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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의 역사와 인물】김승동 송덕비(金升東 頌德碑)를 찾아가다.

이순락기자 0 47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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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현재 농부와 칼럼리스트로 활동 중>

영남의 명산이며 구미의 상징이라면 당연히 금오산이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이자면 금오산을 한층 더 빛내는 것이 있다면 단언컨대 금오산저수지 일 것이다. 아마도 금오산저수지는 금오산의 화룡점정(畫龍點睛)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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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금오산 저수지 모습>


금오산은 시민들에게 힐링과 깨끗한 자연환경을 사시사철 제공하기 때문에 구미시민들은 거룩하고 위대한 금오산을 사랑하고 아끼지 않을 수 없다. 또 한편 금오산은 조선 성리학의 출발점이라는 위대한 철학적·역사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금오산을 더더욱 빛내고 있는 금오산저수지는 1947년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이후에 준공된다. 이 금오산 저수지를 처음 계획하고 준공한 사람이 바로 김승동(金升東) 구미면장이다.  필자가 사는 동네 들성마을에서는 그분을 “주사할배”라고 불렀다. 이유는 그의 첫 벼슬이 주사(主事)였기 때문이다.


김승동은 1878년(고종 15년)에 교관 김인원(敎官 金麟遠)의 아들로 고아읍 원호리  들성마을에서 태어난다. 김승동의 12대 조부가 바로 금오산 저수지를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곳에 잠들어 계시는 조선 최고의 청백리로 일컬어지는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선생이다.


김승동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있을 때 주사(主事) 시험에 급제하여, 첫 발령지가 충청남도 관찰부 주사(9품)로 벼슬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경상도관찰부 주사(道觀察部 主事)로 벼슬생활을 하다가 6품 승훈랑(承訓郞)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함으로써 대한제국에서 벼슬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의 식민통치체제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대체적인 시류였고 역사였다. 간혹 벼슬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 식민통치 체제 속으로 편입되어 간 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김승동 역시 이 시류와 무관하지 않게 일제치하에서 벼슬을 할 수밖에 없는 길을 간다. 그러나 김승동은 나름대로의 식민지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마저는 잃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식민지통치하에 신음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벼슬아치로서 베푸는 삶을 선택한다.


당시 구미는 행정단위 상 “면(面)”이었다. 김승동은 구미면장을 20년간 재직하면서 많은 봉사와 구미가 직면한 일들을 하는 것이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 받는 구미 사람들에게 본인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구미는 아주 보잘 것 없는 농촌의 시골이었다. 따라서 농사를 주업으로 삼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농사에 필수적인 것은 땅과 물이다. 지금의 구미는 관개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어 어디를 가던 물이 풍부하지만, 당시로서는 관개시설은 고사하고 물도랑 하나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물이 제대로 공급 된다는 것은 대단한 하늘의 축복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오죽하면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논에 물 들어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했을까? 금오산 폭포의 이름이 대혜폭포이다. 이렇게 이름지은 것은 금오산의 물로 사람들이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대혜(大惠)폭포로 이름지어졌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던 김승동 면장은 금오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서 금오산 저수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그가 20년간 재직하는 동안 저수지 완공을 목표로 지속적으로 노력과 실행을 감행한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냥 일제 치하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수탈에만 앞장 섰을 것이다. 그러나 김승동은 그렇지 않았다.


금오산저수지 둑 공사는 1945년 해방이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1947년에 준공된다.
그리고 1947년 준공된 이후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구미면민들은 표지석 세운다. 당시 구미사람들은 저수지 완공 공사를 금오제(金烏堤 금오산저수지 둑) 완공 공사로 표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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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금오산 저수지 준공 기념 표지석>

금오산 저수지가 완공되어 농사를 짓는 많은 사람들에게 해택이 돌아가자, 구미 면민들은 구미 면 4곳에 구미면장 김승동 송덕비(龜尾面長 金昇東 頌德碑)를 세운다. 안타깝게도 구미가 급성장하면서 4개 중 3개는 사라지고, 지금은 한 개만 남아 뒹굴고 있는 것을 그의 묘 앞으로 옮겨 놓은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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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동 면장 송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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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매일신보에 실린 김승동면장 공덕비 기사>            
                  

당시 신문에 난 기사를 해석하면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장(龜尾面長) 김승동(金升東)씨는 在職 중년에 치적(治績)이 우량(優良)할 뿐만아니라 면내(面內) 빈민(貧民)132호(戶)에 대하여, 양차(兩次)호세(戶稅)를 대납(代納)하는 등 특별한 뜻을(特志)를 시(施)함이 한(一)둘(二)에 그치지(止)치 아니함으로 면내 面民有志의 발의(發議)에 의하야, 면내 주요지역 4개소(面內主要地 4開處)에 좌측의 기록문(左 記文)과 같은(如한) 송덕비(頌德碑)를 건설하고, 앞으로(今後) 앞에 있는 이름 김승동(一層氏)을 흠모(欽慕)한다는 뜻(意)을 표(表 )하였다더라.”였다.


​김승동의 첫 번째 손꼽을 일이 금오산 저수지 준공이라면 두 번째 손꼽을 일은 바로 금오산 절벽에 있는 도선굴에 사람이 왕래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도선굴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옛날 당시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당시 절벽 속의 도선굴로 사람들이 가려면, 아무 장비도 없는 상태에서 목숨을 담보로 엉금엄금 기어서 조금씩 갔다고 한다.


사람들이 도선굴에 오르는 것이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마음먹은 김승동 면장은 이러한 모습들을 보고 도선굴에 오르는 구미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길을 만들고 안전장치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는 도선굴 앞에 금오산굴통로기(金烏山窟通路記)라는 작은 비석을 하나 세운다. 짧은 글 속에 금오산에 대한 생각을 김승동은 명문장으로 금오산의 역사와 감회를 비석에 새긴다. 그 내용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금오산(金烏山)은 선산(善山) 고을의 진산(鎭山)이다. 선산읍 남쪽 40리에 있는데, 옛 고려(高麗) 말기에 야은(冶隱 : 吉再) 선생이 고려에 대한 망복(罔僕)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귀향하여 금오산 아래 은거(隱居)하였으니, 이로부터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상전하는 바,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이 산을 보고 중국의 숭산(嵩山)과 흡사하다 하여 남숭산(南嵩山)이라 하였는데, 산에 기이하고 절묘한 경치가 많다. 그 중간쯤에 작은 물줄기가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대혜폭포)가 있어, 온 산의 물이 모여 흘러드는 까닭에 폭포가 떨어지는 곳이 자연히 못(潭)이 되었다.

 

절벽 아래로 가늘게 떨어지는 높이가 수백 척이나 되니, 물의 량은 적으나 그 형세는 높아 물줄기가 흩어지며 떨어지는 형상이다. 그 옆에 거대한 혈(穴:굴)이 절벽의 3분의 2 지점 높이에 있어 위로 바라볼 수 있으나, 절벽을 타고 오르기는 불가하여 매번 이곳을 노니는 사람들의 한탄이 되었다.


​<선산군지 善山郡誌> 기록에 의하면 옛적 도선(道詵)이라는 스님이 이 굴 속에 거처하며 수도하였다 하고, 그 뒤에 나의 선조 욕담(浴潭)선생이 또한 임진왜란 때 이 도선굴에서 피란하셨다. 일찍이 대혜폭포 아래 못에 목욕하시며 스스로 호(號)를 욕담(浴潭)이라 하여 이끼 낀 절벽에 두 글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완연하다. 더욱이 당시에 어떻게 절벽 한 가운데 위치한 굴속으로 드나들었는지 알 수 없다.


정축년(1937) 봄에 내가 길을 만들자는 뜻을 발의하니, 모두들  의론을 함께하였다. 이에 절벽 옆으로 암석을 깎아 잔도(棧道)를 만들고 쇠줄로 난간을 설치하여 굴로 통하게 하였으니, 헤아려보건대 높이 21척, 넓이 24척, 길이 25척으로 굴 안에는 기와 조각, 쇠그릇 등이 아직까지 묻혀있어 옛 사람의 자취를 믿을 수 있었다.


그러하나 산의 형세가 어찌 변하겠는가?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호사자(好事者)의 훼손인가? 모두가 알지 못할 것이리라. 길이 이미 관통하게 되자 시인(詩人:騷人)과 유람객(翫客)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아 마침내 한 구역 승경(勝景)을 더하게 되었다.

 

모두 말하기를 "이 공(功)에 기록이 없을 수 없다." 하기로, 내가 면장(面長:구미면장)의 직책에 있으면서 실지로 이 일을 맡아서 감독하였기에 곧 돌에 새겨 기록을 남겨 뒷날 올라오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니, 명승지를 보호하는 하나의 역사라고 하겠다. 구미 면장(面長) 김승동(金升東)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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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도선굴 앞에 있는 김승동면장의 금오산굴통로기(金烏山窟通路記)비문>


김승동의 세 번째 손꼽을 일은 바로 면장으로 재직하면서 장학사업과 많은 빈민들의 세금감면과 구휼활동이었다. 당시 일제 치하에서 김승동은 젊은이들이 학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김승동의 교육에 대해 상당한 관심과 노력으로 많은 인재들을 배출되었다고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오고 있다.


김승동은 어쩌면 식민지 조국에서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과 혜택을 줄 것인가를 깊이 있게 고민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사람들을 돕는 것이, 김승동 자기 자신만의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필자는 추측해 본다. 지금 현재 김승동 면장의 증손녀 김정숙씨는 서울대 약학과를 거쳐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에서 객원교수를 거쳤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때 식품의약품안전청 청장을 역임했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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