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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칼럼

[김기훈의 명문가와 인물]“학문으로 대(代)를 잇는” 낙동강가의 전주류씨(全州柳氏)를 찾아가다.

이순락기자 0 25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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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새로넷 방송 시청자 위원 

구미에서 국도를 따라 상주 방향으로 가다가 일선교 근처에서 오른쪽으로 냉산을 바라다보면 그 아래 옛 한옥들이 즐비한 곳이 보인다. 이 마을이 바로 해평 일선리 문화재마을이다. 구미에서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옛날 기와집과 고택들이 많다. 항상 지나다니면서 한번 가봐야지 하면서도 시간을 못 내다가 모처럼 겨울 끝자락에 이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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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류씨 문화재마을 뒷산에서 내려다 본 전경>


마을입구에는 전주류씨들의 정체성을 담은 “안동 무실 류씨들이 우거하여 타향 땅을 고향으로 삼는다”는 수류우향(水柳寓鄕)이란 글귀가 새겨진 큰 바위돌이 서 있다. 이 마을은 전주류씨 집성촌으로 1987년 안동 임하댐 건설로 고향이 수몰되는 위기를 맞자 70호가 구미 해평면 일선리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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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전주류씨 수류우향 바위돌>


그런데 전주류씨들은 안동뿐만 아니라 영남에서도 알아주는 명문가답게 그들은 조상들의 혼과 삶의 흔적들이 녹아있는 수남위종택, 만령초당, 삼가정, 용와종택, 침간정, 동암정, 대야정, 호고와종택, 근암고택, 수재고택(임하댁) 등 10여 채를 함께 옮겨왔다.

그리고 그들은 집안대대로 내려오는 학문과 정신을 계승하는데 지금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전주 류씨는 조선 시대에 문집이 가장 많은 다섯 가문(의성김씨, 전주류씨, 안동김씨, 진성이씨, 반남박씨) 중 한 가문이다. 그 만큼 학자와 인재가 많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문가로 인정받으려면 그 가문에 반드시 불천위(不遷位)제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불천위 제사는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나라와 유림에서 허락한 것이다.

안동지역에는 우리나라 50여개 종택(宗宅)이 있으며, 50여개의 불천위제사 있다. 그 중 대표적으로 진성이씨 8개, 풍산류씨 5개, 의성김씨 5개, 전주류씨 5개, 안동권씨 4개의 불천위 제사가 있다. 이 불천위 제사만 보더라도 명문가가 제일 많다는 안동에서 전주류씨들의 위치를 알 수 있겠다.


일선리 마을의 전주류씨들은 안동의 임동면의 수곡리(水谷里)에 있는 무실, 박곡리(朴谷里)의 박실, 한들이라는 곳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래서 안동지역과 구미 일선리에 거주하고 있는 전주류씨들은 전주류씨 수곡파(全州柳氏 水谷派) 문중 혹은 무실류씨라고 한다.

수곡(水谷)은 “물의 계곡” 즉, 물이 풍부하다는 의미이다. 이 수곡의 순 우리말이 “무실”이다. 박곡리가 “박 같이 생겼다”해서 박실이며, 한들(大坪)은 순 우리말로 “큰들”이라는 표현이다. 


버드나무는 항상 물이 있어야 잘 살 수 있다. 그래서 버들 류(柳)를 쓰는 성씨(姓氏)답게 항상 물이 풍부한 곳에 정착해야 가문이 번성한다는 것을 지키며 살아오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댐 건설로 고향을 떠나는 전주류씨 가문이 새롭게 정착할 곳은 물이 풍부하면서도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세를 가진 땅이라야 했다. 그곳이 바로 해평면 일선리였던 것이다.

영남의 명문가라고 자부하는 전주류씨들이 일선리에 정착하게 되는 것 중 또 하는 조선 영조때 이중환이 쓴 택리지(擇里志)에 “조선인재 반재영남, 영남인재 반재선산( 朝鮮人才 半在嶺南, 嶺南人才 半在善山) 조선 인재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 반은 선산(善山)에서 났다.”는 기록들도 중요한 하나의 요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해평 일선리로 이주해온 전주류씨 가문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미가 아닌 안동으로 역사적 시간을 되돌려야 전주류씨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겠다. 해평면 일선리 앞에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의 물줄기를 따라 북쪽의 안동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고, 안동이라는 특성을 어느 정도 이해를 해야 깊이 있는 이해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전주류씨 가문이 영남의 명문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인가? 부터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한마디로 전주류씨들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정립한 성리학(性理學), 예학(禮學), 역학(易學)을 “할아버지 → 아버지 → 나”로 이어지는 가학(家學)을 통하여 퇴계학(退溪學)을 계승 발전시켜 왔다.

현재에도 전주류씨들은 조상들에게서 이어져 오는 가학을 게을리 하지 않기 때문에 영남의 명문가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안동에 그 많은 명문가가 있어도 학자가 많기로는 전주류씨를 최고로 손꼽는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서인(西人)들이 지배층을 형성하게 되면서 영남 남인(南人)들은 조선사회의 주류가 되지 못하고, 소외받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따라서 영남 남인들은 벼슬길에 나가도 반대파에게 몰려 화를 입은 사화(士禍)를 당하거나 배척받고 소외된다.

따라서 벼슬길에 나가도 얼마 있지 않아 고향으로 낙향하여 후학양성과 학문만을 하는 경향이 확연해 진다. 특히 퇴계 학통을 이어 받은 선비들이 대표적이다. 그 중심에 전주류씨 가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겠다. 


18세기 조선에서는 “천김쟁쟁(川金錚錚), 하류청청(河柳靑靑)”이라는 말이 있었다. 퇴계 이황의 가장 큰 수제자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과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이 남인(南人)이었다. 이후 학봉과 서애의 제자들 역시 스승을 따라 남인의 길을 걸어야 했다.

따라서 안동 사람들과 안동 지역은 서인노론(西人老論) 집권층에서 볼 때 항상 감시의 인물들이며, 감시 대상 지역이었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조선의 모든 지배권은 노론에게로 넘어가 조선의 왕조차도 노론 세력의 눈치를 살펴야 권력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부패하고 무능한 노론의 지배정치는 세도정치를 양산했고, 이 세도정치는 결국 조선이 망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을사오적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부대신 권중현(權重顯) 이들 역시 서인 노론의 핵심인물들이었다. 조선을 망하게 한 노론 세력들은 침략자 일본에게 결국 회유되어 일본인보다 더 일본을 찬양하고 조선을 유린하는데 더 앞장선다. 


“천김쟁쟁(川金錚錚)”은 의성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 의성김씨들은 아직도 쟁쟁하고, “하류청청(河柳靑靑)”은 풍산 하회마을 풍산류씨들은 아직도 싱싱하게 푸르다는 서인 노론들의 평가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당시 안동의 선비들이 너무나 쟁쟁하고, 청정하여 회유하거나 힘과 글로서는 제압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서인 노론들이 걸었던 길과 다르게 영남 남인들은 중앙정치 무대에 나갈 수 없는 한계성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학문 연구에만 집중하고 연구하는 경향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서인 노론들이 안동 유림들을 항상 감시하고, 정치적 의사를 파악했다는 것이었다. 퇴계이황의 학통은 걸출한 두 제자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퇴계 이황의 걸출한 제자 두 사람은 당대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말과 글”을 하는 영남 선비들에게 학통(學統)을 만들어 가게 한다. 


자연히 서인 노론들이 집권하면서 영남 유학자들의 학문의 깊이와 성숙도는 성리학의 종주국인 중국을 능가하는 역량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영남의 유학은 수양방법은 자연적으로 가학(家學)형태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경향이 많았고, 특히 학문적으로 걸출한 사람이 퇴계학을 이어받는 경향이 농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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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의 학문이 학봉 김성일로 이어져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 → 갈암 이현일 (葛庵 李玄逸)→ 밀암 이재(密庵  李栽)→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손재 남한조(損齋 南漢朝)→ 정재 류치명(定齋 柳致明)  →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  →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이어졌고, 다시 정재 류치명에서 척암 김도화(拓菴 道和) →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 → 동산 류인식(東山 柳寅植) 등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안동에는 “3년마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왔다가야 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농사가 잘된다.” 말이 있다. 의금부도사는 조선 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강제로 조사하면서 무시무시한 공포의 힘을 보여주는 관리였다. 


당시 의금부도사는 지금으로 말하면 “과거 공안검사” 좀 되는데, 실제로 의금부도사가 안동을 3번이나 왔다갔다고 한다. 이것은 오히려 안동 선비들에게 크나큰 영광과 자부심을 갖게 했던 것이다. 그만큼 안동의 선비들은 옳은 것을 주장할 때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반골(反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안동 유림의 반골기질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여 나라를 총칼로 빼앗아 식민지정책을 시행할 때 많은 독립운동가와 우국지사를 배출하게 하는 심리적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충(忠)과 의(義)에 대한 강한 집념은 안동 선비들에게 부귀영화를 버리고, 만리타향에서 배고픔과 추위를 이겨내며 조국광복을 위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만들었다고 하겠다. 


학봉 김성일을 중심으로 하는 학통은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강탈하면서 서산 김흥락, 척암 김도화, 향산 이만도, 백하 김대락은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일본에 강력하게 저항한다. 따라서 이들의 제자들인 석주 이상룡과 동산 류인식, 일송 김동삼, 백하 김대락은 전통적으로 계승되던 유학(儒學)을 뒤로하고, 신교육을 받아들여 협동학교를 세워 신지식과 민족의식을 일깨운다.

당시 가장 폐쇄적일 것만 같은 안동 사람들이 가장 앞장서서 신교육과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혁신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다름 아닌 혁신유림(革新儒林)이라고 학계에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1910년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완전히 빼앗자 이들은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위해 추위와 배고픔이 기다리는 만주벌판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망명길에 오른다. 참으로 “배움이라는 것이 사람의 본능을 이긴다.”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절개와 지조”를 지키기 위해 조선의 마지막 선비들은 그렇게 고향의 따뜻함을 뒤로 한 채 추위와 배고픔이 기다리는 북녘의 만주 땅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망명을 하게 된다. 


이들의 망명은 글공부만 하던 안동의 선비들에게 또 다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석주·동산·일송·백하을 따라 조국독립을 위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안동 선비들이 무려 1000여명이나 나오게 된다. 안동을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하는 이유가 이런데서 나온 것이다. 안동사람들의 독립운동에는 혈연·학연·지연을 칼과 도끼로도 끊을 수 없는 끈끈한 선비정신이 작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국을 되찾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많은 사람들이 있겠다. 그중에서도 의성김씨 가문과 전주류씨 가문이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다. 이 두 집안의 역사적 코드(code)는 나라가 위기일 때 항상 함께 하는 코드를 가졌다고 하겠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알아야 “학문으로 대(代)를 잇는” 전주류씨 가문을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500년 동안 내앞(前川)마을 청계 김진(靑溪 金璡)의 불천위(不遷位) 제사에 올리는 건어물을 전주류씨 가문에서 항상 정성스럽게 마련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가? 의성김씨(義城金氏) 가문 그리고 전주류씨 가문에는 반드시 그들만의 역사적 코드(code)가 있을 것이다. 이제 그 코드를 찾아보자.


전주류씨가 안동 무실마을에 정착하게 되는 것은 류성(柳城)이 의성김씨 청계 김진(靑溪 金璡)의 사위가 되면서이다. 청계 김진은 학봉 김성일의 아버지이다. 따라서 학봉 김성일과 류성은 처남매부지간이 되며, 류성은 기봉 류복기(岐峯 柳復起)와 묵계 류복립(墨溪 柳復立) 형제를 슬하에 두지만, 류복기가 6세 때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더 비극적인 것은 두 형제의 어머니인 의성김씨 부인 김옥정(金玉貞) 역시 남편의 3년 상을 치르고, 두 형제를 남겨둔 채 죽게 된다. 집안 사정이 이렇게 되다보니 부모를 잃은 두 형제는 외삼촌 학봉 김성일 집에서 키워지게 되며, 학봉 김성일은 두 형제의 의식주를 해결하며 공부를 가르친다. 이렇게 되면서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 집안과 전주류씨 가문의 500년 인연이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부모가 없던 류복기 형제는 외삼촌 학봉 김성일을 부모처럼 따르고 성장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류복기는 안동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고, 류복기의 아들 5형제도 아버지를 따라 전쟁에 참여 하여 많은 전공과 함께 전쟁으로 배고픔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당시 학봉 김성일은 경상도에서 발생하는 전쟁을 총괄하는 초유사(招諭使)의 임무를 담당하다가 병으로 죽게 된다. 학봉 김성일은 마지막으로 류복립에게 “진주성을 사수하라”는 유언을 남기자, 류복립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장렬하게 전사한다. 


따라서 전주류씨 가문은 류복기, 류복립 형제와 류복기의 다섯 아들(류우잠, 류득잠, 류지잠, 류수잠, 류의잠)  충(忠)과 의(義)를 지킨 7의사(義士)의 위패를 모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지킨 숭고한 뜻을 기리고, 이러한 뜻을 계승하기 위해 기산충의원(岐山忠義院)을 만들 계획을 수립한다.  

무실 전주류씨의 이러한 뜻이 정부에 받아들여져 전주류씨와 정부가 힘을 합쳐 2016년에 건립한다. 지금은 기산충의원이 안동의 관광자원 중 하나이며, 정신적·문화적 자원으로 자리 잡은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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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의사가 모셔져 있는 안동 기산충의원>


전주류씨 가문이 안동 수곡리 무실에 자리 잡은 중심적 인물은 기봉 류복기(岐峯 柳復起)가 분명하다. 류복기는 혼례를 치루기 위해 영덕으로 가던 중에 어떤 노파가 보더니 “신랑은 좋은데”라고 하며 지나갔다. 함께 가던 학봉 선생이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 노파를 불러 “신랑은 좋은데” 그 뜻을 물었다. 그 노파는 “신부는 귀머거리에 벙어리입니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학봉 선생은 류복기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류복기는 “외숙부님, 앞을 못보고, 듣지도 못하는 벙어리일지라도 이미 하늘이 정해 준 것이니, 이 혼례는 이루어진 것과 같습니다. 제가 가지 않는다면 그녀는 ‘문짝만 바라보는 과부’인 망문지과(望門之寡)의 여인이 됩니다. 제가 그 신부와 혼례를 치르지 않으면 그 신부를 이 세상에 영원히 버리는 것과 같아서 다음에 누가 그녀에게 장가를 가겠습니까?” 


기봉 류복기는 외삼촌 학봉선생에게 이러한 뜻을 전달하자, 이 사건으로 외삼촌이던 학봉선생은 생질 기봉 류복기의 인간됨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신부 댁에 도착하여 혼례를 치르고 보니, 그 노파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고 한다. 신부 측에서 노파 거짓말을 이용하여 류복기의 인간됨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것만으로도 기봉 류복기의 인간됨을 알 수 있겠다.  


기봉 류복기의 현손인 류봉시(柳奉時)가 삼가정(三假亭)을 짖고 가죽나무 세 그루를 심는다. 세 그루는 아버지와 두 아들을 뜻하는 것이며, 가죽나무는 항상 "잘못된 행동들을 삼가하고, 경계하라" 회초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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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 류봉시가 지었다는 삼가정>


가죽나무는 가죽나물 순을 먹기 위해 해마다 봄에 사람들이 가지를 꺾는다. 하지만 다음 해에는 어김없이 새가지를 뻗어 더 많이 번성하는 것이 가죽나무의 특성이다. 

가죽나무의 가지를 꺾으면 꺾을수록 중앙의 둥치는 더 굵어지고, 나무가 잘 번성하는 게 가죽나무의 특성이다. 세 가죽나무에는 회초리의 의미도 담겨있겠지만, 가죽나무처럼 학문과 집안이 번성하라는 의미에서 심지 않았을까? 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가죽나무의 특성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면 필자의 생각을 잘 이해 할 것이다. 해평면 일선리의 삼가정의 가죽나무는 옛날 것이 아니고, 전주류씨가 이주한 이후 과거를 되새기며 다시 세 그루의 가죽나무를 심었다.


류봉시는 두 아들인 용와 류승현(慵窩 柳升鉉)과 양파 류관현(柳陽 坡觀鉉)의 교육에 전념하였고, 이들 형제가 문과에 급제하면서 전주류씨의 학문과 명성은 떨치기 시작했다. 이들 두 형제에서 비롯된 전주류씨들의 가학(家學)은 나날이 발전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기 시작하면서 영남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내로라하는 선비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두 형제는 전주류씨가 가학을 잇게하는 초석을 만들고, 많은 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이후 전주류씨 가문은 오래도록 150여명의 학자를 배출하게 된다. 무실의 전주류씨 가문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장본인은 다름 아닌 류봉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용와 류승현은 여러 벼슬들을 하였지만, 벼슬살이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27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영조 1728년 이인좌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영조가 직접 활과 화살을 류승현에게 하사했다고 하니, 이것만 보더라도 용와 류승현에 대한 영조의 관심과 애정은 남달랐다고 하겠다. 그러나 류승현은 45세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한다. 


동생 류관현은 사도세자의 시강관을 하였고, 경성판관 때는 극심한 흉년이 들어 굶주리고 있는 백성에게 세금을 감면하고, 쌀 1천석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목민관의 류관현의 치적을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양파 류관현은 당대 조선사회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관료이자 선비였다는 것을 다산 정약용이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류승현이 죽자 류관현은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전주류씨의 가학(家學)이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가족이 스승과 제자가 되어 발전되던 전주류씨의 가학(家學)은 시간을 거치면서 수많은 학자와 문집이 나왔다. 일일이 다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전주류씨 가문에 많은 학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빛을 발하고 탁월한 학자가 나오는데, 그가 바로 정재 류치명(定齋 柳致明)이며, 정재학파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 해야 하는 사람 중 한 분은 호고와 류휘문(好古窩 柳徽文)이다. 가히 호고와 류휘문은 천재성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벼슬을 하지 않는다. 전주류씨 가문에서 류휘문을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예학, 역학, 천문, 음악 등에 심오하면서도 박학다식한 실학자였다는 것이다. 조선후기 안동지역에서도 호고와 류휘문을 통해 “실학(實學)이 싹트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영남에서 학문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퇴계학이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을 거쳐 손재 남한조(損齋 南漢朝)로 이어지고, 이것은 마침내 정재 류치명으로 이어져 매듭지어지게 된다. 정재 류치명은 19세기 영남 유학의 종장(宗匠)이 된다.

만년에 수많은 학자들을 지도하고 가르쳐 그가 죽은 후에 상여 줄을 잡고 따른 선비가 900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의 학식과 인격이 대단하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엿 볼 수 있다고 하겠다.


19세기 정재 류치명이 영남 유학의 종장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에는 퇴계학과 영남 성리학을 당대에 이끌고 있던 외할아버지 대산 이상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재 류치명선생이 더 대단한 것은 그의 제자들인 서산 김흥락과 척암 김도화, 향산 이만도, 백하 김대락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국권을 빼앗는 동안 의병을 일으켜 저항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이 완전히 빼앗기는 1910년도 망명을 선택한 석주 이상룡·동산 류인식·일송 김동삼·백하 김대락 선생의 선각자적인 행동은 바로 정재의 류치명 선생의 영향을 받았기 대문이다. 정재학파의 제자들은 모두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는 반드시 훌륭한 제자가 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안동뿐만 아니라 영남지역에서 정재 류치명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석주 이상룡·동산 류인식·일송 김동삼·백하 김대락, 이들은 안동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만주로 망명해서 그들이 배웠던 학문을 뒤로 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붓 대신에 총과 칼을 들고 무장투쟁에 남은 삶을 받친다.

이들의 빛나는 행동들은 안동 유림과 안동 선비가 살아있다는 것을 당시 친일의 길을 걷던 전국 유림에게 충격을 주었고, 일본은 안동의 유림들을 극도로 싫어하고 탄압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안동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민족 시인이며,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육사(李陸史) 본명 이원록(李源綠)이 민족의 한과 슬픔을 노래한 시(詩) “광야와 절정”이 나오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 동안, 안동에는 1000여명의 독립운동가가 나왔다. 이렇게 많은 독립운동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장 크게는 퇴계학(退溪學) 속에 녹아 있는 인간의 근본 심성과 유학에서 강조하는 충(忠)과 의(義)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제자들을 가르친 스승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19세기 영남의 유학의 종장 정재 류치명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재학파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시대변화에 따라 혁신유림으로 변화한다.


따라서 정재 류치명, 그는 분명하게 조선후기 영남지역의 지식인의 우두머리였다. 유학과 퇴계학의 종장이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씨를 뿌리고 잉태하게 만든 유학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안동의 혁신유림들은 퇴계학을 기조로 삼아 보다 혁신적인 사고와 방법으로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을 36년간 지배했던 일본 그들이 식민지화 했던 조선사회의 퇴계학이 그들 일본사회의 최고의 학문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퇴계학이 갖고 있는 정신적·학문적 우수성을 이미 입증받았으며, 퇴계학이 갖는 유의미성은 그저 유학의 하나의 지류가 아니라, 최고 단계로 발전한 유학이라는 것을 일본 지식인들이 입증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이라 함은 3대에 벼슬이 나와야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조선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많은 사회적·관료적·정치적 왜곡을 낳았다. 그 중심에는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있었고, 이후 발생되는 외척과 세도정치가 있었다. 따라서 영남 유학을 계승한 이들은 그 중심에 설 수 없었고 변방에서 오로지 학문만을 해야 하는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자연히 벼슬길에 나가더라도 고향으로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 집중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주류씨 가문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학문하는 것을 즐겼고, 집안에서 계승되어 오던 가학(家學)이 발전 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환경이 있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퇴계 이황이 벼슬하는 것을 사양하고, 도산서원으로 물러나 학문연구와 제자들을 가르친 것처럼, 퇴계가 갔던 길을 쫓고 싶은 안동 선비들의 기질이 전주류씨 가문에도 녹아있고, 지금도 그 물줄기는 유유히 흐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 유학(儒學)의 꽃과 열매는 안동에서 피어나고 맺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안동을 공자와 맹자의 고향인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한다. 영남 명문가의 특징들은 첫째, 혼인을 통하여 그들의 위상을 높였다. 둘째, 양반은 “말과 글을 빌리지 않는다.”는 명제 아래 학문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전주류씨 가문은 이러한 기조를 잃지 않으면서 가학을 계승해 왔던 영향으로 해방이후 정부가 수립되면서 전주류씨 가문은 많은 저명한 대학교수와 학자를 배출하였다. 끝으로 전주류씨 가문 출신의 여류 시인 류안진이 쓴 “안동”이라는 시 속에는 안동과 전주류씨들! 그들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안 동>- 류안진       

                                                

어제의 햇빛으로 오늘이 익는 

여기는 안동 

과거로서 현재를 대접하는 곳

서릿발 붓끝이 제 몫을 알아

염치가 법규보다 앞서는 곳 

옛 진실에 너무 집착하느라

새 진실에는 낭패하기 일쑤긴 하지만

불편한 옛것들도 편하게 섬겨가며

참말로 저마다 제 몫을 하는 곳 

눈비도 글 읽듯이 내려오시며

바람도 한 수(首) 읊어 지나가시고

동네 개들 덩달아 대구(對句) 받듯 짖는 소리

아직도 안동이라

마지막 자존심 왜 아니겠는가.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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