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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의 명문가와 인물]500년전의 대학자!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을 만나다.

이순락기자 0 34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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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회 부회장, 구미 새로넷 방송 시청자 위원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때부터 집안의 각종 시제와 묘사에 보자기를 들고 음식을 받기 위해 산으로 다니면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기억 난다. 당시 나이 많으신 분들이 필자에게 "공부는 벼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말과 글을 빌리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 때 어린 나이에는 그런 말들을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집안의 어른들께서는 남의 가문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개인적으로 평소 남의 가문에 대한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구미 사람이라면 인동대교를 넘어가면서 왼쪽 낙동강가에 동락서원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여헌기념관을 그 맞은편에 새롭게 현대식 건물로 지어 놓았다. 그렇다면 여헌(旅軒)은 과연 누구이길래 이토록 찬사를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인동 땅으로, 거센 물살을 향해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고자 한다.


구미시 인동(仁同)에는 한가운데 조그마한 산이 있는데, 이 산이 바로 옥산(玉山)이다. 이 옥산이 인동장씨(仁同張氏)들의 발원지가 된다. 그래서 본관을 인동(仁同)과 옥산(玉山)을 함께 쓰고 있다. 조선시대 공훈(功勳)이 있는 인동장씨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 옥산군(玉山君)으로 관직(官職)과 작위(爵位)를 봉하면서 묘갈명(墓碣銘) 즉 묘비명에 옥산장씨(玉山張氏)로 많이 쓰였다. 


아직도 옥산장씨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천년 동안 인동에 세거하며 종가(宗家)를 유지하고, 많은 학자와 관료를 배출하게 되면서 조선의 중앙과 지방정치 무대 등장한다. 그래서 인동장씨는 옥산화벌(玉山華閥)로 불려 지게 되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아직도 옥산장씨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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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인의동에 있는 옥산문 >


인동장씨들의 시조 장금용(張金用)은 고려초 상장군으로 낙동강에서 비롯되는 풍부한 물과 비옥한 땅, 그리고 천생산, 유학산, 건대산, 황학산이 둘러싸고 있고, 북쪽에는 낙동강이 있어 적이 침략하면 방어하기에 좋은 천혜의 장소였다. 상장군 장금용이 당시 인동의 지리적 위치를 보며 이러한 것을 감안하면서 정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인동 장씨는 고려 초 인동에 정착한 이후 고려 중기부터 분파되기 시작해 25개의 파로 분파되었다. 그 중에서도 구미·칠곡·성주·선산지역에 5개인 종파(중리파), 남산파, 진가파, 진평파, 황상파가 대부분이다. 


장안세(張安世)는 고려가 망할 때 조선을 거부한 두문동 72현 중 한분이었고, 그의 아들 형제 김해부사 장중양(張仲陽), 한림학사 장중일(張仲日)은 조선 태조가 관직을 하사해도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마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영향으로 조선초기에는 인동장씨들이 역사에 별로 등장하지 않았다. 조선중기를 거치면서 인동장씨들이 비로소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역사에서 수많은 학자와 인물을 배출함으로서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인동(仁同)이라는 지명은 원래 수동(壽同)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에 고쳐서 지금까지 인동이라는 지명을 사용한다. 지명 앞에 3000년 전 공자의 핵심 사상인 “어질 인(仁)”을 썼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이 흐른 후대에 유학(儒學)이 번성할 것을 내다보고 지명을 인동(仁同)으로 지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선견지명은 조선시대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인(仁)과 의(義)를 인의동(仁義同)이라는 지명에 고스란히 담아 탄생되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시대에 인동이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가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과 천생산을 중심으로 왜적과 싸워 승리함으로서 선산과 칠곡 사이의 작은 현(縣)이 일시에 인동도호부로 승격되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직할시나 특별시정도로 승격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임진왜란으로 전국의 여러 가문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선산·구미지역에 기반을 잡고 있던 유력 가문들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 중에서도 인동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보면서 임진왜란은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1554~1637)은 머나먼 피난의 길을 떠나면서 여헌(旅軒)이라는 “나그네의 집”이라는 호(號)를 손수 지었다. 


여헌 장현광이 살던 시기는 조선시대에서 유학의 최고 경지에 오른 학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시대였다. 여헌 장현광은 여러 학자들에게 배움을 익히고 스스로 독자적인 학문의 세계관을 개척하고 연구하여 여헌(旅軒)만의 학문인 여헌학(旅軒學)을 완성하였다. 장현광선생이 살았던 시기에 조선시대에 학문을 좌지우지했던 기라성 같은 대학자들로 인해 영남유학은 그야말로 조선에 연구되던 성리학은 중국의 성리학을 넘어서는 경지에까지 오른다. 그 중심에 우리 선산·구미지역의 여헌 장현광선생이 있었다고 하겠다. 


조선 16세기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바탕으로 하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바탕으로 하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 경(敬)과 의(義)를 중요시 하는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있었다. 이후 17세기 들어와 여헌 장현광은 이들의 사상과 철학을 한층 더 심도 있게 연구하여 이기경위설(理氣經緯說)을 주장하면서 여헌학은 전국의 성리학을 연구하는 선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선산·구미지역의 영남 사림과 선비들에게 절대적이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장현광은 아버지 장열(張㤠)과 어머니 경산이씨(京山李氏)사이에서 딸 다섯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다. 여헌 장현광 선생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9세에 선산 문동골, 지금으로 말하면 독동리의 자형 40세의 송암 노수함(松庵 盧守諴)에게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웠다. 13세에 인동으로 돌아와 16세에 중국의 성리학자 120명의 학설을 모은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게 되고, 18세의 어린 나이에 직접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스스로 만들면서 그의 천재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장현광의 어머니는 여헌 선생이 과거시험을 보아 벼슬하기를 원했지만, 안동의 도산서원에 머물며 성리학을 연구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던 퇴계선생이나 지리산 밑에서 은거하며 평생 성리학만 연구했던 남명 조식 선생처럼 여헌 장현광선생은 벼슬에는 관심이 없고, 공부하는 성리학자의 길을 선택한다. 한마디로 여헌 장현광이 인동장씨 가문에 등장하면서 인동장씨는 그야말로 전국적인 성리학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장현광은 첫 번째 부인이 청주정씨(淸州鄭氏)이다. 부인의 아버지는 정괄(鄭适)인데 일찍 죽었기 때문에 청주정씨 부인은 어려서 작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작은 아버지가 그 당시 유명한 성주의 대학자 한강 정구(寒岡 鄭逑)선생이었다. 조선 선조 때 한강 정구선생의 추천과 후원으로 장현광은 지역 인재로 이미 유명세를 달리고 있었고 향시에 응시하여 합격한다. 그러나 곧 청주정씨 부인이 죽었고, 6년이 지난 후에 야성송씨(冶城宋氏)와 재혼하였지만, 곧이어 어머니 경산이씨가 죽으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과 슬픔을 뼈저리게 느낀다. 


 장현광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어머니 상중인데도 불구하고 난을 피하여 장현광은 상복을 입은 상주로서 인동에서 금오산 뒤 숭산(崇山) → 구미 해평 → 청송 부남면 → 봉화 도심촌 → 영천 입암으로 젊은 날을 정처 없이 풍찬노숙의 떠돌이 삶을 살게 된다. 이러한 긴 여정 때문인지 몰라도 44세에 피난도중 청송에서 “나그네의 집”이라는 여헌(旅軒)이라는 호를 짓게 된다. 여헌 장현광은 전쟁의 와중에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의 추전으로 보은현감과 의성현령을 충실히 수행하여 당시 보은과 의성지역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송과 찬사를 들었다.


여헌선생은 “나그네는  한 곳에 자기 집이 없고, 일정한 곳에 집이 없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자기 집이 아닌 곳이 없다.”라면서 자기 삶이 고스란히 담겨진 여헌(旅軒)이란 호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봉화 도심촌에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낙향해 있는 장현광 본인을 보은현감과 의성현령으로 추전해준 서애 류성룡을 만나 인간적인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전쟁의 피해로 고향에는 아무것도 없어 노수암의 아들이며 생질(누나의 아들)인 선산 생곡리의 노경임(盧景任)에게 몸을 의지하고 의탁한다. 그리고 본인의 외동딸을 해평 괴곡리 용암(龍巖) 박운(朴雲)의 후손인 여헌선생의 친구이자 함께 공부한 박수일(朴遂一)의 아들 박진경(朴晋慶)에게 시집보낸다. 


노경임은 외삼촌 여헌선생이 거쳐할 집을 지어드리는데 여헌선생은 그 집을 원회당(遠懷堂)이라 이름 짓고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친다. 원회당은 낙동강 물이 흘러가는 것이 한 눈에 보이는 장소였다. 그리고 이때 여헌선생은 52세였는데, 종질(5촌 조카) 장응일(張應一)을 양자로 삼는다. 여헌 이후 장응일은 대과에 급제하여 또 한번 중앙정치 무대에서 인동장씨를 빛내는 인물이 된다.

거처할 곳이 없는 여헌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장경우와 제자들은 힘을 모아 여헌선생을 모시기 위해 집을 짓는데, 여헌선생은 그 집을 “조상을 사모하고, 조상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모원당(慕遠堂)이라 이름 붙인다. 모원당은 “영원한 나그네 선비” 여헌 장현광의 안식처가 된다. 모원당은 지금 오늘날의 구미시 인의동에 위치하고 있는 여헌종택(旅軒宗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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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시 인의동에 있는 여헌종택> 

이후 장경우(張慶遇)와 제자들은 여헌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는 낙동강 강가에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를 세운다. 지금 현재 동락서원 옆으로 흐르는 낙동강에 보이는 바위들을 무척 좋아해서 여헌선생은 부지암이라고 이름 지었고, 우뚝 솟은 금오산을 항상 바라보았다.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중국 오악 가운데 하나인 숭산(崇山)에 비해 손색이 없다하여 남숭산(南崇山)이라 불려졌다. 그래서 많은 선비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아마 여헌선생도 부지암에서 금오산을 매일 바라보았을 것이다.  


부지(不知)는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여헌선생은 이 부지(不知)에 대해 “첫째 알지 않아도 되는 것은 모르는 것이 좋다. 재주를 부리거나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은 모르는 것이 좋다. 둘째 사람들이 몰라주는 것을 탓하지 마라. 내가 능력이 없어 남이 몰라주는 것은 내 능력 탓이니 능력을 길러야 하고 능력이 있는데도 알아주지 않으면 상대방 능력 없거나 잘 못이니 가만히 있으라. 이렇게 하면 겸손한 사람이 되고 겸손한 사람은 존경을 결국 받게 된다.”는 철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공자(孔子)의 군자삼락(君子三樂)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訪來 不亦樂乎), 인이부지불온 불역군호(人而不知不溫 不亦君乎)”이다. 이 부지암정사에서 여헌선생은 공자의 군자삼락을 스스로 즐기고 실천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그래서 군자삼락의 마지막 단락 나오는 부지불온(不知不溫)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아니 하고, 괴로워하지 아니한다.”는 군자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지기 위해 낙동강 물속에 있는 바위를 부지암(不知巖)이라 이름 짓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인조15년 여헌선생은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제자들이 부지암정사를 서원으로 바꾸는 것을 결론 내리고 부지암서원으로 바꾸었다. 제자들이 서원 현판을 왕에게 요구하자 숙종은 동락서원(東洛書院) 현판을 하사한다. 동락이란 동국(東國)의 이락(伊洛)이라는 뜻이다. 동국은 조선을 뜻하는 것이고, 이락은 중국 송나라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제자들에게 강학하던 이천(伊川)과 낙양(洛陽) 뜻한다. 동락서원은 중국의 이락처럼 성리학의 성스러운 곳이 되라는 의미에서 동락(東洛)으로 이름지어졌다.


동락서원 담장 옆에 아주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를 천연대(天淵臺)라고 한다. 이 천연대는 시경(詩經) 나오는 연비려천 어악우연(鳶飛戾天 魚躍于淵)에서 유래된다. 해석하면 “솔개는 날아 하늘에 닿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니” 뜻으로 인륜의 도(道)는 억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와 같이 행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천연대의 깊은 뜻을 이해한다면 여헌선생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생각과 철학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다.


여헌 장현광이 살던 시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 때에 북인(北人)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북인들은 서인과 남인을 조정에서 제거하기 시작하면서 극심한 정치적 격동기의 시대였다. 조선사회의 붕당(朋黨)이 형성되고, 서로 간의 대립이 발생한 것은 선조 1574년 김효원(金孝元)이 이조전랑(吏曹銓郞)에 발탁되면서 시작된다. 


다음해 심의겸(沈義謙)의 아우인 심충겸(沈忠謙)이 김효원의 후임으로 이조전랑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전랑(銓郞)의 직분이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고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의 대립은 급기야 사림의 분열을 가져와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지는 원인이 된다.


이조전랑은 그 직위는 정 5품으로 그리 높지 않았으나, 조정의 실질적인 인사권을 가진 직책으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조전랑은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공론을 거쳐 선출하였으므로 당시 관료들 사이에 선망의 대상이며, 누가 이조전랑의 자리에 있는가에 따라 당시 정치세력의 위치가 달라지는 자리였기 때문에 정쟁과 대립의 중심에 있었다. 

김효원과 심의겸의 충돌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東人)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西人)으로 대립을 본격화한다. 그러나 동인은 정치적 입장 차이에 따라 서인에 대한 온건한 입장을 가졌고, 학통상 퇴계 이황을 따르는 남인(南人)과 서인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가지며 남명 조식의 학통을 따르는 북인(北人)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북인은 다시 정치적 입장에 따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으로 갈라진다. 따라서 선조와 광해군 때는 서인·남인·북인이라는 정치적 붕당이 생겼고, 대립하는 시대였다.


임진왜란 당시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운 의병장들이 남명 조식에게 공부한 북인들이었다. 그래서 북인들은 임진왜란이후의 정권을 잡는다.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북인의 대북파가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정치적 시기에 여헌 장현광선생에게 광해군은 합천군수, 선공감 첨정, 사헌부 지평이라는 벼슬을 내렸으나, 여헌선생은 사직소(辭職疏)를 올리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내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많은 유능한 인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전국의 인재를 등용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인조는 잠야 박지계(潛冶 朴知誡)와 여헌 장현광을 불러오라고 하지만, 여헌선생은 인조에게 자신은 “학문이 얕고 좁으며 잘 하는 일이 없으며, 부족하거니와 나이가 70이라 기운과 정력이 없으며 질병이 잦아 임금의 부름에 나갈 수 없다.”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인조는 멈추지 않고 여헌선생에게 다시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의 교지를 내림으로서 여헌으로서는 더 이상 임금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울로 가는 도중 질병이 발생하여 질병으로 못 올라가는 까닭의 상소를 올린다. 그리고 다시 인조는 사퇴하지 말고 치료한 다음 올라오라는 답장을 여헌선생에게 보낸다. 이후 인조는 성균관의 사업(司業)이라는 벼슬을 덕망이 있으며, 학문이 높다는 평가를 받던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장현광, 박지계에게 내렸으나, 이때에도 여헌 장현광은 늙고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2년에 인조반정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이괄(李适)은 1등 공신이 아닌 2등 공신으로 결정되면서 군사를 일으켜 평안도에서 서울로 진격하여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충청도 공주로 피신하여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여헌선생은 급히 공주로 향했지만, 경기도 이천에서 이괄의 난이 진압되면서 인조는 서울로 돌아간다. 그래서 여헌선생 역시 서울로 발길을 옮겨 가는 도중 인조에게서 사헌부 지평의 교지를 받고, 비로소 여헌선생은 인조 앞에 나가 혼란한 대내외적 정치적 상황을 빨리 안정시킬 것을 아뢰었고, 1개월 만에 인조에게 사직의 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다음해 다시 인조는 여헌선생에게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제수하였으나 사직의 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다음해 인조는 여헌선생에게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한다. 벼슬을 주는 임금의 명령에 계속 사직의 소를 올리는 것이 임금의 명령에 대한 거역으로 비춰질 수 있어 서울로 가는 도중 여헌선생이 그만 타고 가던 말에서 떨어져 몸을 다쳐 여헌선생은 또 사직의 소를 올려야 했다. 


인조의 여헌선생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인조 4년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제수하는데, 이때 여헌선생의 나이가 73세였지만, 어머니 상을 당한 인조에게 위로의 조문을 한다. 인조는 여헌선생에게 여비와 음식, 그리고 녹봉을 내리지만 벼슬과 녹봉을 사양하고 인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형조참판에서 사퇴한다. 


서울에 온 것은 벼슬과 녹봉을 받으러 온 것 아니라 어머니 상을 당한 인조를 위로하기 위함이라는 여헌선생의 생각과 뜻을 밝힌다. 인조는 이 날 또 다시 여헌선생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제수 한다. 그래서 여헌선생은 사직의 소를 다섯 번이나 올리는데 여헌선생은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두 가지 이유를 인조에게 제시한다. 


그 첫 번째가 자신의 병이 습한 여름이 되면 더욱 몸이 아프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자기를 키워주고 돌봐 준 어머니와 같은 누님이 95세인데 병이 위중하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여헌선생에게 먼 길을 조심해서 돌아갈 것과 인조 본인이 사용하는 약을 여헌선생에게 직접 하사였으며, 여헌선생이 돌아가는 모든 관아에 말을 공급할 것과 안전하면서도 편안하게 돌아 갈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인조의 여헌선생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인조4년 12월 경상감사에게 여헌선생이 잘 지내고 있는가를 확인하라고 지시하며, 여헌 장현광의 생활이 궁핍할 것이니 쌀과 콩 그리고 음식을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여헌선생에 대한 인조의 애정과 관심이 지극하다는 것을 알게 된 여헌선생은 너무도 감격하여 감사의 상소를 올리려고 했으나, 중국의 명나라가 쇠퇴해가면서 군사력을 키운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이때를 틈타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조선을 침략한다. 


따라서 인조는 여헌선생에게 장정들을 불러 모아 의병을 일으키라는 호소사(號召使)의 교지를 내린다. 여헌선생은 군량미를 확보하고 의병을 조직하여 북으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이미 후금과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급한 나라의 방비를 위해서 국방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다.


1629년 인조 7년에 인조는 사계 김장생과 여헌 장현광을 또 다시 불러들이고 싶은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은 임금이 보낸 교자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임금이 보낸 교자를 타고 오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인조는 “속히 내가 보낸 가마를 타고 올라와서 내 마음에 부응하라”는 하명이었다. 


그러나 여헌선생은 비록 늙고 병이 들었지만 선비의 진실한  마음으로 인조에게 갈 수 없다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인조는 “빨리 와서 위아래의 사치스러운 풍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의 본보기로 삼으려고 하니 빨리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당시 임진왜란이후 조선사회의 백성들은 궁핍함에 허덕이는데도 높은 관리들뿐만 아니라 하급관리들까지 비단옷을 입는 사치스러운 경향이 생겨나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은 깊은 근심과 걱정을 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래서 인조는 이러한 사치스러운 풍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김장생과 장현광이 필요했던 것이다. 인조는 “사대부가 모두 장현광처럼 된다면 백성들의 풍속이 달라질 것”이라며 여헌선생의 검소한 옷차림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76세의 여헌선생은 나아가지 못함에 사죄의 상소와 함께 “임금이 잊지 않아야 하는 세 가지와 조정의 신하가 잊어야 하는 세 가지”를 올렸다.


임금이 잊지 않아야 할 세 가지는 첫째, 위태로움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편안함으로 위태로움을 잊게 된다면 안전한 생활을 못하게 된다는 것. 둘째, 혼란해 질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질서가 있다고 해서 잘 다스려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임금이 방심하면 질서는 파괴되고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셋째, 멸망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나라를 보존하고 임금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해서 방심하고 방탕하면 나라를 잃게 된다는 것이라며 평상시에 국방에 대한 대비를 튼튼히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하가 잊어야 할 세 가지는 첫째,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잊으라는 것이었다. 둘째, 백성을 위해 앞장서기 위해서는 자기 집을 잊으라는 것이었다. 셋째 사리사욕의 사사로움을 잊으라는 것이었다. 여헌선생의 이러한 상소에 임금 인조는 상당한 감명을 받았다고 하며, 더더욱 여헌선생을 존경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여헌선생은 인조의 친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추존하는 일이 잘 못되었다는 상소를 올려 인조의 잘 못된 행동들을 꾸짖고, 일깨웠다고 한다. 


이러한 여헌선생의 임금에 대한 애정을 알고 있는 인조는 한해가 가기 전에 인동부사에게 “장현광은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키고 숨어 살면서 평소의 뜻을 잘 지키고 있는 장현광을 인동부사는 찾아보고 나의 뜻과 함께 푸짐한 음식을 전하여라!”했다고 하니 임금이 항상 그를 얼마나 존경하며 아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헌선생이 81세가 되자 인조는 여헌선생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의 벼슬을 제수한다. 그러나 여헌선생은 늙은이가 세운 공도 없는데 무슨 벼슬을 하냐 하며 사양하는 상소를 곧바로 올리지만, 인조는 그 해에 또다시 여헌선생에게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한다. 여헌선생은 인조에게 내린 직책을 거두고 분수를 지키며 편안히 살다가 죽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인조는 80이 넘은 노쇠한 여헌선생을 계속 올라와 본인의 소망에 부응하라는 것이었다.  


인조는 다음해에 또다시 여헌선생에게 의정부 우참찬(議政府 右參贊)에 제수한다. 당시 조선을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세는 심각해져 가고 있는 상황에 인조와 정온(鄭蘊), 최명길(崔鳴吉) 등은 세상의 풍속이 어지럽고 천박하다는 걱정과 함께 당시를 이렇게 평가했다. “지금은 훌륭한 스승이 없습니다. 오직 술을 마시고 장난과 농단을 일삼고 있어 날이 갈수록 풍속이 어지럽고 불안합니다.”라고 한탄했다. 


이러한 시대의 한탄 속에 인조 14년 여헌선생은 지중추부사에 또다시 제수되어 인조가 가마와 수레를 보낼 것이니 속히 상경하라는 임금의 명을 받는다. 83세의 여헌선생은 상경하는 도중 상주 함창현에서 병으로 건강이 위독해지자 아들 장응일에게 마지막 상소를 임금에게 전하게 했다. 이에 인조는 여헌선생의 상소를 접하고 올라오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않으며 “경은 억지로라도 올라와서 갈망하는 내 마음에 부응하라”라고 했으니 조용하게 살고 싶은 늙고 병든 여헌선생을 끝까지 괴롭혔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직후 후금은 여진족을 통합하여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청 태종이 강제로 조선에게 신하의 관계를 맺으라는 것을 요구하자 조선은 이를 거부하자 청 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진격하는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인조는 급히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과 전쟁을 선택하지만 군사와 군량미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따라서 남한산성 안에서는 청과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崔鳴吉)을 중심으로 하는 주화론(主和論)과 절대로 항복할 수 없으며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김상헌(金尙憲)을 중심으로 주전론(主戰論)이 대립하였다. 김상헌의 주전론은 이후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사상으로 발전하고, 이것은 소중화사상으로 발전한다.

명나라 중국이 망했으니 중화의 사상을 조선이 대신해야 한다는 "조선이 곧 중화"라는 소중화(小中華)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에 서인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이 있었다. 이후 서인 노론 정권은 조선을 완전히 지배하면서 국내정책과 외교정책을 서인 노론들이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소중화 사상은 "서양을 물리친다"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으로 발전하여 쇄국정책을 일관하다가 결국 조선은 그 생명력을 다하여 무력 앞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다.


인조는 전쟁을 멈추고 주화론의 입장을 받아들여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굻고 청과 신하의 관계를 맺는데,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여헌선생은 선비로서 수치와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세상을 등지고, 젊은 날 찾았던 영천의 입암(立巖)에 들어가 살 것을 결심한다. 곧바로 조상 산소에 아뢰는 고유문을 짓고 조상님들 산소에 하직 인사를 한다. 이후 여헌선생은 살아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서 고향 인동 땅으로 돌아온다. 


여헌선생은 입암 깊은 산골로 들어가 만활당(萬活堂)에서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하는 일을 구분하였다. 첫째, 필요 없는 말을 많이 하지 않기로 했다. 둘째, 계획하는 일을 적게 하려고 했다. 셋째, 마음을 크게 비우려고 했다. 넷째, 무엇을 억지로 하려고 애쓰지 않는 삶의 태도를 가졌다. 84세의 여헌선생이 병을 앓아 누운지 20일만에 영원한 나그네의 길을 가고 말았다. 그런데 여헌선생이 세상을 떠나는 날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고 하늘이 짙은 어둠의 먹구름이 끼이고 비바람이 세차게 내렸다고 전한다. 


입암에서 발인하여 상여가 고향 인동까지 수백리 길을 오는데 한 달 정도 걸렸고, 여헌선생의 상여를 따르는 사람이 무려 5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인조는 여헌선생이 돌아가신 것을 듣고는 매우 슬퍼하며 이틀 동안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시장(市場)을 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직접 제문을 지어 보내는데, 그 중에서 인조는 여헌선생을 “500년에나 한 번씩 태어나는 우리나라의 큰 인물”라는 평가를 하였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장례비용과 일할 사람들을 보내라고 하였다. 12월 15일 금오산(金烏山) 아래에 있는 오산동(吳山洞 지금 오태동) 동쪽자리에 장사를 지냈다. 이후 여헌선생의 3년 상이 끝나고 위패가 여러 지역의 서원에 봉안되어졌다.  


그는 고향의 낙동강 물속에 있는 바위를 부지암(不知巖)이라 이름 붙였다. 여헌선생의 부지(不知)는 “알지 못한다” 보다는 공자의 군자삼락에 나오는 “부지불온(不知不溫) 즉,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임금뿐만 아니라 모든 신하와 선비들이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 아닌 알아주는 큰 선비였고, 세상의 큰 나그네”였다. 


필자가 보기에는 여헌 장현광은 살아서는 집이 없는 나그네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죽어서는 수많은 선비들의 가슴속에 여헌 장현광의 사상과 철학이 들어가면서 생전에 집이 없는 나그네 선비가 오히려 커다란 집을 얻은 선비가 되었다. 여헌선생은 살아서는 그렇게 많은 벼슬을 제수 받았지만, 항상 사직의 소를 올리고 벼슬을 멀리했다. 그러나 여헌선생은 사후(死後) 시간이 흘러 효종 때 조선 최고의 벼슬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을 때는 사직의 소를 올릴 수가 없었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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