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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칼럼

【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역사적 비극의 중심에 있었던 신천강씨(信川康氏)를 찾아가다.

이순락기자 0 3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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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前구미회 부회장, 새로넷방송 시청자위원>


언젠가 TV에서 고려말, 조선건국 과정을 소설적으로 그린 “육룡이 나르샤”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었다. 필자는 이 드라마에서 삼한 제일 검, 이방지를 비롯하여 고려 최고의 검법인 곡산검법의 소유자인 척사광, 그리고 조선 제일 검의 소유자 무휼이 나와서 드라마 속에서 그들의 무술 실력을 겨루는 것을 한 때 재미있게 보았다.


여기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실제로 곡산검법이 있었다는 것이다. 곡산검법은 고려시대 최고의 장군이며, 최고의 무술가인 척준경(拓俊京)이 사용한 검법이 바로 곡산검법이다. 그리고 곡산 척씨의 시조가 바로 척준경 장군이다. 실제로 척준경 장군은 놀라운 검술 실력으로 검신(劍神)으로 불려졌다. 곡산검법을 선 보인 척사광은 척준경장군의 4대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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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검신으로 불려졌던 곡산검법의 창시자 척준경장군>


곡산(谷山)은 황해도 북동부에 위치한 군으로 신천(信川), 재령(載寧)이라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곡산 · 신천 · 재령은 동일한 장소이며, 물산이 풍부하여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신천을 본관으로 하는 신천강씨(信川康氏)가 있다. 신천강씨의 시조는 신라시대 성골장군(聖骨將軍)을 지낸 강호경(康虎景)이며, 중시조는 고려 명종(明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강지연(康之淵)이다.

 

재령을 본관으로 하는 재령이씨(載寧李氏)가 있고, 곡산한씨(谷山韓氏) 등이 있다. 모두 역사에서 훌륭한 인물들이 많아 손색없는 명문가의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현재도 그 평가는 여전하다.

 

특히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가 신천강씨이다. 고려가 패망한 가장 큰 원인으로는 권문세족의 토지겸병으로 많은 토지가 권문세족에게 과도하게 집중되면서 전국적으로 너도나도 사전(私田)의 확대하면서 국고(國庫)가 바닥나면서 국가의 재정이 파탄에 이를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이러한 권문세족의 사전(私田) 확대로 국고의 재정 파탄나자, 백성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세력에게는 무엇보다 새로운 개혁이나 혁명이 필요했다. 이러한 국가재정의 파탄과 아울러 홍건적 · 왜구 · 변방 오랑캐의 침략 등 정치적 · 군사적으로 많은 위기에 외부적으로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내외적(內外的) 위기와 맞물려 권문세족과 새롭게 성장한 신진사대부의 내부적 대립은 고려왕조의 패망에 결정적인 원인으로 고착화 되어 갔다. 이러한 위기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마지막 희망으로 떠오르는 영웅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조선을 세우는 이성계(李成桂)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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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

 

1355년(공민왕 4년) 홍건적(紅巾賊)의 1차 침략으로 고려의 정치적 위기는 더해 갔고, 1361년 홍건적의 2차 침략이 일어난다. 고려 동북면의 원나라 지방군벌 이성계가 기병을 이끌고 개경 탈환전에 참가해 가장 먼저 성안으로 돌입하여 홍건적을 몰아낸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왜구들의 침략하자, 이성계가 이를 물리친다.


이성계의 이러한 활약으로 “백전백승”의 이성계 장군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고려의 조정의 많은 대신들과 백성들로부터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성계는 “변방의 촌놈”에서 일약 영웅으로 위기의 고려사회에 당당히 등장하게 되었다.


사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은 몽고가 세운 원(元)나라에 귀순하여 원나라 다루가치(達魯花赤)의 벼슬을 했다. 그러나 고려 공민왕이 원나라가 세운 철령 이북지역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공격하여 탈환할 때, 이자춘과 이성계는 쌍성총관부 탈환에 큰 공을 세우면서 다시 고려인으로 돌아온다. 

 

이성계는 고려의 동북지역을 호령하는 군사적 기반으로 고려를 침략하는 외적을 물리쳐 전공을 세웠지만, 엄연히 고려의 귀족사회로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려 귀족사회에서는 그 때까지만 해도 이성계를 일개 군벌(軍閥)세력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고려의 정치 중심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이성계를 후원해 줄 권문세족과 학문으로 무장한 엘리트 신진세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성계는 귀족사회였던 고려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를 후원해 줄 막강한 정치적 기반과 경제적 기반을 갖춘 권문세족이 필요했다. 이것을 뒷받침 해주는 가문이 바로 신덕왕후의 신천강씨였다. 이성계가 신덕왕후와 혼인을 하면서 이성계는 명실상부한 고려사회의 권문세족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이후부터 이성계는 처가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발판으로 고려 말 혼란한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신천강씨와 정략적 결혼을 통해 고려사회 중심으로 편입되고자 했던 것이다.


이성계와 신덕왕후가 결혼하게 되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전쟁터를 누비던 이성계가 황해도 곡산(谷山)을 지나다가 용연(龍淵)이라는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던 강씨처녀에게 물을 얻어먹기 위해 물을 청한다.

이성계의 청을 받은 강씨처녀는 표주박으로 물을 떠 물 위에 버들잎을 띄워 이성계에게 준다.

그러자 이성계는 “물에 왜 버들잎을 띄웠소?” 묻자, 강씨처녀는 “물도 급하게 먹으면 체합니다.”라고 답한다.

이성계는 그 처녀의 미모와 마음씨에 반해 결혼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온다. 이 강씨처녀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준 신덕왕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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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도록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신덕왕후>


그리고 신진사대부 중 고려는 이미 그 생명을 다했으니, 새로운 나라와 왕조를 건설하자는 급진적인 생각을 가진 신진세력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권근(權近)·심효생(沈孝生)·남은(南誾)·하륜(河崙) 등이었다.

이들이 이성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고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와 왕조가 탄생한다. 조선을 개국하는데 ,그 중심에는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이 있었으며, 조선의 모든 제도와 기틀을 설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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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국의 일등 공신 정도전, 왕권 중심의 국가가 아닌 재상중심주의 국가를 설계하다>

 

그러나 이성계의 조선건국 이후 내부적으로 조선의 정치의 근간을 잡는 방향에서 왕권(王權) 중심이냐, 아니면 재상중심주의의 신권(臣權)이냐를 놓고 갈등과 대립이 일어난다. 조선의 개국에 참여했던 신진사대부 세력들 속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과 갈등으로 분열하기 시작한다.

 

조선이 개국되고 얼마 있지 않아, 1392년 8월 정도전을 중심으로 태조 이성계의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둘째아들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조선의 개국과정에 참여했던 세력들 속에서 다시 대립과 불만이 노골적으로 표출된다.

 

1398년(태조 7) 8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드디어 이성계의 다섯째 이방원(李芳遠)이 정도전, 남은, 심효생과 세자 이방석을 살해하고, 둘째형인 정종(定宗) 이방과(李芳果)를 허수아비 왕으로 앉힌다. 이후 1400년(정종 2년)에 이방간(李芳幹)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이방원은 이를 진압하면서 실권을 잡는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고, 이방원은 왕위에 올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는 태종(太宗)이 되는 것이다. 왕자의 난 이후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만들어 준 신천강씨를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이미 죽은 신덕왕후의 무덤을 훼손하고 묘비를 뽑아다 다리를 만드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역사에서 완전히 왜곡해 버린다. 이 정도라면 신천강씨들에게 태종 이방원은 얼마나 혹독한 핍박을 했겠는가?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신천강씨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수 있도록 만든 권문세가임에도 직격탄을 맞아 죽거나 전국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신천강씨는 태종이 왕으로 있을 동안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조선사회의 정치에 외면 받아야 하는 험난한 길을 걷는다.


현재 제주도에 가장 많은 성씨 중 하나가 바로 신천강씨이다. 그 이유는 신덕왕후의 사촌오빠 강영(康永)은 전라감사를 하고 있으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2년 신덕왕후의 원수를 갚겠다고 조사의(趙思義)와 신덕왕후의 사촌인 강현(康顯)이 태조 이성계를 다시 옹립한다는 명분으로 조사의와 강현이 난을 일으켜 실패한다.

 

전라감사 강영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자신에게 미칠 화를 피해 제주도로 건너간다. 그래서 제주도의 신천강씨들은 강영을 입도조(入島祖)로 모시고 있다. 이러한 원인으로 제주도에 신천강씨가 많이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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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강씨 제주도 입도조 강영의 묘, 전라감사 강영의 묘는 금계포란형의 명당이라고 한다>

 

필자가 살고 있는 원호리 들성마을에서 점터고개를 넘으면, 고아읍 대망리(大望里)가 나온다. 대망리는 옛날부터 신천강씨들의 집성촌을 구성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대망리를 망장촌(網場村)으로 불려 왔다.


그리고 이 망장촌에는 생육신의 한분인 경은 이맹전(耕隱 李孟專)선생이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생육신으로 귀머거리·맹인의 흉내를 내면서 숨어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현재에도 옛 어른들은 망장 또는 망정으로 부르기도 한다.

 

망장(網場)이라 이름 붙여진 것은 선산의 비봉산(飛鳳山)의 봉황이 날아가면 선산이 망한다는 의미에서 날아가는 봉황을 잡기 위해 “그물(網)을 쳐서 잡는다.”라는 비보풍수(裨補風水)에 의해 망장이라는 지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망장은 세월을 거쳐 대망리로 바뀐다. 그리고 대망(大望)은 “큰 희망”을 갖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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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강씨 세거지인 고아읍 대망리의 모습>
 

그러면 봉황을 날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망장촌에 세거하는 신천강씨들은 어떻게 해서 선산(善山)으로 왔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 가지 단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결혼을 하면 남자가 처가(妻家)로 장가를 가서 사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또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으로 인해 새로운 세거지를 형성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권문세족으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선산의 신천강씨들을 찾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도 재미있는 역사 여행이 될 것이다.

신천강씨 선산의 파조(派祖)는 고려 1300년 중후반에 강인석(康仁碩)이 지금의 팔공산 뒤에 있는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大栗里)에 부림홍씨(缶林洪氏, 지역에서는 “한밤홍씨”라 함)로 장가를 들어 군위군에 첫번째 터전을 잡게 되면서 강인석은 신천 강씨의 입향조(入鄕祖)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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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부계면 부림홍씨 세거지인 한밤마을 상징하는 잣나무>


이후 강인석의 아들 강윤리(康允釐)가 선산의 일선김씨(一善金氏)와 혼인을 하면서 처가인 선산 몽대면(夢大面, 몽대면은 현재 구미시 산동읍)으로 옮겨와 신천강씨들의 터전을 선산에 다시 잡게 되면서 세거하게 되었다. 강윤리는 강거의(康居義), 강거례(康居禮), 강거보(康居寶), 강거민(康居敏) 네명의 아들을 두게 되면서 가문이 번성해 진다.


고려시대 두문동 72현 중 최고의 충신으로 일컬어지는 농암 김주((籠巖 金澍)의 손자로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김지경(金之慶)의 장인이 바로 신천강씨 강거례이다.

강거례는 조선 중종 때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거친 병암 김응기(屛庵 金應箕)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또한 강거례는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의 딸을 며느리로 맏는다. 이로써 신천강씨는 혼인관계에 있어서 부림홍씨, 일선김씨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강거례는 딸을 일선김씨에게 시집보내고, 며느리를 일선김씨에서 받아들인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선산에 정착한 신천강씨들은 일선김씨(一善金氏)들과 불가분의 혼인관계를 형성한다. 강거례의 아들 강척(康惕)은 강호 김숙자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임으로서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과는 처남매부지간이 된다.


강척과 일선김씨 부인 사이에 무명재 강백진(無名齋 康伯珍), 임경당 강중진(臨鏡堂 康仲珍) 형제가 밀양 외가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강백진과 강중진은 외삼촌인 김종직으로부터 당대 최고 수준의 정통 성리학을 배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강백진·강중진 형제도 조선사회를 뒤흔들었던 사화(士禍)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점필재 김종직이 누구인가? 조선시대 모든 선비들로부터 한 몸에 존경을 받았던 절의파(節義派) 선비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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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출신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한 명단이다. 1447년 강백진은 식년문과에 3등으로 합격한다>


점필재 김종직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종장(宗匠)으로 일컬어지는 사림(士林)들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았던 선비 중의 선비, 학자 중의 학자였다. 그리고 후대 학자들에게 야은 길재(冶隱 吉再)의 도통(道統)과 학통(學統)을 잇는 가교역할을 하며, 굴곡진 조선시대를 살아가는 선비들의 가슴 속에 잊혀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강백진·강중진 형제가 김종직과 혈연적 관계를 맺으면서 김종직과 같은 사림파(士林派)의 피가 흐르면서 그들에게 앞으로 다가올 운명도 순탄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사화(士禍)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은 조선시대에 태어나서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누구나 한번쯤 그의 제자가 되고 싶어 했던 젊은 선비들의 가슴속에 죽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시대의 스승이었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 김종직의 수많은 제자들, 그들의 높은 학문과 절의(節義)는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인 기반을 차지한 훈구파들에게는 타도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스승 김종직에게 학문을 배우고 익혔다는 이유로, 수많은 제자들과 선비들이 죽거나 유배를 가게 된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과 동지들은 죽음과 시련을 거부하지 않고, 그 피바람에 당당히 맞서며 달갑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오히려 김종직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수학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조선시대 사림파(士林派)가 화(禍)를 입는 최초의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연산군 4년)에 류자광(柳子光) · 이극돈(李克墩)이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스승 김종직이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비난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기록하면서 발단이 되었다.


조의제문은 중국 초나라 항우(項羽)가 초나라 회왕(懷王)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그것을 기록한 제자 김일손뿐만 아니라 김종직과 연관된 많은 제자들과 사람들이 죽거나 유배를 갔다.

 

김종직의 학문을 이어받는 직계 제자 김굉필(金宏弼)도 유배를 간다. 그리고 강백진도 스승이자 외삼촌이 김종직이라는 이유로 유배를 간다. 사실 무오사화는 훈구파가 사림파를 공격하는 서막에 불과했다.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의 등장은 훈구파가 차지하고 있던 기득권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면서 사림파와 훈구파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폭발했던 것이다.

사림파는 학문과 절의(節義)로서 무장한 선비집단이었기 때문에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림파 이들에게 또 다시 시련이 닥치는데, 그것은 1504년(연산군 10년)에 임사홍(任士洪)이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 복위문제를 거론하면서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킨다.

 

무오사화에서 사림파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것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임사홍과 권력의 대립관계에 있었던 훈구파들도 그 대상이 되었다. 이 때에도 김종직의 제자들인 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다.


유배생활을 하던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과 강백진은 참수형을 당한다. 1492년(성종 23년) 7월 김종직은 죽음을 예감하면서 본인이 쓴 모든 서적을 생질 강백진에게 맡긴다. 1492년 8월 19일 조선의 최고 위대한 학자였던 절의파 선비 김종직은 생을 마감한다. 강백진은 외삼촌이자 스승이었던 김종직의 모든 서적을 가져 있다는 이유로 죽었던 것이다.


연산군은 “김굉필과 강백진을 저작거리에 효수(梟首)하라” 이후 연산군은 의금부의 명을 받드는 관리들에게 “김굉필과 강백진이 죽음에 다다라 무슨 말을 하였는가?” 묻자 관리들이 답하기를 “모두 한마디도 말도 없이 죽음 앞에 당당히 나갔습니다.”라고 했다고 역사의 기록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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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재 강백진의 글씨,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서 김종직이 살아 있을 때 김굉필에게 “우리의 도(道)는 본래 굴곡이 많다”라고 했던 것이 이러한 죽음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조선 최고의 선비들이 하루아침에 죽거나 시신이 무덤에서 파헤쳐져 뼈 가루가 되어 없어져도,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스승 김종직을 따랐던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강백진의 동생 강중진은 1519년(중종 14년)에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이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趙光祖)와 사림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다. 이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같은 사림파로 지목된 강중진도 곤장형을 받고 유배를 간다.

 

조선시대 선비답게 옳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종직을 따르던 사림파 선비들은 죽음이 비록 다가와도 그것을 피하지 않고, 옳은 길을 가고자 하는 순교(殉敎) 집단이었다.

 

강씨(康氏) 가문의 화(禍)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강중진의 손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강중진의 손자들인 강경선(康景善) · 강유선(康惟善) 형제들에게 이어진다. 강유선은 송당학파(松堂學派)의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후 강유선은 1537년(중종 32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간다. 1545년 인종이 즉위하자, 성균관 유생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조광조(趙光祖)의 신원 회복을 주장하고 관철시키면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이 일로 강유선은 훈구파 세력의 눈에는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1545년(명종 1년) 소윤(小尹)으로 일컬어지는 윤원형(尹元衡)이 대윤(大尹)으로 일컬어지는 윤임(尹任) 일파를 숙청하고 제거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다. 윤원형이 일으킨 을사사화로 선산을 중심으로 하고 있던 송당학파(松堂學派)는 완전히 궤멸되는 수순을 밟는다.


을사사화의 연장선상에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일으켜 많은 사림파를 다시 제거한다. 그 대표적으로 희생된 사림파는 조광조와 막역했던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평가받던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 소재 노수신(穌齋 盧守愼) · 유희춘(柳希春) · 백인걸(白仁傑)등 20여명이 유배를 가 비참한 삶을 산다.

 

그리고 소윤 윤원형은 1549년 이홍남(李洪男) 형제의 역모 사건에 성균관 유생 강유선이 연루되었다는 거짓 자백을 이용해 강유선을 때려서 죽이는 장살(杖殺)형을 가한다. 강유선의 나이 30세였다. 이 일로 강유선의 형인 강경선은 평민으로 전락하고, 동생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다가 술로 나날을 보내다가 안타깝게 죽는다.


신천강씨는 조선건국의 제일 큰 숨은 조력자였음에도 권력투쟁의 정치적 희생물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선비들로부터 “문장과 도덕으로 조선시대 사대부의 영수”라는 평가를 받던 김종직과의 혈연관계로 무명재 강백진과 임경당 강중진은 당시 사화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리고 강경선·강유선 형제들이 정치적 희생물이 되면서 가슴 아픈 역사를 가진 가문(家門)이 되었다.


선산의 신천강씨 외손들 중에 김여물(金汝岉)장군이 있다. 김여물은 1577년(선조 10년)에 15명을 선발하는 알성시 갑과에 장원을 급제를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충주 탄금대 전투에 신립(申砬)장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에게 발탁된다. 종사관 김여물은 신립장군과 함께 탄금대에서 장렬히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다.


김여물의 아버지 순천김씨(順天金氏) 김훈(金壎)은 창원부사(昌原府使)를 한 망장촌의 강의(康顗)의 딸과 결혼하면서 선산에 정착하게 된다. 김여물의 외할아버지인 강의(康顗)는 바로 임경당 강중진의 아들로서 명종 때 일어나는 “이홍남 역모사건”에 희생되는 강경선· 강유선형제의 아버지가 된다.

김여물의 아들 김류(金瑬)는 1623년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성공시키는 핵심인물이었다. 김류는 얼마 있지 않아, 인조 때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올라 순천김씨들이 조선후기 정치에 등장하여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 할 수 있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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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물이 탄금대 전투를 앞두고 그 아들 김류에게 보낸 서찰>


구미시 고아읍 예강리 부근의 접성산 입구에 시묘암(侍墓巖)이 있다. 이 시묘암 이야기는 고아읍 대망리에 살던 강거민 부부와 양아들 심회(沈澮)가 얽힌 이야기이다. 태종 이방원은 절대적 왕권을 공고히 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본인의 처가를 풍비박살 낸다.


태종의 처남들인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형제가 어린세자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 했다 죄목을 들어 죽이면서 태종의 처가인 여흥민씨(驪興閔氏)가문을 멸문지화시킨다. 태종은 세종이 정치하는 동안 외척이 발호하여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원천봉쇄 버렸다.


또한 세종의 장인이자 태종의 사돈인 영의정 심온(沈溫)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가면서 신하들이 세종과 심온에게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자, 군권(軍權)을 쥐고 있던 태종은 곧바로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이 역모 준비한다는 죄목을 들어 사돈집마저 풍비박살 낸다. 세종의 처가가 세종이 왕권을 행사하는 동안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원천봉쇄해 버렸던 것이다.

태종의 세종의 외가와 처가에 대한 이러한 조치는, 이후 세종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을 때, 외가와 처가의 권력이 발호하여 정치를 혼탁하게 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 효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다. 이로써 세종은 성군(聖君)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하루아침에 세종의 장인이자, 영의정이었던 심온 집안은 공중분해 되어버렸다. 심온은 5남 6녀를 두었는데, 첫째가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였고, 마지막 아들이 심회(沈澮)였다. 어린 심회를 키우던 유모는 심씨 가문에 닥친 화를 피하기 위해 심회를 등에 업고 도망치기 시작하여, 지금의 선산의 대망리까지 오게 되었다.


선산에 터전을 잡은 강윤리의 넷째 아들은 강거민이다. 강거민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강거민 부부는 한날한시에 꿈을 꾸었는데, 용(龍)이 삼밭에 웅크리고 있는 기이한 꿈을 꾸자 한밤에 삼밭으로 가 보았다. 그런데 유모가 추위와 배고픔에 어린 아이를 끌어 앉고 있는 것이었다.


자식이 없던 강거민은 어린 심회를 집으로 데려가 정성을 다해 키웠다. 심회가 15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 심온의 역적 누명이 풀리자, 한양으로 올라가 벼슬길에 나간다. 심회는 1466년(세조 12년)에는 좌의정이 되고 곧이어 영의정이 된다.


1472년(성종 3년)에 강거민이 세상을 떠나자, 선산으로 와서 부모의 예로서 상을 치루고, 양어머니 전씨(全氏)가 돌아가시자 영의정의 벼슬을 내려놓고 선산으로 돌아와 시묘살이를 정성껏 마음을 다해 6년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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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회가 강거민 양부모님을 위해 영의정을 내려 놓고 6년간 시묘살이를 했다는 시묘암>


심회가 시묘살이를 했다는 바위가 바로 고아읍 예강리에 있는 시묘암(侍墓巖)이다. 안타깝게도 심회 역시 연산군 때 일어나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를 당하는 가슴 아픈 일을 겪는다.


강거민과 심회의 이런 인연으로 청송심씨(靑松沈氏)와 신천강씨는 오늘날에도 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한 중심에 서 있었던 신천강씨들의 역사를 보면 필자는 경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역사적 굴곡과 비극의 중심에 신천강씨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신천강씨는 암울한 과거의 잊고, 각 분야에서 후손들이 명문가로서 손색없는 역할을 다하고 있는 가문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굴곡진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희망을 끈을 놓지 않은 신천강씨 가문에게 개인적으로 경의를 표한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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