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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의 명문가와 인물】 올곧고 강직한 선비, 신당 정붕(新堂 鄭鵬)은 과연 누구인가?

이순락기자 0 29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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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새로넷방송 시청자 위원> 

선산에서 국도를 따라 무을면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포상리가 나온다. 이 일대에는 해주정씨(海州鄭氏) 집성촌이다. 옛부터 지역에서 선산 포상리에 살고 있던 해주정씨를 신당계 정씨(新堂溪 鄭氏)라고 부른다. 


아마 그것은 옛날 해주정씨들이 정착하여 살았던 곳의 옛 지명이 신당포(新堂浦)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부터 그 지역에 사는 해주정씨를 신당계 정씨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붕은 자신의 호(號)인 신당(新堂)을 자신이 태어난 동네 이름을 호로 삼은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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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당 정붕의 영정>


뉴스에 심심치 않게 정치인과 공무원의 청탁으로 인한 비리가 터질 때면 살아가기 바쁜 국민들은 화를 내거나 한숨만 짓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그들에게 믿음과 신뢰보다는 항상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것이 일반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청백리(淸白吏)라는 말은 그냥 과거 역사책에서나 찾아보는 단어에 불과해졌다. 청백리는 조선시대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하고 깨끗하면서도 나라의 살림을 근검·절약하여 백성을 잘 다스린 관료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상인데, 조선시대 전체 217명밖에 없었다. 


연산군 때 사림파를 제거하는 무오사화에서 정붕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 중 하나는 정붕의 청렴하고 정직한 그의 처신과 행동이었다. 그는 워낙 청렴하여 벼슬을 해도 항상 곤궁하였다. 


한 날은 정붕의 집에 먹을 것이 없어, 정붕의 부인이 무오사화를 일으킨 류자광 집에 가서 쌀을 얻어와 밥을 했는데, 정붕이 부인에게 쌀을 어디에서 구했소? 물으니, 부인은 외가 친척 류자광의 집에서 얻어 왔다고 했다. 정붕은 다음날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쌀을 빌려 류자광 집에 갔다 줬을 정도로 청렴했다.


벼슬아치들은 무오사화가 일어난 이후 권력의 실세인 류자광 집에 새해 설날이 되면 인사를 가거나 하인을 시켜 서찰이라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정붕은 류자광과 외가쪽 인척도 되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정붕은 서찰로 인사를 대신해야 했다. 그런데 하인에게 새끼줄로 팔을 꽉 쪼이게 묶어 풀 수 없게 해서 류자광 집에 서찰을 전달하도록 했다. 


이유는 류자광은 당시 권력의 실세이다 보니 류자광의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비록 하인일지라도 융숭하게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류자광의 집에 가면 당시 모든 벼슬아치의 하인들이 서찰을 전달하려고 모였기 때문에 그들의 말과 대화는 당시 벼슬아치들에 대한 모든 이야기와 정보가 오고 갔다. 


그것을 알고 있던 정붕은 다른 집 하인과 대화하게 되면 정붕의 살림살이와 누구와 교류하는지 이런 개인의 정보가 손쉽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하인은 묶인 팔이 아파서 재빨리 집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 정붕은 모든 자기의 행동을 삼가하고,조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한 예를 보여 주었는 것이다.


결국 정붕의 이러한 행동과 처신으로 사림파가 대거 숙청되는 무오사화 속에서도 정붕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강직하고 곧은 신념은 항상 그를 위기에 몰아넣게 된다. 그의 성품과 행동은 훈구파와 사사건건 대립한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치를 개혁하여, 태평성대를 꿈꾸던 젊은 선비들밖에 없었다.  


우리 구미지역에서도 이 명예로운 청백리 중 한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신당 정붕(新堂 鄭鵬)선생이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반정을 일으킨 핵심 인물인 성희안(成希顔)이 당시 영의정일 때 신당 정붕 선생을 중종에게 부탁해 청송부사로 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성희안과 정붕은 어렸을 때부터 서로를 잘 아는 절친한 친구였다.


어느날 영의정으로 있는 성희안이 청송에는 잣과 벌꿀이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구인 신당 정붕에게 잣과 벌꿀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신당 정붕 선생은 오랜 친구이며, 당시 조선 최고 벼슬을 갖고 있는 성희안에게 “잣은 높은 산봉우리에 있고, 꿀은 백성들의 벌통 속에 있으니 부사가 어찌 그것을 얻을 수 있겠소이까.”라며 잣과 벌꿀을 보낼 수 없다는 편지 보낸다. 


신당 정붕의 편지를 받은 영의정 성희안은 그의 짧았던 생각을 후회하고, 부끄럽게 여겨 수차례 자기의 잘 못을 뉘우치는 편지를 신당 정붕에게 보냈다고 한다. 당시 지방의 일개 부사가 한 국가의 국정 최고 책임자인 영의정의 부탁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성희안과 정붕은 오랜 친구 이상의 관계였다. 그런데도 친구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한 것이다.


정붕이 조정에서 위기에 빠질 때마다 본인을 구해 준 친구 성희안에게 “꿀과 잣”을 보낼 수 없다고 했다. 지금 보면 너무도 옳고, 강직하다 못해 정붕의 행동은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행동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목민관의 옳바른 행동과 처신을 오늘날에도 신당 정붕에게서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정붕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백성의 것을 빼앗아야 당신에게 보낼 수 있는데, 나는 도저히 백성의 것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으로 성희안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성희안 역시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붕이 백성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고, 어느 누구는 신당 정붕을 참으로 고지식하다고 할 것이다. 다른 벼슬아치들은 영의정의 청탁을 못 들어줘서 안달인데, 아부와 아첨으로 출세를 좀 하지! 할 것이다.  


그러나 신당 정붕은 백성의 것을 하나라도 탐할 수 없다는 목민관의 철학과 사고를 가진 곧고, 강직한 선비였다. 이러한 올곧고, 강직한 선비들은 아부와 아첨을 못하기 때문에 과거에 급제를 한다고 해도 벼슬이 크게 높지가 않았거나, 지방직이나 벼슬의 변두리를 전전해야 했다. 


그러면 구미에서 태어난 신당 정붕이 어떻게 그 시대를 살았으며, 또 어떠한 사건들을 겪었는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조금 알 필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야은 길재 → 강호 김숙자 → 점필재 김종직 → 한훤당 김굉필 → 정암 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도통과 학통이다. 


김굉필에서 조광조로 이어진 성리학은 경기도를 중심으로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한갈래는 김굉필에서 정붕으로 이어진다. 정붕의 학문은 우리가 살고 있는 당시 선산지역의 송당 박영(松堂 朴英) 선생으로 이어지면서, 이 지역에 야은 길재에서 발원한 성리학이 다시 정착·확대되어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선산·구미 야은 길재로부터 시작된 성리학은 당시 수도인 한양으로 올라가 전국으로 퍼져나갔지만, 선산에서 발원한 성리학을 다시 고향인 선산 땅으로 가지고 오게 한 장본인이 바로 신당 정붕 선생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필자는 과거 우리 지역 학맥과 지성사를 이야기하자면, 한훤당 김굉필의 도통과 학통은 서울과 경기도에서 정암 조광조로 이어졌지만, 우리지역은 신당 정붕을 통하여 송당 박영(松堂 朴英)으로 이어져 용암 박운, 진락당 김취성 등의 걸출한 제자들에게 이어졌다. 


구미 인동의 여헌 장현광선생이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9세에 본인의 자형인 노수함(盧守諴)에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13세까지 무려 4년간 배웠다고 한다. 따라서 여헌학(旅軒學)을 완성한 대학자 여헌 장현광 역시 신당 정붕에서 이어진 성리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신당 정붕선생의 아들인 정각(鄭殼)이 노수함을 찾아와 어린 장현광의 행동과 말(言行)에 감탄하여 정각이 타고 온 말(馬)을 줬다는 것만 봐도 그의 스승이자, 자형인 노수함은 신당 정붕 선생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던 것은 당연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헌 장현광을 가르친 노수함은 신당 정붕선생에게 배운 송당 박영선생의 제자였다. 자연적으로 이들은 신당 정붕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고 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신당 정붕의 성리학은 송당 박영을 통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구미·선산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당 정붕 선생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올곧고, 강직한 선비 신당 정붕을 만나보기로 하겠다.


신당 정붕은 1467년 세조 13년에 선산에서 함창현감을 지낸 해주정씨(海州鄭氏) 정철견(鄭鐵堅)의 아들로 태어난다. 정철견은 함창현감을 하였지만, 벼슬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을 때 정붕이 태어났다.


신당 정붕은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하면서도 성실하였으며, 신기할 정도로 앞일을 내다 봤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의 일기예보 같은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어린 정붕이 비가 온다면, 비가 오는 것으로 믿었을 정도로 그의 앞날을 내다보는 예측력을 사람들은 믿었다. 


정붕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남다른 예측력은 훗날 정붕이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할 때 다가오는 위험을 예측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신당 정붕이 관직에 있을 당시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일어나는 연산군 그리고 중종반정이 일어나 반정공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일으킨 기묘사화는 선비들에게는 암흑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 


어린 정붕의 숙부 정석견(鄭錫堅)은 성종 때 김종직·정여창·김굉필 등과 학문을 교류하면서 이들과 친분이 남달랐고, 또한 정석견 역시 사림파였다. 연산군 초기에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이조참판에 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집을 발간했다는 이유로 파직된 인물이다.


정석견이 과거에 급제하여 예안현감을 마치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가면서 정철견의 집에 들러 조카 정붕을 보고나서는 “정붕은 장차 우리 집안의 일으킬 큰 인물이 될 것 같으니” 정붕을 서울로 데려가서 한훤당 김굉필에게 공부를 시키겠다고, 정붕의 아버지 정철견에게 이야기하자 그 길로 정붕은 숙부인 정석견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 당대 최고의 학자, 소학동자로 알려진 한훤당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우게 된다.


정붕에게는 당대 최고의 학자를 만난 것도 일생일대의 행운이지만, 서울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때 성희안(成希顔)을 벗으로 사귀게 된다. 훗날 성희안은 박원종과 함께 중종반정을 일으키는 인물이며, 조선시대 가장 높은 관직인 영의정까지 한 인물이다. 만약 성희안을 친구로 사귀지 않았으면, 아마 정붕도 운명대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정붕의 성격이 너무나 올곧고, 강직하여 왕에게 간언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이것은 곧 정붕이 위기에 맞게 되고, 그 때마다 친구 성희안이 앞장서서 구해주고 정붕을 도와준다. 그리고 정붕이 벼슬을 그만두려고 할 때 청송부사를 추천한 인물이다. 1485년 성종 16년에 정붕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붕의 스승인 김굉필과 친구이며, 동문수학한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을 만나게 된다. 추강 남효원은 비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사육신(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의 충절을 기리는 육신전(六臣傳)을 편찬하였고, 나중에는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추존되는 인물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정여창, 김굉필등과 아주 가까운 사이며 교류하였다.


남효온을 만난 자리에서 정붕은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남효온은 성종 때 벼슬길에 나갔지만, 그의 정신적 세계관에서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야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김굉필의 제자 정붕이 단심가를 읊어주니, 남효온으로서는 굉장한 충격과 감명을 받는다. 이래서 남효온과 정붕은 이후 굉장히 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자주 만나 술을 마시며 많은 것에 대해 논했다. 


남효온과 어울려 학문에 전념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정붕의 숙부 정석견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정석견은 정붕에게 “추강 남효온의 절개와 절의는 높이 살만하지만, 추강 남효온이 섬기는 임금과 네가 섬겨야 할 임금은 분명히 다르다. 그래서 네가 가는 길은 엄연히 다른 길이다.” 뼈아픈 충고를 듣는다.


이후 정붕은 학문에 전념하여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7년만에 성종 23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한다. 하지만 그해에 태평성대를 이루어 백성과 관리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성종이 죽고, 선비들 속에서 절개와 지조를 인정받던 남효온마저 죽는다. 젊은 도학자 정붕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성종의 죽음으로 연산군의 즉위는 정붕이 속한 사림파의 숙청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붕은 연산군 초기 깊은 학식과 논리로 사간원, 사헌부, 한림원을 거치며 조정안에서 인정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연산군은 학문을 멀리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냥과 술·여자로 세월을 보낸다. 이러다 보니 나라의 국고(國庫)는 바닥나기 시작했다. 국고 탕진은 곧 사림파와 연산군의 충돌로 이어진다. 그 충돌의 중심에 바른 말을 하는 정붕이 있었다.


정붕이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 정붕은 임금이 공부하는 경연의 경연관이 되었다. 활쏘기와 사냥 그리고 술과 여자에 빠져 있던 연산군에게 경연을 통하여 공부할 것을 강력하게 주청하지만, 연산군은 사림파가 주도하는 경연을 계속 외면한다. 연산군과 훈구파는 바른 말을 하는 사림파 선비들을 기회가 있으면 제거하고 싶어 하게 된다. 


이 때 정붕은 이상한 꿈을 꾸는데, 성균관의 문묘의 신위가 절(寺)로 옮겨지는 꿈을 꾸었다. 이 사실을 동료들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고, 얼마 있지 않아 정붕의 꿈은 현실로 나타난다.

연산군은 말 많은 유생들을 키우고 가르치는 성균관을 철폐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결국 문묘의 신위가 절로 옮겨진다. 신기할 정도의 정붕의 예지력은 교류하고 있던 동료들에게 큰 놀라움을 주면서 그 때부터 동료들이 정붕의 말이라면 대부분 믿게 되고 듣는다.


정붕과 교류하던 의정부 관리인 강혼(姜渾)과 심순문(沈順門)이 모두 기생첩을 데리고 놀았다. 두 사람이 데리고 있는 기녀들의 미모와 춤·노래는 한양에서 알아줄 정도로 월등했다고 한다. 정붕은 이 기녀들을 한번보고 친구들에게 “기녀들을 빨리 멀리하지 않으면, 뒷날 큰 화를 반드시 입을 것이니 경계하라!”고 정붕은 두 사람에게 충고를 한다.

앞일을 알아맞히는 정붕의 말을 들은 강혼은 바로 기녀를 멀리했다. 그러나 심순문은 정붕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기녀들과 어울려 즐겁게 놀았다. 정붕의 충고를 듣지 않은 심순문은 결국 죽음을 맞이 한다.


1504년(연산군 10)에 전국의 아름다운 기녀와 여자를 선발하여 관리하는 흥청(興淸)을 만들었다. 심순문이 어울렸던 기녀가 흥청에 뽑혀 연산군의 술시중을 들었던 것이다. 심순문과 어울린 기녀는 연산군의 술시중을 들면서 자신과 어울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연산군에게 하게 된다.

 결국 흥청으로 뽑혀 간 기녀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에 심순문은 하루아침에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흥청망청(興淸亡淸)”이란 연산군이 흥청의 여자들과 매일 어울려 술을 마시는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당시 연산군과 훈구파들은 경연을 폐지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이유는 경연을 통하여 사림파들이 훈구파의 기득권을 공격하고, 개혁정치를 주장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정붕은 이러한 시기에 연산군에게 경연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위기에 직면한다. 그 때 정붕을 높게 평가하던 친구인 이조참판 성희안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하면서 위기를 모면한다.


정붕이 살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성희안이 정붕을 살리기 위해 류자광의 이름을 팔았다. 성희안이 훈구파 대신들에게 정붕의 외가쪽 친척이 류자광이라 했기 때문이다.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 기록된 점필재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발생된 무오사화는 훈구파 이극돈과 류자광이 중심이 되어 사림파를 끔찍하게 숙청한다.

점필재 김종직과 관계된 사람들은 비참하게 죽거나 유배를 떠났다. 이때 정붕의 숙부 정석견도 연산군에게 연회와 사냥을 경계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갔다. 그리고 또 하나 정석견 역시 사림파 선비였다.


무오사화를 일으킨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조의제문을 올린 것을 알면서도 늦게 보고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갔다. 이때부터 조정은 류자광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류자광에게 어느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정치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 류자광의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류자광은 세조 말년에 일어난 북방민족 회유정책을 포기하고, 중앙집권적인 군사전략을 취하게 되면서 함경도 길주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일으킨다. 이시애는 세조의 회유정책으로 성장한 무인이었다. 그런데 세조가 회유정책을 포기하자 이시애 본인의 권력적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난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 때 류자광은 세조 앞에서 군사적 능력과 책략을 발휘하여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다. ​서얼 출신이며 일개 갑사출신인데도 불구하고, 류자광에 대한 세조의 신임은 놀랄정도로 높아져 무려 4명의 왕을 모시며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고,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남이장군이다.

 

천하의 간신임에도 류자광은 세조 때부터 예종, 성종, 연산군까지 승승장구한다. 조선시대에서 서얼출신으로 신분을 뛰어넘어 최고의 권력을 발휘했던 인물이 바로 류자광이었던 것이다. 그는 일개 무사 출신으로 출발해 조선 최고의 권력을 잡으면서 많은 인재를 죽이기도 한 인물이다. 그의 출발점은 세조의 갑사 출신으로 지금으로 보면 대통령 경호원이라고 보면된다. 


하지만, 그의 무술 능력과 병법을 구사하는 능력이 세조의 마음에 들었고, 이시애의 난을 빨리 진압하면서 류자광은 일개 갑사에서 실질적인 병권을 좌지우지 하는 병조좌랑까지 오르게 된다. 그 이후 류자광은 세조부터 성종과 연산군까지 승승장구하면서 훈구파의 대표적 인물로 조정의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다. 


하지만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곧 천하의 류자광도 유배지에서 참혹하게 죽는다. 류자광은 조선시대 신분사회에서 신분을 뛰어 넘는 과정에서 계속 옳고 바른 젊은 선비들과 부딪치게 된다.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는데, 서얼출신이 권력을 쥐고 있으니 자연히 사대부 출신의 사림파와 관계가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류자광과 사림파의 골은 깊어 질대로 깊어져 무오사화로 결국 등장하였다.


정치 감각이 매우 빠른 친구 성희안이 정붕을 살리기 위해 류자광의 이름을 팔았던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정붕은 류자광의 이름을 팔았다는 것에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본인과 뜻을 같이 하는 사림파가 류자광에 의해 크나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올곧고 정직한  정붕은 류자광이 외가쪽 친척이라는 것에 항상 트라우마(trauma)가 있었을 것이다.  


1504년(연산군10)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연산군과 정붕은 또 다시 충돌한다. 연산군은 정치를 훈구파 간신배들에게 맡겨놓으면서 상소(上疏)를 올리지 말 것을 어명으로 내린다. 연산군의 지나친 사냥으로 백성들의 피해와 국고가 탕진되고 있는 것을 정붕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연산군에게 상소를 올린다.

상소의 요점은 “잦은 사냥은 제왕의 도리가 아니므로 중지해야 한다.” 것이었다. 사실 당시 연산군에게 산하가 충언을 한다는 것은 목을 내놓고 하는 일이었다.


정붕을 못마땅해 하던 대신들이 연산군을 부추겨 정붕의 목을 벨 것을 아뢰지만, 또 성희안과 정부의 숙부인 정석견이 나서서 정붕을 옹호하는 바람에 곤장 40대를 맞고, 잠시 벼슬에서 쉬는 것으로 끝난다. 이때부터 정붕은 류자광과 임사홍이 있는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앞날을 예측하는 능력이 있는 정붕은 곧 다가올 갑자사화를 예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붕은 조정에 피바람이 불거라는 불길한 예측은 그대로 적중했다. 정붕의 예지력은 그대로 적중하여 임사홍이 실권을 장악하고 공신들의 재산을 몰 수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도중에 폐비 윤씨의 친정어머니 신씨로부터 폐출에서 사사되는 과정까지 듣게 된다. 


임사홍과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머니 윤씨의 원한을 감는 동시에 공신들을 탄압해 바닥난 국고를 채우기 위해 공신들의 재산을 빼앗을 목적으로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폐비 윤씨의 폐출과 사사에 연관된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성준(成俊)·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김굉필(金宏弼)·이주(李胄) 등을 극형에 처해졌고, 이미 죽은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등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다.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 처벌되는 끔찍한 일이었다. 정붕의 스승인 김굉필이 사사되어지면서 그의 제자인 정붕 역시 곤경에 처해진다. 그래서 정붕은 곤장 형을 받고, 영덕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1504년 갑자사화의 주모자로 알려진 임사홍은 두 아들과 함께 임금의 사위인 부마(駙馬)로서 세조에서 연산군까지 왕실과 인연을 맺으며, 정치적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다. 임사홍은  연산군을 자기 손아귀에 쥐려고, 채홍사(採紅使)를 만들어 전국에 있는 미녀들을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아주 간사한 일을 벌였다. 


임사홍은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의 임사홍도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중반정이 일어나자, 그가 뿌린 갑자사화의 원한은 부메랑이 되어 임사홍에게 본인에게로 날아온다. 중종반정이후 임사홍은 참수형을 당한다.  


두 번의 사화는 정붕을 이미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정붕은 체격이 컸으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지만, 젊은 날 스승 김굉필 문하에서 생육신 남효온과 만나 매일 술로 보내다시피 했었다. 그래서 정붕의 건강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로 진행하고 있었다.


정붕이 유배를 갈 때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데 “독약 이야기”이다. 정붕이 유배를 갈 때 독약을 먹고 죽으라는 표시로 류자광이 독약을 정붕에게 준다. 그러나 정붕은 독약을 먹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진성대군을 왕위에 올리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고 권력을 휘둘렀던 류자광은 유배를 가고, 임사홍은 참형 당했다. 류자광이 유배를 갈 때, 정붕 역시 류자광에게 받은 독약을 그대로 돌려주며 “꼭 필요 할 것”이라며 줬다고 한다.


1506년 중종반정의 중심은 성희안과 박원종(朴元宗)이다. 성희안은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우의정까지 승진한다. 유배에서 풀려난 정붕은 더 이상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낙향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쉬면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그러나 우의정 성희안은 정붕의 재주와 능력이 아까워하여 중종에게 정붕을 발탁할 것을 주청한다. 이에 정붕은 병이 깊어 조정에 나갈 수 없다는 핑계로 벼슬을 계속 사양한다. 


거듭된 신하들의 주청으로 중종 역시 정붕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판단하고 중종이 직접 교지를 정붕에게 내린다. 왕의 교지가 워낙 극진했고, 한양까지 타고 갈 수 있는 말(馬)을 함께 보냈다. 이정도의 정성에 정붕도 더 이상 벼슬을 사양할 수 없었고, 조정으로 돌아와 홍문관 교리를 충실히 수행한다. 


그러나 진성대군을 중종으로 앉힌 박원종과 홍경주가 실질적인 조정의 실권자였다. 그래서 조정을 이들이 좌지우지하며,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홍경주(洪景舟) 같은 자가 좌찬성을 하고 있으며, 코뿔소 뿔로 만든 각대를 하고 위세를 부리는 것을 보았다.


정붕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시 조정에 피바람이 불 것이라는 짐작을 하며, 더 이상 병이 깊어 벼슬을 할 수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간곡하게 우의정 성희안에게 전한다. 

우의정 성희안은 정붕이 필시 병만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정붕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이유를 묻는다. 


그래서 정붕은 홍경주의 행동과 말로 봐서는 나중에 반드시 조정에 큰 화를 불러 올 것이라며 친구들에게 이야기 한다. 10년이 지나 정붕이 예측한 것처럼 1519년 홍경주의 딸 희빈홍씨가 중종의 총애를 받게 되자 홍경주는 사림파와 조광조를 숙청하는 기묘사화를 일으킨다.


우의정 성희안과 함께 이조판서 신개지, 이조참판 박설지 등은 청송부사 자리가 비었다는 것을 알고, 정붕에게 청송부사(靑松府使) 자리에 가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정붕은 이들의 권유를 끝내 뿌리치지 못하고, 뜻을 받아 들여 청송부사로 간다. 


청송은 당시 인구 1000여명 정도 사는 첩첩산중이었지만, 행정체계는 일개 현(縣)도 아닌 부(府)였다. 이것은 세조의 어머니 소헌왕후가 청송심씨(靑松沈氏)였기 때문에 세조가 어머니의 본향(本鄕)인 청송을 파격적으로 도호부로 승격시킨 것이다. 청송이 당시 첩첩산중이지만, 인구는 작아도 500년동안 조선왕실에서 계속적으로 특별히 관리했던 곳이다. 


청송부사가 된 정붕은 조정의 권력다툼과는 거리가 먼 청송이라서 마음이 편안했고,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그리고 고향인 선산에 있는 송당 박영과 교류하면서 박영은 정붕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게 된다. 


자연히 정붕의 학문은 송당 박영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정붕으로 인해 송당 박영은 한훤당 김굉필의 학통을 계승하게 되었고, 이러한 학통은 선산을 중심으로 인근지역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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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시 무을면 웅곡리소재 신당 정붕의 묘소>


1512년 정붕은 젊은 시절 얻은 병으로 청송부사를 하는 도중 46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러나 정붕은 죽었지만, 그 이후 조선의 사림(士林)들은 계속 성장해 나간다. 성리학의 종결자라고 할 수 있는 퇴계 이황은 신당 정붕 선생이 남긴 안상도(案上圖)를 보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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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당 정붕의 철학이 담긴 안상도>


정붕의 안상도를 극찬한 퇴계 이황은 “신당 선생의 학문이 정미한 곳까지 나아갔음을 알고자 한다면, 후학들은 마땅히 안상도를 보아야 할 것이다.”, “선산은 야은 길재의 절의(節義)가 있고, 정붕의 도의(道義)가 있다.”라고 할 정도로 퇴계 이황은 신당 정붕 선생을 위대한 선비로 칭송하고 인정했다.


안상도(案上圖)는 짧게 분석하면 대칭적(對稱的), 대대적(待對的)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즉 상대적인 두 가지 사실을 서로 맞세워 구성 배열하였다. 이 대칭적이란 표현을 좀 더 철학적인 용어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대대적인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대대(待對)란 동양적 사물관의 철학적 표현이다. 


즉 모든 사물은 단독적으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반대되는 것과 짝을 이루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 짝을 이루는 형식이 그저 대립적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성격이 다른 두 존재가 서로 상대를 기다리고 필요로 하면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태극(太極)의 그림에서 양(陽)이 음(陰)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고, 음(陰)이 양(陽) 속에 깊숙이 드어가 있는 상태를 음양대대(陰陽待對)의 관계라고 한다. 동양에서는 모든 사물을 이와 같은 대대(待對)의 관계로 파악하는데 안상도(案上圖)의 구성 원리에도 이 대대의 원리가 적용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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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당 정붕의 묘비>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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