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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위기의 시대를 산 “기록의 선비”, 인재 최현(訒齋 崔晛)을 만나다.

이순락기자 0 23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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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 박사, 구미회 이사>

 

인재 최현(訒齋 崔晛, 1563 ~ 1640)은 조선 명종 때에 선산 해평(海平)에서 전주최씨(全州崔氏) 최심(崔深)의 아들로 태어나 인조 때까지 삶을 산 인물이다. 최현은 강원도관찰사와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최현은 죽은 이후 좌찬성(左贊成)에까지 증직된다.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부제학은 실질적으로 조선시대 문관(文官)들이 하고자 했던, 최고의 벼슬이었다. 그 가문이나 집안에 정승판서(政丞判書)가 얼마나 나왔느냐를 그 가문의 위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는, 그 가문에 대제학과 부제학이 얼마나 나왔느냐를 실질적으로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삼사(三司)에 근무하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운 직책으로  이러한 벼슬들을 청요직(淸要職)이라 한다. 그리고 이중에서도 특히 대제학과 부제학의 벼슬을 최고로 인정하여 옥당(玉堂)이라 했다. 이러한 벼슬을 했다는 것은 학문만이 뛰어나서는 절대할 수 없다. 그에 걸 맞는 인품과 덕을 쌓아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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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최현의 문과 병과 급제 교지>


그렇다면 과연 인재 최현은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그의 학문은 어떠했는지, 또 최현은 당면한 시대적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했는지를 알아보고, 되짚어보는 것은 필자로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인재 최현이 태어난 선산 해평리를 가보면 아직까지 전주최씨 가문의 그 옛날 위상을 알 수 있는 고택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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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찬성 인재 최현의 시호 정간(定簡)을 받기 전 교지>


필자는 앞의 칼럼에서 “전주최씨 가문의 역사를 만나다”에서 최현을 언급했고, 생육신(生六臣) 경은 이맹전(耕隱 李孟專)과 두곡 고응척(杜谷 高應陟)에서 짧게나마 최현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최현의 삶을 조명하기에는 역부족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조선시대 가장 큰 사건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최현이 역사적·정치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바라 보았는지를 다시 조명해 보는 것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 최현을 만나보기로 한다.

사실 최현의 관료로서의 업적보다 더 대단한 것은 당시 선산지역의 모든 것을 기록한『일선지』와 한문 소설인『금생이문록(琴生異聞錄)』그리고 국방과 외교에 관계된『관서록』·『조천일록』을 저술했다는 것과 임진왜란 당시 선산의병에 대한 기록들을 유일하게 남겼다는 것이다.


만약 최현의『일선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과거 지역의 역사가 송두리째 기억에 없거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과거 벼슬이 높고 낮음을 떠나 시대를 살아가면서, 훌륭한 저작이나 저술을 남기지 않는 것은, 한낮 벼슬아치로 살았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최현은 당시의 지식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발휘한 인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따라서 외적들이 짓밟고 유린한 조선으로 가보고자 한다. 필자는 조선시대 역사와 정치가 개인적으로, 성립기 → 정착기·번성기 → 암흑기 → 전란기 → 붕당정치 → 세도정치 → 쇄국정치 → 일제강점기로 전개되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최현은 암흑기와 전란기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정치가 안정될 때에도 많은 위인을 역사에 등장하지만, 이것보다는 사람들은 위태롭고 혼란할 때 등장하는 위인에게 이 더 주목하고 열광한다. 위기가 곧 사람을 역사에 등장시키며, 사람은 그 위기를 통하여 기회로 만드는 것이 응전(應戰)의 역사였던 것이다.


최현은 역사적 자료와 기록에 보면 국가존망(國家存亡)의 위기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스스로 해법을 제시한 인물이었다. 이제 바람 앞에 등불과도 같은 조선에서 가장 큰 전쟁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상황 속에서 살았던 최현을 만나러 그의 문학비(文學碑)가 있는 선산 해평 솔밭으로 가보자. 


선산 해평에 전주최씨 입향조(入鄕祖)는 성종 때 비안현감을 지냈던 검재 최수지(儉齋 崔水智)이다. 최수지가 해평에 정착하면서 전주최씨 가문은 이후 번성하게 된다. 최수지의 4대손인 최현이 태어나면서 그야말로 전주최씨 가문은 선산지역에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최현은 8세에 선산의 시조(時調)와『대학(大學)』의 대가였던 두곡 고응척(杜谷 高應陟)을 찾아가 제자가 되어 수학을 하다가, 19세에 안동 퇴계학파의 학통을 잇는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의 제자가 되었다.


최현은 학봉 김성일과 인연으로 김성일의 동생인 남악 김복일(南嶽 金復一)의 딸과 결혼을 한다. 최현은 김성일의 제자가 되어 퇴계학(退溪學)을 공부하는 행운을 얻었으며, 의성김씨(義城金氏) 가문의 사위가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퇴계의 제자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에게도 학문적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다.


이후 40대 후반부터 성주의 대학자이며, 예학(禮學)의 대가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를 찾아 정구의 예학을 배우고 스승으로 모신다. 최현은 당대의 최고의 석학들을 스승으로 모신 보기 드문 인물이다. 


플라톤(Plato)이 스승 소크라테스(Socrates)를 만나지 않았다면 플라톤도 일개 범부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최현은 당대의 석학들이며 훌륭한 인품을 가진 스승들을 만나 공부할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그 때 당시 좋은 스승을 찾아 간다하더라도 아무나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선시대는 스승과 제자가 같은 운명공동체가 되기 때문에 이름난 스승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당시 개인뿐만 아니라 가문에 더없는 영광이었다.


특히 최현의 스승 한강 정구의 예학은 미수 허목(眉叟 許穆)에게 전해지게 되고, 정구의 예학은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호 남인(南人)에게로 이어진다. 그리고 정구의 예학은 실학자이자, 대학자인 성호 이익(星湖 李瀷)에게 이어지게 되었으며,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최현은 젊은 시절 자기보다 9살 많은 인동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던, 영남의 대학자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과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교류를 한다. 최현의 아버지 참찬공(參贊公) 최심(崔深)이 세상을 떠났을 때, 최현은 아버지 묘갈명을 장현광에게 부탁할 정도니, 얼마나 친했겠는가?

장현광이 최심의 묘갈명을 써 준 것을 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보지 않아도 알만 하다고 하겠다. 이것으로 최현은 평소에 장현광을 극진히 모시고 존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현의 삶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은 고응척, 김성일, 장현광, 정구 등이다. 이들은 당대의 대학자들로서 최현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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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장천면 묵어리(일명: 머들)의 인재 최현의 묘소> 

최현은 훌륭한 스승을 두었던 행운아였지만, 반면에 그가 살고 있었던 시대는 조선에서 가장 큰 사건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불행한 시대를 산 인물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최현은 30세의 나이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현의 스승 김성일은 초유사(招諭使)를 맡게 된다. 


초유사란 관군을 동원하는 직책이 아니라, 일반 민간인과 백성을 상대로 전쟁에 참여해 줄 것을 독려하는 직책으로 주로 의병과 관군의 협력관계를 조율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스승 김성일이 초유사를 맡음으로 제자인 최현은 자연히 글 읽는 선비로서 책을 놓고 의병에 참여한다. 


따라서 선산지역 출신으로 과거시험에 급제한 경암 노경임(敬菴 盧景任) 관직에 나가 있다가 고향 선산으로 돌아오자, 최현은 노경임 그리고 선산지역의 건재 박수일(健齋 朴遂一)과 상의하여 의병장에 노경임, 부장에 박수일, 최현은 장서(掌書)에 선임된다.

최현이 맡은 장서는 전쟁 당시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초유사, 순찰사, 도제찰사 등 현직 지휘관들에게 서찰로 연락하여 군사작전회의를 주관하는 직책이었다. 장서를 맡는다는 것은 당시 학문이 높고, 정세를 판단하는 능력이 남달라야 했다.


여기서 한 가지 되짚어 볼 일은 노경임이 나이가 제일 적다. 그리고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은 부장을 맡은 박수일이었다. 의병대장을 뽑을 때 전략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 노경임이 과거에 급제했다고 해서 의병장으로 선출한 것을 보면, 이들은 아직까지 그들에게 닥칠 전쟁의 양상과 개념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글 공부하는 선비가 활과 칼을 들었으니 당시 상황이 어떠했겠는가? 그리고 선산의병장 노경임은 선조가 몽진갈 때 호종하라는 어명을 받고, 노경임은 의병장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한양으로 올라 가버린다. 보지 않아도 선산의병은 오합지졸의 상태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두곡 고응척의 아들 고한운(高翰雲)은 장원급제하여 부안현감을 하고 있었다. 고향 선산에 왜적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들을 이끌고, 선산까지 와서 전쟁에 참여한다. 그리고 선산 인근지역의 의병들을 규합한다.


그러나 금오산성 전투에 참여하다가 장렬히 싸우지만 안타깝게도 전사한다. 고한운이 전사 한 이후 군사적으로 열세뿐만 아니라 내부의 동요와 혼란으로 선산 의병은 지리멸렬하게 되면서 뿔뿔이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선산지역 의병의 실질적인 정세판단은 최현의 담당이었다. 창의(倡義)한 의병의 중심에는 젊은 최현이 있었다. 그러나 의병들은 그 전에 한번 싸워보지 않은 글공부하던 선비와 농사를 짓던 농민이었다. 화승총을 무장한 정규군인 왜군과 대적한 의병들을 보지 않아도 결과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최현의 기록에 보면 의병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지금은 옛날 같지 못해서 기율에 체통이 없고, 위신이 서지 않으며 위로는 구차하게 목숨만 보전하려는 생각만을 하고, 아래는 의구심의 감정만 있어 줄을 지어 진을 쳐도 먼저 물러나 숨을 계획만 하고, 휘하의 깃발이 나아가도 도무지 죽음에 나아갈 뜻이 없다.


적들이 돌격해 오면 빨리 흩어지고 뒤에 달아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비장 이하는 주장의 소재를 알지 못하고, 병기를 버리고 돌아와 죽음을 면한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최현은 임진왜란 한가운데에서 의병들의 행동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과의 싸움은 준비되지 않은 조선으로서는 너무나 힘들고 가혹했으며,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간 전쟁이었으며, 7년간의 전쟁은 실로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전쟁의 와중에서 의병들의 활약은 전쟁을 일으킨 왜적뿐만 아니라,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와 조정대신들에게도 충격과 놀라움을 주게 된다.

 

 경상도 초유사 스승 김성일이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자, 최현 역시 스승을 잃은 슬픔과 함께 희망을 잃고, 고향인 선산 해평으로 돌아와『금생이문록』의 한문(漢文)소설을 쓴다. 이『금생이문록』은 선산의 내놓을 수 있는 학자이자, 선비들이라 할 수 있는 선산출신 유현 10현들과 주인공 금생(琴生)이 꿈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4명의 선생(길재, 김종직, 정붕, 박영)과 4명의 선비(김주, 하위지, 이맹전, 김숙자), 여기에 두 처사(박운, 김취성)들이 꿈속에서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의 덕(德)을 찬양하는 내용의 한문(漢文) 허구소설이다. 최현이 소설을 쓰게 되는 원인은 필자는 당시 지식인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 충절을 고취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최현은 또「명월음 용사음(明月吟 龍蛇吟)」이라는 우국충정이 묻어나는 국한문 혼용 시조를 짓는데, 이 시조는 EBS 고등학교 국어교재에 수록 될정도로 임진왜란 당시의 백성들의 아픔을 잘 묘사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 시조 안에서 주인공 용사음은 최현 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몽진길에 오른 임금을 명월(明月)에 빗대어, 달이 찼다가는 기울고, 구름에 가리웠다가는 어느새 모습을 나타내듯 나라의 환란도 머지않아 물러나리라는 의지를 주인공 용사음(龍蛇吟)이 노래하는 시이다.


34세 최현은 당시 모든 군에 대한 전시작전권을 쥐고 있던,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에게 9조목(九條目)의 전시 개혁안을 올리고, 각 지역의 산성(山城)과 지형에 따라 군·현(郡縣)을 합병하고, 정비하여 효율적인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는 개혁안을 제시한다. 


도제찰사 이원익은 최현의 9조목의 편지를 받고, “벼슬하지 않은 야인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장문의 진정서는 극진하여 장려하고 찬탄할만하다.”고 했다. 여기서 이순신이 정치적 위기에 몰렸을 때, 도제찰사 이원익이 그를 구하기 위해 밑그림을 그리고 큰 조력을 한다. 이원익을 이 기회에 한번 살펴보자.


당시 도제찰사는 이원익은 지금으로 말하면, 전시작전권을 행사하는 합참의장 겸 계엄사령관의 위치에 있었다. 당시 도체찰사 이원익은 이순신 장군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목숨을 살려는 주는 역할을 한다.

임진왜란 하면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고 기억에 떠 올릴 것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지만, 이순신 역시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1593년(선조 26)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협상을 하는 와중에, 고니시 유카나가(小西行長)의 부하 요시라(要時羅)라는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언제쯤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조선수군을 이용해 가토 기요마사를 생포하라”는 거짓정보를 김응서에게 전달한다. 


이에 김응서는 곧 바로 조정에 이 거짓정보를 올리자, 선조와 조정은 이것이 기회다 싶어 이순신에게 바다를 건너오는 가토 기요마사를 생포하라고 명령한다. 고니시 유카나가는 개인적으로 가토 기요마사와 철천지원수였다. 고니시 유카나가는 조선을 이용해서 가토 기요마사를 제거 하는 한편, 조선 수군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일거양득을 노리는 거짓 정보를 조선 조정에 전달한 것이다.


이순신은 고니시 유카나가가 조선에 흘린 정보가 거짓이며, 일본의 계략임을 알았지만 부득이 출동한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조선에 온지 오래되었다. 전쟁 중에도 조정 내에 서인과 남인의 싸움은 치열했다.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바로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었기 때문에, 서인(西人)들인 김응남(金應南)·윤두수(尹斗壽)과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 등이 이것을 기회로 이순신을 문제삼아 남인(南人)인 영의정 류성룡과 남인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싶어하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그래서 서인들은 집중적으로 이순신과 류성룡에게 대한 불만을 성토한다.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평소에 이순신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이 많았던 것을 이것을 기회로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고, 한편으로 조정대신들에게 로비작전도 펼친다.

당시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연전연승하고 있는 이순신에게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한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백성들에게 이미 이순신이 영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내심 이순신이 연전연승에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있었다. 그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이순신은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서 왜적과 싸워 계속적 승리를 하니, 속으로 몹시 불쾌했던 것이다. 백성들의 관심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보다는 열악한 환경에서 싸우는 이순신에게 열광하고 있었다.


영웅이 된 이순신에 자조심이 상할대로 상한 선조는 폭발한다. 선조의 이러한 심리와 전쟁 상황도 모르면서 원균의 상소만 믿고,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늦게 했다는 죄목으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시키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1개월 동안 혹독한 조사와 심문을 받는다. 


류성룡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 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라고 선조에게 간절하게 청했지만, 이미 이순신에게 마음이 떠난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들여 국문할 것을 명령한다. 조선은 전쟁 중에 수군 최고지휘관에게 도움을 줘도 모자라는 판에 책임자를 감옥 가두고 심문하는 어쳐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남 지방의 전시상황을 파악하러 온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이순신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치계(馳啓)를 올린다. 또 우의정 약포 정탁(藥圃 鄭琢)이 “이순신이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만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라고 적극적으로 이순신을 변호하고 나왔다.


또한 이조참판 이정형(李廷馨)은 “원균을 통제사로 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으니, 경솔히 하지 말고 자세히 살펴서 해야 합니다”라고 정탁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순신을 변호한다.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1개월 동안 혹독한 조사와 신문을 받는다. 민심은 불안해지기 시작하며, 백성들은 여전히 이순신 편이었다. 1차 신문과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순신을 구명운동을 벌이는 사람이 바로 정탁이었다. 우의정 정탁은 이원익의 계획과 밑그림에 따라 움직이는 유일한 조정내에 대신이었다.


전시상황을 총괄하는 당시 합참의장 겸 계엄사령관이 이원익이었다. 이순신의 신문과 조사를 총괄하는 사람은 당연히 도체찰사를 맡고 있던 오리대감으로 유명한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이다. 그래서 이순신을 살리느냐, 죽이느냐를 결정은 이원익의 조사와 결정에 달렸던 것이다.

기록에 보면 선조는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빨리 이순신에 대한 조사와 결과를 가져오라고 불만을 전한다. 이원익은 선조의 다그침에 빨리 결과를 내놓아야 했지만, 이원익은 이순신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끌며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해줄 사람을 찾는데, 그가 바로 약포 정탁이었던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도체찰사 이원익은 이순신을 살리기 위해 몰래 정탁에게 이순신 변호와 구명운동을 부탁한 것이다. 이순신을 위해 감히 무서워서 아무도 나서지 않는데, 이원익의 부탁을 받은 정탁이 용감하게 선조에게 이순신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호하면서 조정의 분위기는 변하기 시작한다. 이원익과 정탁이 펼친 이순신구명작전은 죽음의 문턱까기 같던 이순신을 살릴 수 있었다.

결국 이순신은 살아나 백의종군하여 조선수군을 다시 이끌게 되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나라를 구했지만, 도체찰사 이원익은 이순신을 구했다. 이순신이 살아서 제기할 수 있었던 숨은 스토리(story)가 있었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는 항상 영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자기 주변에 어떠한 사람이 있느냐,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도와주느냐를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는 지인을 사귀고, 교류해야 한다. 이순신은 역사상 가장 잘 싸운 사람이지만, 친구를 가장 잘 사귄 사람이다.


1597년(선조 30년) 명나라와 일본의 협상이 결렬되자, 왜적들이 다시 침략하는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최현은 선산지역의 유림들과 선비들을 이끌고 있던 위치에 있는 장현광·박수일과 함께 피난대책을 논의하면서 앞으로의 방향을 선택하고자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를 찾아간다.


그리고 최현은 모두들 제몸 안위를 위해, 피신하고 도망가기 급급했는데, 나라를 구하겠다는 열정과 의지에 찬 젊은 선비 최현은, 급하게 홍의장군 곽재우를 찾아간다. 당시 곽재우는 영남지방에서 의병들의 정신적·실질적인 대장역할을 하고 있었다. 곽재우를 찾아 간 최현은 의병이 나가야 할 방향과 앞으로 적의 공격이 어떠한 양상이 될 것이지 그리고 이에 대한 대비에 대해 심도있는 군사작전회의를 한다. 


인진왜란이 종결되고, 선조와 조정은 곽재우에게 벼슬을 내리지만, 곽재우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그리고 목숨 받쳐 싸웠던 의병장들은 대부분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다. 선조는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을 이미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죽였기 때문에 의병장들은 선조와 조정을 믿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의병장들이 벼슬을 내려도 나가지 않은 것은 선조와 조정대신들을 신뢰할 수 없다는 하나의 증거로 봐야 한다.


최현은 바람 앞의 등불인 나라를 위해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면으로 노력한다. 본인의 안위도 잊은 채 위기 상황에서도 최현의 자발적 사회 참여의식은 국가와 사회가 당면한 시대적 문제에 과감히 뛰어들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철학과 정신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최현은 임진왜란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으며, 전쟁의 실상과 참담함과 비참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전쟁의 충격은 최현을 성리학적 사고방식 안에 국가의 제도의 실용적·실질적·효과적인 것들에 대한 개선과 개혁의 사고가 싹트기 시작하고, 이러한 사고는 이후 최현의 삶에 녹아든다.

특히나 최현이 벼슬길에 출사를 한 이후 군사적인 부분에서 당시의 관료들보다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를 가지는 행동과 모습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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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최현이 밀양 박연정 정자에 쓴 현판>


전쟁을 경험한 최현은 1606년(선조 39년), 44세에 늦은 나이로 과거에 문과에 급제한다. 최현은 나라가 혼란한 전란의 와중에서 과거시험도 볼 수 없었겠지만, 전쟁은 최현의 황금 같은 젊음을 빼앗아 가버렸다. 그래서 임진왜란으로 전국토가 짓밟히고 유린당한 상황에서 최현은 44세라는 늦은 나이에 과거시험을 볼 수밖에 없었다. 


벼슬길에 나간 최현은 관직생활로 바쁜 와중에도 본인이 어렸을 때, 스승인 두곡 고응척의 유집을 저술하는데, 그것이 바로『두곡언행록(杜谷言行錄)』이다. 제자로서 스승에 대한 감사함과 예의를 다하여 언행록을 저술한다.  


이후 최현은 벼슬길에 출사한 이후 조정의 요직을 두루 맡았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평안도 암행어사로, 강원도 관찰사로, 선비들이 정말 해보고 싶어 했던 청요직(淸要職)인 대사성·대사간·부제학 등 관직을 일일이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두루 섭렵한다. 이러한 승승장구 하던 최현에게도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친다.


선조가 죽고, 북인(北人)들은 광해군(光海君)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 형제들을 숙청하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한다. 이러한 숙청의 과정을 거쳐 북인들은 결국 광해군을 왕위에 올린다. 

광해군은 실제로 임진왜란을 잘 수습하고 외교에 있어 실리적으로 잘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광해군을 옹립한 대북파의 너무나 지나친 숙청과 폭정이 결국 인조반정을 불러오게 되었다.

북인들과 광해군은 그들의 정통성과 왕권강화를 위해 당시 수도인 한양을 버리고, 새로운 수도를 옮기자는 천도론(遷都論)을 제안하지만, 많은 관료들이 반대에 부딪쳐 천도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중심에 최현이 있었다.


북인의 실세인 이이첨(李爾瞻)은 본인들이 정국을 운영하는데 있어 협조적이지 않은 인물들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거나 숙청한다. 이 과정에 최현이 있었고, 최현은 고향으로 돌아와 은둔의 시간을 보낸다.


최현은 선산으로 낙향하던 과정에서, 안동 금계(金雞)에 들러 스승 김성일에 대한『학봉선생언행록』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선산으로 돌아와 학봉 김성일의 유집을 교정하는 한편, 한강 정구에게 김성일에 대한 행장을 부탁한다. 고향으로 돌아 온 최현은 지역의 대학자들과 학문을 논하면서 당시 선산의 역사·인물·문화·지리·풍속 등이 상세히 기록된『일선지(一善志)』를 저술하고 완성한다.


최현이 저술한『일선지』는 당시의 모든 것을 기록한 일종의 백과사전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일선지』 귀중한 자료로서 오늘날까지 전해져 많은 연구자들과 사람들에게 그 옛날의 모습과 시대상을 알게 하는 저술로서 그 가치가 상당히 높다고 하겠다.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당시 학자로서 관료로서 첫 번째 임무이다. 이러한『일선지』를 최현이 저술했다는 것은 그가 위치한 지위의 역할과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다.


1623년(인조 원년)에 북인(北人)의 반대세력인 서인(西人)세력인 이서(李曙)·이귀(李貴)·김유(金瑬) 등이 중심이 되어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綾陽君 李倧)을 왕위에 앉히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다.


선산에 낙향해 은둔의 생활을 하고 있던 최현에게 다시 조정에 벼슬을 내리자, 61세의 최현은 다시 조정에 출사하여 적극적인 현실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사실 지금은 61세라면 노인이라고 할 수 없지만, 당시로서는 61세는 환갑을 넘은 상노인이다. 늦은 나이에 다시 출사한 최현은 종횡무진 상당한 요직을 두루 거치며 활동하게 된다. 대사간·대사성·부제학 등도 인조 때 제수 받은 벼슬이다. 


임진왜란을 끝낸 조선은 다시 큰 전쟁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북쪽 오랑캐라고 치부한 만주족이 각 부족을 통일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후금(後金)인 청(淸)나라는 1627 (인조5년)에 조선을 침략하는데, 이 전쟁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이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있었을 때는 균형적인 외교정책으로 후금과의 마찰이 없었다. 인조가 즉위하자 집권세력은 서인이었다. 서인들은 금나라를 배척하는 명나라를 존중하고 금나라를 배척한다는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취하자 이에 불만과 위기를 느낀 금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다. 


이때 당시 최현은 강원도관찰사를 하고 있었다. 금나라가 침공하자 한강방어를 위한 의병들이 모으기 위해 노력한다. 이후 조선과 금나라는 정묘조약을 맺고, 금나라는 인질로 원창군(原昌君)을 데리고, 철수를 하면서 조선은 다시 안정을 되찾지만, 후금과의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더 큰 전쟁으로 이어진다. 


1628(인조8년)에 강원도 횡성에서 이인거(李仁居) 역모사건이 일어났다는 원주목사의 고변이 있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빨리 보고하지 않은 수상한 행동과 책임을 물어 66세의 강원도관찰사 최현은 투옥 된다. 당시 인조반정은 왕만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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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최현의 강원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임명 교지>


정권을 잡은 서인은 조정안에서 남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역모사건이 터지자, 이를 계기로 남인세력을 축출하려는 속셈이 있었는데, 때마침 역모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서인은 최현을 희생양으로 삼아 남인을 더더욱 궁지로 몰고 간다. 


이 세력 싸움에서 서인이 최현을 희생양으로 삼고 승리함으로서, 남인들은 대거 정계에서 축출되어진다. 그래서 회령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다행히 인조는 최현의  학문과 인품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조이후부터는 임금이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했다.

바야흐로 조선은 선조이후부터 신하가 왕을 선택하는 “택군(擇君)”의 시대가 도래했다. 임금은 신하의 문치를 보며, 그들끼리 경쟁을 시키며, 어느 순간에는 힘을 몰아줬다가, 어느 순간에는 힘을 빼는 용인술을 자주 사용한다.


인조는 최현이 역모에 가담하고 역모를 일으킬만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인조는 최현을 탄핵하는 신하들의 눈치도 살펴야 했다. 기록에 보면 임금을 교육하는 경연(經筵) 자리에서 인조를 괴롭힐 정도로 강론했다.

임금을 공부시키는 경연자리에서 왕을 괴롭힐 정도면 충신이 아니면 왕을 괴롭힐 수 없다. 임금이었던 인조 역시 최현의 충성심을 알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런 이유에선지 유배를 간 최현은 9개월 만에 유배에서 풀려난다.


최현과 장현광은 무척 친하고, 서로가 선후배로 존경하는 사이였다. 대학자 장현광에 대한 인조의 애정과 관심은 각별했다. 그래서 인조는 장현광에게 죽을 때까지 벼슬을 내리지만, 벼슬을 내릴 때마다 장현광은 출사를 하지 않는다. 기록에 보면 인조의 장현광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장현광과 최현의 관계를 알게 되었던지, 아니면 장현광이 인조에게 비공식 통로를 통해 최현의 구명운동을 벌였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아무튼 인조는 유배를 간 최현을 9개월 만에 특사로 풀어준다. 


최현은 얼마 있지 않아, 1630(인조8년)에 다시 충청도 옥천에서 역모사건에 연루된다. 최현은 이 역모사건의 무고(誣告)를 받고 투옥되었다가 특사로 풀려난다. 이로써 최현은 벼슬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고향 선산으로 낙향하여 은둔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70이 넘은 나이에 그를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 바로 조선에서 일어난 큰 전쟁 중 하나인 병자호란이다. 전쟁은 죽음의 문턱에 선 늙은 충신이자, 선비인 최현을 다시 세상밖으로 나오게 한다.


74세의 최현은 의병이 창의할 것을 알리고, 직접 군대를 조직하여 출정을 한다. 그러나 1년 후 1637(인조15년),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45일 만에 항복을 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서는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이라 부르는 인조의 청나라에 대한 항복이다.

이 과정에서 남한산성 안에서 청나라와 화친을 맺자는 주화론(主和論)과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론(主戰論)이 팽팽히 맞섰지만, 결국 인조는 화친을 하자는 주화론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청나라에 항복을 하는 것이다.

인조는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皇太極) 앞에 나가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를 올린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리는 왕으로서는 너무나 굴욕적인 것이었다.  


이 때 75세의 최현은 아들이 사망하고, 존경하던 선배였던 여헌 장현광마저 세상을 떠나자, 늙은 최현은 마음과 육체적 병을 얻게 되었다. 1640(인조18년) 78세의 최현은 후손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김천 봉계에서 세상을 떠난다. 


최현은 한마디로 “기록의 선비”였다. 그래서 그가 저술한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은 선산의 많은 것들에 대한 기록으로 남긴『일선지』를 저술했다는 것과 선산지역의 10명의 유현(儒賢)들을 주인공 금생(琴生)을 통하여 꿈속에서 만나보는 한문소설『금생이문록』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1608(선조 41년) 선조가 2월에 죽는다. 따라서 광해군이 즉위하고, 왕위 계승문제로 명나라에 승인을 받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최현은 8월 동지사 서장관(冬至使 書狀官)에 임명되어 사신의 자격으로 명나라를 가게 된다. 


서장관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일행의 어사(御史)의 역할을 했다. 당시 중국에 파견되던 사신들의 핵심 구성원은 정사(正使)·부사(副使)·서장관으로 구성되고,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인정받은 사람만이 선발될 수가 있었다.

이들은 지식뿐만 아니라 인품 또한 탁월해야 가능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왕이 인정하지 않으면 선발될 수가 없었다. 사신단의 정사·부사·서장관으로 발탁되었다는 것은 조선시대에 크나큰 영광이었고, 큰 잘 못이 없는 한 출세 길의 보증 수표였다.  


명나라를 가던 사신단의 서장관을 맡은 최현은 산문체 연행록인『조천일록(朝天日錄)』을 저술한다. 말하자면 조선후기 실학파의 문을 열었던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의『열하일기(熱河日記)』와 같은 성격의 것이다. 


명나라를 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들과 당시 중국의 사람들의 행태 등 많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서 그 때에 사신 자격으로 갔는데도 불구하고, 특히 명나라에서 인삼과 은(銀)을 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사행단에 대한 중국의 횡포는 상상이상이었다. 

중국의 이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일이 진척과 진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조천일록』은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따라서 학계에서 당시의 명나라와의 관계를 연구하는데『조천일록』은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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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이 명나라 서장관으로 돌아 온 후 쓴 조천일록>


그런데 인재는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갔다 와서 고초도 겪는다. 명나라는 하루 속히 광해군을 임금으로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해군 때 정권을 잡은 북인 들 중에서 대북(大北)파들이 항상 최현을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후 최현은 영창대군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다가 혐의가 풀리자 고향으로 낙향한다.


하지만 전쟁의 참상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최현은 1610(광해군 2년)에 평안도 암행어사의 적임자로 임명된다. 암행어사의 목적은 서북지방의 국방과 민생문제를 파악하고 살피기 위한 것이었다. 최현은 암행어사라도 신분으로 국가의 국방에 대해 많은 관심과 심혈을 기울인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특히 최현은 국경에 맞닿아 있는 군대의 조직·성곽·지형과 요충지 등을 기록한 지도를 그려『관서록(關西錄)』을 저술하는데, 실제『관서록』은 관서지방의 군사적 자료집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국경을 넘어 의주와 강계를 매년 오가는 사행단(使行團)이 민생에 끼치는 폐단을 개선하고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보고서를 조정에 올린다.


인재 최현은 조선의 암흑기에 태어나 전쟁시대를 살은 인물이다. 어찌 보면 전란을 겪는 백성들의 삶을 직접 보고, 전쟁을 체험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시대가 직면한 문제에 있어서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한 선비였으며 관료였다. 


그리고 그 사회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최현은 실현하고자 했으며, 현실의 폐단을 개선하고 개혁하고자 몸부림쳤던 “기록의 선비” 였다고 평가 할 수 있겠다. 학계에서 인재 최현의『관서록』과『조천일록』을 하루 빨리 번역하여 대중들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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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해평면에 있는 인재 최현의 문학비>

 

"기록의 선비", 최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전란을 몸으로 겪은 사람이었다. 최현은 젊은 시절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벼슬길에 나가서는 많은 위기들에 봉착했지만, 평소 그의 단아하고 검소한 인품과 학문은 그러한 위기에서 매번 그를 구했다. 

최현은 이러한 삶의 궤적 속에서 그는 어느 누구보다 많은 저술활동을 했다. 그는 한마디로 기록의 선비이며, 기록의 대가였다. 혼란한 상황에서도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다한 최현은 진정한 선비였던 것이다. 필자는 수백년의 시공간을 초월하여 최현을 만나면서, 그의 위대함을 알게 되어 다시한번 개인적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는 중요한 기회였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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