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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조광조의 마지막을 지킨 장잠(張潛)은 누구인가?

이순락기자 0 2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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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 박사, 경북대 평화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구미회 이사, 구미새로넷방송 시청자자문위원>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의 정치사상은 도덕적 교화를 통해서 순리대로 정치를 하는 맹자의 왕도정치(王道政治)와 지치주의(至治主義)였다. 조광조는 지치주의가 실현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는데, 지치주의는 “사람에 의해 다스려지는 세상이 하늘의 뜻이 실현된 세상”이다. 조광조는 한마디로 이상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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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때 왕도정치와 지치주의를 실현하려던 정암 조광조>


중종은 즉위과정이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즉위 초부터 그의 권력 기반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반정 공신들인 훈구파는 중종을 본인들이 세웠다는 명분으로 국정을 좌지우지함으로서 중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보수 세력인 훈구파의 전횡을 견제하고자 중종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사림파를 대거 등용시키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죽은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의 제자 33세의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였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등용되어 4년 동안 초고속 승진을 하여 사헌부(司憲府)의 최고 수장인 대사헌(大司憲)까지 오른다.   


조광조는 개혁이고 진보적인 사림파의 수장이 되어 소격서 철폐, 과거시험의 현량과 실시, 반정공신들의 위훈 삭제(僞勳削除) 등 많은 개혁정치를 이끌었다. 조광조와 사림파가 환란을 겪는 기묘사화(己卯士禍)의 가장 큰 원인은 반정공신들에 대한 공신지위를 삭제하는 위훈삭제 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조광조의 개혁정치 중에서도 이 위훈삭제는 정국공신(靖國功臣) 중 자격이 없는 공신들의 위훈을 박탈하고 토지와 노비를 환수하는 것이었다. 이 위훈삭제는 대부분의 공신들에게 불만을 제공하게 된다.

리고 곧이어 공신들에 대한 기득권을 빼앗는 위험으로 느껴져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를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는 사림파에게 역습을 가하는 것이 기묘사화이다.

    

그리고 그동안 사림파가 주장하는 개혁정치에 불만이 쌓이고 농축되어 있던 중종마저 훈구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조광조와 사림파가 진행한 위훈삭제 4일 후에 조광조가 중심이 된 사림파가 숙청되는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조광조는 비록 도덕적으로 훌륭한 선비였고 정치가였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조광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왕과 신하들 앞에서 뜻을 굽히지 않는 끝없는 토론들은 곧 중종의 역린(逆鱗)을 건드리게 된다. 중종은 조광조와 사림파에 대한 우호적인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기묘사화는 훈구파의 반격과 사림파에 대한 중종의 염증 등이 결합함으로서 일어나는 것이다.


조선 1519년 11월, 중종 14년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서 왕도정치(王道政治)와 조선을 폐정을 개혁하려던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가 유배 1개월 만인 12월 20일 함박눈이  내리는 날, 37세로 젊은 나이로 사약을 받고 생(生)을 마감한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의 일이다. 조광조의 죄목은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죄라는 붕당죄(朋黨罪)였다. 


당시 조광조에게는 대표적인 제자들이 있었는데, 죽정 장잠(竹亭 張潛), 휴암 백인걸(休菴 白仁傑),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등이 있었다. 조광조가 개혁을 붕당(朋黨)을 형성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떠나는 과정에서나 화순 능주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을 때까지 함께 한 사람이 바로 제자 죽정 장잠과 친구인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이었다. 


양팽손은 1519년 10월에 조광조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파직당하여 고향인 능주에 먼저 내려와 있던 상황이었다. 장잠은 한양에서부터 대역 죄인이 된 스승 조광조를 따라 천리 길을 따라 온다.

그리고 스승 조광조가 사약을 먹고 죽는 최후를 양팽손과 함께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본다. 그 이후 장잠은 목숨을 걸고 스승 조광조의 억울한 죄를 풀어달라는 신원소(伸冤疏)를 올린다. 


의금부도사 유엄이 사약을 가지고 오자, 조광조는 “오늘 하루 안에 죽으면 되지 않겠소?”하면서 제자 장잠에게 물을 끓이게 한 후 목욕을 한 다음 지필묵을 가지고 오게 하여 가족들에게 유언의 편지를 쓴다.

그리고 조광조는 그 유명한 절명시(絶命詩)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쓴다. 조광조가 죽는 것보다 더 싫었던 것은 아마 믿었던 임금에게 하루 아침에 버림받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잠에게 조광조는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으니, 꼭 이를 실행하여다오. 내가 죽거든 관은 얇은 것으로 하며, 무겁고 두꺼운 것은 절대로 쓰지를 말라. 행여 무거운 것을 쓰면 먼 길에 돌아가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아주 얇은 것으로 준비하여라.”라는 말을 남기자, 제자 장잠은 대성통곡을 하며 답한다. 


조광조는 사약을 마셨지만, 쉽게 바로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고통스럽게 피를 토하며 몸부림쳤다. 의금부도사 유엄은 장잠에게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안이 절절 끓도록 하거라. 그리하여 죄인을 방안에서 죽게 하여라.”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조광조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방안에서 편히 죽기보다 밖에서 죽겠다고 한다. 


조광조가 피를 토하면서도 빨리 죽지 않자, 군사들이 밧줄로 목을 졸라 죽이려 하자. 조광조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감히 내 몸에 손대지 마라”하며 호통을 치고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금부도사 유엄에게 사약을 더 주시오 한다. 

이러한 조광조의 간절한 부탁을 금부도사 유엄은 들어준다. 그래서 조광조는 사약을 한 그릇 더 먹고, 붉은 피를 토하며 두 눈을 뜬 채 죽었다. 


당시 조광조는 대역 죄인이었다. 따라서 조광조와 함께 있는 것조차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그보다 더 위험한 일은 사약을 먹고 죽은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었다. 임금으로부터 어명을 받고 죽은 역적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불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위험한 반역행위였다.

보통 대역 죄인의 시체는 손도 대지 못하고,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을 개혁하여 조광조가 꿈꾸던 세상과 사회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은 무위로 돌아가고 그의 개혁하고자 했던 노력들은 오히려 "역적"이라는 오명을 쓰고 죽는다.


의금부도사 유엄은 “죄인 조광조의 시신은 함부로 수습하거나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 반드시 들판에 내버려 들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해 두어야 할 것이다. 이를 어기는 사람은 국법으로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군사를 데리고 사라졌다.

왕도정치와 개혁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조광조는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던 것이다. 친구 양팽손과 제자 장잠은 죽은 조광조를 끌어 안고 대성통곡을 한다. 


조광조가 죽은 23년 후 인종 때, 그의 신분이 다시 회복되어 진다. 그리고 1568년 선조 원년에 문정(文正)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완전하게 복권된다. 조광조가 죽은지 50년이 지나 당시 대사간이며 조광조의 제자 백인걸이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하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자 선조는 퇴계 이황에게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을 물었다. 그러자 퇴계 이황은 “조광조는 천품이 빼어났으며, 일찍 학문에 뜻을 두고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조정에서는 충직을 다하였으며 여러 사람들과 서로 협력하고 옳은 정치를 하였습니다. 다만 그를 둘러싼 젊은 사람들이 너무 과격하여 옛날 대신들을 물리치려 함으로써 화를 입게 된 것입니다.”라고 평가하였다.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본인들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위험하게 하는 행동들이었지만, 이들 양팽손과 장잠은 금부도사의 눈을 피해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하고 염을 한다. 그리고 춥고 추운 엄동설한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보성 쪽의 쌍봉사를 지나 중소산에 아무도 모르게 평평하게 매장한다.

장잠과 양팽손은 다음해 봄이 오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시 조광조의 조상들이 묻혀 있는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각자의 길을 간다. 그래서 장잠은 구미 땅 인동으로 돌아온다.


조광조가 한양에서 11월 17일 유배의 길을 떠나 유배지인 화순 능주에 도착한 날이 11월 26일 도착하여 그 곳 현감에게 인계되었다. 조광조의  억울한 죽음을 마지막까지 지키며 시신을 수습하여 임시 매장을 할 때까지 유일하게 있었던 사람이 선산·구미의 인동사람인 죽정 장잠(竹亭 張潛)이었다. 


장잠은 인동장씨 황상파(仁同張氏 凰顙派)의 파의 시조인 파조(派祖)이다. 장잠은 스승 조광조가 억울하게 죽는 모습을 보고, 고향 인동으로 돌아와 대나무를 심고, 죽림정사를 지어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으며 학문에만 전념한다. 


장잠은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대나무를 좋아하여 본인의 호(號)도 대나무 죽(竹)를 넘어 “대나무 정자”란 뜻에서 죽정(竹亭)으로 하였다. 장잠이 대나무를 심고 본인의 호를 죽정으로 한 것도 아마 스승 조광조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키고자 해서 죽정으로 짓지 않았나 짐작할 수 있겠다.


장잠은 1497년, 연산군 3년에 장적손(張嫡孫)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가업(家業)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손수 경전(經傳)을 베끼어 읽었다. 장잠은 “하루라도 책을 대하지 않으면 비루하고 인색한 마음이 싹트니, 마음을 맑게 하는 요점은 오직 책을 읽는 데에 있다.”라고 하면서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장잠은 18세 되자 스승을 찾아 서울로 갔는데, 이시기에 조광조를 만나게 되면서 주자학의 도학자(道學者)로 성장한다. 당시 서울에는 전염병이 돌아 장잠이 병에 걸려 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추운 겨울 천리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와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3년 동안 밤낮으로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이 인동현감으로 부임하여 당대에 이야기를 나룰 사람은 장잠밖에는 없었다고 할 정도로 장잠의 학문의 넓이와 깊이는 남달랐다. 회재 이언적이 누구인가? 


“정몽주 →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정여창 → 조광조→ 이언적 → 퇴계 이황”이라는 조선의 주자학의 도통(道統)에서 회재 이언적은 조광조 이후 잇는 대학자였다.

이러한 대학자 이언적이 장잠을 매일 찾아와, 장잠의 대나무 숲에서 학문을 논하고 시를 읊었다. 이미 장잠은 전국의 내노라하는 선비들 속에서 그 명성이 높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회재 이언적은 “죽림(竹林)의 주인(主人)이 보리밥과 죽순국을 배불리 먹고, 항상 성현(聖賢)의 책을 보면서 취미를 붙이니, 일생의 맑은 즐거움을 꼽을진대,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장잠을 평가 하였다. 


이언적과 장잠이 주고받은 시(詩)와 문장(文章), 그리고 서찰이 책 한권 정도였다고 하니, 지금으로 보면 대단한 지식인의 교류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두 사람 앉아 학문을 논하고, 시를 읊은 바위가 구미시 황상동 416-3번지에 있는데, 이 바위를 이현암(二賢巖)이라 부른다. 이언적과 장잠, 두 사람을 “현명한 두 현인(賢人)이란 뜻에서 이현암으로 이름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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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잠과 이언적이 담론을 나누었다는 이현암>


인동장씨 집안에서 장잠이후 큰 대학자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이 나온다. 당시 장잠의 제자가 30여명 된다고 하니 학문적으로 대단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장잠과 장현광은 아재와 조카관계인 숙질간(叔姪間)이 된다. 아마 장현광도 장잠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죽정 장잠이 죽었을 때, 장잠의 묘비명인 묘갈문을 장현광이 직접 쓴다.


장잠은 1545년 명종 때 스승 조광조의 신원을 회복시키기 위해 한양에 갔는데, 소윤(小尹)인 윤원형(尹元衡)이 대윤(大尹) 윤임(尹任) 일파를 제거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고 있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고향 인동으로 돌아온다.


이언적과 함께 담론을 주고받았던 죽림정사 이현암(二賢巖) 뒤쪽에 소요재(逍遙齋)를 짓고 은거하며, 당대 최고 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송희규(宋希奎) 등과 활발히 교류하며, 명산대천을 유람하면서 세속적인 일을 잊고 살았다. 


도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소학(小學)을 중요시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장잠의 위대한 점은 부모를 섬길 때는 반드시 남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직접하고, 아우들의 가난함과 친족들의 안위를 극진히 살폈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고 친구를 사귈 때는 그 지위와 가문이 아닌 그 사람됨을 보고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잠은 모르는 사람이 곤경과 어려움에 처할 때에 구지 못 본 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광조의 영원한 제자 장잠은 스승 조광조가 배우고 익힌 학문을 세상에 펼치고 실천하려 했던 것처럼 장잠 역시 스승 조광조처럼 도덕적 진리를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도학자(道學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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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잠을 기리는 구미 황상동 현암서원>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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