세종 때 국력을 키워 나가고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세종은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백성들의 삶을 개선시키고, 안정되게 하며 중국어가 아닌 우리말과 글인, 한글을 창제하여 백성들이 불편함 없이 생활 할 수 있도록 하는 “백성을 위한” 진정한 군주(君主)였다. 만약 우리말과 글인 한글이 없었다면 조선은 아마 중국의 땅 속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1429년 5월 (세종 11년) 정초(鄭招)는  공조판서, 변효문(文)은 직제학으로 있을 때, 세종은 정초에게 중국의 농법이 아닌 조선의 실정에 맞는 새로운 농업을 연구 통해 우리 실정에 맞고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농서(農書)가 간절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바로 정초가 저술한 『농사직설』이다. 정초가 지은 『농사직설』의 서문은 “농사는 천하의 대본(大本)”이라고 시작한다.


세종은 『농사직설』을 편찬하고 기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며, 백성이 잘 먹고 잘 살아야 나라도 잘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훌륭한 임금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많은 힘을 기울였다. 농사가 잘되어야 흉년이나 가뭄이 들어도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는 법이다. 


마침내 내가 왕위에 오른 지 11년 만에 우리 실정에 맞는 농사법을 책으로 정리하게 되어 참으로 기쁘고, 이제 발을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다. 농사 방법을 직접 실험해 보니, 정성을 다하여 농사를 지으면, 가뭄을 만나도 무난히 대처할 수 있다. 내가 직접 농사를 지어 보지 않았다면, 백성의 마음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세종은 이렇게 기쁜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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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가 저술한 『농사직설』을 만드는데, 국가총력이 동원되었고, 세종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농법을 찾는데 간절했다. 당시 『세종실록』에 보면, “젊은 임금 세종이 즉위하자 10년을 넘게 가뭄이 지속되어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강원도와 함경도에 거주하던 백성들의 수가 삼분의 일로 줄어들었으며, 견디다 못해 흙을 파먹으며 연명하는 백성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정초가 『농사직설』을 만들기 이전까지 중국의 농업 서적을 그대로 번역하여 사용했음으로 전혀 우리 실정에 맞지 않아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물론 지방의 관리들조차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역시 『농서집요(農書輯要)』를 편찬하게 한다. 그렇지만 이 『농서집요』 역시 당시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아 효과가 없었다.


이러한 잘 못된 것을 수정하고자 『농사직설』이 편찬되기 시작한다. 정초는 『농사직설』에서 곡식 재배에 필요한 물의 양, 날씨, 토양 등의 환경 조건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어떤 환경에서 어떤 곡식을 재배하면 보다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는지 기술하였다. 


『농사직설』이 저술되고 나서 지방의 농업을 담당하는 관리인 권농관(勸農官)은 물론 지방의 수령들에게 배포되어 『농사직설』에 따라 농사를 짓는 지침서 역할을 하도록 했다.

실제로 세종은 1437년 궁궐 뒤에 시험용 논과 밭을 만들어 직접 농사를 지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이때 세종은 “하늘의 재앙 역시 사람의 노력과 힘으로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면서 『농사직설』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정초가 『농사직설』을 저술할 때, 각 지역에 알맞은 농법을 알리기 위해 각 지역의 대표하는 농부들을 참여시켜 의견을 묻고, 그들의 경험을 수집·정리하면서 개선하는 방법으로 농부들이 실질적으로 농사 지었을 수 있는 방법으로 저술하고 편찬했다는 것이다. 세종과 정초는 농부들에게 머리를 숙여가며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물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세종이 장영실을 통하여 하늘의 천문을 관측하는 간의대를 만들 때, 장영실은 사실 지금으로 말하면 기술자와 공학자였다. 이 간의대를 만들 때 모든 것을 관장하는 책임자는 정초였다.

정초는 이밖에도 음악서인 『화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 조선과 중국의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아 기록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道)』 편찬에도 참여하여 조선의 기틀과 과학·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정초는 세종 때의 역사적 많은 사업에 중추적으로 참여했지만, 그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정초는 예조참판, 공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이라는 조선시대 최고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적 흔적들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 많다. 그리고 정초 본인 스스로 개인적 기록을 대체로 남기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는 정초, 본인의 공(功)을 조선시대 르네상스를 열었으며, 조선이라는 국가의 기틀을 반석 위에 올린 세종에게 그의 공을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정초는 살아서 세종에게 신하로서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신하였고, 본인의 업적을 세종에게 돌릴 줄 아는 진정한 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애민(愛民)의 신하였던 것이다. 세종은 정초와 같은 유능하고, 열정이 넘치는 인재들로 인해, 결국 500년이라는 조선왕조의 기틀과 초석을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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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정신으로 과학과 문화를 이끈 세종>

 

정초가 저술한 『농사직설』은 조선의 각도에 널리 보급되어졌으며, 1492년(성종23년) 내사본으로, 1656년(효종 7년)에 농가집성에 포함되었으며, 1686년(숙종 12년)에 숭정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중 성종 때 만들어 진 내사본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농업 발전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세종의 농서를 만들라는 명을 받고 『농사직설』을 편찬한 정초는 산술과 지리, 역법, 중국어 등에 능한 당대의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정초는 조선의 실정과 풍토에 전혀 맞지 않은 중국의 농서와 농법을 개혁하고자, 전국에 있는 농민들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었다.

정초는 이러한 경험들을 우리 실정에 맞는 『농사직설』을 편찬하여 조선 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탁상공론하는 신하가 아닌 깨어있고, 현실을 개혁할 줄 아는 자각(自覺)한 관리였다고 할 수 있겠다. 


세종 역시, 정초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러한 훌륭한 업적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정초 역시 세종 같은 훌륭한 군주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의 능력은 한낱 벼슬아치에 불과했을 것이다. 세종과 정초, 즉 군주와 신하의 애민(愛民)정신이 느껴지는 사실들과 이야기들이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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