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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의 역사와 인물】개혁군주였던 정조(正祖)의 죽음과 인동장씨(仁同張氏)사람들...

이순락기자 0 4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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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 박사, 현재 농부와 칼럼리스트로 활동 중>


1800년 6월 28일 개혁 군주 정조 대왕은 죽음을 맞이한다. 지금까지 정조의 죽음에 대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 정조 대왕 독살설이다. 


1776년 할아버지 영조가 사망하면서 그 해 정조는 비로소 조선의 왕에 즉위 한다. 7월에 정조 암살 기도가 발생한다. 위로는 정순 왕후부터 아래로는 궁궐을 청소하는 사람까지 관여 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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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학(好學)군주이며, 개혁 군주였던 정조 대왕 어진(御眞)>


다행히 정조 암살 기도 사건은 암살 기도를 실행한 그 시간 정조가 밤늦도록 잠을 자지 않고, 책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노론(老論)이 주도한 암살 기도는 실패한다. 


암살 계획은 정조가 머물고 있는 존현각 지붕을 뚫고 자고 있는 정조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다.


이후에도 궁궐 담장을 넘으려는 괴한을 발견하는데, 천민 출신 전흥문(田興文) 체포되고, 정조 암살 기도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다. 비상 계엄 상황에서 다시 일어난 대담한 암살 기도 사건이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 세자가 노론과 영조에 의해 죽은 원인에는 “미쳤다, 사람을 죽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영조를 즉위 시킨 노론 세력이 사도 세자가 왕위에 오를 경우 남인(南人)과 소론(少論)을 등용할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노론에 의해 죽었던 것이다.


사도 세자를 죽이는 명을 내리는 것은 아버지 영조였지만, 노론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지 않으면 본인 뿐만 아니라 훗날 어린 세손(정조)이 왕위에 오르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영조는 아들인 사도 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다. 권력은 냉정하다 못해 항상 잔인한 면을 가진 것을 역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영조는 불안한 아들보다는 손자를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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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리 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 21대, 52년간 조선을 통치한 영조>


사도 세자가 죽는 과정에서 노론은 시파(時派)와 벽파(辟派)로 분열을 한다.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그 죽음을 동정하고 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즉위까지 막지는 않겠다는 것이 노론 시파였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사도 세자는 마땅히 죽어야 하며, 그 아들 세손 마저 죽이거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노론 벽파의 입장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론 시파와 벽파의 본거지는 정조의 외가였다. 정조의 외할아바지 홍봉한(洪鳳漢)은 시파, 작은 외할아버지 홍인한(洪麟漢)은 벽파였다. 노론은 사도 세자를 죽인 이후 세손인 정조를 제거하자는 당론을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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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외할아버지이자 노론 시파의 우두머리 홍봉한>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罪人之子 不爲君主) “죄인지자, 불위군주”를 조직적으로 퍼뜨리며 정조를 제거하거나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 했다.


다시 노론은 정조의 즉위를 지지하는 부홍파(扶洪派),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는 정순왕후와 경주김씨 가문은 공홍파(攻洪派)로 나뉘어져 두 외척간에 치열하게 대립한다. 


홍봉한을 중심으로 하는 풍산홍씨(豐山洪氏)가문과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경주김씨(慶州金氏) 가문이 노론 안에서도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이들은 사도 세자를 죽일 때는 한 배를 탔다가, 사도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이 사도 세자의 죽음을 동정하고 시파로 돌아서자,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구주(金龜柱)가 곧바로 홍봉한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노론은 부홍파와 공홍파로 나뉘어져 치열하게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싸우며 대립한다.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속성처럼 같은 노론이지만, 한치의 양보도 없이 주도권 다툼을 하게 된다. 


나이가 많고 몸이 쇠약해진 영조가 세손인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 주기 위해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노론 벽파와 공홍파들은 영조에게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없으며, 국사나 조사는 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세손이 세 가지 일을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가지론(三不可知論)이다. 그러나 영조는 1775년 12월 8일 세손인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강제로 시행하게 한다. 그러나 22일 신하들 중 대리청정 조참(朝參)에 참여한 신하는 한 명도 없었다.

이것은 신하들이 세손인 정조를 자기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조는 곧바로 세손 정조에게 군사권(軍事權)을 넘긴다. 권력적 기반이 약한 정조가 군권마저 노론에게 빼앗긴다면 정조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는 불가피한 조처였다.


영조와 정조는 신하들에게 불만을 표현하지는 못하고, 할아버지와 손자는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임금을 능멸해도 화를 내지 못하는 왕이 되어 있었다. 왕이 신하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대였던 것이다.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 반정 이후부터 택군(擇君)의 시대가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신하가 군주를 택하는 “택군”이었던 것이다. 왕권은 살아지고  바야흐로 신하가 왕을 선택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1776년 3월 3일 영조가 재위 52년을 기록하며 죽는다. 영조가 승하한지 5일 후 세손은 왕위에 오른다. 선왕인 영조의 시신이 있는 빈전 밖으로 정조는 대신들을 부르라 명을 내린다. 


여기에서 정조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정조가 왕위에 즉위 하는데 반대했던 세력들인 노론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정조도 참을 만큼 참았던 것을 대외적으로 공표했다.


사도 세자 죽인 세력과 자기의 왕위 즉위를 반대한 세력은 같은 세력이라 정조는 생각했다. 정조의 공격은 사도 세자를 죽인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즉위에 반대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 노론에 공격 계획을 세웠다. 


정조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외가의 홍인한 뿐만 아니라 노론의 주도적 인물들을 1차적으로 유배형을 단행한다. 정치에서 즉위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참았지만, 왕이 된 이상 더이상 참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조에게 노론과 벽파 공홍파가 반격을 준비하는데 바로 그것이 정조를 암살 기도 사건이었다. 사도 세자가 죽은 이후 조정은 노론 일당체제였다. 유일한 남인은 채제공(蔡濟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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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정조때 유일하게 남인으로 재상까지 오른 채제공>


채제공은 사도 세자의 신원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고 정조의 뜻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정조는 채제공을 우의정(右議政)에 발탁하고 끝임없는 신뢰를 보낸다.


채제공을 우의정에 앉게 하자, 노론의 저항은 정조의 전교를 거부하고, 왕명의 집행을 거부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오늘날 조정에 임금이 있는가?, 신하가 있는가?, 윤리가 있는가?, 강상이 있는가, 국법이 있는가?, 기강이 있는가?”라며 대노했다.


정조의 정치 개혁의 첫 순서로 안동 도산서원에서 별시(別試)를 거행한다. 이것은 공개적으로 영남 남인들을 등용하겠다면 노론에 대한 대외적 선전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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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맞은 편 낙동강 상류 섬에서 별시가 진행되었다>


영조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 이후 65년 만에 영남 남인들에게 과거길이 열었고, 정조는 답안지를 직접 채점 했다. 이 별시에서 상주(尙州) 출신의 강세백(姜世白)과 안동의 김희락(金熙洛)이 장원으로 선발되었다.

1795년 정조는 채제공을 좌의정, 이가환(李家煥)을 공조판서, 정약용(丁若鏞) 우부승지에 임명한다. 철저하게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들을 기용하는 전략을 강력하게 실현시킨다.


그리고 정조는 서자(庶子) 출신이지만, 그들의 학문과 지식이 당대 최고였음에도 출신 성분 때문에 벼슬 길에 나가지 못하는 서자들에게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을 만들어 신분상 천대를 받던 서자들에게 벼슬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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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를 만나면서 천재성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다산 정약용>


당대 천재들이지만 서자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벼슬 길에 나가지 못한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서이수(徐理修) 등 4명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채된다. 


이로써 정조는 노론 일당을 분쇄하기 위해 다당제와 사상·인적 다원화를 추구한다. 노론 일당체제에 대한 다원화는 여러 정책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노론은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러한 정조의 개혁 정치는 그동안 빛을 보지 못한 구성원들에게 한줄기 희망을 갖게 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으로 조선후기 실학(實學)이 싹트기 시작하고 번성하게 된다. 


정조가 이러한 일들을 결정하고 단행한  궁긍적인 목표는 조선을 정상적인 왕조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왕조 국가가 아닌 비정상적인 신하들이 좌지우지 하는 국가였다.


1800년 정조(24년) 5월 30일 정조는 오회연교(五晦筵敎)를 내린다. 오회연교는 영조 이후 중요 시기마다 있었던 군신(臣)간 정치 의리에 있어서 의미 및 변화 말하는 것이었다. 


당파의 사적(私的) 의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군주에게 맞서는 일부 신료들에게 경고하는 동시에 군주가 천명하는 정당한 의리에 적극 응하라는 것이었다.


정조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사도 세자를 죽이고, 자신의 대리청정과 즉위를 방해하고, 심지어 자객을 보내 암살하려고 했던 노론 벽파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조는 반성하지 않고 옳은 길을 걷지 않으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경고를 강력하게 노론에게 보냈던 것이다. 정조의 오회연교로 노론은 궁지에 몰리고,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조는 오회연교를 발표하고, 6월 28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때 정조에게 약간의 종기가 있었는데, 노론 영수 심환지(沈煥之)의 측근이 어의() 심인이었다. 


심인은 수은이 들어간 연훈방(烟薰方)을 2번 사용했다. 이것은 지금으로 보면 수은을 사용하는 극약처방이었다. 곧바로 홍문관·사간원·사헌부인 삼사(三司)는 정순왕후와 심환지가 비호하던 어의 심인을 흉적(凶賊)이라며 공격한다.

대사간 유한녕(俞漢寧)은 순조가 즉위하는 7월 13일 어의 심인을 역의(逆醫), 심인을 국문하여 그 배후를 밝히는 동시에 관련자들을 국법에 따라 역적 죄로 다스려야 한고 강도 높게 주장한다. 대사간은 지금으로 말하면 검찰총장이다.

다산 정약용 역시 정조가 죽던 6월 28일 “시상(時相: 심환지)이 역의(逆醫) 심인을 천거하여 독약을 올리게 시켰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봤을 때,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것에 설득력을 얻기 시작한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죽음을 헤매는 정조와 함께 있겠다고 신하를 물리친 상태에서 정조는 죽고 말았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정조가 완전히 죽지도 않았는데, 인사권을 사용하여 윤행임(尹行恁)을 승정원 도승지로 임명한다. 


정조의 죽음은 곧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심각한 권력 투쟁이 왕권과 신권(權)사이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순조이후부터 국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라로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곧 안동김씨 세도정치 60년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정조의 죽음은 한마디로 조선의 국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의미했다. 정조는 조선 최고의 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무과 2000명을 합격시켜 호위와 국방에 만전을 기하고 왕권 강화를 실현시켰다.

정조가 죽은 이후 심환지와 정순왕후는 곧바로 장용영을 혁파해 버린다. 이 장용영 혁파는 국력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장용영 혁파는 100년 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출발점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노론의 심환지와 정순왕후는 조선의 모든 것을 과거로 회귀하도록 하였다.


호학군주이며, 개혁군주인 정조가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외세에 마구잡이로 짓밟히는 그런 역사의 결과는 초래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적어도 어느 정도의 완충적으로 외세를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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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무과급제자 2000명으로 만들어진 조선 최고의 부대 장용영> 


그러나 시중에서 심환지와 정순왕후가 어의 심인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면서 좋지 못한 소문이 들끓자 정순왕후는 독단적으로 심인을 유배 보내기로 한다.


그러나 여론이 더욱 악화되자 정순왕후는 7월 20일 “인심의 분노는 막기 어려워서 물정이 점점 격렬하여지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전교를 내려, 어의 심인을 8월 10일 사형시켰다.

그러나 onebyone.gif?action_id=327e20cd9f13006bbefbda98252e07d신하들이 국문(鞫問)할 것을 요청하자, 이것을 묵살하고 어의 심인을 사형시킨다. 국문도 없이 정순왕후가 갑작스럽게 어의 심인 처형하자, 신하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정조가 독살되었다고 믿기 시작했다. 
심인의 처형은 정조 독살설이 전국적으로 유포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8월 15일에 경상도 인동부(仁同府), 인동의 장시경(張時景) 3형제가 서울로 진격하여 노론 벽파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조작 사건이 일어난다. 이를 인동작변(仁同作變)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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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에서 인동도호부, 지금의 구미 인동>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했는데, 인동부사였던 노론 벽파 출신인 이갑회(李甲會)는 슬퍼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이 풍악을 울리면서 아버지의 생일 상을 마련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던 장윤혁(張胤爀)이 이갑회의 초청을 거절한다.


이갑회는 장윤혁을 괘심하게 여겨 추석날 장윤혁의 집에 소머리를 던져 놓고 임금이 승하했는데, 소를 도축하였다는 혐의로 장윤혁의 가노(家奴)를 구금한다. 그리고 이 사태로 장윤혁의 아들인 장시경(張時景)·장현경(張玄慶)·장시호(張時皥) 3형제와 인동장씨 일가들이 인동부 군졸들과 충돌하게 된다.


이갑회는 장씨 3형제를 정조의 독살설에 연결시키면서 장씨일가가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와 군량을 탈취한 후 서울로 진격하려고 하려 한다는 역모 혐의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곧바로 이갑회는 경상감사 김이영(金履永)에게 장씨 형제들을 모반을 일으킨다고 보고 했다.

 

모반을 일으킬 힘도 없는 장시경 형제에게 인동부사 이갑회는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는 역적죄를 씌우자, 장시경 형제는 천생산으로 올라가 낙수암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선택한다.

경상감사 김이영은 8월 29일 조정에 이 사건을 보고하게 되고, 조정에서는 모반 협의를 조사하기 위해 안핵사(按覈使)로 이서구(李書九)가 파견된다. 노론에서 파견한 안핵사는 남인인 인동장씨에게 조금의 용서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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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경 3형제가 억울한 역모사건의 누명을 쓰고 자살한 천생산>


이 사건으로 인해 장씨 일가(張氏一家)에게 대대적이고 무차별적이며 혹독한 처벌이 이어졌다. 인동부(仁同府)에서 인동현(仁同縣)으로 강등되어진다.

자살을 선택한 장씨 형제들 중 장시호가 우연하게 살아남게 된다. 장시호외 2명은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한 후, 노론의 영수 심환지는 장시호를 다시 경상도로 보내어 공개적으로 처형할 것을 명령한다.

 

10년이 흐른 후, 장윤종·장윤문의 아들 형제, 장시호의 4촌들은 석방되어 인동으로 돌아왔다. 이 일련의 과정과 상황에서 중앙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까지 노론은 남인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가혹하게 처리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인동장씨 집안이 풍비박살이 났다. 장시호의 부인에 대한 애절하고 절박한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장시호의 배씨(裵氏) 부인은 장석규(張錫奎)를 임신하고 있었다.

 

장시호의 남겨진 부인 배씨와 한 달도 채 안된 아들, 그리고 딸은 전라도 강진(康津)의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배씨 부인은 그 외단 섬에서 바느질 품을 팔고, 밤에는 불을 밝혀 새벽녘에 이르도록 일을 했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배씨 부인은 절대로 남편에 대한 예의로 상복(喪服) 벗지 않았다.


유배 온 부인을 관속(官屬)들이 부인과 17세의 딸을 겁탈하려 하자, 부인과 딸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바다에 빠져 자결한다. 마을 사람들이“간밤에 농짝 같은 큰 별이 앞바다에 떨어지더니 그 때가 배씨 모녀가 물에 빠진 시간이다.”라고 했다.

사흘 만에 나타난 배씨 모녀 시체는 서로 껴안은 채 떠올라 마을 사람들이 슬퍼하며 장사 지냈다고 한다. 이때 장시호의 아들 장석규의 나이 9살이었다.

전라도 강진 지역에는 배씨 부인 모녀가 죽은 때만 되면 폭풍우가 일어 배가 오갈 수 없고, 극심한 가뭄이 찾아와 흉년이 된다는 전설이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그런데 어머니와 누나가 죽었음에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장석규는 혼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야 가족들의 복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석규는 글을 할 줄 알아야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역적의 죄인이라고 아무도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장석규는 공부하는 문제를 혼자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장석규는 악착같이 혼자서 독학으로 글을 배워 시간이 흐른 뒤 경전과 역사에 통달하게 되었다. 장석규는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불을 깔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아끼고 절약했다.

그리고 글을 배우고 익힌 댓가로 양반집 딸인 차씨(車氏) 부인과 결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들 기원(琪遠) 낳자 장석규는 “내 발이 이 섬을 떠나지 못해 누명을 씻을 길이 없더니, 이제야 네가 태어나 내 소원을 풀어 주겠구나.”하며 매우 기뻐했다.

 

장석규는 아들 기원이 15살이 되자, 기원을 서울로 보낸다. 이유는 임금이 행차하는 곳에 나가 엎드려 억울함과 무죄를 아뢰라는 것이 그때까지만 해도 유일한 방법이었다. 


장석규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 인동장씨 참봉 장석봉(張錫鳳)은 철종(哲宗)의 장인이자, 권력실세였던 안동김씨(安東金氏) 김문근(金汶根)에게 그간의 경위와 사연을 보고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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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의 주역으로 철종의 장인인 김문근의 묘비>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김문근은 흔쾌히 철종에게 보고하여, 장시호의 누명이 벗겨지게 한다. 장시호의 누명이 벗겨지자, 항상 혹독하게 살던 1861년 3월 병을 얻어 곧 죽게 되었다. 


그런데 차씨부인이 손가락을 끊어 피를 입에 넣으려 하자, 장석규는 “남자는 부인의 손가락을 끊게 하지 않는다오.”하며 죽는다. 어떻게 보면 장석규는 부모님의 원한과 신원회복을 위해 어떻게든 살았던 것이다.


우리는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역사 시간에 조선시대 영조(英祖)와 그의 손자인 정조(正祖) 때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蕩平策)을 펼쳤다고 배웠다. 


조금만 시간을 할애하여 영조·정조 시기를 공부한다면 기존의 역사에서 배웠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우리가 배우고 알고 있는 역사적 진실들이 옳은가?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러면 역사 시간에 그렇게 배우고 가르쳤는가? 그것은 필자가 추측하건데 조선 중기 이후부터 조선후기 그리고 일제 강점기까지 당쟁에서 승리한 서인 노론(西人 老論) 세력들이 경제적인 부(富)와 정치권력을 독식하고 장악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노론으로, 일제 시대에는 친일을 하면서 노론의 후예와 자손들은 기득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1945년 해방된 한반도에 등장한 미군정(美軍政)의 후원을 받으며, 1948년 정부 수립에 까지 참여한다. 


항상 기득권을 누리던 서인 노론의 후손과 자손들은 대한민국의 정치·법·교육·문화의 독점적 지위를 차지했다. 자연스럽게 조상들을 미화하고 잘 못된 점을 감추어야 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아닌 서인 노론이 조선 지배했고, 친일을 한 행위들을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숨겨야 했다. 이러한 것들이 자라나는 학생들의 교과서로 침투되어 탕평책을 기술되었던 것이다. 


국어 교과서에도 극심한 당쟁의 와중에 등장하는 편향된 그 시대 문학 작품들이 역사적 배경과 진실도 가려진 채 책에 실려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1905년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는 을사늑약에 가담한 을사오적(乙巳五賊)들은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부대신)이다. 


이들은 모두 조선  조선 후기를 폐쇄적인 사회로 만들었으며, 왕위에 군림하면서 권력을 좌지우지 했던 서인 노론의 자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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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팔아 먹은 이들은 조선을 지배했던 노론들이었다. 특히 이완용은 노론 당수였다.>


을사늑약을 적극적으로 진행한 학부대신 이완용은 고종황제(高宗皇帝) 때 노론의 우두머리인 노론당의 당수(黨首)였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친일(親日)의 길로 간다. 


200~300년 동안 노론이 집권하다 보니 어느 때 어떤 순간에도 정치 권력을 잃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들 조선시대를 좌지우지 했던 노론 세력은 현대의 한국정치로 편입되어 기득권을 독점하는 경향을 뚜렷하게 나타냈다. 


정치권력을 잡는 DNA를 가져던 서인 노론들은 독립 운동보다 일제의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독립 운동보다는 오히려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서면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형성해 같다. 


그러나 조선 시대 정치에서 소외 되었던 소론과 남인들은 오히려 나라가 일본에 강탈당할 때 삭풍이 휘몰아치는 만주 벌판으로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며, 일본과 맞서 싸운 사람들이 많았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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