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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칼럼

【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금오산에서 조선 최고의 청백리,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을 만나다.

이순락기자 0 38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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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前구미회 부회장, 새로넷방송 시청자위원>


금오산저수지를 따라 가다보면, 구미시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백운재(白雲齋)가 나온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머물러 커피 한잔을 마시며, 금오산 저수지를 바라보면서 대화와 낭만을 즐겼다. 그러나 지금은 “구미성리학역사관”으로 재정비되어 달달한 커피를 맛 볼 수는 없지만, 다시 새롭게 정비되어 구미시민의 깨끗한 휴식 공간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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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구미성리학 역사관 제2지구에 새롭게 단장된 백운재>


이 백운재 좌측 편으로 산을 조금 오르다보면 “문간공구암김선생지묘(文簡公久庵金先生之墓)”라는 오래된 비석과 함께 큰 묘소가 나온다. 이 묘소가 500년전 청백리로 살다간 구암 김취문의 무덤이며, 백운재는 구암 김취문의 덕(德)을 기리며, 그를 숭모(崇慕)하기 위해 만든 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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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성리학 역사관 제1지구와 제2지구의 전경>
 

조선시대 450년 동안 청백리를 기록한 『전고대방(典故大方)』을 보면 조선시대 청백리는 모두 218명이다. 그 중 구미(선산)출신 청백리는 야은 길재(冶隱 吉再), 율정 박서생(栗亭 朴瑞生),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 4명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훌륭한 관료를 염리(廉吏), 청리(淸吏)라고 하였으며,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살아 있는 경우에는 “염근리(廉勤吏)”, 죽은 후에는 “청백리”라고 불렀다. 이것은 조선 명종 때부터 살아 있는 자는 염근리라는 명칭을 붙여 선발했고, 죽었으면 청백리로 녹선(錄選)하였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들어가면 청렴캠페인 홍보하는 만화가 나오는데, 그 주인공이 구암 김취문이다. 후세 역사학자들이 조선시대 청백리 10명을 선정하라면 김취문이 들어갈 정도이다. 그가 얼마나 청렴했는가를 이 만화에 나오는 일화를 보면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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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권익위원회 "표주박 숟가락 염근리"로 알려진 김취문의 청렴 홍보만화>


유륜(兪綸)은 대사헌·부제학·형조판서를 역임했던 유여림(兪汝霖)의 아들로 당시 한양에서 이름난 부자였다. 유륜은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이름난 매파를 기용하여 백방으로 사위감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유륜은 김취문에게 김종유(金宗儒)라는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매파를 김취문에게 보내어 혼사의 의중과 살림살이를 파악해보라고 한다. 유륜은 김취문과 오래전부터 사돈의 인연을 맺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매파에게 혼인이 성사되는 방향을 설정했다. 그리고 유륜은 가족들에게 “김취문의 가문이라면 그 덕이 널리 알려져 있으니, 다른 말 하지마라!”  김취문의 집을 다녀온 매파가 유륜에게 김취문의 가난함을 이야기 하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김취문의 집을 찾아가니 그릇도 하나 제대로 된 그릇이 없으며, 표주박에 밥을 받아먹고 있으며, 나무로 만든 숟가락을 사용하고 있으니, 이 혼사는 안 될 것 같다고 매파가 전한다. 매파의 말에 유륜은 무릎을 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역시 김승지는 어질고 청렴결백하다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더니 그것이 사실이구나!” 하며 유륜은 당장 가족들과 딸에게 시집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는 일화는 김취문이 어느 정도 검소하고 청렴했는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조선시대 승정원 정3품의 당상관 동부승지(同副承旨)는 요즘으로 말하면 청와대 비서관급 정도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청백리 김취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선비들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그 시대를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김취문을 만나기전에 당시의 역사적·정치적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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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재 안에 있는 선산김씨 구암 김취문선생 신도비와 임진왜란 때에 전사한 의병장인 그의 아들 김종무의 비> 

 

조선시대 4대 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오랜 세월 동안 대립과 갈등으로 촉발된다.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 14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즉위 1년)의 을사사화(乙巳士禍)가 50년 동안 지속되는 사화 속에서 많은 젊은 사림파 관료와 선비들은 숙청당하는 시대였다. 


여기서 조선시대 일어난 4대 사화는 그 정치적 배경이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과 갈등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이다. 그렇다면 훈구파가 무엇인지, 사림파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조선 시대 역사를 더 명확하게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훈구파와 사림파에 대한 개념 정도는 알아야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건국이후 역성혁명파는 고위관직을 장악하고, 막대한 토지를 수여받아 새로운 지배층으로 자리 잡는다. 이들은 태종 이방원(李芳遠)이 주도한 1·2차 왕자의 난과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기 위해 주도한 계유정난(癸酉靖難), 그리고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中宗反正) 등을 거치며, 막대한 토지를 하사받아 그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는 공신(功臣)들을 훈구파(勳舊派)라고 한다.  


사림파는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 건국이 되자, 새 왕조에 가담하지 않고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과 덕을 쌓으며, 향촌사회와 산림(山林)에 머물러 있다가 시간이 흘러 조선의 관료사회에 진입한 세력들을 사림파(士林派)라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목은 이색(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야은 길재(冶隱 吉再) 등에게 학문을 이어받거나 이들의 후손들이거나 제자들이다.


 따라서 그 시대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1544년12월 중종이 죽고, 인종(仁宗)이 즉위한다. 인종의 어머니는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로 인종을 낳고, 산후통증으로 7일 만에 사망한다. 따라서 인종은 계모인 문정왕후 밑에서 왕위 계승의 경쟁자인 명종과 경쟁해야 했기 때문에 핍박과 시달림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인종은 즉위하자마자, 아버지 중종 때 벌어진 기묘사화 때 희생당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회복과 현량과를 부활시키는 일련의 개혁정치를 펼치려 하였다. 인종의 이 같은 정치는 한편으로 훈구파에게는 상당한 긴장감을 주었고, 반대로 신진 사림들로부터는 태평성대를 열어 줄만한 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인종은 어머니인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 외삼촌인 윤임(尹任, 역사에서 대윤(大尹)이라 부른다), 그리고 사림파와 손을 잡고 정치를 펼치다가 즉위한지 8개월 만에 갑자기 죽는다. 야사에는 문정왕후가 준 떡을 먹고 인종이 죽었다는 독살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개혁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사림파는 인종의 죽음으로 다시 한번 최대의 위기를 맡는다. 1545년 12살의 어린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는 “명종이 어리다”는 이유와 핑계를 들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실시한다는 구실을 삼아 정치 전면에 등장하면서 바야흐로 암흑기가 열린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 역사에서 소윤(小尹)이라 부른다)이 훈구파들과 손을 잡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일파와 사림파를 제거 하면서 조선의 제도를 무너뜨리고 전횡을 일삼는다. 대윤인 윤임과 소윤인 윤원형은 개인적으로 촌수가 7촌으로 한집안이다. 그러나 왕위에 방해되면 아무리 한 집안일지라도 망설이지 않고 죽이는 것이 권력의 비정함이다. 


문정왕후와 소윤들의 전횡으로 하늘도 슬퍼하고 노했는지, 백성들이 굶어죽는 대기근(大飢饉)이 10년 동안 찾아와 많은 백성이 죽고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살아남은 자는 도적떼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록에는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죽은 사람의 인육(人肉)을 먹었다고 하니, 실제 보지 않아도 시대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에 등장하는 도적이 그 유명한 “임꺽정”이었다. 이 시대를 “여인천하(女人天下)”했듯이 정치의 모든 권한은 문정왕후와 윤원형 그리고 그의 애첩 정난정(鄭蘭貞)이 나라를 좌지우지했다. 정치는 위에서부터 아래로까지 부패가 만연했고, 백성들은 죽거나 병든 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윤원형과 정난정은 권세를 이용해 막대한 부정축재를 일삼아 그들의 창고에는 쌀과 재물이 넘쳐났다. 


1545년 8월 을사사화를 일으킨 윤원형,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등은 “나라가 망한다”는 용기를 가진 뜻있는 선비들의 말과 상소에 개의치 않았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용기 있는 관료들과 재야의 선비들은 을사사화가 부당하다는 입장을 문정왕후와 소윤 세력에게 강력하게 저항하고 내놓았다.

이러한 저항은 권력을 쥐고 있던 문정왕후와 소윤인 윤원형은 오히려 을사사화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관료와 재야의 선비들을 제거하는 기회로 삼았다. 얼마 있지 않아 양재역벽서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을 빌미로 조정내의 사림파는 완전히 숙청된다.


기록에 보면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한다”는 상소와 간언이 줄을 이었다. 대표적인 상소가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의 성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대학자, 1555년에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명종에게 문정왕후와 명종의 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상소문인 단성소(丹城疏)가 대표적이다. 


조식의 단성소를 보면 당시 재야의 선비들이 조정과 정치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잘못돼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래됐습니다.” 


“자전(慈殿·왕의 어머니, 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고사(孤嗣, 외로운 후계자)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이 상소문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어지고, 특히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아”로 표현한 대목에 대해 명종이 “군상불경죄(君上不敬罪)”로 상소문을 올린 조식을 죽여야 한다는 큰 파문이 일어났다. 


하지만 상당수 대신이나 사관들이 “조식이 초야에 묻혀 있는 처사(處士)로 상소문이 적절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뜻은 나라를 잘 다스리라는 우국충정에서 나온 것이니 봐져야 한다.”는 논리가 적용되어 파문은 가라앉았다. 


남명 조식은 “칼을 차고 다니는 선비”로 유명한데, 문정왕후와 명종의 정치가 잘 못되었다는 비판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이다. 만약 조식이 올린 상소문을 죽였을 경우 조식을 따르던 영남의 선비들이 들고 일어나면, 아무리 전횡을 일삼는 문정왕후와 윤원형이라 할지라도 그 반발을 쉽게 막아내는 것은 역부족이었으며, 불가능했기 때문에 조식을 살려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위기적 상황에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김취문은 인종이 죽기 직전에 아버지 김광좌(金匡佐)가 인종보다 먼저 죽게 되면서 을사사화의 화를 운좋게도 비켜가게 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기 직전, 김취문은 3년상을 치루기 위해 잠시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 선산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김취문은 당시 사림들에게 향했던 피바람과 칼날을 아버지의 죽음으로 운 좋게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사림파의 일원이었던 김취문은 비록 살아남았지만, 그의 관직 생활은 이후부터 순탄하지 않게 된다. 항상 궁핍함과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지방을 전전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도 심각한 흉년으로 도적 떼가 들끓고,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는 궁핍한 곳의 목민관(牧民官)으로 발탁된다. 그것은 험지로 차출된 어느 벼슬아치도 가지 않으려는 곳을 조정에서는 김취문을 보냈던 것이다.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는 1549년까지 연장선상에 있었다. 1547년에 “양재역 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난다. 사건의 내용은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조정은 이 사건의 배후를 캐기 위해 다시 한번 피바람을 몰고 온다.


이 사건으로 을사사화에서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사림파를 윤원형과 훈구파는 완전히 제거하려는 기회로 이용한다. 양재역벽서사건으로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게 되고, 그 대표적인 사람이 많은 신진사림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당대 최고 석학인 대사성(大司成)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이었다. 이언적은 이 사건에 연류되어 참혹한 유배생활을 하다 죽게 된다. 


당시 이언적은 송당학파(松堂學派)를 이끌던 송당 박영(松堂 朴英)과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 그리고 용암 박운(龍巖 朴雲) 밀접하며 절친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송당학파에게도 대대적인 화가 미치기 되었다. 선산김씨 가문의 사위인 사헌부 집의를 맡고 있었던 야계 송희규(倻溪 宋希奎)도 을사사화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유배를 가게 된다. 


또한 송당학파(松堂學派)와 교류가 많았던 선산 출신인 신재 김진종(新齋 金振宗) 역시 10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며 유배지에서 죽는다. 같은 송당학파였던 안명세(安名世) 또한 을사사화의 부당함을 아뢰다 죽임을 당한다. 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성균관에서 조광조의 신원회복을 주장했던 진락당 김취성의 제자들이었던, 선산의 강경선(康景善)·강유선(康惟善) 형제들에게도 사화를 일으킨 세력들은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핑계와 이유를 들어 비참하게 죽인다. 을사사화의 정치적 목적은 선산출신 관료들과 송당학파에 초점이 맞추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 화(禍)가 중앙정치무대에서뿐만 아니라, 선산지역을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을사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촉발된 숙청은 선산의 송당학파는 최대위기를 불러왔고, 선산지역 선비들에게 크나큰 위기로 다가왔던 것이다. 을사사화와 양재역벽서 사건으로 시작된 피바람은 선산의 송당학파를 쇠락의 길로 이끌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당시 송당학파의 좌장(座長)은 김취문의 맏형인 진락당 김취성이었다. 김취성은 슬픔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건강을 잃게 되면서 깊은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4년 뒤 세상을 떠난다. 진락당 김취성의 죽음은 당시 송당학파의 구심점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취문은 1509년(중종 4)에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웃골, 들성마을이라는 곳에서 충무위 벼슬을 한 선산김씨 김광좌(金匡佐)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다. 김취문은 송당 박영(松堂 朴英)에게 학문을 배우는 동시에 송당학파의 좌장이며, 핵심이었던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과 용암 박운(龍巖 朴雲)에게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김취문은 29세에 1537년(중종 32)에 문과(병과)에 급제하여, 문신으로 덕행과 학문이 남다른 젊은 사람이 맡는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를 시작하여 곧 바로 왕세자를 교육하는 담당하던 시강원(侍講院) 서연관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김취문은 명종의 다음 왕위계승자인 조선 12대 왕인 인종(仁宗) 이호(李峼)의 교육을 담당했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강원도 도사로 있던 김취문은 “삼년상은 천자(天子)에서 서인(庶人)까지 지켜야할 도리이니, 따라서 전하께서도 삼년 동안 베로 만든 옷과 관을 쓰고, 문무배관들의 하례를 받으면 아니되옵니다.”라는 상소를 올려 일대 파문을 일으킨다. 이를 계기로 젊은 김취문은 사림파 관료들 속에서 그 명성이 회자되기 시작했으며, 평소 김취문을 아끼던 인종은 홍문관 수찬으로 부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김취문에게 불행이 닥쳐오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를 아껴주던 인종의 죽음과 아버지 김광좌의 죽음이었다. 아버지 김광좌의 죽음은 김취문 개인에게 곧 닥쳐올 을사사화를 비켜가게 한다. 당시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 동안 부모님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은 결코 불행이 아니었다.


조정은 3년 상을 마친 김취문에게 호조(戶曹)와 공조(工曹)의 정랑(正郞)을 맡으라는 교지를 내린다. 하지만, 훈구파와 윤원형은 뇌물을 받치지 않는다는 것과 김취문이 사림파 관료라는 것을 들어 큰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한 전라도 도사로 좌천시킨다. 


그리고 조정은 이런 구실 저런 구실을 들어 김취문을 전라도 도사에서 나가 있던 김취문을 1년 뒤 해임시킨다. 김취문은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을사사화로 사림파가 제거된 상황에서 앞으로 벼슬길에 나가는 것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느끼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전국적인 대기근으로 날로 민심이 흉흉해지고, 을사사화로 지방관으로 내보낼 관료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민심을 다시 돌려 세우기 위해서는 청렴하면서 능력 있는 인재가 필요했다. 당시 전국 어디 할 것 없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특히 경상도의 경주와 영천이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경주와 영천은 대기근으로 도적 떼가 들끓어, 아무도 부임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조정은 김취문에게 영천군수로 임명하고, 김취문의 판단을 기다려 본다. 김취문의 판단에 따라 집안이 풍비박살 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험지차출론”이다. 만약 험지로 나가지 않으면 손쉽게 죽이면 되고, 험지로 갔다고 하더라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또 책임을 물어 제 입맛에 맞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김취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Dilemma)”에 빠진 상황이었다. 김취문의 영천군수 부임은 집안을 구하기 위한 자의적 선택이었다.


그러므로 김취문은 학문과 강직함으로 무장한 선비들과 관료들이 화(禍)를 당하던 시대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개인적으로 강당하기 힘든 정치상황 속에서 김취문은 회의와 절망감을 느끼면서도 울분을 삭히며 인내하며, 대기근으로 백성들이 배고픔과 추위에 떨고 있던 곳으로 가야 했다.


영천군수로 부임한 김취문은 대기근의 영향으로 죽기 직전의 영천과 경주를 짧은 시간 안에 풍년이 들게 하면서 위험하고 흉흉했던 민심을 수습해 나갔다. 대기근으로 촉발된 영천지역의 도적떼는 그 사나움과 명성은 전국적으로 이미 오래전에 유명해 있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도적떼 “팔룡이파”가 유명했다.


1550년(명종 5년) 영천군수로 재임하고 있던 김취문은 본인의 맏형이자, 스승역할을 했던 진락당 김취성이 59세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고향 선산으로 급하게 달려왔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과 고통을 느끼며 벼슬을 내려놓으려는 마음까지 내비친다. 김취문에게 정신적 지주이자, 맏형 김취성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산에서 맏형 김취성의 상을 치루고 다시 영천으로 갔던 김취문은 좀 더 효과적이며 실효성 있는 행정을 펼친다. 필자가 앞에서 이야기 한 김취문의 청백리에 녹선(錄選) 된 사실을 언급했다. 


요즘 초등학생들이 보는 역사만화 『나라를 빛낸 청백리』에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 10명을 선정하여  그린 역사만화이다. 이 역사만화에서 김취문은 「도적도 반한 청백리 김취문」으로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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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 김취문을 "도적도 반한 청백리"로 소개한 아동 역사만화>


“도적도 반한 청백리 김취문”이란 제목이 붙게 된 계기는 김취문이 업무수행을 위해 영천에서 경주를 가던 도중, 김취문 일행은 “팔룡이파” 도적떼를 만났다. 김취문은 팔룡이파에게 “감히 도적떼 따위가 방백의 길을 막느냐?” 호통을 치지만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관아의 수령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김취문은 도적떼에게 “너희도 본래는 선량한 백성이었다. 기근과 가혹한 조세를 견디지 못해 어쩔 수 없어 도적이 되었겠지만, 칼을 버리고 하루 빨리 백성으로 돌아오라”하며 설득을 했다. 기록에는 이들을 경주적(慶州賊)으로 기록하고 있다.


도적떼는 김취문의 호통과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이려 할 때, 도적떼의 우두머리 팔룡이가 나타나 “영천군수 김취문은 청렴하고 옥처럼 고결한 사람이라는 풍문을 들었다. 오늘 그를 만나보고 그가 입은 옷과 행색을 보니 듣던대로 청렴한 사람이 사실이구나! 아무리 도적이라도 저렇게 청렴결백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하며 도적떼가 돌아갔다는 것이다. 기록에는 “영천군수는 단아한 옥인(玉人)이다. 그러니 차마 그를 죽일 수는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551년(명종 6년) 고향을 방문한 김취문은 맏형 진락당 김취성과 함께 송당학파를 이끌었던  좌장, 용암 박운(龍巖 朴雲)을 찾아가 관직생활의 괴로움을 토로하자, 박운은 김취문의 올곧은 성격이 관직생활에 있어서 오히려 방해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는 구암(久庵)이란 호(號)를 지어준다. 


박운은 구암(久庵)이란 호를 지어 준 것은 “김취문의 성격이 맑은 물이 소용돌이 치는 것과 같으니, 오래도록 고요함을 간직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박운은 “오랫동안(久) 고요하라(靜)” 뜻에서 구정암(久靜庵)을 김취문에게 이야기 한다. 그 이후부터 김취문은 “오랫동안 고요하라”는 뜻을 간직하며 구암(久庵)이란 호를 쓰게 된다.


1552년(명종 7년)에 김취문의 어머니 선산임씨(善山林氏) 부인이 죽게 되자, 김취문은 영천군수직을 사임하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다. 3년 동안 시묘살이가 끝나자, 조정은 다시 김취문을 청송부사에 재수한다. 청송 역시 기근으로 인한 흉년으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김취문은 청송부사로 6년간 재임하면서 점진적으로 모든 것을 변화시키며 청송을 풍요롭게 했다. 


김취문이 청송부사로 있을 때, 퇴계 이황은 경주에서 참봉(參奉) 벼슬을 하고 있던 그의 아들 이준(李寯)에게 “청송부사(김취문)은 비상한 사람으로 내가 경외하는 사람이다. 너는 모름지기 조심해서 알현하거라. 무릇 지나는 곳들은 모두 근신해야 하지만, 청송은 더욱 근신하거라. 


그리고 퇴계는 “청송 가는 길이 험하지만, 넓은 바다(巨海)와 같은 큰 그릇의 어진 이(賢人)을 만나 보게 될 것이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는 편지를 아들 이준에게 보낸다. 이 편지 내용으로 봐서 퇴계 이황는 10살 정도 아래인 김취문의 인간됨과 학문을 평소에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1559년(명종 14년) 당시 명종은 영천과 청송에서의 김취문의 10년 동안 목민관으로서의 선정을 전해 듣고는 자기 옆에 두고자 했다. 그래서 명종은 김취문에게 사간원 사간과 성균관 사예에 임명하려 했으나, 윤원형과 조정대신들의 완강한 반대로 임명이 좌절되고, 흉년으로 허덕이던 상주목사로 임명된다. 


상주에 부임한 김취문은 대대적인 개혁을 통하여 상주가 어느 정도 풍요롭게 만든다. 그리고 이 풍요로움으로 상주의 관문인 풍영루(風詠樓)재건하게 되고, 퇴계 이황이 편찬하고자 하는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에 경제적 지원까지 하게 된다. 퇴계는 기쁜 마음으로 풍영루 발문(跋文)을 짓는다. 


여기서 퇴계 이황은 “이 곳의 목사로 부임한 선산의 김문지(金文之, 김취문)가 예전의 명성 그대로 학문을 권장하여 이치에 도달하게 하고, 재해 상황에서도 더욱 열심히 노력하여 백성들을 돌보고 관아의 재정을 절약해 상주의 행정이 통하게 되고 적폐들이 제거되었으며, 그 뒤로 풍년이 들자 백성들이 기뻐했고 재정도 조금씩 여유를 갖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1562년 탁월한 역량으로 상주를 회복시키고 있던 김취문은 갑자기 상주목사에서 해임된다. 이후 김취문은 선산 들성마을 대월재(對越齋)에서 학문과 저술활동에 전념한다. 그런데 1564년 (명종 19년)에 김취문은 나주목사에 갑자기 임명된다. 기록에는 “몸가짐이 근신했고, 재직 중에 청렴하고 깨끗했다.” 라고 김취문을 나주목사에 임명하게 된 경위를 기록했다.


1565년(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명종은 외삼촌이자 을사사화와 양재역벽서 사건을 만들어 많은 젊은 사림파 관료와 선비를 죽인 소윤 윤원형과 그의 애첩 정난정을 황해도로 유배를 보내고, 그들과 한 배를 타며 윤원형의 온갖 전횡에 동조했던 일파들을 숙청한다. 왕을 능가하는 군력을 부렸던 윤원형과 정난정은 유배지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새롭게 임명된 영의정을 동고 이준경(東皐 李浚慶)이 맡으면서, 훈구대신들을 몰아내고 젊고 유능한 사림파를 기용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에 가장 먼저 중앙 정치무대로 복귀한 사람이 바로 김취문이었다. 


김취문은 20년 만에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영의정인 이준경은 평소 송당학파의 도학(道學)을 높이 평가했던 인물이다. 이준경은 판단력과 예지력이 대단한 인물로 평가받는 인물인데, 이준경은 사림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당쟁(黨爭)을 할 것이라는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유일하게 예언한 사람이다. 


중앙정치무대로 복귀한 김취문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과 함께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두루 거친다. 이후 다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를 역임했으며, 명종은 또다시 김취문을 강원도관찰사에 임명한다.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된 김취문은 강원도에서도 김취문은 진정한 청백리다운 면모를 다시 한번 발휘한다. 관찰사 김취문은 세 가지 반찬과 관아에서 사용하는 훌륭한 놋그릇과 은수저를 사용하지 않고, 보통 평범한 백성들과 같은 그릇에 직접 농사지은 채소를 먹었다고 한다. 특히 깻잎반찬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바야흐로 명종의 시대가 끝나고, 선조가 등극하자 김취문은 1567년(선조1년)에 대사간(大司諫)과 좌부승지(左副承旨)를 맡다가 다시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에 임명된다. 그러나 김취문은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1570년(선조3년)에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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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구미성리학 역사관 제1지구와 제2지구 사이에 있는 구암 김취문의 묘소 전경>


선조는 김취문의 학문과 청백리의 삶을 애도하는 제문(祭文)을 내려 위로했다. 이후 시간이 흘러 1853년(철종4년)에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받았다가, 1864년(고종1년)에 문간공(文簡公) 다시 시호를 받는다.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부제학은 실질적으로 조선시대 모든 문관(文官)들의 로망(Roman)이자 최고의 영광된 자리였음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가문이나 집안에 정승·판서(政丞·判書)가 얼마나 나왔느냐를 그 가문의 위상도 중요했지만, 가문에 대제학과 부제학이 얼마나 나왔느냐를 조선시대는 실질적으로 더 중요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과거시험을 거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삼사(三司)에 근무하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운 직책으로 여겼고, 따라서 깨끗한 벼슬이란 뜻에서 삼사의 벼슬들을 청요직(淸要職)이라 했다. 이중에서도 특히 대제학과 부제학의 벼슬을 최고로 인정했고, 이것을 옥당(玉堂)이라 했다. 


이러한 벼슬을 했다는 것은 학문만이 뛰어났고 절대할 수 없었다. 그에 걸 맞는 인품과 덕행을 쌓아야만 할 수 있었던 벼슬들이다. 김취문은 관직을 나간 이후 학문과 올곧음이 남달랐지만, 그가 부여받은 일은 죽음에 문턱 앞에 있는 백성을 구하는 일이었다.

김취문은 기댈 곳이 없었으며, 헐벗고, 배고픔과 추위에 떨고 있었던 죽음직전의 백성들이 있었던 곳으로 향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더욱 빛났던 것이다. 김취문은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갔었다. 그것도 가장 힘든 곳의 목민관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해야 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따라서 김취문은 목민관으로서 백성의 삶을 구제하는 일에 평생을 받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금오산을 오르고 백운재를 들릴 때는 김취문의 이러한 일화를 생각해 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필자는 생각이다.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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