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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금오산 채미정으로 가는 대나무 숲길에서 율정 박서생을 만나다.

이순락기자 0 21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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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회 이사, 구미새로넷방송 시청자위원>


38세의 야은 길재(冶隱 吉再)는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직감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마음으로 중국 고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멸하자, 주나라에서 나는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 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처럼 살겠다고,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구실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 금오산으로 들어가 세속을 떠나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한다.


금오산에서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생활이 정착되고 안정되자, 인근지역의 제자들을 받아 그의 학문을 전하는데 그의 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 중에서 스승 길재를 빛나게 하는 제자가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율정 박서생(栗亭 朴瑞生)과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이다. 


김숙자는 12세에 길재에게 『소학(小學)』을 배우기 시작하여, 길재가 죽는 1419년 세종 원년에 31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중앙의 요직은 하지 못한 채 지방의 벼슬자리만 전전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처가인 밀양으로 내려간다.

김숙자는 제자들 가운데 김숙자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齋 金宗直)이 있었다. 김종직은 조선 성리학을 융성하게 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서 많은 훌륭한 제자들인 김굉필·정여창·손중돈이 나오고, 이후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가 나오면서 야은 길재는 조선 선비들에게 누구도 부인 못하는 조선 성리학 도통(道統)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이러한 성리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왕도정치와 지치주의 정치를 조선에 실현하려다가 좌절된 조광조와 사림파에 의해 길재는 조선 성리학의 종조(宗祖)로 까지 추앙받음으로서 길재는 6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현재에 굳건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길재에게 전수받은 학문을 바탕으로 조선 초기 길재 본인은 조선에서 벼슬하기를 거부했지만, 제자들인 박서생과 김숙자에게는 새롭게 개국한 조선왕조에 나아가 선비로서 사회적·정치적 역할을 하라고 주문한다. 


길재의 이 두 제자 중 길재가 언행(言行)의 기록인 “행장(行狀)과 야은언행록(冶隱言行錄)”이 없었다면 후세의 우리는 무엇을 보고 길재를 평가할 수 있겠는가? 박서생은 스승 길재를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도록 만드는 장본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청백리(淸白吏)라는 말은 과거 역사책에서 한번쯤은 본적이 있을 것이다. 청백리는 조선시대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하고 깨끗하면서도 나라의 살림을 근검·절약하여 백성을 잘 다스린 관료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상인데, 조선시대 전체 217명밖에 없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 선산출신의 청백리는 모두 4명에 불과했다. 이 네 명의 청백리 중 두 명이 스승 길재와 제자 박서생이 들어간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신당 정붕(新堂 鄭鵬)과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이다.


그리고 길재는 본인의 학문인 성리학을 이어받을 전수자 강호 김숙자를 만났기 때문에 그의 학문은 멈추지 않고 조선이라는 시간 속에 녹아 유유히 흘렀던 것이다. 김숙자 이후부터 조선성리학의 도통(道統)은 계속 흘러 퇴계 이황(退溪 李滉)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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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가 낙향하여 은거했다는 채미정>


따라서 이 두 제자가 아니었다면 길재는 아무리 학문이 높고, 그의 절의(節義)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제자들이 길재의 명성을 더 높이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과연 누가 알아주겠는가?


금오산에서 길재가 은거하며 제자를 가르쳤다는 채미정(採薇亭)을 가다보면 개울을 건너야 채미정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채미정 주변으로 푸르른 대나무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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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가 낙향하여 은둔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한 채미정 입구의 모습>
 

기록에 보면 이 대나무는 길재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채미정에 정착할 때 심었다고 한다. 그러니 채미정 근처에 있는 대나무 숲의 역사는 600년도 넘으면서 조선시대와 한국근현대사를 흔들림 없이 보아 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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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산 채미정쪽으로 가는 계곡 산책길의 모습>


그리고 채미정 아래쪽으로 대나무 숲을 지나다 보면 “율정 박선생 기적비(栗亭朴先生 記蹟碑)”라고 큰 비석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비석이 바로 율정 박서생의 발자취를 기록한 비석이다. 모두들 야은 길재에 대해서는 들어 본봐도 많고 관심도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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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전 길재가 심었다는 대나무 숲 속에 채미정을 지키는 율정 박서생의 기적비>


그리고 길재가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한 채미정만 찾을 뿐이지, 대나무 숲과 소나무 숲 사이로 외롭게 서 있는 박서생의 발자취가 새겨진 비석은 무엇 때문에 거기 서 있는지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실제 길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한 제자가 박서생이다. 그래서 박서생은 야은 길재의 개인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야은 길재의 “행장(行狀)과 야은언행록(冶隱言行錄)”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집필하고 기록한다. 이러한 박서생의 역할로 인해 야은 길재의 역사가 활발하게 살아서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는 것이다.

 과거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여도 그것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먼 훗날 그 누가 알아 볼 수 있겠는가? 이렇게 스승 길재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길재의 곁에서 제자로 혹은 친구로서 그의 뜻과 행동을 따르는 제자인 율정 박서생을 알아 볼 필요성과 의미성은 충분하다고 하겠다. 

 

길재의 수제자 박서생을 찾아 수백 년 동안 아무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미지의 산을 찾아가듯 수백 년 전의 미지의 역사 속으로 어두운 동굴에 횃불 하나를 들고 들어가는 심정으로 박서생을 찾아가 보자!

항상 역사에서 그 인물들이 빛나기 위해서는 후손과 제자가 어떤 인물이 나오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길재는 훌륭한 제자들을 두었기 때문에 길재의 명성은 600년을 넘어 유유히 흐르고 하늘 높이 나는 것이다. 그 제자 중 제일은 율정 박서생이다.


율정 박서생의 본관은 비안박씨(比安朴氏)로 고려 공민왕 1371년에 지금의 의성군 비안면에서 태어난다. 박서생은 1390년 고려 공양왕 때 약관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지만, 고려가 망해가고 있다는 것을 예감한 박서생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후 박서생은  익히 길재의 명성을 알고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선산 금오산에 은거하고 있던 야은 길재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길재는 그의 문하에서 박서생이 인물됨과 학문이 독보적이며 월등하다는 것을 일찍이 알아봤다. 길재 본인은 벼슬길에 나갈 수 없지만, 길재는 박서생에게 조선왕조에 출사하기를 권유하고 허락한다. 그래서 31세의 박서생은 1401년 태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지공거(知貢擧) 맡은 인물이 하륜(河崙)이었다. 


지공거는 과거시험을 출제·감독하는 벼슬을 지공거라 한다. 하륜은 태종을 도와 조선개국에 참여한 인물이며, 태종이 권력의 안정기 접어들자 주변 측근을 대부분 숙청하지만, 하륜은 태종 초기부터 끝까지 신임받으며, 태종을 도와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 인물이다. 


태종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하륜이 지공거를 맡은 것을 볼 때, 그만큼 조선왕조에 올바른 인재가 절실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륜은 고려의 신하들이 조선의 신하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가교나 교량 역할을 했다. 하륜의 포용적인 성격때문에 하륜을 보고 조선왕조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서생이 길재의 권유를 받고, 조선왕조에 박서생이 출사한다는 것은 조선왕조 태종의 입장에서는 더  없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고려때 길재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스승이었던 권근(權近)은 정몽주(鄭夢周·김약항(金若恒)·길재(吉再)를 대표적인 절의지사(節義志士)로 천거함으로서 길재의 제자인 박서생은 태종과 권근뿐만 아니라 여러 신하들에게 주목과 관심을 받게 된다. 


또한 시간이 흘러가면서 조선왕조에 벼슬하기를 거부하던 고려의 두문동 72현의 후손들과 제자들은 조선왕조에 출사하는 경향이 많아지던 시기였다. 많은 명성이 높은 후손들과 제자들은 조선의 신하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절의를 숭상하던 조상들이 조선왕조에 나가는 것을 권유했고,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당시 조선왕조에서 두문동 72현의 자제이나 후손들과 제자들이 조선왕조에 출사하는 경향이 현격하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정몽주의 차남 정종본(鄭宗本), 이행(李行)의 아들 이적(李逖), 배상지(裵尙志)의 아들 배환(裵桓) 등이었다. 


모두 대표적인 두문동 72현의 후손들과 제자들이었다. 정종본은 아버지 정몽주가 태종 이방원에게 직접적으로 죽임을 당했으면서도, 조선왕조에 그것도 태종에게 나아가 벼슬을 한다. 아버지의 원수를 임금으로 모셔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고려에 대한 절개와 지조를 지킨 절의파(節義派)의 후손들을 수용한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여주었고, 또한 조선왕조에서 보면 왕조의 기틀을 굳건히 다지기 위해서는 두문동 72현의 젊고 유능한 후손들과 제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박서생은 문과에 급제하였음에도 어떤 이유에선지 관직에 물러나 “학교를 흥하게 하고 인재를 양성한다”는 흥학교양인재(興學校養人才)를 실천하는데 매진한다. 당시 지역의 향교(鄕校)가 있었기 때문에 한양에서 내려 온 박서생은 스승 길재를 모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태종 2년 길재는 어머니 김씨부인의 상(喪)과 길재의 장남 길사문(吉師文) 죽음을 맞는다. 길재가 본인의 어머니 상과 큰아들의 상을 박서생에게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맞게 주관해 줄 것을 부탁한다. 


길재가 제자 박서생에게 집안의 장례를 믿고 의지했다는 것은 길재에게 있어서 박서생은 제자 그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길재에게 있어 박서생은 아마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겠다.  


태종3년 당시 경상도관찰사로 조선 개국공신인 남재(南在)였다. 남재는 길재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갔지만, 길재의 절의를 시(詩)를 지을 정도로 길재를 존경했다. 그래서 가난하게 지내는 길재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한다. 


선산군수 이양(李揚)의 입장에서는 바로 위 직속상관인 경상도관찰사가 가난하게 살고 있는 길재에게 배려하는 것을 보고, 본인 이양도 가난한 길재가 장착하여 안정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율곡(栗谷, 밤실)지역을 선산군수 이양이 길재에게 주는 것이다. 이곳이 바로 현재의 구미시 도량1동 밤실이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이렇게 하여 길재는 율곡(밤실)로 이사를 하게 되고, 박서생 역시 스승을 따라 고향 의성 비안(比安)에서 율곡(밤실)로 이사를 온다. 이렇게 밤실에 길재와 박서생이 함께 정착하면서 그들은 하나의 공동운명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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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실에 있는 박서생의 묘소인데 너무도 초라하게 보여진다. 묘소를 보고 정말 청백리답다는 것을 알수 있다.>

 

예부터 지역에서는 밤실에 사는 해평길씨(海平吉氏)를 밤실길씨라 불렀다. 그리고 현재에도 지역의 나이 많으신 어른들께서 그렇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길재의 제자 박서생은 말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박서생은 직접 밤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밤실이라 부른다. 엄밀히 말하면 박서생의 말년부터 밤실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박서생 때문에 지명이 "밤실"이 되었다도 봐야 한다. 그리고 박서생은 자신의 호(號)를 “밤나무 정자”라는 뜻에서 율정(栗亭)으로 짓는다. 밤실이라는 지명은 길재의 제자 박서생 때문에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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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1동 밤실마을 입구 도산초등학교 벽에 그려져 있는 고려 삼은(三隱)인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의 벽화>
 

길재는 벼슬살이를 하다 돌아 온 박서생이 길재 자신의 곁을 맴돌고 있는 것을 보고는 박서생에게 다시 관직에 나갈 것을 강력하게 권유한다. 이후 성균관으로 돌아온 박서생은 태종7년에 문과 중시에 을과 1등으로 합격하면서 사간원  정6품 우정언(右正言)에 임명되었고, 이후부터 박서생은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그리고 태종 18년에 박서생이 서연관(書筵官) 정4품의 필선(弼善)의 직책을 맡는다. 서연관의 직책을 맡았다는 것은 임금으로부터 학문과 인격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서연관이란 미래권력인 왕세자를 교육하는 기관임으로 대단히 중요한 자리였다. 서연관은 문과 급제자 가운데서도 학문과 덕망이 뛰어난 사람들을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즉 서연관의 자격 조건은 학문이 뛰어나고 단정한 사람만이 임명되었다. 만약 서연관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판단 될 때에는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바로 파직되었다. 


서연관 박서생이 해야 할 일은 왕세자 양녕대군의 교육을 담당하는 하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은 유교국가를 표방했음으로 왕이 되려면 성리학적으로 뛰어난 학문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왕세자의 학습량은 어마어마할 정도였다. 양녕대군은 군왕의 공부보다는 여자에 더 관심이 많았고, 여자때문에 항상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어리문제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모든 것이 왕세자란 이유로 덥혀졌다. 


양녕대군이 전 중추부사 곽선의 첩 "어리(於里)"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선물을 보낸다. 그러나 어리는 중추부사 곽선에게 지조를 지켜야 한다면서 거부한다. 양녕대군은 이에 개의치 않고, 어리를 직접 찾아가 강제로 궁궐로 데려와 양녕대군 처소에 숨어 어리와 사랑놀이를 한다. 어리가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되면서 이 사실이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궁궐 전체에 알려지게 된다.

그런데 이 어리사건에서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金漢老)가 어리를 입궐시키는 것을 도와주고, 양녕대군이 주색잡기를 탐하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하였다. 장인 김한로는 사위 양녕대군이 하자는 대로 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자, 태종은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와 어리를 유배 보내고, 양녕대군의 주변에서 잘 못된 일을 도운 나인과 내시를 모조리 죽인다. 그런데도 태종은 양녕대군에게 반성할 기회를 한 더 주지만, 양녕대군은 아버지 태종의 마음도 모르고, 아버지 태종에게 직격탄을 날리는 편지를 쓴다. 


양녕대군은 반성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 태종의 여자문제를 거론하게 됨으로서 태종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더 이상 양녕대군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접는다. 태종 이방원이 어떤 인물이었가? 조선건국에서부터 본인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방해되는 형제뿐만 아니라, 조선을 개국하는데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여도 마음 하나 흔들리지 않은 철의 사나이 아니었던가!

어찌보면 태조 이성계 옆에 태종 이방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강철 같은 태종도 큰 아들 양녕대군을 폐위시키는 과정에서는 개인적으로 가장 괴로워 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양녕대군에 대한 폐세자 결정이 내려지고, 경기도 광주로 유배를 간다. 이후 태종은 장남 양녕대군을 폐세자시키는 과정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태종이 양녕대군 때문에 많은 눈물을 혼자 흘렸다고 기록한다.


양녕대군의 교육을 담당하던 서연관 필선 박서생은 세자 양녕대군을 잘 못되게 했고, 불의에 빠지게 했다는 죄목으로 파면된다. 그러나 1419년 태종의 시대에서 세종의 시대로 넘어가지만, 여전히 상왕인 태종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렇지만 박서생의 능력을 알고 있던 태종과 세종은 박서생에게 사헌부 집의의 관직을 내린다.


그러나 세종 2년 동료 홍여방(洪汝方) 상왕 태종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다가 태종의 진노(震怒)로 상주로 유배를 가지만, 2개월 뒤 박서생은 경외종편(京外從便)된다. 경외종편이란 유배된 죄인을 유배지에서 풀어주고, 서울 밖의 어느 곳에서든지 본인 뜻대로 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외종편된 박서생은 8년 동안 벼슬을 하지 않는다. 


세종 1년에 길재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길사순(吉師舜)이 길재의 행장을 부탁했지만, 박서생은 과중한 업무로 도저히 스승 길재의 행장을 집필하지 못했다. 아마 박서생은 유배지 상주에서 풀려나 이 시기부터 길재의 삶이 담겨져 있는 행장과 언행록을 집필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박서생의 유배는 스승 길재의 행장과 언행록을 집필하는데 오히려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었다. 오히려 박서생의 입장에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길재의 행장과 언행록을 집필하는 것이 평소의 소망이었을 것이다. 아마 박서생은 제자가 되어 스승의 행장과 언행록을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인 스스로 큰 죄라고 인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박서생은 1428년 세종 10년에 58세의 나이로 관직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드디어 박서생의 인생에서 황금기를 맡고, 세종의 태평성대를 돕는다. 성균관 대사성으로 돌아온 박서생은 외교관의 신분으로 일본에 사행(使行)을 가는데, 이것이 조선 최초의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이다. 


당시 조선의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은 본토와 대마도를 분리하는 외교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외부적으로 보여 지는 것은 외교관계 차원의 조선통신사였지만, 내부적으로는 특히 왜구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서생은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의 농업과 상업을 직접 관찰하여 조선으로 돌아온다.


박서생이 조선통신사로 다녀와서 가장 큰 공로와 기여는 당시 일본농업에서 수차(水車)를 이용하여 논농사를 짓는 것을 보고, 조선도 이와 같은 수차를 제작하고 활용하여 논농사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것을 세종에게 박서생은 이렇게 보고 한다. 


“일본 농민들은 수차를 설비하여 물을 퍼 올립니다. 우리나라에서 전년에 만들었던, 인력(人力)으로 물을 대는 수차와는 다릅니다. 그 모형을 만들어 바치오니 청컨대 각 고을에 설치하여 관개(灌漑)의 편리를 돕도록 하소서.” 


그래서 세종 13년에 세종은 수차의 설계와 제작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공조참의(工曹參議)의 벼슬을 내리고 수차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박서생은 직접 수차 제작에 직접 참여하여 드디어 수차를 개발하여 밭농사 중심에서 논농사 중심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세종과 박서생은 조선의 농업에 대한 기술혁신을 이끌었다. 세종은 조선 실정에 맞는 농사법을 책으로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농사직설』을 간행하여 수전농법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박서생은 혁신적인 농업기술 개발에 머물지 않고, 백성들에게 화폐를 널리 보급하여 물물교환 위주의 경제를, 화폐 중심 경제로 전환할 것과 교량과 길을 건설하고 정비하여 사람과 물건의 이동이 편리하도록 해야 한다고 세종에게 보고한다. 


그 내용은 “돈(錢)을 포백이나 미곡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여행하는 사람들이 비록 천리를 가더라도 돈만 있으면 식량을 휴대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건의하며, 박서생은 세종에게 왕실과 조정에서 거두어들이는 각종 세금을 면포를 제외하고는 모두 화폐인 돈으로 바치도록 건의한다. 박서생의 이러한 주장은 점진적으로 정책에 반영되어 조선사회에서 상업과 경제가 활발하게 일어나도록 하게 된다.


세종 역시 박서생의 실학적인 주장을 수용하여 대대적으로 실천과 정책에 반영하였다. 어찌 보면 박서생은 조선 실학의 효시(嚆矢)라고 할 수 있다. 박서생과 같은 인물들이 조선에 많았다면 한말에 조선이 일본에게 식민지되는 안타까운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박서생의 능력과 노력을 크게 평가하던 세종은 1430년 세종 12년에 박서생을 집현전 부제학으로 임명하는데, 당시 집현전의 학자들은 대부분 고려 때 조상들이 두문동 72현의 후손과 제자들이 많았음으로 길재의 수제자인 박서생의 위상은 말하지 않아도 높았던 것이다.


박서생은 1431년 세종 13년에는 병조참의를 거쳐 1432년 세종 14년에는 안동부사로 임명된다. 박서생은 1407년 태종 7년부터 1432년 세종 14년까지 25년간 오랜 관직생활을 하였다. 박서생은 안동부사를 끝으로 벼슬살이에서 물러나 구미 밤실마을로 돌아와서 그 곳에서 삶을 마감한다. 

그가 죽고 난 이후 그가 만든 밤실, 동쪽 산기슭에 묻혔다. 그의 묘소에 제대로 된 비석과 상석이 없다. 이것만 봐도 박서생이 정말 청백리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길재의 후손들은 600년 동안 박서생의 묘소를  잊지 않고 관리해 오고 있다고 한다. 스승과 제자로 맺어진 인연이 사후에도 이어지는 것을 보면 대단하고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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