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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칼럼

【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탄금대에서 신립과 함께 용감하게 싸운 김여물(金汝岉) 장군!

이순락기자 0 29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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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前구미회 부회장, 새로넷방송 시청자위원>


1592년(선조 25)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왜적들은 칼·창·활로 무장한 조선군을 서양에서 도입한 현대식 화승총으로 공격하여 일방적으로 승리를 하면서 왜적들은 3개의 길로 나누어 파죽지세로 선조가 머물고 있는 한양으로 진격하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조정에서는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하고, 북상 중인 왜적을 격퇴하라는 명을 내린다.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며, 가장 중요한 전략상 요충지는 당시로서는 상주와 문경새재였다. 이 군사상 요충지로 일본의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기병(騎兵)부대는 빠르게 진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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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임란북천전적지와 충렬사 입구의 모습>


늦게 상주에 도착한 순변사 이일은 제대로 전투준비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의 급습을 받아  상주 북천(北泉)에서 대패를 한다. 조선의 의병과 관군은 왜적의 수적 우위와 우세한 화력 앞에 추풍낙엽처럼 무너진다. 


전투 중 순변사 이일은 제대로 싸워보지 않고, 신립(申砬)이 있는 충주로 도망친다. 지휘관이 전투 중 도망쳐 버리니, 남은 상주 북천의 의병과 관군은 어떻게 되었는지 보지 않아도 상상이 될 것이다. 사실 선조는 순변사 이일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선조는 신립(申砬)을 최고 군사지휘관 직책인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한다. 상주 북천 전투에서 도망친 순변사 이일은 충주에 있는 신립에게 합류한다. 신립의 종사관(從事官)은 김여물(金汝岉)이었다. 다급한 신립은 순변사 이일, 종사관 김여물과 군사전략 회의를 열었다.


상주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친 이일은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군사와 백성으로는 적을 대항하기가 쉽지 않다는 보고를 신립에게 보고한다. 군사적 열세에 있는 조선으로서는 누가 봐도 문경새재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조령(鳥嶺)에서 왜적을 막는 것이 유리하고 용이하다고 알고 있었지만, 신립은 이를 무시한다. 


신립은 참모들과 문경새재 조령을 둘러 본 이후, 군사 최고 책임자인 삼도도순변사 신립장군은 충주 달천의 탄금대에서 왜적과 싸울 것을 결정한다.

김여물은 “아니 될 말입니다. 적은 수의 병력으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오로지 지형이 험한 이곳 조령뿐입니다. 아니면 평지보다 높은 언덕을 이용해 역습해야 합니다.” 신립의 의견에 반대의사를 피력한다.

김여물은 문경새재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매복 작전으로 적은 수의 병력으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수 있는 문경새재 조령에서 전투를 벌이자고 주장을 펼쳤지만, 묵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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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요충지인 문경새재 조령의 입구 모습>

 

이에 신립은 “이곳 조령에서는 기병을 쓸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마땅히 평원에서 일전해야 한다.” 신립은 왜적보다 우리가 유리한 것은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騎兵)이 있기 때문에, 기병은 험준한 문경새재 조령에서 제대로 싸울 수가 없으니, 평지인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기병으로 작전을 펼치면 된다고 참모들의 의견을 묵살한다. 신립의 사고와 판단은 완전한 작전의 실패였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화승총은 사정거리가 (120~140)m, 조선 활의 사정거리는 200m로 기병과 활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작전을 펼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며, 군사최고 책임자 신립은 참모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쳐서 왜적과 싸우기로 결정한다.


당시의 조선 기병용 말인 전투마(戰鬪馬)는 제주도 조랑말이 아닌 대륙에서 종마를 들여와서 지속적인 종자 개량을 한 군사용 말들이었다. 1583년(선조 16)에 신립은 북방에서 여진족 니탕개(尼湯介)의 난을 기병작전으로 평정한 전쟁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탄금대의 기병작전도 믿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은 그 이전 어디에도 없었던 총이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의 군사적 대응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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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장군과 김여물이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한 충주 탄금대>

 

신립이 이 탄금대 전투에서 간과한 것은, 4월에 겨울에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땅에 물이 많고 질퍽하여 말을 활용한 기병작전에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전투 장소가 탄금대로 결정되자 종사관 김여물은 전쟁에 패할 것을 직감하고, 아들 김류(金瑬)에게 유언의 편지를 쓴다. 


김여물이 아들 김류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도(三道)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나 응하는 자가 없구나. 아무런 도움이 없으니 안타깝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야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으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될 뿐이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나는 여기서 죽을 터이니 모든 가족은 행재소(궁을 떠난 임금이 머무르는 곳)로 사서 도와라. 결코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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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물 장군의 친필 글씨>
 

4월 하순 왜적은 문경새재 조령을 어려움이 통과하면서 군대를 나누어 빠르게 충주를 포위한다. 정찰부대가 왜적에게 고립되고 정보를 전달받지 못하자 신립과 김여물은 작전이 완전히 실패한 것을 알고, 탄금대에서 최후를 결심하고 장렬히 전투를 벌이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삼도도순변사 신립이 믿었던 기병은 예상과 달리 제 역할을 못하면서 탄금대 전투는 완전히 패배한다. 신립과 김여물은 왜적에게 잡혀 치욕적인 수모를 겪느니 자결을 선택한다.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했다는 것을 직감한 신립은 탄금대 강물에 먼저 투신한다. 이후 신립이 투신하는 것을 지켜 본 김여물 또한 탄금대 강물로 뛰어들어 자결을 한다. 처참한 패배였으며, 조선은 육지의 주력부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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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에 있는 시신은 없는 김여물 장군의 묘소>
 

한양에서 신립의 승전보만을 기다리던, 선조는 탄금대 전투를 보고받고 “신립마저 무너졌느냐?”하며 몹시 당황하여 한양의 백성들을 버리고 서둘러 몽진 길에 오른다. 


여기서 신립의 일급 참모 종사관 김여물은 무관(武官)이 아니고 문신(文臣)이었다. 그리고 우리 지역 선산출신이다. 김여물은 문신으로도 엘리트였으며, 당시 병서(兵書)에 통달했기 때문에 많은 병법과 지략을 가진 인물로 조정에서 항상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김여물은 개인적으로 궁마술(弓馬術)과 무술(武術)에 아주 능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무(文武)를 겸비한 김여물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풍전등화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는 항상 위인과 인물을 만들어 낸다. 그 능력이 아무리 출중했더라도 위기 아니면, 그의 진정한 가치와 능력을 제대로 평가 받을 수가 없는 것이 역사적 순리이자, 이치이다. 


조선 최고의 위기였던 임진왜란에서 개인의 능력과 가치를 발휘한 김여물을 만나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김여물은 선산 영봉리(迎鳳里)에서 종 6품의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김훈(金壎)의 아들로 태어난다. 영봉리(迎鳳里)는 지금 선산읍 이문리 일대이다. 


영봉리는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만 15명이나 배출되었으며, 이 중 장원급제가 7명, 부장원 2명이 나와 장원방(壯元坊)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인재가 많이 나왔던 곳이다. 영봉리(迎鳳里, 지금 선산읍 이문리 일대) 지명의 뜻은 “봉황을 맞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선산은 조선시대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李重煥)은 선산을 가리켜 “조선 인재 반은 영남(嶺南)에서 나고, 영남 인재 반은 선산(善山)에서 났다.”는 “반재영남, 영남인재 반재선산(朝鮮人才 半在嶺南, 嶺南人才 半在善山)” 글을 남길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곳이다.


선산은 조선시대 인재의 산실, 즉 “인재를 배양하는 인규베이터(incubator)”였다. 이 주장에 역사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인재가 출연하여 조선시대와 아울러 근대에서 현대까지 국가의 동량이 되는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김여물의 아버지 김훈이 선산에 정착하게 된 것은 부사(府使) 벼슬을 한 망장촌(網障村, 지금의 고아읍 대망리) 강의(康顗)의 사위가 되면서이다. 이후 김훈은 선산읍의 영봉리로 이사하여 김여물을 낳았다. 김여물의 본관은 순천김씨(順天金氏)로 호는 피구자(披裘子) 또는 외암(畏菴)으로, 1577년(선조 10)에 15명을 선발하는 알성시 갑과에 장원을 급제를 하여 벼슬길에 나간다.


장원급제한 김여물은 조정의 중요 요직을 거치며, 소위 요즘으로 말해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1591년(선조 24) 9월에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있을 때, 승승장구하던 김여물도 인생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이때는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나뉘어져, 극렬하게 대립하던 붕당정치의 시대였다.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을 비롯한 동인들이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역모를 꾀한다는 기축옥사(己丑獄事)가 벌어져 서인들은 정여립과 연루된 동인들을 대거 숙청시키면서 동인들이 완전히 몰락한다. 원래 정여립은 서인에서 촉망받던 인재였는데, 서인들 특히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의 불화로 동인으로 그의 정치노선을 바꿔버린다.

정여립이 중심이 된 대동계와 동인들이 역모를 꾀했다는 기축옥사로 동인들이 몰락하자, 조정의 권력은 정철(鄭澈)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들이 중심이 되어 철저하게 동인들을 축출 했다. 그러나 정국을 주도했던 정철과 서인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정철이 광해군(光海君)을 왕세자로 책봉하자는 의견을 선조에게 올리자, 선조는 왕위에 불안감을 느끼고, 서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는 한편 정철을 유배 보낸다. 정철과 서인은 세자 책봉 문제로 선조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이었다.


문제를 일으킨 정철을 따르던 김여물은 곧 의금부에 잡혀 오고, 의주목사에서 파직된다. 그러나 다음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류성룡(柳成龍)을 요즘으로 말하면 합찹의장 겸 계엄사령관인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한다. 도체찰사 류성룡은 오래 전부터 김여물의 능력을 알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김여물을 풀어주고, 자기 곁에 두고 막중한 임무를 맡기고자 했다.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된 신립(申砬), 또한 문무를 겸비한 김여물의 능력을 알아보고 류성룡에게 “김여물의 재능과 용기가 뛰어나고 그 성정이 충의로우니, 저의 종사관으로 임명해주소서.” 신립은 김여물을 자기 휘하에 두고 쓰겠다고 간곡하게 부탁을 한다. 


따라서 류성룡은 김여물을 신립의 종사관으로 허락 하면서 김여물은 신립의 종사관이 되어 탄금대 전투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신립의 뒤를 따라 강물로 뛰어들어 자결한다. 김여물에 얽힌 기막힌 전설이 있다.

김여물이 17세에 진사시험을 합격하고 한양에 있을 때 갑작스럽게 도무지 알지 못하는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웠다. 한마디로 의원과 백약이 무효였다. 김여물은 3대 독자로 부인과 결혼하여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젊은 부인과는 아직 자식이 없는 상태였으며, 김여물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집안은 초상집 분위기보다 대가 끊어지는 지경이라며 모두들 하늘만 원망하며 서로가 죽어야 한다며 여인들의 곡소리가 길을 가던 사람이 들을 정도로 끊이지 않았다.


김여물을 살릴 방법만 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는 자기들이 대신 죽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여인들은 마지막 선택을 한다. 용한 점쟁이를 부르는 것이었다. 홍판수는 맹인 점쟁이로 당대 최고의 점쟁이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김여물 집에 온 홍판수는 산통(算筒)을 흔들고, 혼자 한참을 중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 댁 주인의 증조부 되시는 분이 형조당상의 벼슬을 할 때, 술에 만취하여 그만 분노를 참지 못하고, 증조부를 보좌하던 서리(書吏)와 사령(司令)을 때려죽인 일이 있습니다. 서리도 불쌍하게 죽었거니와 사령은 오늘날 이 집안처럼, 삼대독자의 몸으로 자식도 없이 젊은 몸으로 한 집안에 사대과부를 남겨놓고, 증조부의 술주정에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그 원혼들이 염라대왕에 호소하여 그 보복으로 이 댁의 삼대독자를 잡아가는 것이니, 막지 못할 운명이옵니다.”


이 말을 들은 증조모가 홍판수의 소매를 붙잡으며, “부부일체이니 남편의 죄를 내가 넘겨받아 죽어서 원혼에게 사죄할 터이니, 그리하면 우리 증손이 혹시 살길이 있을는지 다시 점을 쳐 주시오.”했다. 증조모, 할머니, 어머니, 부인이 동시에 홍판수에게 매달려 서로 죽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홍판수는 다시 산통을 잡고 흔들더니, 몸을 벌벌 떨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주인 양반을 살려낼 방법이 있으나, 소인은 원귀의 노여움을 얻어 죽을 것입니다.” 홍판수는 “이것 역시 내 운명이니, 소인이 귀댁에 적선을 할 것이니, 훗날 소인의 아들이나 후손을 잘 보살펴 주십시오.” 


말을 마치고 홍판수는 다시 점을 치더니 말을 했다. “죽은 원귀를 막으려면 조상대대로 인덕(仁德)을 쌓았고 그 기개와 용기가 한 나라를 움직일만한 명문가의 아들이면, 원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그런 인물은 원귀라도 함부로 범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 하루만 잘 넘기면 주인 양반과 그 자손들은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홍판수는 “한양 필운대 밑에 사는 우참찬을 지낸 이몽량 대감의 아들 이항복(李恒福) 같은 인물이면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니, 김여물의 증조모와 조모는 손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이항복의 집으로 찾아가 모든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살려달라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부탁한다. 


이야기를 들은 이항복의 어머니 최씨 부인과 이항복은 손자를 살리기 위해 찾아 온 김여물의 증조모와 조모에게 청을 들어 주기로 하고 김여물의 집으로 가서 이항복은 김여물을 껴안고, 그날 밤을 보내는데 한밤 중 자시(子時)가 되자, 홍판수가 말한 것처럼 원귀들이 나타나 김여물을 데리고 가려하는데, 이항복이 원귀들을 보고,내 목숨이 붙어 있는 이상 이 사람의 목숨은 빼앗지 못할 것이라며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이항복이 김여물에게 붙어 있는 이상 원귀들도 닭 울음소리가 들리고, 김여물의 목숨을 빼앗지 못하자, 원귀들은 “필시 이 일은 평동 사는 홍판수 놈의 부질없는 방해로 생긴 일이니, 그놈을 대신 잡아가야겠다! ”며 원귀들이 물러가고 김여물은 온기를 되찾아 살아났다고 한다. 


김여물은 살았지만, 김여물이 살아날 수 있게 알려 준 홍판수는 원귀들이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버렸다. 그래서 김여물의 집안에서 홍판수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준다. 이후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 김여물의 아들 김류는 중심인물 되어 반정을 이끌어 1등 공신이 되며 나중에는 영의정에 까지 오른다.

이것으로 봐서 점쟁이 홍판수의 점이 확실했는 것 같다.  조상대대로 홍판수 집안에 빛이 있던 김류는 홍판수의 아들을 인조반정에 가담하게 하여 그를 정 3품 당상관의 자리까지 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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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에혼 타이코기가 그린 장렬하게 싸우는 김여물장군>


김여물이 충주 탄금대에서 장렬하게 싸웠던 장면을 18세기 일본의 에혼 타이코기(繪本太閤記)가 김여물이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수많은 왜적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 나와 일본군과 싸우는 장면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린 것을 봐서, 김여물은 일본인들에게 비록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용감하게 싸운 장군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엿 볼 수 있겠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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