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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칼럼

【김기훈의 명문가와 인물】 구미·선산은 고려의 충신과 조선을 뒤흔들었던 선비를 낳은 곳이다.

이순락기자 0 19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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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새로넷방송 시청자 위원>


구미는 고려의 충신 야은 길재(冶隱 吉再)도 낳았지만, 어쩌면 야은 길재 못지 않은 충신 백암 김제(白巖金濟)·농암 김주(籠巖 金澍)를 낳았다. 그리고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안향(安珦)이 고려에 가지고 왔던 성리학은 고려시대 삼은(三隱)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야은 길재(冶隱 吉再)를 거쳐 조선시대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야은 길재가 뿌린 성리학은 비록 황무지에 뿌려졌지만, 조선시대를 뒤흔들었던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와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을 만나 조선 성리학의 도학(道學)의 도통(道統)과 학통(學統)이 이룩되고 후대에까지 이어진다. 아무리 학문이 높고, 좋은 스승이라도 제자가 훌륭하지 않으면 빛나지 않는 법, 길재는 제자를 잘 만났기 때문에 그의 학문이 더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점필재 김종직의 학문과 학통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숲”이라는 사림파(士林派)를 만든다. 그리고 이들 사림파는 조선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훈구파를 몰아내기 위해 대결하다가 결국 선비들이 화를 입는 4대 사화를 겪는다. 조선시대를 뒤흔들었던 중심에는 바로 야은 길재의 도통을 잇는 점필재 김종직이 있었다고 하겠다.

  

조선왕조 500여 년간 왕위에 오른 사람은 모두 27명이다. 이 가운데 왕의 적장자 혹은 적장손 출신으로 정통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사람은 겨우 10명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17명의 왕은 세자의 책봉과정이나 왕위계승에 있어서 원칙에 맞지 않는 비정상적인 계승자였다. 조선왕조에서 왕의 직계가 아닌 왕실의 방계에서 처음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宣祖)였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이었다. 


명나라는 이러한 선조의 왕위계승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들을 보낸다. 트집 잡기 위해 조선 온 명나라 사신들 앞에 나가서 대화할 수 있는 조정의 신하들은 별로 없었다. 명나라 사신들에게 잘 못 말했다가는 자신의 목이 달아나거나 유배를 가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퇴계 이황이 그들 앞에 나간다. 그 때 명나라 사신이 퇴계 이황에게 조선 성리학의 학통을 묻는다.


퇴계 이황은 그 자리에서 바로 고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 야은 길재(冶隱 吉再) →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 점필재 김종직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라고 바로 이야기 하면서 당시 왕인 선조부터 문무백관들이 모두가 부정하지 않고 이 학통을 인정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학통은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대부 선비들 가슴 속에 정설로 깊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이것으로 봤을 때 우리가 살고 있는 구미는 조선 성리학의 학맥이 처음 출발한 곳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다. 


이 학통에서 눈여겨 볼 두 사람이 있는데 강호 김숙자와 점필재 김종직이다. 이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 부자관계이다. 조선에서 보기 드물게 학통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졌다. 아버지 강호 김숙자에 학문을 배운 점필재 김종직 조선 성종 때 대학자이자 개혁 관료로서 성장하였고, 젊고 유능한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 사림파(士林派)를 형성하여 훈구파에 대항하기 시작한 사림파의 시작점이라고 하겠다.


강호 김숙자와 점필재 김종직이 바로 우리 지역의 대표적 가문인 일선김씨(一善金氏)이다. 뒷부분에서 강호 김숙자와 점필재 김종직을 다시 평가하기로 하겠다. 지역의 유력한 가문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천년전의 역사 속으로 힘겹게 거슬러 올라 그들의 가문의 출발점인 시조(始祖)와 시조가 어떠한 배경에서 본관(本貫)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후 그 가문에서 어떠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자가 쓰고 있는 “명문가와 인물” 제일 중요하다고 하겠다. 


조선시대를 뒤흔든 우리 지역의 유력 가문인 일선김씨를 알아보기 위해 알지 못하는 과거의 세계를 책과 문헌 그리고 그 집안에서 아직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사실에 근거하여 알아보아야  한다. 그러면 천년전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겠다. 먼저 일선김씨의 시조인 김선궁부터 알아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왕건의 고려 통일 마지막 전투인 일이천(一利川) 전투에서 일선김씨 시조(一善金氏 始祖) 김선궁(金宣弓)의 활약상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언급하였다. 15세의 나이로 고려 왕건을 돕는 과정에서 왕건이 쓰던 활(弓)인 어궁(御弓)을 하사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에도 활을 의미하는 궁(弓)자를 하사받으면서 김선(金宣)은 김선궁(金宣弓)이 되며, 고려 왕건은 김선궁에게 일선(一善)이라는 본관을 하사하면서 김선궁은 일선김씨(一善金氏)의 시조가 된다. 고려 왕건은 본관제(本貫制)를 시행하여 각 지역의 호족들에게 지역에 맞는 본관을 하사하는 정책을 시행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姓氏)들 대부분이 고려 초 고려왕조로부터 하사 받는 것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고려왕조의 영향력이 각 지방과 그 지역을 통치하게 한다. 그러나 유력 가문을 통제할 필요성은 있었던 것이다. 그 하나의 장치로 본관제 정책을 전국적으로 강력하게 시행하여 각 지방의 호족들을 고려왕조로 흡수하고, 통제 하에 둔다. 이것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본관제는 고려왕조가 지역의 각 호족세력과 각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동시에 하나의 통제 장치였다. 본관(本貫)과 성(姓)을 왕이 직접 하사 하는 것을 사성(賜姓)이라고 한다. 이 사성은 주로 공신에게 주어졌는데, 사성을 받는 사람이나 가문은 아주 많은 혜택을 받았다.

사성을 받은 공신에게는 관직(官職)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식읍(食邑) 또는 녹읍(祿邑)을 함께 주어졌다. 이 뿐만이 아니라 대대로 후손들이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음서(蔭敍)제도의 혜택도 주어졌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정책을 볼 때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활과 이름을 하사받고, 고려왕조 기틀을 만든 일이천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김선궁은 당시 지역 최고의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선김씨 그의 후손들은 시조 할아버지의 업적으로 고려시대에 출세가 보증된 유력 가문이었다.    


고려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면서 김선궁은 고려의 개국원훈공신(開國元勳功臣)으로 선주백(善州伯)으로 봉해진다. 당시 백(伯)이 붙은 선주백은 당시 이 지역의 군사·행정의 최고 통치자이며, 지휘자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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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김씨 시조 김선궁의 묘소 전경>

 

김선궁이 죽은 뒤 그의 유허비에는 “고려 삼중대광 영문하시중(高麗三重大匡領門下侍中)” 새겨져 있으며, 순충공 김선궁(順忠公 金宣弓)이라는 쓰여 있다. 김선궁은 죽은 후에 고려시대 최고의 관직을 받았고, 가장 영광스러운 순충이라는 시호를 고려왕조로부터 받았다. 이 김선궁 정도의 인물이면 “벽상공신(壁上功臣)”이라 해서 공신의 초상화를 벽에다 걸어 놓고,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다. 


고려 태조 왕건부터 시행한 본관제에 의해 김선궁은 당시 지명이 일선(一善)이었다. 따라서 제왕이 신하에게 봉토(封土)와 작위(爵位)를 내리는 봉작(封爵)으로 김선궁은 일선군(一善君)으로 봉해진다. 일선(一善)이란 지명(地名)은 신라 때부터 였다.

선산(善山)이란 지명은 그 이전에도 사람들의 입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선산이라 회자되기는 했지만, 명실상부하게 선산이란 지명을 공식적으로 쓰게 되는 것은 조선 태종 초기이다. 이러한 지명의 역사적 사실로 본다고 해도 선산(일선)김씨으로 하는 것보다 일선김씨로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옳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종합하면 선산(일선)김씨들이 쓰는 것보다는 일선김씨로 하는 것이 옳다. 그 명백한 이유는 일선김씨 시조 김선궁 묘의 비석에 그 해답이 바로 나온다. 선산(일선)김씨 이것은 일선김씨와 선산김씨가 같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단서를 항상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일선김씨와 선산김씨는 역사적·계통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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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충공 일선 김선궁의 묘비>

 

뒤에 소개되는 일선김씨의 백암 김제와 농암 김주의 누이동생의 남편인 매제(妹弟)가 선산김씨(들성김씨)의 입향조 화의군 김기(和義君 金起)선생이다. 선산김씨의 처가가 일선김씨 인 것이다. 따라서 구미지역에 살고 있는 선산김씨는 그러니까 일선김씨의 외손인 것이다. 


일선김씨가 선산김씨로 쓰게 되는 원인과 단초를 제공한 것이 바로 점필재 김종직이 선산부사를 하면서 본관을 선산(善山)으로 표기함으로서 발생하게 된다. 점필재 김종직이 본관을 선산으로 했다고 해서 일선김씨가 본관을 선산으로 쓴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구미시 해평 미석산에 있는 일선김씨 김선궁 묘비에는 분명 시 순충 일선 김선궁(諡 順忠 一善 金宣弓)으로 되어 있는 것이 명백한 증거이다.


일선김씨는 고려왕조와 함께 시작한 명문가이고, 신라 문성왕 7세손이며, 신라 김씨 마지막 왕손인 체의공(體誼公)의 아들이 바로 일선김씨 시조인 김선궁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여 일선김씨 문중에서 한번쯤 논의를 거쳐야 한다는 조심스러운 판단을 해 본다. 


먼 훗날의 김선궁의 후손인 조선시대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선산부사로 부임하여 지은 이존록(彛尊綠)에 보면 지금 구미시 선산읍에 있는 선산출장소가 김선궁의 집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후손인 김종직은 본인의 시조 할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공(公)은 사사로운 일보다 국가를 앞세워 당시 관아를 지을 터가 마땅치 않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을 보고 자기가 사는 집을 청사로 국가에 바쳤다.”라고 쓰여 있다. 김선궁의 집터는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날의 구미시 선산출장소 자리이다. 


절의를 지킨 백이숙제(伯夷叔齊)처럼 살겠다던 야은 길재에 비해 절대 뒤지지 않는 청사(靑史)에 빛나는 고려 충신들이 우리 지역에는 또 있다. 야은 길재의 배출한 제자들이 너무 훌륭하다보니 길재에만 너무 집중되어 있었다. 길재 못지않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가진 선비들이 바로 백암 김제(白巖 金濟)·농암 김주(籠岩 金澍)선생 형제들이다. 


1392년 조선 태조 이성계와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은 고려의 사대부의 핵심인물인 포은 정몽주를 제거하는 한편 4개월 뒤 공양왕에게 왕위를 받는 선위를 통하여 이성계가 조선의 첫 번째 왕위에 오른다. 이로써 475년간의 고려왕조는 막을 내리고, “조선왕조”가 열리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형인 백암 김제는 평해군수(平海郡守)를 하고 있었는데, 고려가 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본인의 이름을 제해(濟海)로 바꾼다. 


노중련(魯仲連)은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 때 높은 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해 바다에 빠져 죽었다. 백암 김주는 고려가 망하자 이러한 노중련과 같은 길을 가야겠다는 의지와 뜻으로 “바다를 건너다”는 뜻의 제해(濟海)로 본인의 이름을 바꾸었다. 백암 김제는 울진 평해 바다 앞의 큰 바위에 평해 벽상시(平海 壁上詩)를 써 놓고, 12월 22일 돛단배를 홀로 타고 망망대해의 동해바다로 가버렸다고 한다. 이후 백암 김제는 영원히 아무도 볼 수가 없었다.


그의 평해 벽상시는 이렇다. “배를 불러 동으로 노중련(魯仲連)의 나루를 묻노라. 오백년 끝난 나라 슬픈 신하의 몸, 내 외로운 넋이 죽지 않는다면, 원컨대 해와 달 따라 중원에 비치리.”였다. 


이러한 백암 김제의 충절이 소문으로만 무성하다가, 1798년 조선 정조 때에 와서 평해 벽상시가 발견되어 정조가 직접 충개(忠介)란 시호를 내리고, 또한 정조는 직접 제문을 지어 백암 김제가 동해바다로 떠났던 평해 바다 앞에 신하를 보내어 제를 지내게 했으며, 많은 서원에 그의 충절을 추모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이 비극은 형인 백암 김제로 끝나지 않고, 동생 농암 김주 역시 비극적으로 끝난다. 1392년 농암 김주는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중국 황태자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가는 하절사(賀節使)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고려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류(柳)씨 부인에게 농암은 마지막 자기의 뜻을 전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니, 내가 강을 건너면 몸 둘 곳이 없노라. 내 부인이 잉태 중임을 아노니, 만약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양수(揚燧)라 하고, 딸을 낳으면 명덕(命德)이라 하라. 그리고 내가 입었던 관복과 신을 보내니, 후일 부인이 죽으면 합장하여 우리 부부의 묘로 하고, 묘 앞에 비문과 묘갈(墓碣)명, 즉 묘비명을 쓰지 말 것이며, 내 일을 후세에 알리지 말고, 내가 서신 보낸 날을 나의 기일(忌日)로 하라.”하였다고 한다.


농암 김주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명나라 황제에게 이씨조선을 정벌하고, 고려를 다시 건국할 것을 청하니, 명나라 황제는 “국가의 혁명은 하늘에 있으니, 한사람의 충절로써 회복할 수 없다.”라고 농암 김주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농암 김주의 능력을 알아 본 명나라 황제는 그에게 예부상서(禮部尙書)의 벼슬을 내리지만, 농암선생은 벼슬을 사양하고, 거절하며 숨어 살기를 원했다. 


농암선생은 벼슬을 사양하고, 중국 형초(荊楚) 지역에서 숨어 살면서 고려를 그리워하며 충절을 지킨다. 그래서 중국 명나라 황제도 농암 김주의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을 높이 사 농암이 죽을 때까지 본인 뜻대로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농암선생의 유언에 따라 편지를 보낸 12월 22일을 후손들은 제사를 지냈다. 


농암 김주는 류씨부인에게 편지에서 아들을 낳으면 양수(揚燧)라고 지어라고 했는데, 양(揚) → 양(楊), 수(燧) → 보(普)로 고쳐 양보(楊普)로 이름지었다. 농암 김주의 아들인 김양보는 아버지와 달리 조선왕조에 출사를 하여 문과에 급제한다. 


김주의 손자 김지(金地)는 문과급제하여 정언(正言)과 좌찬성에 추증된다. 증손자인 김지경(金之慶)은 대사성, 대사간까지 한다. 그리고 김지경의 아들 김응기(金應箕)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그러나 농암 김주가 편지에서 류씨부인에게 전한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명을 받들어 조선시대 고관대작을 하였음에도 할아버지 김주의 뜻을 받들어 자손들 역시 묘비가 없다.

농암선생의 이러한 이야기가 후대로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농암의 5대손인 홍문관 응교를 한 신제 김진종(新齊 金振宗)이 오래전부터 집안에서 내려오던 농암선생의 이야기를 친구 용암 박운(龍巖 朴雲)에게 이야기 하면서 박운의 아들과 손자가 일기에 남기게 된다. 그러면서 이것을 인재 최현선생이 일선지(一善志)를 만들면서 세상에 들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농암 김주는 고려 최고의 충신이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충절을 지킨 고려의 신하 72인을 두문동 72현(杜門洞 七十二賢)이라 하는데, 농암 김주는 두문동 72현의 두 번째 인물이 된다. 1796년 조선 정조는 농암 김주 선생에게 충정공(忠貞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직접 제문을 지어 신하를 보내어 제를 지내게 했다. 농암 선생을 기리는 충렬당과 신도비가 구미시 도개면 궁기리에 지금도 존재한다. 


김선궁에서 출발한 일선김씨 가문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은 고려에서 충절을 지킨 선비들을 대대적으로 부각시켜 조선 사대부 선비들에게 조선과 왕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정책을 태종 때부터 차츰 차츰 시행한다. 그래서 고려에 충성한 두문동 72현은 조선시대에 모두 신원이 회복되며 충(忠)이 들어간 시호를 대부분 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몽주를 비롯하여 고려의 충신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태종 이방원 본인조차 조선사회에서 사대부 선비들에게 충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고려 충신들에 대한 충절을  부각시켜야만 했다. 고려의 충신을 죽여 피를 묻혀가며 조선을 세웠지만, 고려의 충신들이 본보기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항상 아이러니하다고 하는 것일까? 


두 형제 백암과 농암의 충절은 오히려 고려보다는 조선에서 더 빛나는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농암 김주는 아이를 잉태한 부인을 뒤로 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숨어 살았지만 그의 후손들은 번성하여 지금은 일선김씨 전체 중 농암파 후손이 제일 많다고 한다. 


과거 지역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일선지(一善地)를 쓴 인재 최현(訒齋 崔晛)선생의 삼인사적(三仁事蹟)에도 지역에서 배출한 고려와 조선의 최고 충신들이라 할 수 있는 농암 김주, 단계 하위지(丹溪 河緯地), 경은 이맹전(耕隱 李孟專) 3명의 충절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로 들어오면 일선김씨에서 조선 선비사에서 걸출한 두 사람이 나온다. 그 두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의 부자관계가 스승과 제자관계가 되어 조선 선비사를 이끄는 강호 김숙자와 점필재 김종직이다. 이들은 조선 유학사 즉 성리학의 학맥을 형성하게 되는데 고려에서 출발한 성리학을 조선사회에 완전히 뿌리내리게 하는 장본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조선 성리학의 학맥을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조선 전기 성리학 학맥은 점필재 김종직에서 발원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은 정몽주 → 야은 길재 → 강호 김숙자 → 점필재 김종직으로 계승되어, 김종직의 제자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한훤당 김굉필로 이어진다. 


다시 우재 손중돈 → 회재 이언적 → 퇴계 이황으로 이어져 퇴계학파를 형성하고, 다른 하나는 한훤당 김굉필 → 정암 조광조로 이어져 기호학파를 형성하게 되고, 또 하나는 남명 조식으로 이어져 남명학파를 만들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석학들인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정여창, 이황을 다섯 사람을 일컬어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고 한다. 모두가 점필재 김종직에게서 학문을 계승한 당대 걸출한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서 출발한 성리학자들이지만, 스승 점필재 김종직으로 인해 죽거나 부관참시를 당하거나 벼슬이 박탈되어 유배를 떠나는 사람으로서 겪기 힘든 삶을 산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정미사화의 엄청난 피해를 겪으면서도 이들 사림세력들은 그들의 학문과 학통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조선 성리학의 계통을 세운다는 의미에서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어 있다.


조선 성종 때에 오면 조선사에서 사림파 선비들의 추앙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아 사림파를 조선 정치에 등장시킨 점필재 김종직을 만날 수 있다. 점필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 강호 김숙자를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유는 아버지 강호를 스승으로 모시고, 조선 도학(道學)의 학통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강호 김숙자를 만나러 가보자.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의 원래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다. 강호선생은 고려 1389년 고양왕 때 선산 연봉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선산읍 이문리이다. 12세에 야은 길재(冶隱 吉再)에게 학문을 배웠고, 당시 역학(易學)의 대가인 별동 윤상(別洞 尹祥)에게 주역(周易)을 배웠다. 


훌륭한 스승을 만난 강호 김숙자는 세종 때 1414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1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곡산 한씨(谷山 韓氏)였는데, 혼인한지 얼마 있지 않아 곡산 한씨 부인을 버린다. 김숙자는 31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으로 발탁되었는데 사헌부의 관리들이 그의 임용을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당시 세종실록에 보면 사헌부는 “김숙자는 제 자식을 서얼이라고 깎아내렸고, 힘든 시절을 함께 견딘 아내를 쫓아낸 사람입니다. 형법에 따라 김숙자에게 곤장 80대를 치고, 그가 내쫓은 한씨 부인을 데려다가 재결합하기를 요청합니다.”기록이 있다. 수신(修身)을 하지 못한 사람이 깨끗한 사초를 기록하는 관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사헌부의 요구에 따라 김숙자를 파직한다. 그러나 김숙자는 10대 초반일 때 벌써 곡산한씨 부인과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보니 사기결혼이었다는 것이다. 김숙자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곡산한씨 측이 주장하는 “출세를 하게 되자, 조강지처와 자식을 함부로 버렸다”는 것이 조정에 받아들여졌다. 조정에서 파직당하고 쫓겨난 김숙자는 곡산한씨와 재결합을 거부한다.

그는 곡산한씨와 헤어진 이후 벌써 밀양의 박홍신(朴弘信)의 딸과 혼인하여 선산 땅을 떠나 버린 상태였다. 김숙자는 밀양박씨 부인과 결혼하면서 처가의 막대한 경제력으로 밀양에서 경제적 기반까지 갖추게 되었다. 중앙정치에서 쫓겨났지만, 김숙자의 학문을 아꼈던 세종은 경상도 선산, 고령, 개령, 성주 등 각 지역을 다니며 향교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직을 제수한다.  


세종은 강호 김숙자가 누구보다 학문에 조예가 깊고 높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세종은 13년 만에 다시 강호 김숙자를 조정으로 부른다. 세종을 이어 왕이 될 세자 문종을 가르치는 세자시강원 직책을 내렸다. 그러나 이때에도 사간원·사헌부 관리들이 강력히 반발함으로서 강호 김숙자는 넘쳐나는 학문과 지식을 펼칠 수가 없는 불운한 당대의 선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들이자 제자인 점필재 김종직이 있었다.


처가인 밀양으로 돌아가 김숙자는 선비로서 불명예와 수치심을 씻으려고 성리학적 가족윤리를 가장 중요시 하며 학문 연구에 몰두해 성리학을 독파한다. 만약 벼슬살이만 했다면 그의 학문이 완성되었을까? 강호 김숙자와 밀양 박씨 부인 사이에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다섯째 아들이 바로 조선 최고의 선비이며 대학자인 점필재 김종직이었다. 


강호 김숙자는 아들들에게 가정교육에서부터 예절과 학문까지 철저하게 가르쳤다. 점필재 김종직은 아버지의 이러한 철저한 교육의 덕분으로 조선에서 글과 말을 조금 할 줄 안다는 선비들의 흠모와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는 것이다. 점필재는 한마디로 조선 선비들이 가고자 하던 도학자의 삶, 문장가로서의 삶, 정치가로서의 삶을 시대의 격랑 속에서 살았던 선비였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호 佔畢齋는 “경전의 뜻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책에 적힌 문자만 배송하여 가르치는 변변치 못한 경서선생”이란 뜻에서 점필재로 지은 것이다. 문하에서 공부와 학문을 하였던 60여명의 제자들 중 무려 48명이 문과에 급제를 하였다는 것만 봐도 김종직의 학문의 깊이와 명성은 조선전체에서 넘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조선에서 제자가 많기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이 있지만, 이들의 제자는 수적으로는 많았지만, 조선사회를 이끌었던 핵심적 인물들을 봐서는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들이 월등했고, 조선의 선비사회를 좌지우지 했던 인물들을 대거 배출하였으며 그의 도통과 학통은 멈추지 않고 조선 중기를 거쳐 조선후기까지 이어졌다.

1476년(성종 7)년에 김종직은 조선의 조정에서 바쁘게 벼슬생활을 하고 있었다. 선산부사(善山府使)로 내려오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첫째, 중시(重試)의 폐지를 건의하다가 조정의 훈구대신들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둘째 항상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이며 본인의 학통이 출발한 곳인 선산 땅에 와보고 싶던 평소 본인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고향을 찾아 가려는 회귀본능이 있듯이 점필재 김종직은 그 많은 지방의 벼슬 중 유독 선산부사를 자청하여 선산부사를 3년간 한다.


선산부사로 온 점필재 김종직은 제일 먼저 선산 땅에 살고 있던 백성들의 세금을 지방 아전들이 백성에게 거두는 세금을 장난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선산지도지(善山地圖誌)를 만든다. 당시 지방 관아의 아전들이 백성을 수탈하는 것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고, 당시 벼슬아치들이 지방으로 발령 받으면 지방의 아전들과 한통속이 되어 백성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백성의 재산을 수탈하면서 매일 기생과 술로 보내는 것이 다반사였다.  


김종직은 백성들에게 과도하게 부과되는 세금을 없애고, 공평하게 하여 백성들이 생활이 안정될 수 있도록 당시 선산의 지형과 산과 강, 전답이 자세하게 기록하는 선산지도지에 모든 것을 기록하고 그의 집무실에 매일 그것을 보면서 선산부사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이 지도에는 인구통계인 호구(戶口), 곡식이 생산되는 땅의 면적인 간전(墾田), 인간이 행해야 하는 법도인 도리(道理)직접 기록하여 선산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삶을 안정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고향인 선산에서 본인의 연원을 찾는데, 일선김씨 시조인 순충공 김선궁(順忠公 金宣弓)에 대한 행적을 찾고, 시(詩)를 지어 선산지리도에 남겨 놓는다. 


그러나 점필재 김종직은 농상의 번성, 호구의 증가, 학교의 진흥, 군정의 정돈, 부역의 균등, 송사의 간명, 교활의 근절이라는 목민관으로서 해야 할 원칙을 정하고 이를 실행한다. 선산부사로서 목민관으로서 많은 선비들에게 표상이 되는 행동과 자세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지역의 많은 백성과 선비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듣게 되었다.


김종직이 선산부사로 있을 때 인근의 많은 후학들이 김종직의 문장과 학문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다. 김종직 역시 가르치는 일이 좋았고, 제자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부친인 강호 김숙자가  자신을 가르친 방식대로 『소학』을 기본으로 읽어야 할 책의 순서를 정해주고 철저히 독파할 것을 요구하였다. 


선산부사로 있을 때 그의 제자들이 대부분 대단한 제자들이었지만, 그 중에 점필재의 학통을 잇는 한훤당 김굉필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인으로, 학문적으로, 개인적으로 가장 뜻 깊은 순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학문 연구에 지친 제자들에게 돼지를 잡아 먹이고, 제자들을 항상 아끼고 공부하는 것을 항상 격려하였다. 


김종직은 문벌이 빈약한 지방의 선비들이 효도하고 출세하는 유일한 길이 과거(科擧)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많은 선비들에게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에서 이름 있는 선비들은 김종직 곁으로 모여들어 사림파(士林派)가 형성되는 것이다.이 사림파들은 성종 때부터 중앙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성종뿐만 아니라 훈구파는 세조가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가 왕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정권에 대한 정당성의 문제에 있어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런데 사림파 역시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이 된 것은 잘 못 되었다는 대체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곧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의 정치 대결로 확대되어지면서 결과적으로 4대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훈구파는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찬탈 과정에서 공훈(功勳)을 세운 정치세력을 훈구파라고 한다. 이들 훈구파는 시문과 잡문인 사장학(詞章學)을 하였다. 성리학적 도학(道學)을 하는 사림파들의 철학과도 맞지 않을뿐더러 왕위를 찬탈한 세력들이 정치권력마저 장악하고 있으니, 사림파로서는 같은 하늘아래 같이 있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당시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훈구파들 입장에서는 사림파들의 도전을 그냥 놔둘 수 없는 것이었다.


사림파는 삼사인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및 사관 직을 차지하면서 그 동안 훈구파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폭로하고, 탄핵하였다. 그리고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여 향락에 빠져 사는 것을 비판하기 시작하고 사림파와 훈구파 그리고 연산군과 대립하기 시작한다.

훈구파의 중심인물이던 이극돈(李克墩)은 자신의 비리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것이 잘 못되었다는 것을 사초(史草)에 기록한 김종직의 제자 춘추관 사관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과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류자광(柳子光)을 시켜 많은 사림파 선비들이 희생되는 1498년 무오사화(戊午史禍)를 일으킨다.

그렇지 않아도 사림파의 종주인 김종직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류자광은 향락에 빠져 살고 있는 연산군을 부추겨 정계에 진출한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사림파를 대거 숙청하는 일을 벌인다. 


무오사화의 발단과 원인이 된 김종직의 찬탈에 비판적이며 초(楚)나라 항우가 회왕(懷王)을 죽이고 왕이 된 것을 비유하여, 세조가 왕위찬탈 한 것을 비판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것이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난하는 내용이었으며,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며 의리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김종직은 1492년 성종 23년에 62세의 나이로 밀양에서 죽었다. 이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김종직 본인이 지은 조의제문 때문에 그가 죽은 이후 무덤이 파헤쳐지고, 관을 꺼내어 시신의 목과 뼈를 자르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다.


밖으로 보이는 무오사화의 원인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했다는 것이지만, 김종직과 류자광은 아주 오랫동안 서로에 대해 갈등과 대립하는 관계였다. 무오사화의 발단을 깊게 알려면 무오사화를 일으킨 류자광부터 알아야 한다.

류자광은 조선신분제 사회에서 서자출신으로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다. 그는 세조가 등용하여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세조이후 예종·성종·연산군 때까지 서자 출신임에도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친다. 


남이(南怡)장군 1457년(세조 3)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1467년에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우상대장(右廂大將)이 되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면서 1등 공신이 되고, 여진족이 살고 있던 서북방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여 27세에 병조판서가 된다. 이 때 건주위를 정벌하고 백두산에 올라가 읊은 시(詩)가 결국 나중에 그를 죽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白頭山石磨刀盡頭滿江水飮馬無男兒二十未平國後世誰稱大丈夫” 내용은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했으며,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잦았도다.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태평하게 하지 못하면 뒷날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세조가 죽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이장군이 대궐에서 숙직하는데, 밤하늘에 갑자기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이 깔릴 징조”라고 한 것을 류자광이 듣고 남이장군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류자광은 남이장군을 제거하기 위해 남이장군이 지은 시(詩)를 이용한다. 남이장군의 시 중 “미평국(未平國) 나라를 태평하게 한다는 것”을 “미득국(未得國) 나라를 얻어야 한다.”로 바꾸어 예종에게 보고함으로서 조선사를 통틀어 가장 재주와 능력이 출중하고 훌륭한 남이장군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는다. 


남이장군을 죽인 류자광에게 많은 선비들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 중에서도 류자광을 가장 혐오하고 경멸했던 사람이 바로 김종직이었다. 그런데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류자광이 함양의 지금의 상림인 대관림을 돌아보고, 소고대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내려와 학사루를 보고 절경에 감탄하여 아전에게 필묵을 시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학사루에 걸어놓았다. 


함양 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류자광이 지은 시가 학사루 현판으로 걸린 것을 보고 떼어내도록 지시하고, 류자광의 시가 함양 동헌의 현판에 새겨있는 것을 보고 떼어내 불사르게 한다. 김종직을 따르던 하인이 “이 현판은 관찰사가 쓴 현판입니다. 그러자 김종직은 관찰사가 아니라 정승의 것이라도 떼어내야 한다. 쌍놈은 쌍놈이니라.” 


이렇게 행동하고 말한 것이 류자광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유자광은 서자출신으로 항상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출신성분에 대한 열등감과 콤플렉스가 있었던 류자광은 김종직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사람파를 극도로 증오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후 일어날 무오사화는 김종직이 함양군수를 할 때 이미 잉태되고, 무오사화의 씨가 부려졌던 것이다.


김종직이 류자광이 쓴 글과 현판들을 떼어내 불살라버렸을 때 류자광은 속마음은 김종직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지만,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류자광은 오히려 김종직이 사망하자 제문을 지어 겉으로 애통해 하는 모습을 사림파에게 보여준다. 


이유는 당시 김종직에 대한 성종의 배려와 신임이 누구보다도 두텁고 높았다. 그리고 김종직의 뒤에는 절개와 지조를 지키는 사림파가 있었기 때문이다. 류자광은 김종직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숨기고, 오히려 사림파와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한다. 이것은 김종직과 사림파의 정보와 약점을 캐기 위한 류자광의 거짓 행동에 불과했다.


그러나 김일손의 사초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자, 김종직이 쓴 현판 글씨를 모조리 없애게 했으며 김종직을 천하에 없는 역적으로 몰아가고 만든다.

 

류자광은 김종직을 “간사한 신하가 몰래 모반할 마음을 품고, 옛 일을 거짓으로 문자에 표현했으며, 흉악한 사람들이 당을 지어, 세조의 덕을 거짓으로 날조해서 꾸며 나무라니 죄악이 극도에 달했다.”라고 비판했고, 류자광은 김종직이 세조가 왕위 찬탈했다고 비판하면서 세조의 부름을 받고, 김종직이 조정에 출사한 것은 이중적이며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라고 비판하였다.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여 죽어서까지 불행했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비록 천하가 알아주는 대학자였지만, 그는 젊어서는 자식들을 잃는 아픔을 겪으며 살았다. 김종직은 성종 5년(1474) 한 해에 두 아들과 첫 딸을 잃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과 슬픔을 겪었다. 


비극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성종 12년(1481) 김종직은 어머니 상을 당하고, 손자가 죽었고, 작은 아들마저 죽으면서 며느리는 미쳐버렸다. 다음 해에는 하산조씨(夏山曺氏)부인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후 남평문씨(南平文氏) 부인을 얻어 62세로 죽을 때 그의 아들 김숭년(金崇年)의 나이가 7세였다고 한다. 그의 학문은 조선 팔도의 선비들을 따르게 할 정도로 최고의 학문을 가졌지만, 그의 인생은 평생 불행이 따라 다녔고, 그는 죽어서도 부관참시를 당하는 불행을 겪었다.


점필재 김종직은 본인의 학통과 도통을 잊는 한훤당 김굉필과 결별하는 아픔을 겪는다. 1484년 10월 김종직이 이조참판에 제수되어 훈구파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자 제자 김굉필은 스승 김종직을 비판한다. 


이때 김굉필을 비롯한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스승이 훈구파에 맞서 조정을 바로잡아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김종직 오히려 이조참판이 되자 김종직은 조정에 나가 개혁적인 정치를 제안하지 않는다. 이러한 김종직에 불만이 있었던 김굉필은 스승과 사이가 벌어질 것을 각오하고, 한 편의 시(詩)를 지어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김종직의 현실타협적인 처세를 비판하는 시를 쓴다. 


도는 겨울에 가죽옷 입고, 여름에 얼음을 마시는 것에 있는데 비가 개면 가고 장마 지면, 멈추는 것을 완전하다 하겠습니까? 난초도 세속에 따르면, 마침내 변하는 것이니 이제 소가 밭 갈고 말을 탄다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김종직 자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제자들에게 불편한 마음을 담은 한 편의 시를 지어 보내면서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내비치면서 자신의 처세가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시(詩) 통해 밝힌다. 


분수에 맞지 않게 공경대부 높은 관직에 올랐지만 내가 어찌 임금을 보필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을 해낼 수 있을까? 그대 같은 후학(後學)들이 나의 허물과 어리석음 조롱하지만  구차하게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는 않네.


이 시(詩)를 주고받은 시기에는 김굉필은 스승 김종직과 결별하다. 학통과 도통은 벌써 형성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도 개인적으로는 이미 멀어질 대로 멀어진 사이가 된다. 완전히 멀어져도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으로 인해 김종직이 만든 화(禍)는 김굉필과 그의 제자들을 피해가지는 않는다. 무오사화는 처음부터 훈구파가 사림파를 겨냥한 정치적 테러였기 때문이다.


무오사화의 결과 김일손을 포함한 권오복(權五福)·이목(李穆)·허반(許盤)·권경유(權景裕) 5명은 사형되고, 그의 제자 김굉필, 정여창을 비롯한 많은 사림파 선비들이 귀향을 가게 된다. 이 무오사화의 과정에서 이극돈 역시 파면된다. 이유는 이러한 일들을 빨리 보고 하지 않고, 조사를 게을리 했다는 이유로 정작 이극돈마저 관직에서 파면됨으로서 류자광은 혼자의 조정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이 무오사화를 통해 김종직의 학통을 계승한 김굉필은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를 간다. 그곳에서 한훤당 김굉필은 조선 성리학의 도통과 학통을 잇는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를 운명적 으로 만나게 된다. 김굉필은 조광조를 조선 성리학의 도학을 잇는 도통(道統)으로 만들어 간다. 무오사화가 만약 아니었다면 김굉필과 조광조는 운명적으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 유학과 성리학의 도통과 학통을 잇게 한 점필재 김종직은 중종(中宗)이 즉위하여 사림파와 조광조가 정권을 잡게 되자 점필재 김종직의 신원이 회복되어 지고, 숙종(肅宗) 때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 무오사화의 영향으로 당시 밀양에 살던 김종직의 가족뿐만 아니라 일가친척들과 벼슬을 한 제자이건, 벼슬을 하지 않은 제자이건 수많은 제자와 관련인물들이 무오사화로 화를 입게 되었다.

 

이후 점필재 김종직의 학통을 잇던 김굉필은 조선시대 가장 간사하고 흉악한 간흉(奸凶)인 임사홍(任士洪)이 일으키는 갑자사화에 사약을 받고 죽는다. 정암 조광조 역시 중종 때 개혁정치를 주장하며 많은 신진 사림세력들을 등용시킨다. 


중종은 처음에는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적극 찬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개혁정치를 부르짖는 조광조와 사림파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이 틈을 파고 드는 훈구세력들은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와 사림파는 대거 희생된다.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시작으로 출발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거쳐 기묘사화까지 이어져 김종직을 따르던 사림파는 죽음을 맞이 해야 했다.


조광조와 사림파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는데, 그것이 바로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이다. 궁궐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네 글자 모양으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이 발견된다. 왕인 중종이 조광조를 전라도로 유배를 보내고, 이후 사약을 보내 결국 조광조를 죽인다. 


주(走)와 초(肖)자를 합치면 조(趙)자는 조광조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주초위왕은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이것이 조작되던 아니던, 왕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조광조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점필재 김종직의 종택은 본인이 태어난 밀양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인 선산도 아닌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가곡리에 있다. 이곳을 개실 또는 개와실이라고 부른다. 무오사화이후 김종직의 자손들은 3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기에 살고 있다. 그 동네 앞의 김씨세거비(金氏世居碑)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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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군 개와실에 있는 점필재 김종직 종택>


“무오사화의 여진으로 선생 후손은 수대에 걸쳐 밀양과 합천 야로로 번갈아 이거하고, 다시 고령 용담을 거치면서 지루한 이동의 고초를 겪었다”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일선김씨 세거비도 아니고, 선산김씨 세거비도 아니다. 그냥 “김씨세거비”이다. 보통 관향(貫鄕)을 붙이는 것이 정상이고 관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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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필재 김종직 종택 앞에 있는 김씨세거비>


점필재 김종직의 후손들은 조선시대 일어나는 4대 사화의 모든 영향을 받으며 살아 왔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관향(貫鄕)을 밝히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라는 생각이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았나 하는 필자의 추측이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이 부관참시를 당할 때 밀양 지역에 전해져 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부관참시는 묘를 파헤쳐 죽은 시신의 목을 자르고 뼈를 부수는 끔직한 형벌이다. 김종직의 시신이 목이 잘리고, 찢어지니 호랑이 한마리가 나타나 시신주위에서 몇일 동안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김종직의 시신을 거두어 다시 무덤을 만든 이후에도 호랑이는 무덤을 지키다 결국 무덤 앞에서 호랑이마저 죽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김종직 묘 옆에 호랑이 무덤을 따로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김종직의 묘 옆에 슬퍼하며 죽은 호랑이의 “인망호폐(人亡虎斃)” 비석이 있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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