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의 역사와 인물]일선김씨(一善金氏)와 선산김씨(善山金氏)는 어떻게 다른가?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기 이전에,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본관(本貫)이 언제 어떻게 생성 되었는가? 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과 공부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본관이 만들어진 고려 사회에 대한 이해가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이해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려 시대를 역사학계에서는 귀족 중심의 사회, 벌집 구조의 사회라고 평가한다. 이 귀족 중심의 사회와 벌집 구조의 사회를 만든 것이 바로 본관제(本貫制)이다. 각 성씨의 본관(本貫)은 고려의 개국과 동시에 생겨나게 된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은 전 국토를 중국의 본관제(本貫制)를 모방하여, 각 지역의 사람과 가문에게 성씨(姓氏)를 하사하고 본관을 부여하게 된다. 이렇게 본관제를 통하여 전국의 군사와 행정을 통치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姓氏)들 대부분이 고려 초기 고려 왕조로부터 하사 받는 것이 대부분이나 조선에 들어와서도 본관이 생겨난다. 이러한 본관이 주어지면 관직(官職)과 작위(爵位)가 함께 수여되는데, 이것을 봉작(封爵)이라 한다. 본관제는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전국의 각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었다.
본관제는 고려 왕조가 지역의 각 호족 세력과 각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동시에 하나의 통제 장치였다. 본관(本貫)과 성(姓)을 왕이 직접 하사 하는 것을 사성(賜姓)이라고 한다. 이 사성은 주로 공신에게 주어졌는데, 사성을 받는 사람이나 가문은 아주 많은 혜택을 받았다.
고려 때, 사성을 받은 공신에게는 관직(官職)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식읍(食邑) 또는 녹읍(祿邑)을 함께 주어졌다. 이 뿐만이 아니라 대대로 후손들이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음서(蔭敍)제도의 혜택도 주어졌다.
고려 때, 국가의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본관제는 그대로 조선으로까지 이어진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이은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전국의 각 지역을 원활하게 통치 하기 위해서 군사·행정의 관할 지역 편제에 따른 개편·수정 작업을 거쳐 정착시킨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구미·선산은 신라 시대에는 일선군(一善郡)·숭선군(崇善郡)으로 불려졌고, 고려 시대에는 선주군(善州郡)으로 불려졌다. 고려 말 조선 초기 짧은 기간 동안 화의군(和義郡)으로 있다가 태종 3년에 선산군(善山郡)으로 개칭된다.
고려의 본관제는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조선에서 고려의 본관제를 그대로 유지한 것은 그 가문과 개인이 새로운 국가 “조선”에 충성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그래서 고려에서 시행되던 본관제는 조선에 들어 와서도 파괴하지 않고 수정·보완을 거쳐 실시되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 또다시 많은 본관이 생겨나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본관들이 다수 생겨나기 시작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군사들이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거나 전공을 세워 조선의 왕으로부터 본관을 하사 받는다. 또한 임진왜란 때 왜적으로 조선에 온 병사들 중 1만 여명 정도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조선 군과 함께 왜적을 물리친 일본인 사야가(沙也加)가 있다. 이후 조선의 조정에서 충직하고 착하다는 뜻의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내렸다. 김충선의 본관은 임금이 하사한 성씨라 해서 ‘사성(賜姓)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시조가 된다.
명나라에서 조선에 파병 되어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정착한 대표적인 성씨로는 전주추씨(全州秋氏), 절강편씨(浙江片氏), 절강팽씨(浙江彭氏), 절강장씨(浙江張氏), 성주시씨(星州施氏), 광천동씨(廣川董氏), 진양화씨(晉陽花氏), 낭야정씨(瑯琊鄭氏), 성주석씨(星州石氏), 성주초씨(星州楚氏), 두릉두씨(杜陵杜氏) 등이 있다.
한국 사람은 개인 혹은 조상의 역사적 연대기를 기록한 족보를 대부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족보는 그 간행된 역사가 조선 중기에 와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일반인들은 족보가 신라 혹은 고려 시대부터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과 판단을 하는 것이 보편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 개국과 함께 그들의 시조(始祖)부터 그들 조상들이 족보에 계속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칫 신라나 고려 때부터 족보가 간행되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족보 간행의 시작은 조선 중종 때 와서 태동한다.
족보 간행 역사를 보면, 조선 세종 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은 좌찬성과 예조판서를 지낸 권제(權踶)가 중국의 소씨보(蘇氏譜)를 모방하여 편찬한 것을 아들 권람(權擥)이 자료를 수집하여 보완하다가 죽는다.
그러나 권제의 생질(甥姪)인 대사헌(大司憲)과 대제학(大提學)이자, 당대의 최고 학자로 이름을 떨치던 서거정(徐居正)이 1476년 안동권씨(安東權氏) 족보인 성화보(成化譜)를 완성한다. 따라서 현재 안동권씨 성화보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524년(중종 19년)에 한양조씨(漢陽趙氏) 갑신보(甲申譜), 1529년(중종24년) 합천이씨(陜川李氏) 기축대동보(己丑大同譜), 1565년(명종20년) 문화류씨(文化柳氏) 가정보(嘉靖譜), 1576년(선조 9년) 남양홍씨(南陽洪氏) 족보 등이 활발하게 간행되기 시작했다.
안동권씨 성화보에서는 “옛날 중국에는 종법(宗法)이라는 것이 있어 소목(昭穆)의 순서를 정하고 적손(嫡孫)과 지손(支孫)을 구별하여 백세(百世)가 지나도 그 관계를 분명하게 밝힐 수가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강량이씨(江陽李氏)라고도 하는 합천이씨(陜川李氏) 기축대동보를 쓴 이복로(李福老)는 서문에서 “지금 중국에는 사대부의 집만이 아니라 상공민(商工民)의 천함으로도 족보가 있으되, 우리 동방은 족보가 있는 집이 적으니, 비록 문벌 좋은 구족(舊族)이라도 두어 대만 지나면, 자손들이 고조(古祖)와 증조(曾祖)의 이름을 기록하지 못하는 자가 많다.”는 표현하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유수의 많은 가문들이 그 가문의 족보를 간행 하는 움직임은 중종과 명종 때에 와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따라서 중종과 명종 때는 이미 고려 시대와는 수백 년이 흐른 뒤이기 때문에 많은 가문들은 오래전의 기록들을 찾아내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필자는 일반인들에게 일선김씨(一善金氏)와 선산김씨(善山金氏)가 같지 않느냐? 아니면 어떻게 다르냐? 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상대방에게 짧게 이해 시키기란, 실제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답을 구하는 상대방이 두 집안의 족보와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이해를 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답을 구하는 상대방은 아주 쉽게 질문을 하는데, 답을 하려는 사람은 어떻게 설명해야 상대방이 이해할까 늘 고민할 것이다. 역사와 족보를 모르고는 대화가 되지 않는 질문과 답만이 있었을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로 일선김씨에서 善山(一善)金氏이라고 표기 하면서 일반 사람들은 일선김씨와 선산김씨를 혼동하기 시작했을 것이라 필자는 생각하고 추측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선산김씨보다는 “들성김씨”로 더 많이 부르고 이야기 하는 경향이 있게 되었다.
선산(善山)의 옛 지명이 일선(一善)이었기 때문에 선산김씨와 일선김씨, 누가 봐도 두 가문이 같다는 생각과 같은 가문인데 다르게 표기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蓋然性)을 충분히 준 것이었다.
조선 시대를 뒤흔든 우리 지역의 유력 가문인 일선김씨를 먼저 알아보는 것이 해답을 찾아 가는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모든 가문의 출발점이 시조(始祖)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일선김씨의 시조인 김선궁(金宣弓)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왕건의 고려 통일의 마지막 전투는 선산의 낙동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일이천(一利川)전투에서 일선김씨 시조(一善金氏 始祖) 김선궁(金宣弓)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리고 김선궁은 15세의 나이로 고려 왕건(王建)을 도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고려 왕조를 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왕건을 도운 김선궁에게 왕건이 직접 쓰던 활(弓)을 주면서 “선궁”이란 활(弓)을 넣은 이름을 하사한다. 그리고 왕건은 당시 지명에 따라 김선궁의 본관을 일선(一善)으로 봉작(封爵)을 내린다. 이때부터 고려 개국과 함께 고려 역사에서 일선김씨가 등장하게 된다.
고려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김선궁은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김경응(金慶膺)의 7세손이었다. 김선궁은 고려의 개국원훈공신(開國元勳功臣)으로 선주백(善州伯)으로 봉해진다.
김선궁은 당시 지역 최고의 통치자로 군림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김선궁의 고려 건국의 활약과 역할은 고려왕조에 후손들이 손쉽게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 당시 백(伯)이 붙은 선주백은 당시 이 지역의 군사·행정의 최고 통치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김선궁은 고려 조에서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까지 추앙 받았던 인물이다. 벽상공신은 공신의 초상화를 종묘사직의 벽에다 걸어 놓고, 왕조가 망할 때까지 최고의 예우를 받는 공신반열이었다. 고려 왕조에서 그만큼 김선궁과 일선김씨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선궁이 세상을 떠난 뒤, 구미시 해평면 미석산(彌石山)에 있는 그의 유허비(遺墟碑)에는 “고려 삼중대광 영문하시중(高麗三重大匡領門下侍中)”, 순충 일선 김선궁(諡 順忠 一善 金宣弓) 새겨져 있다. 왕이 죽은 신하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내리는 것을 시호(諡號)라고 하는데, 김선궁의 시호는 순충공(順忠公)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미시 해평면 미석산, 일선김씨 시조인 김선궁 유허비>
이러한 일선김씨 시조 김선궁의 유허비의 역사적 사실과 근거를 본다면, 김선궁을 시조로 모시고 받들고 있는 후손들은 善山(一善)金氏로 표현 하는 것 보다는 일선김씨(一善金氏)로 표기하는 것이 역사적 진실과 사실에 더 가깝다고 강조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혼인 관계로 본다면 선산김씨와 일선김씨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결론 내리기가 더 쉽다. 선산김씨의 선산 입향조(入鄕祖)는 고려 말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낸 화의군 김기(和義君 金起)이다. 김기의 부인이 일선김씨 부인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동성동본(同姓同本)의 혼인을 하지 않는 풍습과 예법이 오랫동안 지켜져 왔던 것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구미시 선산읍 포상리, 선산김씨 입향조 화의군 김기의 묘비>
이러한 화의군 김기의 혼인으로 보았을 때, 일선김씨와 선산김씨는 완전히 다른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선산김씨 입향조인 화의군 김기의 장인(丈人)인 김원로(金元老)를 살펴보는 것이 더 정확한 이해를 도울 것이다.
김원로(金元老)는 김선궁의 13세손으로 선산군 옥성면 주아리에 살았다. 김원로는 고려 말, 정순대부(正順大夫)로서 예의판서(禮儀判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지춘추사(知春秋事) 등을 역임했다. 김원로는 쓰러져 가는 고려 왕조를 대해 충성을 다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겠다.
김원로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백암 김제(白巖 金濟)와 농암 김주(籠巖 金澍)이다. 이들 두 형제는 두문동 72현에 들어가는 고려 왕조의 충신들이었다. 부조현(不朝峴) 고개에서 관복을 벗어던지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새 왕조인 조선에 출사하지 않았고, 끝까지 고려 왕조에 충성을 맹세한 충신들을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이라고 한다.
김제·김주 형제와 김기는 처남매부 지간이었다. 이렇게 하여 김기는 고려 왕조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처가(妻家)인 현재 선산 옥성면 주아리로 피신하였다. 김기는 처가에서 머물다가,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옥성 산촌(山村)에서 숨어 지내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살펴보았을 때, 선산김씨(들성김씨)는 일선김씨 김원로의 외손(外孫)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겠다. 이렇게 엄연히 다른 가문임에도 사람들은 서로의 본관과 조상에 대해 혼란과 혼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왜 일선김씨가 혼란스럽게 선산김씨로 본관을 쓰게 되었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 원인은 조선 시대의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조선이 개국되자, 일선김씨들 중에서 조선 시대 유학사(儒學史)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가 바로 성리학의 도통관(道統觀)을 잇는 대학자인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부자(父子)들이다. 강호 김숙자는 일선김씨 시조인 김선궁으로부터 13세손이 된다.
성리학은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안향(安珦)이 고려로 가지고 왔다. 이 당시 성리학은 원시적 상태의 학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리학은 고려시대 목은 이색(牧隱 李穡) →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 야은 길재(冶隱 吉再)로 이어져 계승·발전되어 갔다.
야은 길재의 성리학은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발전하여 조선이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야은 길재에서 발원한 조선의 성리학은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와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에게서 한 차원 높은 도학(道學)으로 발전·계승하게 된다. 이때부터 성리학자들을 도학자(道學者)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김숙자와 김종직은 금오산의 야은 길재에게서 출발한 성리학을 전국적으로 확산 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전국으로 확산된 성리학은 당시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대부의 핵심 이데올로기(Ideologie)로 변화되어 갔고 수용되어 졌다.
점필재 김종직의 학문은 조선의 선비들을 사림(士林)이라는 거대한 숲으로 변화시켰다. 김종직은 이 사림들에게 사림의 영수(領袖)로서 끝임 없는 존경과 추앙을 받으며, 선비들의 가슴 속에 끊임없이 살아 숨 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김종직을 따르는 사림(士林)들이 벼슬 길에 나가자, 기득권을 유지하던 훈구(勳舊)세력들과 충돌하게 되면서 점필재를 따르던 수많은 선비들은 그들의 목숨을 걸어야 했다. 죽음을 각오한 사림은 부패한 훈구파에게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고, 당당히 그들의 부패와 잘못을 지적하며 당당히 맞섰다.
김종직은 1453년(단종 1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1459년(세조 5년)에 문과에 합격한다. 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 하여 채 2년 못되어 죽는다. 이후 성종은 13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한다. 성종이 어리다는 이유로 할머니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수렴청정의 뒤에는 정희왕후와 훈구대신들간의 비호와 결탁이 있었다.
성종이 왕이 되는 데 공을 세운 원로대신들, 그 중에서도 장인인 한명회(韓明澮)를 비롯한 훈구대신들은 정치적으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예종이 금지했던 분경, 대납, 겸판서 등을 부활시켰고, 자신들을 견제하던 종친 세력의 핵심 인물인 구성군(龜城君)을 유배 보냄으로써 훈신 세력의 권력을 공고히 했기 때문에 왕권이 약화되어 갔다.
성종이 성년이 되어 왕권을 물려받자, 신진사림을 전면에 등용하여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성종은 훈구세력을 견제할 젊은 인재들을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사림들은 주로 대간으로 기용되어 언론권을 장악해 훈구파의 부정부패를 공격했다.
1478년(성종 9)에 예문관에서 분리된 홍문관(弘文館)을 신설하고,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등에 신진사림을 포진시켜 언론 삼사(三司)로 훈구세력을 강력하게 견제했다. 홍문관은 대간(大諫)을 감독하는 역할을 하다가 언론 기관으로 삼사(三司)의 하나로 군림하게 되었다.
조정에 대거 기용된 신진사림과 훈구대신들의 충돌은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조선시대 사화(士禍)의 중심에는 점필재 김종직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인 사림(士林)들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김종직을 따르는 사림(士林)은 정신적으로 무장한 붓을 든 무사(武士)들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필자가 더 이상 김종직에 대한 학문과 위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도 그의 영향력과 파급효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종직은 사림파(士林派)의 중심적 인물이었으며, 김종직은 훈구파에 대항하는 시작점과 중심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 김종직은 조선의 선비들 마음 속에 살아 숨쉬는 영원한 스승처럼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조선의 기틀은 성종(成宗) 때에 와서 완전하게 마련된다. 조선의 기틀을 다지던 성종은 훈구(勳舊) 대신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도덕성과 성리학의 근본주의 이념을 강조했던 정치적 집단인 신진사림(新進士林)들을 대거 조정에 등장시킨다.
성종이 이룩한 큰 업적 중 하나는 조선왕조 통치 체제의 근간이 되는『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 반포한다. 경국대전의 완성은 조선왕조 통치체제를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경국대전』은 조선 시대의 기본 법전으로, 조선의 행정 조직인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의 6전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각 조별로 태조부터 성종까지의 왕명(王命)과 교지(敎旨), 판지(判旨, 각 부서에서 필요한 법 조항을 올리고 이를 왕이 재가한 것) 등을 집대성한 것이다. 따라서 6조는 이러한『경국대전』의 법 조항에 근거해 업무를 처리했다.
이러한 신진사림의 중심에는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이 있었다. 김종직은 성종의 무한한 신뢰와 지지를 받으며, 성종이 추진하고 싶어 하는 성리학적 조선을 만드는데 자기의 학문과 웅대한 기개를 펼쳐 나갔다.
조선왕조 500여 년간 왕위에 오른 사람은 모두 27명이다. 이 가운데 왕의 적장자 혹은 적장손 출신으로 정통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사람은 겨우 10명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17명의 왕은 세자의 책봉 과정이나 왕위 계승에 있어서 원칙에 맞지 않는 비정상적인 계승자였다.
조선왕조에서 왕의 직계가 아닌 왕실의 방계에서 처음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宣祖)였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이었다. 적정자(嫡長子)가 아닌 서자 덕흥군의 아들이 등장하자, 명나라에서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결여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 조선의 왕위 계승 문제를 외교 문제화 했던 것이다.
명나라는 이러한 선조의 왕위계승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들을 보낸다. 트집 잡기 위해 조선 온 명나라 사신들 앞에 당당히 나가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조정 안에서 아무도 없었다.
명나라 사신들에게 대답을 잘 못 말했다가는 자신의 목숨 뿐만 아니라, 임금의 안위도 담보할 수 없었다. 그때 선조는 퇴계 이황을 불러 명나라 사신들의 응대하라고 명한다. 퇴계는 서울로 올라가 무례하기 짝이 없는 명나라 사신들 앞에서 당당히 그들 의 질문에 답변해 나간다.
그 때 명나라 사신이 퇴계 이황에게 조선 성리학의 학통과 도통관을 묻는다. 퇴계 이황은 그 자리에서 바로 고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 야은 길재(冶隱 吉再) →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 점필재 김종직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라고 바로 이야기 한다. 당시 왕인 선조와 문무백관들은 퇴계 이황의 답변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였고, 지금까지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퇴계의 답변이후 이 도통관은 조선에서 명문화되어 지금까지도 받아 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도통관을 설계한 장본인은 정암 조광조였다.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사실 중 하나는 야은 길재의 스승이 포은 정몽주로 알고 있는데, 야은 길재에게 실질적인 가르침을 준 인물은 조선개국에 참여한 양촌 권근(陽村 權近)이다. 길재에 대해 또 하나 잘 못 알고 있는 사실 중 하나는 고려 왕조가 패망해서 벼슬을 버리고, 금오산으로 낙향했다는 것이다.
길재는 신하들이 고려 우왕(禑王)을 유배 보내어 우왕이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자신이 섬기던 왕을 하루 아침에 신하들이 죽이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길재는 이 모든 것에 회의와 절망을 느끼고, 절의(節義)를 되새기며, 고향으로 낙향해 버린다.
길재는 고려 최고의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에게 낙향 인사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금오산에 은거한다. 우왕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 내리고, 죽이는 사건의 중심에는 포은 정몽주와 이성계(李成桂)가 있었다.
역사적 기록들을 자세히 찾아보면, 실제 길재는 포은 정몽주를 좋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왕이 죽은 이후 고려 왕조는 창왕(昌王), 1392년 공양왕(恭讓王)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길재가 고려 왕조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는 잘 못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우리는 한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다.
길재는 태종 이방원과 함께 고려시대 성균관(成均館)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사이였다. 그래서 길재의 제자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오면 태종 이방원은 친구 길재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태종 이방원은 “길재는 사람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정몽주와 길재의 관계를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도학(道學)으로 발전되면서 도통관을 만들어야 하는 당위성과 필연성으로 조광조가 정몽주 → 길재라는 도통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왜곡인데도 불구하고, 이 왜곡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조선 성리학에서 학통과 도통관에서 눈여겨 볼 두 사람이 있는데, 바로 강호 김숙자와 점필재 김종직이다. 특이하게도 강호 김숙자와 점필재 김종직은 부자 간에 스승과 제자 관계를 맺었다. 강호 김숙자에 학문을 배운 점필재 김종직은 조선 성종 때 사림의 중심적 인물로 많은 일을 수행한다.
그러나 김종직은 수많은 개혁 과제와 업무에 지치고, 가족의 연이은 죽음으로 무척 괴로워했고, 힘들어 했다. 그래서 김종직은 외직으로 선산부사를 자청한다. 성종은 김종직의 선산부사로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산부사로 부임한 4년 동안 김종직은 선산에서 낮에는 각종 사무와 행정을 수행하였다. 김종직은 밤에는 선산향교에서 인근뿐만 아니라, 멀리서 찾아 온 선비들을 모아 제자 양성에 전력을 쏟는다. 그리고 함양군수 5년 동안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낸다.
김종직의 대표적인 제자들은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유호인(俞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 등이다. 김종직은 불세출의 제자를 양성함으로써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으로 일컬어졌다. 조선 5현인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중에서 김굉필과 정여창 2명이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들이다.
이때 선산부사시절 김종직이 제자로 만난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이 있었다. 이러한 김종직의 제자 양성은 성리학을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대되어 나가는 계기를 만들었고, 한 차원 높은 도학(道學)으로 만들어 나갔다.
또한 김종직은 1480년(성종11년) 이존록(彛尊綠)을 저술한다. 김종직이 저술한 이존록은 일종의 족보(族譜) 형태이다. 김종직은 이존록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 전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 종직(宗直)은 찬(撰)한다.”라고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무인년 여름에 종직이 선부군(先父君)의 복(服)을 마치고, 선부군의 덕행(德行)과 사업(事業)을 서술하고, 마침내 세계(世系)까지 서술하게 되었다.”라고 이존록의 취지를 밝히고 있었다.
이존록은 아버지이자 스승인 김숙자에게 책을 바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존(彛尊)은 원래 ‘제사에 쓰는 술 그릇’이라는 뜻한다. 그리고 이존(彛尊)으로 읽어도 되고, 이준(彛尊)으로 읽어도 틀리지 않고 맞다.
이존(彛尊)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뜻으로 봤을 때, 김종직은 아버지이자 스승인 김숙자에게 거룩하고, 위대한 무언가를 바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쓴 단어 중에서 가장 극대화 시킨 단어인 이존(彛尊)을 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종직은 아버지에게 바치는 이존록에 선산김씨보도지(善山金氏譜圖誌)를 기록한다.
김종직은 자신의 본관을 당시의 지명에 따라 일선김씨가 아닌 선산김씨(善山金氏)로 쓴다. 선산김씨보도지의 서문(序文)을 김종직의 처남이자, 제자인 매계 조위(梅溪 曺偉)가 쓰고, 발문(跋文)은 퇴계 이황에게 책을 가장 많이 구해줬다는 구암 이정(龜巖 李楨)이 쓴다.
여기서 김종직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김숙자의 삶을 짧게 살펴보자. 점필재 김종직의 아버지인 강호 김숙자가 선산에 있을 때, 곡산한씨(谷山韓氏)와 일찍 혼인을 하여 아들을 둔다. 김숙자가 경학(經學)과 문장에 아주 뛰어났으며, 26세(1414년, 태종 14년)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곡산한씨와 이혼을 한다. 이후 김숙자는 경남 밀양의 박홍신(朴弘信)의 딸인 밀양박씨(密陽朴氏) 부인과 결혼한다.
그리고 5년 뒤인 1419년(세종 1년)엔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세종(世宗)은 청년 김숙자를 ‘사관(史官)’에 임명하기로 했지만, 조정의 젊은 관리들로 구성된 사헌부(司憲府)에서 김숙자의 이혼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그리고 조정의 젊은 관리들은 김숙자의 이혼 문제 삼아 “처자식을 버린 의리와 도리가 없는 선비”로 관리 임명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상소를 세종에게 올리자, 김숙자는 조정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처가인 밀양으로 내려가 버린다.
이후부터 김숙자는 지방의 낮은 벼슬인 각 지역의 향교에서 제자를 양성하는 교수(敎授)직을 주로 맡게 된다. 김숙자의 호(號)가 강호(江湖)·강호산인(江湖山人)인 것도 벼슬에 마음을 비웠다는 의미에서 강(江)과 호수(湖), 그리고 산(山)을 넣은 호를 사용했던 것이다.
김종직이 서술한 이존록의 선산김씨라는 기록은 이후 엄청난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 최고의 대학자로 사림(士林)으로부터 추앙받던 김종직이 쓴 이존록의 선산김씨라는 기록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사실 김종직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 이후부터 점필재 후손을 중심으로 본관을 선산(善山)으로 쓰기 시작했다.
김종직은 태어난 고향이 경남 밀양(密陽)임에도 불구하고, 김종직은 아버지가 태어난 고향인 선산을 자기의 고향으로 기록한다. 지금으로 보면 자기가 태어난 곳을 고향으로 기록하거나 이야기한다. 하지만 고향(故鄕)은 엄밀히 해석하자면, 부모와 조부모가 태어난 곳 또한 고향으로 할 수 있다. 본관을 관향(貫鄕)이라고 한다. 관향에는 조상들의 고향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고향(故鄕)보다는 “팔향(八鄕)”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팔향은 아버지의 내·외향(內外鄕), 할아버지의 외향, 증조(曾祖)의 외향, 어머니의 내·외향, 아내의 내·외향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살아가는데 본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지만, 조선 시대에는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본가 4대까지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본관을 비롯해 외가의 4대까지 본관을 서술하지 않으면, 과거시험 자체를 볼 수 없었다.
본관은 일종의 개인의 신원 증명이다. 그리고 신분 사회에서 그 사람의 신분과 가족들을 가늠하는 척도였다. 조선 시대 과거시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혼인을 하는 것인데, 본관은 혼인을 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첫 번째 요소였다.
<선산의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이다. 과거합격자는 맨 아래 자기의 본관을 기록하는데, 당시 일선인을 선산인으로 표기하지 않았고, 일선인(一善人)으로 표기하였다. 자세히 보면 선산인(善山人)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조선 최고의 대학자로 일컬어지는 김종직의 마음은 잘 알 수 없지만, 아마 김종직 마음속에는 아버지가 버리고 떠난 고향을 자기 스스로 되찾고 싶은 마음에서 이존록에 자기의 모든 정체성이 포함되어 있는 본관을 선산으로 표기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버지가 떠나버린 고향을 되찾아,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에게 그 고향 선산을 바치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적어도 선산김씨와 일선김씨가 다르다는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따라서 필자가 언급한 사실만으로도 어느 정도 선산김씨와 일선김씨가 서로가 다른 가문이며, 본관을 가지고 혼동하는 일은 조금이 나마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끝으로 필자의 얕고, 짧은 지식으로 역사를 기술해 보았다. 비록 독자들이 읽을 때, 필자의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겠지만, 혹여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양해 해 주기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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