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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칼럼

【김기훈의 역사와 인물】매학정(梅鶴亭)에서 그 옛날 천재들을 만나다.

이순락기자 0 1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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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현재 농부와 칼럼리스트로 활동 중>


필자는 오래 전부터 매학정에 대한 글을 써기 위해 자료 수집과 사람들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가 필자는 올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농사일에 매진하게 되었다. 


한참 동안 매학정에 대한 것을 잊고 있을 때, 금오산의 구미성리학역사관 기획전시에서 “고산황기로 탄생 500주년 기념”으로 “매학을 벗 삼아 펼친 붓 나래”라는 제목으로 황기로선생에 대한 특별기획전을 한 것을 보고, 새삼 다시 역사와 인물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용솟음 치기 시작했다.


금오산을 정상으로 가다 보면 오른 쪽으로 큰 바위가 나타나는데, 거기에 “금오산의 깊고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금오동학(金烏洞壑)”이란 초서 형태의 명필의 암각이 나타난다. 금오동학의 주인공이 바로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이다. 오늘은 이 천재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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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초성(海東草聖)으로 일컬어 지는 고산 황기로(孤山黃耆老)의 금오동학(金烏洞壑)>


구미에서 33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현일중·고등학교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해 숭선대교를 지나기 전 왼쪽으로 낙동강변 언덕에 매학정이 있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수백년 동안 강바람을 이겨내며 지금까지 있다. 이 매학정(梅鶴亭)을 만든 이가 바로 고산 황기로이다.


이 매학정이 있는 곳은 구미시 고아읍 예강리이다. 예(禮)가 흐르는 강(江)이란 뜻에서 예강리가 되었다. 예전에 어른들이 “이국”이라 불렀다. 예곡(禮谷)을 옛 어른들은 “이국”하였던 것이다. “예(禮)가 흐르는 강(江)” 한마디로 멋진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지명을 이렇게 붙이게 된 것에는 반드시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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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 황기로는 매학정에서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살다>


그래서 한겨울 낙동강 강바람을 맞으며, 필자는 황기로에 대한 역사적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역사의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도 유유히 흐르고 있는 낙동 강변의 매학정은 황기로와 얽힌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던져 줄 수 있는 열쇠가 된다고 하겠다. 거대한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 떼처럼 과거 속으로, 역사 속으로 가겠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율곡 이이(栗谷 李珥)를 모르거나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율곡을 모른다면 한국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오천원권 지폐의 주인공이 바로 율곡 이이기 때문이다.

이것 뿐인가?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9번이나 장원급제를 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일컬어지며 조선 시대 전체를 통틀어 천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느닷없이 황기로를 이야기 하고자 하면서 율곡 이이를 필자가 이야기 하는 것은 율곡 이이를 이야기 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황기로 선생을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 신사임당은 5만원권 지폐의 주인공이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통화되고 있는 돈에 덕수이씨 가문의 사람들이 가장 많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니다. 우리나라 동전 100원에는 덕수 이씨 가문의 전설적인 영웅이며, 과거와 현재를 합쳐 전세계 해군제독 중 가장 뛰어난 이순신 장군이 있다.


덕수이씨 가문은 현재 약 5만명 정도인데, 한국의 금융과 통화 정책을 좌지우지 하는 인물들 역시 덕수이씨 가문의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인 사람이 한국은행 총재 이주열 총재이다. 이외에도 많은 덕수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훌륭한 조상을 본받아 한국사회에서 모든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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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 과거에 장원급제한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1548년(명종 3년)에 율곡 이이가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이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율곡은 이때부터 삶에 대한 회의와 죽음에 대해 생각에 빠져들어, 18세에 불경을 접하여 공부하게 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1년 동안 승려 생활을 하다가 다시 환속한다.


율곡의 금강산 입산하여 불교에 대한 귀의는, 당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사회로 율곡의 불교에 대한 귀의 했다는 것은 조선 시대에 반유교적 행위로 율곡을 평생 동안 뿐만 아니라, 그가 죽어서도 그를 따라 다니며 괴롭혔다.


이이는 다시 속세로 돌아와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22세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을 하여 1년 동안 처가인 성주에서 처가살이 생활을 한다. 율곡이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게 된 이유는 노경린이 한양에서 생활 할 때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가 결혼생활을 시작했을 때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돌아가셨지만, 외가인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는 아직 외할머니 용인이씨(龍仁李氏)가 살아 계셨다. 율곡은 외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경상도 성주에서 강원도 강릉으로 먼 길을 정처 없이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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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이자, 조선시대 여성들의 롤모델 신사임당>


성주(星州)에서 길을 떠나 강릉으로 향하던 율곡 이이는 상주(尙州)에 도착하여, 안동 예안의 계상서당(溪上書堂)에 머물고 있던 조선 시대 최고의 학자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만나고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한다. 조선 시대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누구나 퇴계를 만나 보는 것이 선비들의 꿈이었다.


율곡은 외할머니가 기다리고 있던 강릉을 뒤로 한 채, 안동 예안에서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 심취해 있던 퇴계를 만나러 발걸음을 옮긴다. 그 해 3월 예안의 계상서당에서 조선 시대 최고의 학자인 58세의 퇴계와 조선시대 23세의 최고의 천재가 서로 만나 3일 동안 밤낮으로 학문에 대한 심도 있는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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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초기에 제자들을 가르치던 계상서당>


퇴계는 율곡을 만나고 난 이후 공자(孔子)가 말한 “자기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이지만, 두려워 할만하다”는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평가 했다. 당시 퇴계와 율곡의 대화는 잘 알 수 없지만, 율곡에게 평생 문제가 되었던, 금강산에서 승려가 되었던 것과 앞으로 어떻게 학문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해 퇴계에게 물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추측한다. 


조선 시대 많은 역사적 장면이 있었지만, 퇴계와 율곡의 만남은 한국 철학사에 제일 첫 번째 명장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하여 퇴계와 율곡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게 되고, 율곡은 퇴계와 헤어진 이후에도 궁금하거나 의문이 있다면 편지를 통하여 퇴계에게 허심탄회하게 물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575년(선조 8년) 사림파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지는 동서분당(東西分黨)에서 퇴계를 따르고 배웠던 인물들은 동인으로, 율곡을 따르고 지지하던 인물들은 서인으로 나누어지는 참혹한 당쟁(黨爭)이 시작된다. 학문적으로 퇴계 이황은 영남학파로 종장(宗匠)이 되고, 율곡 이이는 기호학파의 종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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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의 대철학자 퇴계 이황>

  

사실 율곡은 사림(士林)이 동·서인간 갈등이 분당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동인들은 율곡을 서인이라고 지목하면서 율곡 이이는 피로감에 지쳐갔다. 결국 율곡 이이의 중재 노력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삼사(三司)로부터 탄핵을 받아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율곡 이이의 중재 노력이 좌절되면서 당쟁은 조선 후기의 정치를 극심하게 왜곡하게 되고, 조선의 역사를 비극적으로 만든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당쟁으로 승리한 서인들의 안방무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이로써 성리학적 조선은 경직되고 폐쇄된 사회로 가고 말았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매학정은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와 옥산 이우(玉山 李瑀)를 빼놓고는 그 역사적 실마리를 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야기 할 수도 없다고 하겠다. 앞에서 매학정을 이야기 하는데, 왜 갑자기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거론하는 것을 좀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고산 황기로는 퇴계의 제자이며, 옥산 이우는 율곡 이이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의 동생 옥산 이우는 황기로의 사위가 되기 때문이다. 고산 황기로는 조선을 통틀어 서예(書藝)에서 가장 어렵다는 초서(草書)의 대가이다. 그래서 황기로는 본인의 글씨인 초서로 성인의 반열에까지 올랐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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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625호로 지정된 황기로 초서 이군옥시(黃耆老 草書 - 李羣玉詩)


사람들은 그를 초성(草聖)이라 불렀다. 황기로는 조선의 왕희지(王羲之)라 불릴 만큼 그의 글씨는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었는데,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굉장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구도 부인 하지 못한다. 황기로의 초서 글씨는 보물로 지정된 것들도 있고, 거래된다면 몇 억을 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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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황기로의 초서(草書), 신의 경지라 할 수 있다>


황기로의 본관은 덕산황씨(德山黃氏)로 1521년에 선산에서 태어나 1534년(명종 18년)에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벼슬 길에 나가지 않고, 매학정에서 한평생 매화와 학을 키우면서 시와 거문고를 즐기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살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아버지 황이옥(黃李沃) 때문이다.


황이옥의 상소로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최대 희생양인 조광조(趙光祖)가 죽게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누구인가? 기묘사화는 훈구파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심정(沈貞)등이 신진 사림인 조광조와 김정(金淨) 일파를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을 일으켜 신진 사림을 제거 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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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도정치를 통한 개혁정치를 하고자 했던 조광조>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의 주초위왕(走肖爲王)은 그 동안 조광조에게 신임을 아끼지 않던 중종의 마음을 돌변하게 만든다.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의 주초위왕은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던 중종도 이 기회를 삼아 항상 개혁을 주장하는 신진 사림을 조정에서 제거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개혁은 좋지만 굉장한 피로감을 동반한다.

 

조광조가 왕도 정치와 철인 정치를 외치며, 개혁 정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실천해 나가면서, 훈구파 뿐만 아니라 왕권이 약했던 중종마저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제거하는데 의기투합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와 사림파는 죽음의 정치적 덫에 걸려 들었던 것이다.


조광조는 조선 시대 글을 읽을 줄 알거나, 갓을 쓴 선비라면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성리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정통 성리학과 조선이 개혁 되기를 원하는 사림파들의 중심에는 조광조가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는 조선 시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같은 존재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조광조는 성리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능주(지금의 화순)로 귀양 간 지 한 달 남짓 되어도 임금의 노여움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중종은 조광조를 죽이자는 상소를 원했지만, 아무도 상소를 올리지 않았다. 조광조를 죽이자고 상소를 올리는 것 자체는 선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 황이옥(黃李沃)·이래(李來)·윤세정(尹世貞) 등이 조광조를 죽이자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떠나 이들은 출세욕에 눈이 먼 사람들이었다. 이로써 조선시대 모든 선비들의 존경을 받던 조광조는 이들의 상소로 말미암아 사사(賜死)된다.


중종은 조광조를 죽일 수 있도록 만든 황이옥에게 술을 내린다. 중종 실록에는 황이옥을 “조광조를 헐뜯어 임금의 뜻에 영합하니, 사람들이 모두 본디 성품이 흉악한 자다”라고 기록한다. 이로써 황이옥은 선비들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인정받을 수 없거니와 평생 손가락질을 받고 숨어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가야 했다.


조선시대 선산(善山)에서 3형제 모두가 문과 급제한 가문은 진주하씨(晉州河氏)인 하강지(河綱地)·하위지(河緯地)·하기지(河紀地) 3형제와 덕산황씨(德山黃氏) 황린(黃璘)ㆍ황위(黃瑋)ㆍ황필(黃㻶) 3형제가 유일하다.

이 덕산 황씨 3형제 중 한분이 고산 황기로의 조부 황필이다. 황필은 아들 황이옥의 잘 못을 뼈저리게 느끼며 가문의 수치로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황이옥의 상소로 조광조가 사사된 이후 황씨 집안은 벼슬 길에 나가지 않는 방향으로 삶을 선택한다.

따라서 황기로 역시 무시무시한 상황과 환경을 인식하며 성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부 황필은 손자 황기로에게 벼슬 길에 나가지 말 것을 당부했을 것이다. 그리고 낙동 강변에 매학정을 지어, 매화와 학을 키우면서 평생 시를 짓고, 글을 써며 살아 가기를 바랬을 것이다. 이로써 천재 황기로는 조부의 뜻에 따라 살아가게 되었다.

벼슬길에 나간들 모든 사람들에게 창피와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조부 황필은 알았다. 그리고 조부 황필 역시 조광조와 학문적·정치적 궤적을 같이 하는 사림파였던 것이다.


조부 황필은 조선 시대 모든 선비들의 마음속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제자였던 것이다. 조광조는 어찌 보면 황필의 후배였던 것이다. 아끼는 후배를 아들이 죽였으니 그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웠겠는가?


점필재 김종직의 도통관과 학통은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에게 이어지고, 이것은 다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로 이어진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맥은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 퇴계 이황(退溪 李滉) 이렇게 이어진다.


황기로의 부친 황이옥의 조광조 사사 상소는 그야말로 이 조선 성리학의 도통관과 학통을 부정하는 일이며, 또한 황기로의 조부 황필에게는 스승 김종직을 부정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를 살아가는 선비들에게 조광조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는 것은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부 황필은 황기로가 매학정(梅鶴亭)에서 매화와 학(鶴)을 키우며 살아 갈 것을 당부한 것일지도 모른다. 황기로가 벼슬길에 나갔다면 아버지 황이옥의 상소로 조광조가 죽었다는 꼬리표는 평생 따라 다니며 황기로를 괴롭혔을 것이다.


따라서 황기로는 조부의 뜻을 받들어 1534년(중종 29) 1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조부 황필의 뜻에 따라 황기로는 평생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처럼 키우며”,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술과 시를 즐기며 거문고를 타면서 위대하면서도 예술적인 글을 남겼다.


그러다가 흥에 취하면 신에 가까운 글씨를 남겼다. 천재성의 표현을 초서로 승화 시켰던 것이다. 천재가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하면 미쳐버리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의 글씨는 사람이 썼다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글씨가 아닌 예술 작품이 되었다.


황기로는 조선 시대의 치명적 약점을 글씨로 승화 시키고, 극복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아마 황기로가 아버지의 과오가 없어 벼슬 길에 나갔다면, 불세출의 전무후무한 그러한 초서를 후대에 남겼겠는가? 그리고 초성이 되었겠는가? 아마 필자는 불가능했다고 판단한다.


당대의 이름 있는 선비들이라면, 고산 황기로를 만나보고 글씨 하나를 받아 보기 위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고, 황기로의 글씨를 받아보기 위해 어떠한 대가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화와 학을 함께 하는 황기로를 신선으로 까지 묘사했고, 지금도 고산 황기로를 신선이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조선의 이름 있는 선비들은 황기로를 초서의 성인이라 하여 초성(草聖)으로 불렀다. 그래서 현재에도 황기로의 초서 한 장이 값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황기로의 초서 작품 중에서도 특히 칡으로 만든 칡 붓인 갈필(葛筆)로 쓴 초서는 그의 예술성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현재의 구미시 고아읍 대망리를 조선시대에는 망장(網場)이라 불렀는데, 그 곳에는 금수골이라는 칡넝쿨이 많은 골자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 곳에서 황기로는 숯으로 칡 잎에 글씨 연습을 너무나 많이 하여 비가 오면 골자기 냇물이 숯 검정으로 새까맣게 되어 흘렀다고 전해진다. 황기로는 초성이라 불려 질만큼 되기까지 남다른 노력을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은 1541년(중종 36년)에 풍기군수인 주세붕(周世鵬)이 세웠고, 서원이 세워진 한참 후에야 경렴정(景濂亭) 정자의 현판을 고산 황기로가 쓰게 된다. 일화에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황기로에게 초서체의 현판 글씨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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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이 고산 황기로에게 부탁한 소수서원 경렴정 현판>


퇴계를 본 황기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어 식은땀을 흘리다가 퇴계가 자리를 비켜주자, 그 때서야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경렴정(景濂亭)이라는 현판의 글씨를 썼다고 한다. 경렴정의 현판이 워낙 명필이라 진본은 박물관에 보관하고 지금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라고 한다.

퇴계 이황은 경(敬)을 항상 강조하는 철학관을 가졌기 때문에 글씨 역시 자유분방한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퇴계는 사람들이 글을 쓸 때도 바르게 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게 된다.

퇴계는 “매사를 하나같이 바르게 하라”는 가르침을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엄히 가르쳤지만, 퇴계의 매학정시(梅鶴亭詩)에서 알 수 있듯이 황기로에게 만큼은 예외적으로 관용을 베풀었다. 이러한 퇴계의 배려는 황기로에게 더없는 기회였으며, 황기로는 퇴계의 이러한 배려에 부응하고자 더 열심히 노력하여 초서의 대가가 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퇴계 이황은 황기로에게 “백학이여 매화 늙음을 한탄치 마라. 장욱(張旭)처럼 글씨 쓰며 노년을 즐기리라” 노래하고 있다. 장욱은 중국 당나라 때의 초서의 대가로 초성(草聖)으로 불려진 인물이다.

당나라 때 이백(李白)의 시와 배민(裵旻)의 검무, 그리고 장욱의 글씨가 삼절(三絶)로 유명했다. 퇴계는 황기로를 당나라 글씨로 유명한 장욱에 비교했던 것이다. 이로써 황기로의 글씨는 용이 승천하는 일필휘지의 초서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영주의 사계(砂溪) 장여화(張汝華)가 전계초당(箭溪草堂)을 짓고 편액을 써줄 것을 황기로에게 청하자, “내가 흥이 날 때 휘호할 것이니 기다리라”고 했다. 며칠 뒤 산사를 거닐다 갑자기 “내가 지금 흥이 났으니 종이와 붓을 준비하라”고 통보한다.


황기로 자신은 산에서 칡넝쿨 줄기를 이빨로 씹어 갈근필(葛根筆)을 만들어 전계초당 넉 자를 썼다. 황기로는 전계초당(箭溪草堂) 쓰고는 “내 평생의 득의작(得意作)”이라며 글을 써 달라는 장여화보다 더 기뻐했다고 한다. 득의작(得意作)이란 예술가가 만들어낸 창작물 중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좋아하는 작품을 말한다.


선산출신 이증영(李增榮)이 합천군수로 있는 동안 극심한 흉년이 닥치자, 백성들을 몸소 구휼하고 청렴하게 관직 생활을 하여 합천 백성들이 이증영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백성들은 이증영에 대한 고마움의 보답으로 이증영 유애비(遺愛碑)를 세우기로 한다.

유애비의 글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쓴다. 그리고 남명 조식은 글씨를 황기로에게 부탁한다. 남명 조식 역시 황기로가 신선에 가까운 글씨의 재능을 알아 봤고, 이미 오래전부터 두터운 교분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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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군수 이증영의 유애비, 남명 조식과 고산 황기로가 만나다>


남명 조식이 누구인가? 당대 조선에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던 대학자가 아니었던가! 한사람은 경상도 좌도에서, 한사람은 경상도 우도에서, 서로가 학문과 도(道)를 닦으면서 천하의 인재를 길러 낸 대학자이자, 철학자들이었다. 황기로는 과분할 정도로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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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남명 조식>


황기로의 사위 옥산 이우(玉山 李瑀)와 그의 형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덕수이씨 형제이다. 덕수이씨는 지금의 개성 개풍군 덕수리를 관향(貫鄕)으로 하는 성씨이다. 율곡 이이와 옥산 이우가 외가인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러나 그들의 고향은 엄연히 아버지 이원수의 고향인 경기도 파주 율곡리가 그들의 고향이었다. 그래서 이이는 자신의 호(號)를 율곡(栗谷)으로 쓰게 된 것이다. 율곡은 밤나무 골짜기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율곡하면 "나도 밤나무, 너도 밤나무 이야기"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율곡이 호랑이에게 물려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천(千) 그루의 밤나무를 심었는데, 두(二) 그루가 죽어 998 그루가 되었다. 두 그루가 죽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도 밤나무" 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나무에게 "너도 밤나무"잖아 해서 천 그루의 밤나무를 채워 율곡이 호랑이에게 물려 가지 않았다는 "나도 밤나무와 너도 밤나무" 전설이 오늘 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율곡 이이와 파(派)는 다르지만, 덕수이씨(德水李氏)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임진왜란에서 바람 앞에 등불인 조선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장군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율곡 이이 사이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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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영웅으로 평가 받는 충무공 이순신장군>


1576년(선조 9년)에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를 거쳐, 전라도 종 4품의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된다. 그러나 1583년 5월 병조정랑을 맡은 서익(徐益)과 서인(西人)들은 이순신에게 부당한 명령을 내리고 뇌물을 요구했지만, 이순신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단호히 거절한다.


이에 병조정랑 서익은 이순신이 동인(東人)들, 특히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과 친하다는 이유를 들어 모함과 흉계를 꾸며, 3년전에 이순신이 맡은 계급으로 강등시킨다. 이때부터 힘없는 이순신은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 끊임없이 위기에 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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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전란을 지휘하고 수습한 서애 류성룡>


그해 12월 율곡 이이는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이조판서에 올랐다. 율곡이이는 류성룡에게 이순신이 같은 덕수이씨 문중 사람이니, 이순신을 만나보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한다. 류성룡은 이순신을 찾아가 율곡의 뜻을 전하니 이순신은 이렇게 말했다.


“나와 율곡은 같은 덕수 가문(家門)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이조판서의 자리에 있을 때 만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오.” 하면서 이순신은 율곡과 류성룡의 청을 단번에 거절한다. 이후 서인 세력들은 이순신의 계급을 강등시키고, 이순신이 예전에 근무 하던 훈련원으로 보내 버린다.


1년이 흘러 이순신은 다시 좌천되어,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하급 군관으로 임명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족 추장을 사로잡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하지만, 북병사 김우서(北兵使 金禹瑞)는 이순신이 군사적 명령 없이 독자적 행동이라며, 오히려 이순신을 처벌해야 한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린다.

이로써 이순신의 전공은 사라지고 위기에 직면한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공도 없애는 동시에, 처벌도 없게 하는 조치를 취한다. 불굴의 의지와 용기를 가진 이순신에게는 항상 불운이 따라 다니기 시작한다.


이순신은 아버지 3년 상을 모시고, 다시 함경도 조산 만호와 녹둔도 녹전관에 임명되었는데, 여진족의 기습으로 조선 백성 60여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한다.

이에 이순신은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장 4명의 목을 베고, 재물과 포로를 구출하였다. 하지만 이순신도 다리에 화살을 맞고 전사자가 10여명이 나왔다. 이 결과에 대해 이순신은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당시 북병사를 맡고 있던 이일(李鎰)은 이순신이 병력 증강을 요구했음에도 이를 무시한 것이 밝혀 질까봐 두려워 이순신의 목을 베야 한다고 조정에 장계를 올린다. 나중에 북병사 이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 북천 전투에서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비겁한 장수였다.

따라서 이순신은 자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는 자기 변호의 상소를 올렸지만,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곤장을 때리고 계급을 완전히 빼앗는 백의종군을 시킨다. 이것이 이순신의 제1차 백의종군인 것이다. 우리들이 잘 아는 임진왜란 중의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은 제2의 백의종군인 것이다.


이순신은 무과 급제 이후 항상 시기 질투와 모함,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 까지 가는 생애를 살았다. 그렇다고 이순신은 높은 사람에게 부탁과 청탁을 하지 않고 고지식할 정도로 타협하지 않았다.

사실 율곡 이이와 이순신은 같은 덕수이씨 문중으로 항렬 상 이순신이 아재뻘이 됨에도 조카뻘인 율곡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충무공 이순신과 율곡 이이는 촌수로 19촌이 된다.


승승장구하고 있던 율곡은 이순신에게 도움을 주려 했지만, 이순신은 그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에서 23전 23승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의지와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순신은 정읍현감으로 있다가 친구인 류성룡이 영의정에 오르자, 류성룡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발탁한다. 정읍현감은 지금의 대위 정도 계급이며, 좌수사는 지금의 투 스타(two star)인 소장(小將)정도이다. 이순신은 6단계를 뛰어 넘는 있을 수 없는 진급을 한 것이다. 류성룡은 오래전부터 이순신의 사람 됨과 그의 지혜와 용기를 익히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책임지고 진급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 집안의 후손들과 류성룡의 자손들 사이에는 수백년 동안 끊이지 않는 교류를 해 왔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 것에 따라 인생의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이순신과 류성룡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류성룡의 이순신 좌수사 발탁이 없었다면 조선은 임진왜란 때 끝나는 왕조가 되었을 것이다.


잠시 율곡 이이와 충무공 이순신의 관계를 살펴봤다. 다시 돌아가서 율곡 이이의 동생 옥산 이우와 그의 장인 고산 황기로를 살펴보겠다. 옥산 이우는 조선 최고의 명필이라 일컬어지는 고산 황기로의 사위가 되면서 덕수이씨가 선산(善山)지역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옥산 이우가 황기로의 사위가 된 사연에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첫 번째, 율곡 이이와 옥산 이우의 아버지 이원수가 을사사화(乙巳士禍)에 화를 입고, 성주에 유배되어 있던 묵재 이문건(默齋 李文楗)과 교류하다가 이원수가 평소 이문건과 친하던 고산 황기로를 만나게 되면서 옥산 이우가 황기로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율곡 이이가 성주에서 강릉 오죽헌(烏竹軒)에 있던 외할머니를 찾아가다가 도중 조선 최고의 학자인 퇴계 이황을 만나러 안동 예안을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길을 떠난다.

그런데 선산에 들러 조선 최고의 명필가로 알려져 있던 매학정의 황기로를 찾아 동생 이우가 있는데,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 황기로는 그러면 나에게도 무남독녀 고명 딸이 있으니 결혼 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소? 하여 옥산 이우가 황기로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율곡 이이가 안동 예안의 계상서당에서 퇴계 이황을 만나 3일 밤낮을 앞으로 나갈 학문에 대한 이야기와 자기 신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도중 율곡이 저에게 동생이 있습니다. 하니 퇴계가 그러면 제자인 황기로에게 좋은 딸이 있는데 서로 결혼 시키는게 좋지 않겠소? 해서 율곡 이이의 동생인 옥산 이우가 황기로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율곡 이이는 9번의 장원을 차지한 천재였다.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은 친가로 4대까지 할머니들을 포함해 조상의 이름과 본관 알아야 했고, 외가 또한 4대까지 할아버지들의 이름과 할머니의 본관을 알아야만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율곡 이이의 외가는 평산신씨(平山申氏) 집안이다. 율곡 이이의 외가 고조부는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낸 신개(申槩) 대감이다. 그 부인이 군사(郡事) 김가명(金可銘)의 딸이다. 그러니 김가명의 딸은 율곡 이이에게 외고조모가 된다. 외고조모가 바로 선산김씨(善山金氏, 들성김씨)로 불리는 김가명의 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율곡 이이에게는  본래부터 선산 땅이 낯설지가 않은  곳이었다. 외고조모의 고향이자, 조선 성리학의 출발점인 선산에서 율곡 이이는 고산 황기로를 만나는 것은 새로운 안식처에 도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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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내고리에 있는 옥산 이우의 산소 전경>


옥산 이우가 황기로의 사위가 된 것에는 어느 것이 정확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시(時)·서(書)·화(畵) 3절로 당대 최고가는 고산 황기로가 일찍부터 하나밖에 없는 무남독녀의 사위감을 찾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겠다.

율곡 이이는 안동 예안 계상서당에 머물고 있던 퇴계 이황을 찾아가면서 매학정에 머물고 있던 황기로를 찾는다. 율곡 이이는 황기로를 만나기 위해 매학정을 들러 아름다운 매학정을 노래하는 “매학정을 찾는다”는 방매학정(訪梅鶴亭)이라는 긴 장문의 시(詩)를 남긴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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