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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칼럼

【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조선시대 지식인 교류와 연결의 중심에 섰던, 용암 박운(龍巖 朴雲)을 찾아 간다.

이순락기자 0 2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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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 박사, 前구미회 부회장, 구미새로넷방송 시청자위원>


필자는 어느 경매 뉴스 기사에서 퇴계 이황이 용암 박운에게 쓴 서간(書簡), 즉 옛날 편지가 경매에 나왔다는 것을 보았다.

이 서간은 이직재를 통해 박운에게 전달한 것으로 자신이 조정에 들어가게 된 후의 심정과 박운에게 빌려 읽은 책을 아직 다 읽지 못했다는 내용과 자신이 빌려준 주자(朱子)의 문집을 인편(人便)에 보내 달라는 내용의 「서간: 용암 박운에게」 경매에 출품되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편지를 전달한 이직재(李直哉)의 본명은 이사청(李思淸)이고, 직재(直哉)는 이사청의 호가 아닌 자(字)로 밝혀졌다. 필자는 이직재를 알기 위해 한학자에게 도움을 구하여 알아냈다. 아마 이사청은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했거나, 선산에서 박운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사람일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필자는 지역의 역사와 인물을 공부하고, 글을 쓰다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용암 박운을 알면 당시 지역 선산뿐만 아니라, 당대 조선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선산지역사회의 학문적 수준을 엄청나게 끌어 올린 인물이 용암 박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운은 필자의 「역사와 인물」 칼럼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조선에서 알아주는 효자였다는 것이다. 박운은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면 박운을 통하지 않는다면, 과거 지역의 지식 교류와 인물 교류를 알지 못한다고, 필자는 감히 말한다. 반대로 박운을 알면 당시 조선의 선산지역의 지식 교류사와 인물 교류사가 훤하게 다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 선산의 지식 교류사와 인물 교류사를 이끌었던 박운을 만나 보기로 하겠다. 박운은 지금의 구미시 해평면 괴곡리에서 본관은 밀양박씨(密陽朴氏)이며, 성균관 진사 박종원(朴宗元) 아들로 1493년, (성종 24년)에 태어난다. 박운이 태어난 괴곡리(槐谷里)를 예부터 지역에서는 “고르실”로 불렀다. 그래서 “고르실 박씨”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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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 박운이 태어난 해평 괴곡리, 일명 고르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은 박운이 태어난 것보다 8년 후인 1501년 (연산군 7년)에 태어난다. 박운은 이황보다 8살이 많다. 그러나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이황보다 8살 많은 박운이 올라가 있다. 박운은 안동 도산서원의 이황에게 직접 배운 적이 없음에도, 이황의 제자에 올라가 있다. 박운의 직접적 스승은 선산의 송당 박영(松堂 朴英)이다. 


그렇다면 박운은 이황보다 8살이나 많고, 직접적으로 퇴계 이황에게 배우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도산급문제현록』에 올라가 있는 것 왜일까? 그것은 바로 박운이 송당 박영에게 수학을 하고, 난 이후 박운은 자신이 저술한 책과 학문적 견해를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어 평가와 자문을 받았다. 


이황 역시 자기보다 8살 많은 박운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퇴계 이황의 제자들을 수록한 『도산급문제현록』에 박운이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박운과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은 송당학파를 이끈 송당 박영의 고제(高弟)들이며 좌장이다. 고제는 제자들 중 으뜸가는 중심적 제자이며, 학문의 수준이 스승과 버금가는 제자를 고제라 한다. 송당 박영(松堂 朴英)은 이미 필자 칼럼에서 언급했었기 때문에 앞의 칼럼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용암 박운과 진락당 김취성이 스승 송당 박영을 만나는 과정의 에피소드, 즉 일화가 있다. 사실 박운은 과거시험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1519년 (중종14년)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한양에 올라가 생원진사(生員進士)시험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다. 


사마시에 합격한 박운에게 아버지 박종원은 기뻐하면서도 간곡하게 말했다.“진사를 했으니, 너의 출세의 뜻은 세운 셈이다. 이제부터는 벼슬보다는 학문에 전념하는 게 좋겠다고 박운의 아버지는 말한다. 그런데 박운은 어찌 그렇습니까? 출사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도 가문을 일으키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박운이 대답한다.

그러자 박운의 아버지는 “자칫 잘 못하면 너 하나의 목숨 보전하는 것도 힘들고, 나아가 가문에 멸문의 화가 닥칠 수도 있다. 그러니 근신하여 몸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몸을 숨기고, 이름마저 숨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학문을 통해서 너의 뜻을 세워 널리 펴는 것도 어쩌면 더 큰 장부의 일이 아니겠는가?” 


이후부터 박운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잊은 채, 산림(山林)에 은거하며, 학문을 전념하는 처사(處士)의 길을 선택한다. 박운이 살던 시기는 산림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젊은 사림들이 정계에 진출하여 기득권을 쥐고 있던 훈구파와 갈등과 대립을 하던 시대였다.


박운이 사마시에 합격하고 돌아오던 중, 한강에서 송당 박영을 만난다. 이 만남은 후일, 선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송당 박영 스쿨(School)인 송당학파가 만들어자는 결정적 계기였다. 박운은 말하자면 유럽 프랑스 지식인들이 모여서 대화와 학문을 논했던 살롱(Salon)을 만들게 한 실질적인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박영은 박운에게 “어찌 하여 서로 만남이 늦었던가?”, “내가 자네와 성지(成之)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인데, 다만 내가 어진 이를 만나는 연분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늦어졌으니, 원컨대 성지에게 통지하여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박운에게 말한다. 


송당 박영이 말한 성지(成之)는 박운의 절친인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을 말한다. 박운은 송당 박영의 뜻을 받들어 김취성에게 찾아가 당대의 도학자(道學子) 중에 그의 학문을 따를만한 자가 드물고 없으니, 송당 박영의 제자가 되어 우리가 질문하고 토론하는 것이 어떠하겠냐고 김취성에게 물었다. 


김취성이 박운의 말을 의심스러워했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자 박운은 김취성을 보고 소년들이 높은 체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모름지기 이러한 것을 떨쳐버려야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다고 김취성을 꾸짖듯 말한다. 박운의 말을 들은 김취성은 박운의 제의에 흔쾌히 승낙하고, 송당 박영을 만나기로 한다. 


이후 1519년(중종14년) 4월 김취성은 박운과 함께 월파정(月波亭)에서 송당 박영의 도학 강론을 듣게 된다. 한마디로 스승 박영의 도학(道學)의 실력을 제자들이 테스트한 것이다. 그 이후 김취성은 박운에게 “만약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거의 헛된 삶을 살 뻔했다.”고 송당 박영선생을 만나게 한 박운에게 큰 고마움을 전한다. 


월파정에서의 도학 강론을 계기로, 용암 박운과 진락당 김취성은 송당 박영에게 성리학을 배우면서 송당학파가 태동(胎動)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송당학파의 특징은『대학(大學)』과『중용(中庸)』을 강조하는 학문적 경향이 뚜렷했다. 이것은 김굉필에게서 정붕으로 이어진 학문의 특징이 고스란히 박영에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송당학파의 학문적 경향은 선산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명성과 지위를 확보해 나간다. 안동의 퇴계학파와 인동의 여헌학파가 활성화되기 이전까지는 송당학파가 지역의 성리학을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명종 때 일어나는 사화의 가장 큰 화를 입는 곳이 송당학파였다. 을사사화를 계기로 송당학파는 쇠락의 길을 걷는다.


그래서 송당학파의 명성은 선산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선산에서 야은 길재(冶隱 吉再)는 출중하고 유능한 제자를 많이 길러낸, 이후 송당 박영 때에 와서 많은 인물들이 나타나고 등장한다. 그래서 박영은 도학자(道學者)의 명성과 위상을 얻는다.


이후에 박운은 스승 송당 박영을 “동방 리학(理學)의 종장(宗匠)”이라고 평가한다. 1537년(중종 32년) 박운은 명경당(明鏡堂)을 짓고, 스승 송당 박영(松堂 朴英),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을 초대하여 함께 시를 지으며 학문을 논한다. 가장 연장자는 스승 송당 박영이었으며, 모임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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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모여 학문을 논했다는 명경당 모습>
 

그런데 이 모임에 참석한 회재 이언적은 누구인가? 조선 성리학의 한 획을 긋는 도학자였다. 이언적은 당시 사림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성리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만큼 이언적이 조선 성리학에 미친 영향은 컸고 실로 엄청났다고 하겠다.


야은 길재(冶隱 吉再) →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 퇴계 이황(退溪 李滉)으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도통관(道統觀)이 성립된다. 퇴계 이황 이전에 도통관을 이어받는 사람이 바로 회재 이언적이다. 


박운이 지은 명경당에 모여 이들은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한다. 그야말로 박운의 명경당은 당대의 지식인들의 교류의 장이며, 지식의 토론장이 되었다. 이것으로 볼 때 박운은 인생 초기에는 송당 박영, 중기에는 회재 이언적, 후기에는 퇴계 이황과 교류하는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박운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하였지만 벼슬길에 출사하지 않는다. 이유는 박운이 태어났을 때는 성종 때였고, 학문이 폭 넓어질 때는 연산군과 중종 때였다. 조선시대 이때에는 사림파(士林派)와 훈구파(勳舊派)의 권력 갈등과 대립이 극심하게 나타나는 때이다.  


1498년(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연산군 10년)에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 14년)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지방출신으로 학문의 실력과 능력이 탁월했던 사림파들은 훈구파가 일으키는 사화(士禍)에 번번이 희생을 당하는 선비들의 죽음의 시대였다. 


그래서 역사에서 이 시기를 조선시대 암흑기라 했으며, 선비들이 화를 입는 사화(士禍)의 시대라고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사림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개혁적 정치가 훈구파의 기득권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훈구파는 사화를 일으켜 조정에 진출한 사림들을 숙청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러한 원인으로 학문이 탁월하고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것이 산림에 은거한 보편적인 선비들의 경향이었다. 산림(山林)에 은거하여 학문만을 하는 사람을 처사(處士)라고 하는데, 당시 대표적인 선산지역의 처사가 용암 박운, 진락당 김취성이다. 


박운이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것은 시대적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지만, 박운의 아버지 박종원이 죽으면서 박운에게 “너는 반드시 과거시험에 대한 생각을 끊어라.”라는 유언이 있었기 때문에 벼슬길보다는 조선최고의 선비가 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최고의 스승을 만나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아버지의 유언으로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단념한 박운은 학문 탐구에 모든 열정과 전력을 다하기 위해 옳은 가르침을 얻기 위해 평생 스승을 찾는다. 학문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노력과 열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지만 학문을 하다 한계에 부딪칠 때 반드시 훌륭한 스승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학문하는 사람으로 훌륭한 스승을 만나보고 싶은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그래서 박운은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스승 3명을 만나는데, 그들이 바로 송당 박영,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이다. 박운은 『사우문인록(師友門人錄)』에서 이들 3명에게 선생(先生)이란 칭호를 붙인다. 즉 박운은 3명을 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선산에서의 학통(學統)과 도통(道統)은 송당 박영의 스승인 신당 정붕(新堂 鄭鵬)이었다. 정붕의 스승은 한훤당 김굉필이다. 따라서 김굉필의 학통은 신당 정붕 → 송당 박영 → 용암 박운·진락당 김취성으로 이어졌다. 야은 길재에서 출발한 성리학은 서울로 올라가서 다시 신당 정붕을 통하여 선산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정붕은 송당에게 『대학』·『중용』을 강조함으로서 선산지역에서 출발하는 송당학파는『대학』·『중용』을 강조하는 학문적 경향을 정착시킨다. 이후 선산지역을 중심으로 배출되는 인물들은 이러한 송당학파의 학문적 경향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박운은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일컬어지는 회재 이언적이 1547년(명종2년)에 일어나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억울하게 유배되어 죽은 회재 이언적에 대해 “학문은 주자(朱子)를 이었고, 맑은 절개와 지조는 백이(伯夷)에 이르렀네.” 이언적에 대해 평가한다.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은 이후, 사림들을 이끌던 중심적 인물은 이언적이다. 중종의 죽고, 인종이 즉위한다. 그러나 인종은  즉위한지 8개월 만에 죽으면서 나이 어린 명종이 즉위하면서 사림들에게 을사사화가 닥쳐온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임금이 어리다는 이유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실시한다. 문정왕후는 성격이 포악하고, 질투심이 많았으며, 정치적으로는 정적이라 생각되면 가차없이 제거하는 여인이었다.


명종이 즉위한 그해에 문정왕후의 동생인 소윤(小尹)인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대윤(大尹)인 윤임(尹任) 일파를 숙청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다. 이후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비호아래 권력을 독차지 하고, 궁인들을 매수하여 명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권력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축척한다. 


실록에는 “뇌물이 문에 가득해 재산이 나라의 국고보다 더 많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윤원형의 애첩이 바로 정난정(鄭蘭貞)이다. 이들은 권세를 이용해 조선의 상권을 장악하고 매전매석 통해 백성들의 삶을 궁핍하게 되었고, 특히 대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는 사람이 전국적으로 헤아릴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각지방에 도적이 들끓어 조선은 망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임꺽정이 이때 등장하는 도적이다. 이 같은 암흑기를 만든 장본인이 문정왕후와 소윤(윤원형)과 훈구파들이었다. 시대는 정치가 없고 백성이 없는 문정왕후와 정난정 그리고 윤원형만이 있던 시대였다. 드라마에서 이 때를 여인천하(女人天下)라 했다.


1547년(명종 2) 9월에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를 발견되었다.

여기서 여주(女主)는 문정왕후를 지칭하며, 간신(奸臣) 이기(李芑)는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과 손잡고 대윤(大尹) 윤임(尹任)의 세력과 사림파를 숙청한 인물이다.


권력을 쥐고 있던 윤원형과 훈구파는 을사사화에서 처벌이 미흡해, 이 같은 일이 다시 생겼다면서 대대적인 사림파 숙청을 감행한다. 이것이 바로 “약재역벽서사건”이다. 이 양재역벽서사건은 소윤(小尹) 윤원형 일파가 조작하여 을사사화에서 살아남은 사림파를 다시 한번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다. 


1498년(연산군 4)에 일어난 무오사화에서 출발한 훈구파의 사림파에 대한 숙청은 50년간 지속된 것이다. 을사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은 훈구파가 사림파에 가한 대대적인 숙청으로 조정에서 사림파 관료들을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살아남았다하더라도 변방과 외직에서 관직 생활을 해야 했다. 


이 양재역벽서 사건에 이언적이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게 되고, 결국 죽는다. 이언적은 박운의 평생지기인 진락당 김취성의 학문과 인품을 보고 벼슬길에 여러번 천거했다.

하지만 김취성은 이언적의 천거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는 한편 어렵고 아픈 백성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김취성은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있는 서산재(西山齋)에 은거하며, 더욱 학문탐구와 의술로 백성들을 치료하는 일에 전력하였다. 진락당 김취성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찾아 오는 길을 문장로(文章路)라 했다.


김취성과 박운의 스승인 송당 박영은 당시 모든 의서(醫書)들을 섭렵하고, 경험방(經驗方)과 활인신방(活人新方)이라는 의서를 저술하여 지역의 백성들에게 의술을 베풀었다. 그리고 박영이 저술한 의서들은 영남지역에 확산되어 의술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특히 김취성은 스승 박영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학문과 진리을 탐구에 매진하면서도, 의술을 배워 많은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 방향으로 삶을 선택한다. 김취성의 의술로 병을 고치고 목숨을 살린 사람이 수천명이었다고 하니, 어쩌면 벼슬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김취성의 삶은 오히려 현명한 삶이었다고 하겠다.

김취성의 이러한 삶을 선택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는 잦은 사화가 일어나는 시대상황이었다. 김취성은 뜻있는 선비라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처사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의미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지역에서는 처사(處士)로 박운과 김취성이 있었다면, 전국적으로는 학문이 당대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삼처사(三處士)가 있다. 그들이 바로 남명 조식(南冥 曺植)·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대곡 성운(大谷 成運) 같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산림(山林) 은거하며, 학문과 진리탐구에만 평생을 보낸다. 임금과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절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아 살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벼슬을 거부하며, 처사적 삶을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명성과 명예는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박운은 이 밖에도 이언적의 제자였던, 양명학(陽明學)대가인 소재 노수신(穌齋 盧守愼),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인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과 사귀면서 교류하였고, 퇴 계 이황의 문인(門人)인 구암 이정(龜巖 李楨),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후조당 김부필(後彫堂 金富弼)등과도 교류하였다. 


대사헌(大司憲)과 우참찬(右參贊)을 한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이 1552년 선산부사로 부임했을 때, 정치적·학문적 경향과 노선이 달랐음에도 송순은 박운의 명성을 듣고, 직접 박운을 찾아와 교류하였으며 서로 만나 시를 지었다고 한다.


박운이 가장 극적인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퇴계 이황과의 관계이다. 송당 박영의 제자였으며, 송당이 죽고 난 이후, 안동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 이황의 제자가 돠였던 송정 최응룡(松亭 崔應龍)이 1552년 평해군수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운과 최응룡은 서로 선후배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박운은 최응룡의 도움을 받아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정(지금의 백암온천)에 갔을 때, 최응룡을 통해 이황의 제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 때 박운은 아마도 안동의 퇴계 이황의 제자가 되어야 겠다고 마음 먹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겠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박운은 정식으로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제(師弟)의 예로써 교유(交遊)를 청하였다. 박운은 병 때문에 직접적인 교유는 하지 못했지만 편지로서 학문에 대한 서로 의견과 견해를 주고받으며 학문의 깊이를 더해 가고 성숙해 갔다. 


박운이 이황과 편지를 왕래한 것은 1557년부터인데, 박운이 저술하던 『격몽편(擊蒙篇)』, 『자양심학지론(紫陽心學至論)』, 『경행록(景行錄)』, 『삼후전(三侯傳)』, 『위생방(衛生方)』에 대한 평가와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박운과 이황은 1560년까지 9회에 가까운 편지왕래를 한다. 


이황은 박운을 “지금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선비(今世難得之士)”라고 평가 하면서, 제자들에게 박운의 저술이 지닌 문제점과 보완해야 할 것을 지적하며 타산지석으로 삼을 것을 강조한다.

퇴계 이황은 사실 박운과 스승 송당 박영을 저술들을 주자학적(朱子學的)관점에서 날카롭게 비판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조선 성리학은 이황이후 부터 도그마(dogma)적 성격이 강해져 시간이 흐르면서 학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거부하게 된다. 이는 국제사회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뒤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주자학이 교조적(敎條的) 성격이 강해져 주자학적 측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비판을 받는 시대로 변해간다. 이후부터 유학자(儒學者)는 주자학의 이념·성격과 범위를 벗어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취급당하는 분위기가 형성 되어 갔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사림파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당되는 동서분당(東西分黨)이후 더 극심하게 나타난다. 서인들은 조선후기를 더욱 폐쇄적·쇄국적 사회로 이끌어간다. 인조때 일어나는 병자호란이후 효종 때 북벌(北伐)을 주장한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이 등장하면서 "소중화(小中華)"사상이 시대를 지배하면서 조선은 주자학이외의 모든 것은 이단(異端)으로 간주되어 같은 하늘아래 있을 수 없는 시대로 변해갔다.

조선은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 때문에 학문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할 수 없는 경직된 사회 분위기는 조선후기로 갈수록 해외문물과 국제적 교류에 있어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로 가는 아주 큰 문제점을 잉태한다. 조선후기 서인들의 집권과 세도정치는 정치적 부패와 나라의 문을 닫는 쇄국의 길로 갔던 것이다.


박운은 1562년(명종 17년), 70세로 세상을 떠난다. 퇴계 이황은 자기보다 8살이 많은 제자 박운의 묘갈명(墓碣銘)을 써 준다. 이황이 묘갈명을 써 준 유일한 사람은 용암 박운밖에 없다. 조선시대 누구로부터 묘갈명을 받느냐가, 그 사람의 학문과 인품을 말해주는 척도였다. 


이황이 박운의 묘갈명을 써 준 것으로 봤을 때, 퇴계에게 있어서 분명히 남다른 점이 있었다고 하겠다. 그것은 아마도 박운의 학문과 인품도 있었겠지만, 박운이 부모님께 행한 효도(孝道)일 것이다. 


퇴계와 박운의 인연은 박운의 손자인 건재 박수일(健齋 朴遂一)로 이어진다. 박수일은 할아버지의 인연으로 퇴계 이황의 제자가 되어 수학한다. 그리고 박수일은 경암 노경임(敬菴 盧景任), 인재 최현(訒齋 崔晛)과 함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산에서 의병을 모아 전투에 참가하여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다.

박수일의 아들 와유당 박진경(臥遊堂 朴晋慶)은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서 의병에 참여해 전사한 아버지 시신을 찾기 위해 전쟁터로 뛰어 들어 아버지 박수일의 시신을 찾는다. 박진경은 용기와 효성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리고 박진경은 17세기 대학자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에게 학문을 배우고, 장현광의 사위가 되면서 용암 박운가문과 인동장씨는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한다. 


장현광이 대학자가 되었던 직간접적으로 원인은 당시 선산지역에 훌륭한 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추측되어진다. 장현광은 어린 나이에 송당학파의 일원인 자형(姊兄)인 송암 노수함(松庵 盧守諴) 밑에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공부했음으로, 장현광 역시 송당학파의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박운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에 대한 효도가 특별했다고 한다. 40여 년간 어머니를 직접 극진히 봉양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어머니 묘 옆에 여막을 짓고, 나물죽만 먹으면서 3년 동안 어머니 산소 주위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살아 생전에 어머니에게 못다한 삶을 돌아 보며 후회를 했다. 


시묘살이가 끝난 뒤, 박운은 아침·저녁으로 부모님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 참배를 드렸다. 어머니가 임종할 때가 겨울이었는데, 어머니가 참외를 먹고 싶다는 말을 하자, 박운은 효심이 지극하면, 겨울이라 해도 참외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참외를 구하러 다녔다. 한 겨울에 참외를 구할 수 없었던, 박운은 평생 참외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박운의 이러한 효행이 인정되어, 1578년(선조 11년)에 효자·충신·열녀 등에게 내려지는 정려(旌閭)를 받고, 박운의 정려비가 1580년 세워졌다. 정려비문에는 “효자 성균진사 박운지려(孝子成均進士朴雲之閭)”라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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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이 쓴 박운의 정려비의 탁본 사진>


이 글씨체는 조선최고의 명필가 석봉(石峰) 한호(韓濩) 즉, 한석봉의 쓴 글씨이다. 박운은 죽은 뒤 두 번의 행운을 얻는다. 하나는 퇴계 이황의 묘갈명이요, 또 하나는 정려비문의 글씨가 조선최고의 명필가 한석봉이 썼다는 것이다.

이로써 박운은 학문을 탐구하기 위해 당대의 최고 석학들을 찾아 스승으로 모셨고, 부모님께 효도를 다했다. 박운은 조선시대 암흑기에 태어나 암흑기에 성장했지만, 학문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줄기차게 도학자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박운은 많은 학문적 결과와 성과를 이루었음에도, 당대에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많은 기록들은 그 이후 나타나는 선산지역의 많은 후배들에게 가르침과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인재 최현(齋 崔晛)은『일선지(一善志)』를 저술하는데, 박운의 기록들은 많은 참고자료가 되어 빛을 본다. 만약 박운의 기록들이 없었다면, 아마 인재 최현의『일선지』는 세상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일선지』는 선산지역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인물들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지리·풍속·문화에 대한 기록들을 저술한 책이다. 만약 이『일선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소중한 기록과 역사적 사실들을 접할 수가 없다. 누군가는 앞서서 길을 걸어야 뒤따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박운이 죽은 이후, 조선성리학을 집대성한 퇴계 이황이 살아서 박운의 묘갈명 써준 것만 봐도 비록 처사적(處士的) 삶을 살은 박운은 당시 최고의 학자로 인정을 받았다고 평가 할 수 있겠다.

또한,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가 한석봉이 박운의 비문을 써 줬다는 것을 볼 때, 박운은 세상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찬사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박운과 그의 후손들은 대단한 영광과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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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운의 효도 정려비> 




기사등록 : 조은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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