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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칼럼

【김기훈의 역사와 인물】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을 찾아가다.

이순락기자 0 2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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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현재 농부와 칼럼리스트로 활동>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의 손에 넘어간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회복하기 위해 1907년 6월 헤이그 평화회의에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을 비밀리에 파견한다. 이 평화회의의 목적은 열강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약소국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손에 넘어간 작은 나라, 조선은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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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평화회의 밀사로 파견된 이상설, 이준, 이위종>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한 3명의 밀사는 각국 대표에게 대한제국의 외교권 회복을 역설했지만, 모두 외면당하거나 조롱당했다. 외교권을 회복하려는 모든 것이 실패하자, 밀사의 대표를 맡은 이상설은 통한의 슬픔을 간직한채 귀국하지 않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다.

이상설이 귀국하지 않은 이유는 "세계!  어느 나라도 조선을 도와주지 않기 때문에, 독립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상설은 먼저 독립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독립군 기지건설”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부터 이상설은 국외에서 국내로 자기와 뜻을 같이 할 동지와 사람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이상설의 독립군 기지건설에 동참하는 대표적인 사람과 가문이 있었다.

 

그 가문으로는 경북 구미의 왕산 허위가문, 서울의 우당 이회영 6형제, 안동의 석주 이상룡 가문, 안동의 백하 김대락 가문들이 편안한 삶을 뒤로 하고 추위와 배고픔이 기다리는 만주벌판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뒤돌아 보지 않고 달려간다.


특히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선생과 백하 김대락은 안동을 대표하는 명문가이면서 안동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는 무려 1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쯤은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과 그의 고택인 임청각(臨淸閣)을 보거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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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선생>


임청각은 99칸으로 만석꾼의 위용을 자랑하며, 임청각의 노비가 무려 400여명 되었다고 한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면서 이들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고, 만석에 가까운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상룡의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첫번째 조치는 임청각의 정기를 끊기 위해 철도를 놓아버리는 잔혹한 짓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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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선생의 99칸 임청각이 일제 의해 훼손되고 임청각 앞에는 철도가 놓인다>


이상룡 선생은 1896년 의병활동을 지원하기 시작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삶 전체를 걸게 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만 5천 냥을 들여 정예의병을 창설하지만 의병의 실체가 발각되어 실패하자, 이상룡은 그전까지 유학을 고집하던 것을 버리고 신학문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애국계몽운동으로 전환한다.


그러다가 1910년 강제병합이 이루어지자, 1911년 1월 5일 52세의 나이로 만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가 망명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망명일기인 『서사록(西徙錄)』에 처음 떠나는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행장을 수습하여 호연히 문을 나서니 여러 일족들이 모두 눈물을 뿌리며 전송하였다”라고 나온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명은 이상희(李象羲)였다.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룡으로 개명하게 된다. 이유는 중국인들과 동화되기 위해서이다. 이상룡은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자, 조선의 선비로서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한번의 죽음뿐이다”라는 각오로 1911년 전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그리고 석주 이상룡은 중국의 만주 땅을 중국 땅이 아닌 과거 단군 성조와 고구려의 땅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는 왕산 허위가문의 허은(許銀) 여사였다.

허은 여사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한다. 허은 여사가 직접 기술한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게 되는 것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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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선생의 손자며느리,『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저자 허은여사>


“이시영 씨댁은 이 참판댁이라 불렀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많이 하여 지체 높은 집안이다. 여섯 형제분인데 특히 이회영·이시영 씨는 관직에 있을 때도 배일사상이 강하여 비밀결사대의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합방이 되자 이동녕 씨 그리고 우리 시할아버지(이상룡)과 의논하여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라고 허은 여사는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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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갑족으로 불려질 만큼 조선 최고의 부와 명예를 가진 집안 우당 이회영 6형제>


허은 여사는 일창 허발(一蒼 許坺)의 딸이다. 조부는 범산 허형(凡山 許蘅)이며, 왕산 허위(旺山 許蔿)와는 사촌이 된다. 따라서 석주 이상룡선생의 손자며느리, 허은 여사는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의 어머니 허길 여사의 조카가 되는 것이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이육사의 광야, 청포도, 절정이라는 위대한 시들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민족이 직면한 상황을 가슴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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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산 허위일가들 대부분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전생애를 바친다>


구미 임은동 왕산 허위 가문은 독립운동 서훈을 받은 사람만 무려 14명이 된다. 그러나 아직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고도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적지 않은 실정이다. 그렇다면 왕산 허위는 도대체 누구인가?

일본이 1896년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저항하다가 해산했다가 1906년 전국의병인 13도창의군 군사장을 맡다가 이후 대장을 맡아 서울진공작전을 펼치다 작전이 실패하면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 제1호 사형수가 된다.


청송 진보에서 의병을 이끌었던 허씨가문의 맏형, 방산 허훈(舫山 許薰) 그리고 성산 허겸이 모두 허위의 형제들이다. 허씨 가문의 맏형, 허훈은 의병활동과 동생들의 국권회복 운동에 전재산 3천두락(60만평)을 내놓는다. 허위 선생이 사형되고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자, 허씨 가문의 대부분의 형제들과 가족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추위와 배고픔이 기다리는 머나먼 만주로 향했다.


1909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왕산 허위선생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라고 안중근은 허위를 평가했다. 


이상룡 선생은 1910년 강제 병합되기 이전 1909년 2월 안동경찰서에 끌려가 약 1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다가 석방된 이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만들고 안동지역 젊은이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킨다. 그러나 대한협회가 친일단체인 일진회와 제휴를 하자 안동지회는 대한협회와 갈등과 충돌을 하면서 더 이상 일제치하에서는 독립운동이 어렵다고 판단한다.


석주 이상룡 일가는 1911년 1월 27일 발거(썰매 수레)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간다. 석주 이상룡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그 감회를 시로 옮긴다. 나라를 되찾겠다고 망명길에 오른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는 가슴 저미는 시를 홀로 남기고 떠난다.


“칼날보다 날카운 삭풍이, 차갑게 살을 도려내네, 내살 도려지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창자 끊어지는데 어찌 슬프지 않으랴.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 누구를 위해 머뭇거릴 것인가, 홀연히 나는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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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천전리의 의성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 전경>


이상룡 일가가 도착한 곳은 만주의 횡도촌이다. 이곳에는 이회영 일가와 김대락 일가가 이상룡 일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동에서 임하댐과 청송방향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천전리(川前里)가 나온다. 사람들은 이곳을 내앞 마을이라 부른다. 내앞 마을은 의성김씨 집성촌으로 오래전부터 경상도에서 4대 길지(吉地)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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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하 김대락의 생가 백하구려와 바위돌, 이 바위돌 위에서 협동학교 교사의 목이 베어진다>


이러한 마을 입구에 커다란 고택이 나오는데, 그곳을 보면 백하구려(白下舊廬)라는 큰 글자가 있다. 이것은 백하 김대락의 생가로 “백두산 아래에서 오두막 집을 짓고 살겠다”는 뜻으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집에 들어 가면 이집 가문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이 벽에 가득하다.

래서 김대락은 “백두산 아래”라는 뜻의 호(號)를 백하(白下)를 쓴다. 사실 독립운동사에서 김대락을 일반인들은 잘 들어보지 못한 인물이다. 하지만 백하 김대락을 모르면 독립운동사를 모른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독립운동을 이야기하면 김구선생만 떠올리는 것은 우리 역사의 스펙트럼이 이념 대결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백하 김대락 선생이 만주로 망명하기 이전 1907년 안동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했다. 당시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인 김대락은 안동 유림뿐만 아니라 영남지역에 커다란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던 보수유림인 위정척사파들은 협동학교가 있는 김대락 집을 습격하여 협동학교 교사들을 살해하는 참극을 벌인다.

아직도 김대락 생가인 백하구려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위에 교사들의 목을 자르는 잔인한 짓을 벌였다. 백하 김대락의 여동생 김우락(金宇洛)이 바로 석주 이상룡선생의 부인이다. 혈연으로 얽힌 관계는 훗날 빛나는 독립운동사를 남긴다.

따라서 김대락과 이상룡은 처남매부지간으로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함께 망명을 결정한다. 김대락 선생은 이상룡선생보다 먼저 만주로 망명을 하게 된다. 김대락 역시 만주를 고조선과 고구려의 땅으로 인식하여 타국이 아니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김대락은 당시 65세의 노인이었다. 독립운동사에서 그 유명한 김동삼(金東三)이 바로 김대락의 집안 조카였다. 김대락은 아들 김형식과 김동삼을 데리고 망명길에 올랐다. 김대락은 “식민지 땅에서 자손들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만삭의 손자며느리도 데리고 간다.


김대락은 망명길에서 증손자를 보았는데, 식민지가 아닌 중국에서 낳아 통쾌하다는 듯에서 증손자의 이름을 쾌당(快唐)으로 지었고, 둘째 증손자는 고구려 시조의 주몽의 땅에서 태어났다는 뜻에서 기몽(麒夢)으로 지을 정도로 일제를 배척했으며, 김대락은 횡도촌에 학교를 열어 후학들을 양성해 나간다.


김대락이 죽은 이후 백하의 정신을 계승하는 사람이 바로 집안 조카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과 동산 류인식(東山 柳寅植)이다. 김대락, 이상룡, 김동삼, 류인식은 당시 기존의 유림에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신문물과 신학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유림을 혁신유림(革新儒林)이라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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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국권침탈이후 안동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이며, 대표적인 혁신유림>

 

김대락의 또 다른 여동생 김락(金洛)은 예안의병을 일으킨 퇴계 이황의 후손인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의 며느리가 된다. 향산 이만도는 퇴계 이황의 11대 손으로 1866년 장원급제 하여 벼슬생활을 하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시행되자 의병을 일으킨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5적의 죄상과 을사늑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통렬한 상소문을 올리고 영양 일월산으로 들어가 산나물을 뜯어 먹고 살았다. 1910년 8월 29일(경술국치) 나라가 완전히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하자 절명 단식에 들어간다.

향산 이만도는 그냥 예사 선비가 아니었다. 안동지역의 유림을 대표하는 사람이었기에 만약 이만도가 죽는다면 일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정치적 상황이 발생한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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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 이만도선생의 절명단식 순국유허비>


그래서 일본은 강제로 이만도에게 음식을 먹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만도는 일본의 폭력과 회유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끝내 절명단식으로 죽는다. 이만도의 절명단식은 안동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이만도의 며느리가 바로 김대락의 여동생 김락이었던 것이다. 

 

이만도의 죽음을 목격한 아들 이중업(李中業)과 손자 이동흠(李棟欽) 그리고 며느리 김락은 이후부터 모든 삶을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만도의 죽음은 퇴계이황의 후손들뿐만 아니라 안동전체에 독립에 대한 의지와 행동을 불러 일으킨다. 이만도의 죽음은 조선 선비의 마지막 자존심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대락의 여동생 김락은 57세의 나이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경찰의 잔혹한 고문으로 두 눈을 잃게 된다. 죽은 자보다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보지 않아도 눈에 들어 올 것이다.삶 그 자체가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상룡과 김대락이 망명한 이후 국내에서는 데라우치 암살사건이라는 명목으로 “105인 사건”이 발생시켜 독립운동에 투신할 많은 사람들을 강제로 투옥시키고, 혹독하면서도 잔인한 고문가하면서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의 국권회복 운동은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독립운동에 투신할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의지와 행동을 좌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상룡·이회영·김대락은 독립운동에 대한 많은 지원과 동력을 잃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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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신민회의 간부들을 체포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


그리고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횡도촌에서 조선인들이 중국인들과 토지 매입 등으로 커다란 갈등이 발생한다. 문제가 심각져 가자, 우당 이회영이 청나라 조정의 실력자들을 설득시켜 토지매입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이회영의 노력으로 조선인들은 봉천성 삼원보를 옮겨 간다. 그리고 새 보금자리에 조선인 2000호가 자리 잡게 되고, 이상룡·이회영·김대락은 실질적인 삼원보의 우뚝한 지도자들이었다. 그리고 지도자답게 이들은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한다. 교육이 독립의 첫길이며, 끝이라고 생각했다.


경학사는 “낮에는 농사를 짓는 농본주의와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표방했다. 이상룡은 “아아! 사랑할 것은 한국이요, 슬픈 것은 한민족이로구나!”시작하면서 조선인들의 미래의 목표는 반드시 독립이라는 것을 천명한다.
 
1911년 4월 경학사를 결성한 망명객들은 독립운동을 전개할 독립군 양성을 위해 무관학교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망명객들은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개교한다.처음에는 신흥강습소로 출발한다. 신흥강습소는 다시 신흥무관학교로 탈바꿈하게 된다. 신민회(新民會)의 신(新)과 다시 일어선다는 흥(興)을 합쳐 신흥무관학교가 탄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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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청산리, 봉오동전투, 의열단원으로 활동 했다> 

만주벌판에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던 김대락은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다가, 1914년 12월 10일 따뜻한 조국의 품이 아닌 만리타향에서 차디찬 삭풍을 맞으며 죽는다. 김대락이 남긴『백하일기』는 만주에 망명하여 정착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하여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석주 이상룡과 우당 이회영은 당시 조선 팔도에서 알아주는 갑부들이었다. 그리고 대대로 조선의 대표하는 명문가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작되자, 모든 부귀영화를 한 순간에 버리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밀알이 되고자 얼어붙은 땅을 향하여 거침없이 달려갔다. 살을 도려내는 추위가 기다리는 만주벌판에서 그들은 독립을 위해 삶 전체를 바친다.


허은 여사는 1932년 5월 시조부인 이상룡 선생이 조국의 품이 아닌 순국하자, 시조모 김우락과 시어머니 이중숙을 모시고 귀국길에 오른다. 허은 여사가 돌아 온 조국에서의 삶, 또한 만주벌판 못지 않은 혹독한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의 감시하에 숨어지내면서 생계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상상만해도 끔직한 일이었다.

조선 최고의 부자 며느리들이 조국을 되찾겠다는 민족의 지도자의 의지와 노력 때문에 그렇게 여자들은 삶이 아닌 삶으로 자기를 희생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환영받을리 없었는 것은 당연했고 항상 감시의 대상이었다. 독립운동은 그야말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혹독한 삶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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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서 귀국하여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이시영선생>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자, 이러한 이회영·이시영 6형제들이 독립운동에 기여한 막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이시영은 초대 부통령이 된다. 그리고 이승만대통령은 이시영에게 독립운동에 바친 6형제의 전 재산을 정부차원에서 돌려주겠다는 의견을 이시영부통령에게 묻는다.

이시영부통령의 답변은 “재산을 되찾으려고 형님들께서 독립운동 한 것이 아닙니다.”하고 단호히 거절한다. 그리고 이시영은 부통령은 이승만의 독재에 가까운 정치와 정치적 노선이 다르자, 부통령직에서 사임한다. 우당 이회영 형제들의 재산은 현재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당시 경기도 양평 땅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1990년 독립운동에 전재산과 전가족을 받쳐던 이상룡선생의 유해가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李炳華)선생이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이 인정되어 독립장에 추서된다.

상상만해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들을 같은 하늘아래 숨쉬었던 사람들이 했었다.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팔아 먹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고 살아 남은 자로서 나라를 위해 이들의 숭고한 희생과 업적을 적어도 기억하고 존경하는 것이 살아 숨쉬는 자의 몫이 아닐까 한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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