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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칼럼

【김기훈의 역사와 인물】고통 받는 백성의 삶 속으로 뛰어든 도학자(道學者),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을 서산재에서 만나다…

이순락기자 0 26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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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경북대 정치학 박사. 前구미회 부회장>


구미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에 있는 들성지 주변을 산책해 봤을 것이다. 그리고 “들성”이라는 마을 지명과 함께 들성김씨를 들어봤을 것이다. 작은 들성마을에 살았던 선산김씨(善山金氏)는 조선시대 문과(文科)16명, 무과(武科)14명, 생원 진사과를 포함하는 연방과(蓮榜科)에 65명, 음사(蔭仕)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문집(文集)을 남긴 사람이 66명이나 된다.


1403년(태종 3년) 당시 경상도관찰사로 조선 개국공신인 남재(南在)였다. 남재는 길재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갔지만, 야은 길재(冶隱 吉再)의 절의(節義)를 시(詩)를 지을 정도로 길재를 존경했는 인물이다. 그래서 남재는 가난하게 산림(山林)에 은거하며, 제자를 가르치는 길재에게 많은 배려를 한다. 


경상도관찰사인 남재의 이러한 배려는 곧 선산군수 이양(李揚)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따라서 선산군수 이양은 금오산에 은거하고 있던, 길재의 생활이 안정 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선산군수 이양은 지금의 밤실마을(구미시 도량1동)을 길재에게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길재가 밤실(栗谷)마을에 정착하면서 “도(道)를 가르쳐 널리 깨우친다”는 뜻과 어질다는 뜻의 량(良)을 붙여 도량동(道良洞)이 되었다. 도량동이란 지명은 길재로 인해 생긴 지명이며, 그 뜻이 예사롭지 않은 명칭이다. 그리고 도량동을 지나 고아읍 원호리로 가는 길을 문장로(文章路)라 한다. 


이 문장로가 생기게 된 연원은 원호리 일명 들성(坪城)마을 서산재(西山齋)에 머물고 있던,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에게 글과 학문을 배우러 오는 선비들이 많아, 그 옛날 사람들이 문장(文章)의 골짜기인 “문장골”이라 부르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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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락당 김취성이 강학하던 고아읍 원호리의 서산재>


문장골은 현재의 문장로(文章路)가 되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들성마을에 포함되는 문성리(文星里)가 있는데, 문성리(文星里)의 지명은 “학문이 높은 선비들이 별처럼 많이 나왔다”는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바로 “글월 문(文)과 별 성(星)자가 합쳐서 문성(文星)이 되었다.


“들성”이라고 부르는 지명은 한자로 쓰면 평성(坪城)이라 표기하기도 하는데, 이 말은 하늘에서 보면 마치 산이 들을 둘러싸고 있는 성(城)같아 들성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 옛날 조선 시대에는 지명이 평성방(坪城坊)으로 불려졌다. 그러니까 “들성”은 순우리말의 지명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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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사진으로 보는 현재의 들성마을인 원호리와 문성리>


우리는 진락당 김취성(1492년(성종 23) ~ 1550년(명종 5)) 이란 인물이 누구이며, 당시에 그의 학문과 지역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한번쯤 주목해 볼 필요성은 굉장히 크다고 하겠다. 김취성은 역사에서나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이 알려지거나, 회자(膾炙)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행적과 학문을 알게 된다면 정말 도(道)를 실천하는 큰 도학자(道學者)였다는 것을 한번에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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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재에 있는 진락당 김취성의 유허비> 

김취성이 당시 교유(交遊)한 지식인들을 보거나, 그가 지역사람들에 끼친 영향은 보면, 실로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아님을 알수 있을 것이다. 당시 지식인들이 직면한 시대적 문제에 있어서 도학자로서 역할과 책임을 다했던 인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김취성은 필자의 앞의 칼럼 용암 박운(龍巖 朴雲)에서 박운의 지기지우(知己之友)로 소개한 바 있다. 김취성과 박운은 10대 후반 선산향교에서 만나 교류하면서 도학에 대한 열정, 인간에 대한 애정, 사회를 개혁하려는 열의 등 많은 측면에서 일치했다. 한마디로 지향하는 이상향이 같았다.


조선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이은 관료학자였던 대사성(大司成)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과 중종 때 학문과 관료로서 이름을 떨쳤던 형조판서(刑曹判書) 사재 김정국(思齋 金正國)은 당시 임금이던 중종과 조정에 천거한 인물이 바로 진락당 김취성이었다. 이것만 봐도 김취성의 학문과 인품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대의 거유(巨儒)들인 이언적과 김정국이 김취성에게 출사(出仕)를 권유하지만, 김취성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서산재에서 은거하며 학문을 닦으면서 의술(醫術)로 가난한 수천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삶을 산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건데, 김취성은 반드시 보통 인물이 아니었음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김취성을 만나러, 그가 살았던 과거로 그리고 그가 공부했던 서산재로 가보자. 김취성의 본관은 선산김씨(善山金氏)이며, 호(號)는 진락당(眞樂堂) 또는 서산(西山)을 썼다. 선산김씨는 고려시대에 대부분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서 거주하며, 고려왕조를 건국과 기틀을 다질 때부터 참여한 가문이었다. 


그러나 1392년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조선이 건국되자, 경기도 광주목사(廣州牧使)였던 화의군 김기(和義君 金起)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과 정치적 대혼란을 피해 장인 김원로(金元老)가 살고 있던 처가인, 지금의 구미시 옥성면 주아리로 옮겨온다.


김기의 장인 김원로는 본관이 일선김씨(一善金氏)였으며, 고려에서 예의판서(禮儀判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역임한 관료였으며 학자였다. 그리고 김원로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이 바로 고려의 최고 충신으로 추앙받는 백암 김제(白巖 金濟)와 농암 김주(籠巖 金澍)이다. 이들은 모두 고려 최고의 충신들인 두문동 72현에 들어가 있다. 


선산김씨 입향조 화의군 김기와 일선김씨 김제·김주는 처남매부지간이 된다. 김기는 본인의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 그리고 처가의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節義)는 일맥상통했다. 따라서 화의군 김기는 같은 정치노선을 가진 처가집과 공동운명체로 인식하에 선산으로 내려와 숨어 지냈다. 

그리고 김기가 선산으로 내려온 이유 중 하나를 더 이야기 하자면, 김기 본인의  관향(貫鄕)을 선산(善山)으로 쓰기 때문에 먼 조상의 고향을 찾아 가고 싶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보면 화의군 김기는 선산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세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선산김씨와 일선김씨가 같은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잘 못된 이야기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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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김씨 입향조 화의군 김기(和義君 金起)의 묘소: 선산읍 포상리>


시간이 지나고, 조선의 기틀이 완전히 잡혀가는 15세기 김기의 4대손인 충무위(忠武衛) 벼슬을 한 김광좌(金匡佐)는 결혼하기 이전까지 선산읍 고남리, 즉 지금의 독동리(禿洞里)에 살았다. 그리고 김광좌는 선산임씨(善山林氏) 상호군(上護軍) 임빈(林斌)의 무남독녀 딸과 결혼하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 가야할 일이 있는데, 18~19세기 선산임씨 상호군의 이름에(玉  + 文 + 武) 조자(造)가 등장하면서 상호군 임빈(林斌)의 이름을 임무(林珷)로 잘 못 표기되고 읽혀지는 오류가 발생했다. 따라서 그 이후부터 계속된 오류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이유는 족보의 기록에 합성된 (玉  + 文 + 武)이러한 글자를 어떻게 읽느냐가 문제 해결의 관건이다.

이러한 조자(造字)는 옥편에 찾아도 나오지 않는 한자를 조자(造字)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조자를 족보에 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특히 임금의 이름에 일반인이 사용하지 않는 글자를 만드는 "조자(造字)"로 임금의 이름을 작명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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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임빈의 이름은 (玉  + 文 + 武) 이렇게 합성이 되면, 구슬 옥(玉)자가 빈(斌)자에 붙으면, 玉 자는 임금 왕(王)자로 변한다는 한자의 원리가 적용되어 만들어졌다. 덧붙여 기록되어진 한자는 틀린 것이 아니라, 잘 못 읽고 잘 못 해석한 오류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따라서 상호군 임무(林珷)가 아닌 임빈(林斌)으로 해석하고 읽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김광좌는 결혼이후 가족들을 데리고, 장인 임빈과 선삼임씨들이 세거하고 있는 들성에 오게 된다. 당시에 들성은 신천강씨(信川康氏)와 선산임씨(善山林氏) 함께 공존하는 세거지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김광좌의 6형제가 번성함으로 들성은 완전한 선산김씨의 터전으로 자리매김해 간다. 그리고 선산임씨 상호군 임빈은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그가 죽고 난 이후 외손인 선산김씨 자손들은 600년 동안 임빈의 제사와 묘사를 지내는 외손봉사(外孫奉祀)를 하였다. 이 외손봉사는 현재에도 진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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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0년동안 외손봉사를 받아오던 상호군 선산임씨 임빈의 묘소 >

김광좌와 그의 아들 6형제가 정착한 들성의 터전으로 선산김씨는 600년 가까운 역사를 써 내려간다. 이후 가문이 번성하게 되고, 선산김씨는 빠른 시간 안에 영남의 명문가의 위치를 잡아간다. 국가나 조직의 기틀을 만들 때는 계획을 설계하고, 기획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임무와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김광좌의 맏아들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이 그 역할을 했다. 김취성은 다섯 동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인생의 방향을 설정해 주게 되면서 지역뿐만 아니라, 정관계에서도 그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선산김씨를 실질적으로 지역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만든 도학자(道學者) 진락당 김취성을 알아보기 위해 과거로, 역사 속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들어가 보기로 하자. 

 

김광좌는 6형제의 아들을 두게 되는데, 그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 맏아들, 진락당 김취성과 다섯째 아들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이라 할 수 있다. 이들 형제의 나이 차이는 17년 차로 당시로서는 아버지와 아들 정도의 나이 차이가 난다. 특히 동생 김취문은 맏형인 김취성에게 많은 학문적 가르침과 영향을 받아 관직생활을 할 때도 맏형의 가르침을 항상 잊지 않았다.


선산김씨 가문의 맏아들인 김취성은 학문적으로 가장 뛰어났으며, 다섯 명의 동생들과 제자들을 가르칠 때 쯤에는 그의 학문은 당대에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단계에까지 다다랐다. 김취성은 1492년 (성종 23년) 태어났다. 김취성이 태어난 2년후에 당시 임금이던 성종(成宗)이 죽고,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한다.

김취성은 조선의 4대 사화가 일어나는 조선시대의 정치적 암흑기에 태어나 성장하고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출사하지 않은 원인들 중 가장 큰 원인이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당시에 태어난 사람들이 너나할것이 모두가 그래겠지만, 김취성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연산군이 즉위한지 4년 만에 훈구파(勳舊派)들이 신진사림을 숙청하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난다. 사림파의 종장(宗匠)이라 일컬어지던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중국 초나라 회왕(懷王)이 항우(項羽)에게 죽는 것을 빗대어 쓴「조의제문(弔義帝文)」이 무오사화의 빌미를 제공한다.

김종직이 쓴「조의제문」을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초에 기록하게 되면서 류자광(柳子光)과 이극돈(李克墩)은 연산군을 부추겨 김종직의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신진사림파를 숙청하는데, 이것이 신진사림들이 최초에 화를 입는 1498년에 일어나는 무오사화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화를 입는 4대 사화(士禍)는 1498년(연산군 4년) 때의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1504년(연산군 10년) 때의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 14년) 때에 조광조와 사림파를 제거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즉위) 때의 소윤(小尹)인 윤원형(尹元衡)이 대윤(大尹)인 윤임(尹任)일파와 사림파를 숙청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전개되어졌다. 


김취성은 조선시대 정치적·역사적으로 가장 비극적일 때 태어나 삶을 살은 인물이다. 김취성은 선산 해평의 용암 박운과 가장 친한 사이였으며, 김취성은 박운보다 한 살이 많다. 김취성의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 있는데 박운과 송당 박영이다.

송당 박영이 낙향할 결심을 굳힌 것은, 신진사림들의 급진적 개혁성 그리고 훈구척신들의 견제를 관찰했음으로 조만간 큰 변란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다. 송당 박영이 낙향하자마자 곧바로 중종이 훈구파 세력인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등을 이용하여, 신진사림인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세력을 숙청하는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아마 박영은 신진사림이 주장한 급진적인 개혁이 곧 큰 화를 불러올 기미를 알았다고 하겠으며, 박영은 평소 도학자(道學者)의 길을 가고자 했던 열망과 시대적 상황이 합쳐지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송당 박영은 중종 때 큰 변란이 일어날 것을 예감·직감하게 된다.그래서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 선산으로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여 학자의 길을 가고자 한다. 이러한 송당 박영(松堂 朴英)에게 본인을 받쳐 줄 제자들이 필요했다. 그 필요성에 충족하는 제자들이 김취성과 박운이라고 박영은 생각했다 

송당 박영은 선산으로 내려오면서 김취성·박운과 함께 송당학파를 만들려는 마음을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박영의 제자가 되는 박운은 1519년 (중종14년) 이른 봄, 한양에 올라가 생원진사(生員進士)시험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고향 선산으로 돌아오기 위해 배를 타기 위해 한강변에 도착한다. 


그런데 박운은 낙향하는 박영에게 작별 인사를 위해 나온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림 관료와 이름 있는 선비들이 한강변에 모여 낙향하는 송당 박영에게 작별 인사하는 것을 본 이후, 박운은 박영에게 처음 인사를 하고, 선산까지 박영을 모시고 돌아오면서 그의 학문과 인품에 존경심을 느낀다. 


박영은 박운에게 “어찌 하여 서로 만남이 늦었던가?”라고 말을 꺼내면서 “내가 자네와 성지(成之)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인데, 다만 내가 어진 이를 만나는 연분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늦어졌으니, 원컨대 성지에게 통지하여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박영은 김취성을 만나보기를 원하는 내용을 박운에게 전한다. 


박영이 박운에게 말한 성지(成之)는 박운에게 가장 친한 벗인 김취성을 말한다. 성지는 김취성의 자(字)이다. 박운은 박영을 스승으로 모시기를 결심하고, 서산재에 있는 김취성을 찾아가 송당 박영이 김취성을 만나보고자 한다는 사실을 전하였다.


하지만, 박운의 말을 들은 김취성은 박영이 무인(武人) 출신이라, 그의 학문의 수준과 깊이를 의심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박운이 김취성을 꾸짖듯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박운은 서산재의 김취성에게 “소년들이 높은 체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모름지기 이러한 병통(뿌리 깊게 박힌 잘못이나 결점)을 떨쳐버려야, 새로운 공부로 나갈 수 있다”고 박운은 김취성을 꾸짖는다. 그래서 김취성은 가장 친한 친구인 박운의 충고에 따라 송당 박영을 만나보기로 결심한다.


이후 1519년(중종14년) 4월 김취성은 박운과 함께 월파정(月波亭)에서 송당 박영의 도학(道學) 강론을 듣는다. 한마디로 스승 박영의 도학의 실력을 제자들이 테스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후 김취성은 박운에게 “만약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거의 헛된 삶을 살 뻔했다.”고 하면서 김취성과 박운은 박영에 대해 스승의 예로서 대하면서 정식 제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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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학파가 도학강의를 듣던 선산 낙동강변의 송당정사>

 

박영의 월파정 강론을 들은 김취성과 박운은 그자리에서 송당 박영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면서, 송당학파는 28세의 김취성과 27세의 박운이 중심이 되어 출발한다.

이후 송당학파는 선산지역뿐만 아니라, 인근지역 그리고 멀리는 전라도와 서울과 경기도에까지 회자되기 시작한다. 송당 문인록(門人錄)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전라도에서는 일재 이항(一齋 李恒), 서울·경기도에서 대곡 성운(大谷 成運), 야천 박소(冶川 朴紹), 희중 박집(凞仲 朴緝), 극순 임건(克順 林健), 경응 안명세(景應 安名世) 등이 있었다. 그리고 경상도에서는 자함 신계성(子諴 申季誠), 송계 권응인(松溪 權應仁) 등이 있었다.


선산지역에서는 김취성과 박운, 김취성의 동생인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 송암 노수함(松菴 盧守諴), 송정 최응룡(松亭 崔應龍), 희중 길면지(希中 吉勉之), 최해(崔海)·최심(松庵 崔深) 형제 등이 있었다.  


특히 일재 이항과 대곡 성운은 송당 박영에게 수학한 다음 그들만의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해 나간다. 사실 송당 문인록에 나오는 16명보다 훨씬 많았다. 하지만 1592년에 일어나는 임진왜란으로 많은 유고와 자료가 사라지거나, 소실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밝혀내기가 힘들다.


조선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잇는 김굉필(金宏弼)의 학문은, 선산 출신 정붕(鄭鵬)으로 이어져, 고스란히 박영에게로 이어졌다. 그래서 송당학파의 특징은 『대학(大學)』과『중용(中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이러한 원인은 “청산대학(靑山大學)” 통해 송당 박영이 신당 정붕의 학통을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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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의 달인,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쓴 송당 박영의 신도비>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이미 박영은 한양에서 관직에서 벼슬생활을 할때, 이미 서산재에서 도학(道學)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던 선산의 김취성의 명성을 훨씬 이전부터 듣고 있었던 것이다.

김취성의 6형제가 선산 고남리, 지금의 독동리에서 태어나 들성마을로 들어와 성장할 때까지 선산김씨는 선산지역 사회에서 미약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김취성이 28세에 송당학파에 들어간 이후, 선산지역에서 선산김씨의 영향력은 유수의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까지 도달하고, 김취성이 본격적으로 서산재에서 학문을 강학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명성은 선산지역 뿐만 아니라 인근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강학활동과 의술을 베풀 때는 선산을 넘어, 서울에까지 김취성의 학문과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이 소문이 난다. 이때부터 김취성은 선산김씨의 실질적인 리더(leader)가 되어 가문이 나갈 방향을 설계하고 이끈다.


송당학파는『사서삼경(四書三經)』 중 특히『대학(大學)』을 중요시하고 강조하는데, 중국에서『대학』의 대가는 송나라 때 학자 진덕수(陳德秀)이다. 그는『대학』을 평생 공부하고『대학연의(大學衍義)』를 저술한다. 진덕수의 고향이 막서산(莫西山)이다. 그래서 진덕수는 그의 호(號)를 서산(西山)으로 짓는다. 


김취성 역시『대학』을 당연히 강조하며, 그의 강학당인 서산재에서 제자를 양성을 시작한다. 그의 동생들인 김취기(金就器), 김취연(金就硏), 김취련(金就鍊), 김취문(金就文), 김취빈(金就彬)과 함께 먹고 잠을 자며 학문에 전념한다. 그리고 친구 박운의 아들 박호(朴灝)·박연(朴演)형제, 강경선(康景善)·강유선(康惟善)형제로 김취성의 서산재 스쿨(school)과 스터디(study) 그룹이 출발한다.


김취성은 동생들과 동고동락하며 강학활동을 펼쳤던 강학당의 이름을 진덕수의 호인 “서산(西山)”을 따와 서산재(西山齋)로 이름 짓는다. 김취성은 호(號)를 두 개를 쓴다. 하나는 “참으로 락을 알고 즐기다”는 뜻의 진락당(眞樂堂)과『대학』의 대가 진덕수의 호인 서산(西山)도 함께 썼다.


당시에 김취성은 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기록에 의하면 김취성에게 도학을 묻는 학자들이 “좌우에서 그를 모시는 자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고, 출입하고 교류하는 친구들이 모두 세상에 널리 알려진 명류들”이었다는 기록은 그의 학문의 수준을 알게 해 준다.


1531년 생원이 된 성주의 칠봉 김희삼(七峯 金希參)이 서산재의 김취성을 찾아온다. 김희삼은 그 유명한 대학자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의 아버지이다. 김희삼은 9년 동안 김취성 문하에서 수학을 하며, 1540년 문과에 급제를 한 인물이다. 김희삼은 벼슬생활을 하면서, 김취성이 보낸 편지를 벽에다 붙여 놓고 읽으며, 자신을 항상 되돌아보았다고 한다. 

 

1542년(중종 37년) 3월 서산재의 김취성에게 서울에서 치재 홍인우(耻齋 洪仁祐)가 찾아온다. 의술과 학문이 높은 김취성에게 홍인우는 본인이 앓고 있던 결핵을 치료하고, 김취성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울에서 그 먼 선산 원호리 서산재까지 찾아온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로 짐작하건데, 서울 중앙관료로 진출한 신진사림들 속에서 김취성의 학문과 의술이 회자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원인으로 홍인우가 서산재까지 왔을 개연성이 높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김취성은 송당 박영의 수제자로 박영이 공부한 의약, 점술, 천문, 지리까지 폭넓은 지식을 배제하지 않고 공부를 하게 된다. 산림(山林)에 은거하여 처사(處士)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오히려 이러한 잡학이라고 취급받는 분야의 학문들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의약, 점술, 천문, 지리 분야의 학문은 백성들에게 더 필요했고, 절실했다.

그리고 학문의 진정한 목적은 배운 것을 가지고, 세상을 이룹게 하는 것이 학문의 당초 목적이 아닌가? 이런 물음에 답한 사람이 바로 김취성이다. 김취성은 이상적인 학문을 하면서도 그것을 현실에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도학자였던 것이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한 이후,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소윤(小尹) 그리고 훈구세력들의 전횡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또한 전국적으로 대기근이 찾아와 10여 년 동안 전국적으로 굶어죽는 사람과 병든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러한 대기근은 전국적으로 어느 곳 할 것 없이 유랑민과 도적 떼가 창궐하게 만들었다. 그 유명한 임꺽정도 이때 나오는 도적이다. 기록에는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죽은 사람의 인육(人肉)을 먹었다고 하니, 실제 보지 않아도 시대 상황을 직잠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죽지 못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던 시대였다. 정치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썩었고, 백성들은 죽거나 병든이가 대부분이었다. 살아남은 자는 도적이 되는 시대였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병들고, 유랑민이 되어 떠돌아다니는데, 조정에는 문정왕후와 소윤(小尹)과 간신들만 득실거리는 시대였던 것이다. 기록에는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한다는 기록들 쉽게  찾을 수가 있다. 국가의 모든 제도와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인, 김취성은 학문을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하는가? 라는 질문을 자기 스스로 던지며 책을 놓고 백성을 구하기 위해, 굶주리고 아픈 백성들의 삶 속으로 뛰어든다. 김취성은 아파하고, 슬퍼하는 백성들 속에서 그가 가고자했던 도학(道學) 길을 찾고, 구도(求道)의 길을 찾았던 것이다. 


김취성은 스승 송당 박영에게 수학하는 과정에서 의술도 함께 배웠다. 박영은 당시 제대로 된 의술서가 없고, 실정에 맞지 않는 책들이 많아 직법 의술서를 쓴다. 그것이 바로 경험방(經驗方)과 활인신방(活人新方)이다. 박영은 직접 지역 백성들에게 의술을 베풀어 학문의 진정한 목적을 실현하고자 한 도학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이가 김취성이다.


박영의 백성에 대한 애민(愛民)정신은 김취성에게 많은 감동과 충격을 줬다고 하겠다. 산림에 은거하며, 도학자의 길을 가고자 한 김취성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박영이 의술로 사람을 살리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굶주리고 아픈 병자들의 삶 속으로 뛰어든 김취성은 그를 찾아오는 많은 환자를 치료하는데, 기록에는 김취성이 구한 병자들이 “수천 명이나 될”정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1544년12월 중종이 죽고, 인종(仁宗)이 즉위한지 8개월 만에 급자기 죽는다. 신진사림들은 인종이 태평성대를 열어 줄만한 임금으로 생각했는데, 인종이 급자기 죽자, 신진사림의 개혁적인 정치 이상은 정치현실에 가로막히게 된다.

1545년 12살의 어린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는 명종이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실시하며, 암흑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조선의 어둠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뜻있는 관료들은 옳은 말을 하다 죽고, 학문이 높은 선비들은 초야에 묻혀 도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가슴 아픔을 달래야 했다.


곧이어 문정왕후의 동생 소윤(小尹) 윤원형은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등을 주축으로, 대윤(大尹) 윤임(尹任)과 신진사림을 숙청하는 을사사화를 일으킨다. 그 때 사헌부 집의(執義)인 야계 송희규(倻溪 宋希奎)는 1545년 8월 을사사화가 발생한 당일 문정왕후의 밀지를 받아 소윤 편에 섰던, 대사헌 민제인(閔齊仁)과 대사간 김광준(金光準)을 강하게 비판한다.

송희규는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관원들을 이끌어 을사사화를 반대하는 입장을 문정왕후와 소윤 세력에게 보여줌으로서, 그의 관직생활과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이후 이 일로 송희규는 유배를 간다. 


인종이 죽기 직전에 김취성의 아버지 김광좌가 먼저 세상을 떠남으로서, 관직에 출사해 있던 김취문은 아버지 상을 치루기 위해 고향 선산에 내려와 있었다. 이렇게 됨으로서 신진사림세력이었던 김취문은 당시 일어난 을사사화를 운 좋게 비켜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김취문의 관직 생활은 그 이후 순탄하지 않았고, 항상 외직과 어려움을 전전해야 했다. 그것도 심각한 흉년으로 도적 떼가 들끓는, 누구도 가지 않는 곳의 목민관(牧民官)으로 발탁되어 소윤과 훈구세력들의 감시를 받았다. 그리고 김취문에게 외직(外職)의 벼슬을 계속적으로 내린다.

김취문은 외직 벼슬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나가지 않는다고 할 경우 정권을 잡고 있던, 소윤과 훈구척신세력들이 무슨 구실을 달아 가문을 풍비박산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에 힘든 외직 벼슬을 갈 수밖에 없었다.

 

인종의 죽음은 나라의 큰 불행뿐만 아니라, 신진사림에게는 더 큰 불행이었다. 송희규는 김취성의 처남이 된다. 을사사화를 강하게 비판했던 송희규는 1547년(명종 2년)에 일어난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전라도 고산으로 유배를 간다. 그리고 김취성을 학문과 인품을 알아주며, 조정에 김취성을 천거했던 당대의 석학으로 신진사림의 대표했던 이언적마저 유배를 가서 죽는다.


그리고 송당학파의 일원이었던, 안명세는 이기·정순붕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현신(賢臣)들을 숙청하자, 그 부당함에 대한 것을 시정기(時政記)에 작성한다. 결국 이 시정기가 문제가 되었다. 안명세의 시정기의 내용은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尹任) 등 3대신을 죽인 것은 잘 못된 것이라 지적한다.


이 시정기에는 이기·정순붕 등이 무고한 많은 선비들을 처형한 사실들과 사화의 찬반논쟁 했던 선비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1548년(명종 3년)안명세와 함께 사관(史官)으로 있던 한지원(韓智源)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정순붕에게 밀고함으로써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다가 죽는다. 


그리고 김취성의 제자였던 강경선·강유선 형제는, 1545년 인종이 즉위하자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신원과 관작을 복원할 것을 인종에게 호소하여 관철시키자, 당시 훈구파 세력들은 이들을 주목하고 요주의 인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1549년 (명종 4년) 이홍남이, 동생 이홍윤이 모반을 도모한다는 고변하자, 이에 강경선·강유선 형제가 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반역죄로 잡아들여 고문을 하던 도중 강경선·강유선 형제가 죽는다.

 

이러한 소식들은 아버지 김광좌의 3년 상을 치르고 있던, 김취성에게 심각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수반하게 만들었다. 3년 상이 끝났지만, 김취성은 1547년 겨울 병이 회복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김취성은 자리에 누워 4년이라는 시간 동안 투병하다가, 안타깝게도 1550년(명종 5년) 10월 13일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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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취성과 선산김씨 5형제의 아버지 참판공 김광좌의 묘소>

 

1545년 김취성의 아버지 김광좌가 세상을 떠나자, 김취성은 아버지 묘소 자리를 보기 위해 지관(地官)과 함께 터를 보고 있었다. 묘소 자리를 보던 지관이 “이쪽으로 하면 큰집이 잘 되고, 저쪽으로 하면 작은 집인 동생들이 잘 됩니다.”했다. 


김취성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동생들이 잘 되는 방향으로 아버지 묘소의 방향을 잡으라고, 지관에게 이야기한다. 동행한 지관이 평생 묘소자리를 보러 다녔지만, 이런 분은 처음 본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김취성은 김씨 가문의 동생들을 아끼고 사랑했다. 이후 사실 동생들의 가문은 500년 동안 자손과 학문이 번성하여 지금까지 내려온다. 


김취성은 굶주리고 병들어, 오갈 때 없는 수많은 병자들에게 의술을 베풀어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 자기 본인보다는 동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 진정한 대학자요, 큰 선비였다. 김취성이야말로 사람이 배우는 이유와 목적을 알고 있었으며, 진정한 학문의 목적을 아는 당대의 큰 도학자(道學者)였으며, 선산이 낳은 자부심의 선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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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아픔과 슬픔을 알았던 진정한 도학자 진락당 김취성의 묘소>


김취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박운은 김취성을 기리는 제문을 짓는데, 그 내용은 “자질이 순수하여 학행으로 세상을 구제했네. 날로 고명(高明)들을 사귀어 표리(表裡)를 깨달았네. 일찍이 낙훈(洛訓: 송당)을 계승하여 넓고 큰 곳으로 돌아갔네. 체용이 혼원(渾圓)하고 동정에 어김이 없었네. 효제가 순성(純誠)하고 후학의 사범(師範)이 되었네. 


임천에 숨어 지냈지만, 명성이 날로 높아졌네. 풍문자(風聞者)는 복종하고, 덕을 본 자들은 기뻐했네. 어버이 치료할 제 몸소 제약(製藥)했고, 남에게 미쳐 천만 사람 생명을 구했네. 무위(無位)로도 은택을 끼쳤으니, 옛날 사람도 짝하기 어려웠네. 자질(子姪)들의 현능, 동생들의 밝음, 인교(仁敎)는 부드럽고 온화하며 원만했네. 덕은 있었지만, 관직이 없었으니, 백성들에게 어찌 복이 있었겠는가?”라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친구 박운은 김취성을 위해 눈물을 쏟아가며 제문을 지었다.


그리고 17세기 영남의 대학자로 일컬어지는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은 진락당 김취성과 선산김씨 가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내 일찍이 일선(一善) 남쪽 마을에 진락당 김선생이 사셨는데, 참다운 말씀을 송당 박선생에게 전수받아 마침내 진유(眞儒)가 되어 도를 지키고 몸을 마쳤다. 일시에 동생들도 모두 명망이 있는 사람이 되었으며, 친족으로 뒤에 태어난 자들 또한 자못 의로운 방법을 안다 하였다.”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진락당 김취성은 선산김씨를 선산 들성마을에 정착시킨 실질적인 계획자였으며, 학문이 현실에 적용될 수 있도록 했던 도학자였던 것이다. 그는 선산김씨 가문을 학문하는 방향으로 이끌었고, 실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선산김씨가 있었다고 하겠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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