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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칼럼

【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선산 단계천(丹溪川)을 찾아, 그 옛날 단계 하위지를 기억해 본다.

이순락기자 0 2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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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지금으로부터 570년 전 구미·선산에는 작은 아버지 세조에게 왕위 찬탈을 당한 단종과 관계된 사육신 단계 하위지(丹溪 河緯地)과 생육신 경은 이맹전(耕隱 李孟專)이 있었던 고장이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그 많은 선비가 있었지만, 한 고장에서 이렇게 사육신과 생육신이 동시에 나와 충절을 지킨 지역은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고, 이렇게 한 고장에서 사육신과 생육신이 함께 나온 지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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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에 있는 단계 하위지 유허비>


이렇게 군왕에게 충절(忠節)을 지키고, 사람에 대한 의리를 지킨 선비가 많이 나오게 된 것은 야은 길재(冶隱 吉再)영향이 컸다고 하겠다. 생육신 이맹전 또한 야은 길재에게 학문을 직접 배웠고, 하위지는 아버지 하담이 길재의 제자였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절의(節義)를 지키던 길재의 사상과 철학을 이어받은 것이다. 즉, 야은 길재는 충절의 토양과 밑거름을 제자들에게 제공한 것이다. 


여기서 먼저 필자는 단계 하위지를 570년 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만나보고자 한다. 경은 이맹전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살펴보기로 하고, 단계 하위지를 먼저 만나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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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지는 영조 34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렬공이란 시호를 받는다>
 

하위지는 1412년 태종 12년에 진주하씨(晉州河氏) 군수 하담(河澹)의 아들로 선산 영봉리, 지금 선산읍 이문리에서 태어난다. 영봉리(迎鳳里)는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만 15명이나 배출되며 이중 장원급제가 7명, 부장원 2명이나 나와 장원방(壯元坊)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인재가 많이 나왔다. 


일설에는 선산 비봉산(飛鳳山)은 전설의 새 봉황새가 하늘로 나는 형국인데, 비봉산의 정기가 바로 맺힌 곳이 영봉리라고 한다. 영봉리는 봉황을 맞이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선산읍을 중심으로 하는 지명들은 비봉산의 날아가는 봉황새에 비롯된 것이 많다. 


하위지의 조상들은 대대로 진주에 살았다. 그런데 하위지의 할아버지가 선산 금오산에 은거하고 있는 야은 길재(冶隱 吉再)에게 하담을 교육시키기 위해 선산으로 보냈다. 야은 길재 문하에서 공부하던 하담은 선산 영봉리에 있는 유면(兪勉)의 딸과 결혼하게 되면서 영봉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진주에서 와 선산에 정착하게 된 하담은 야은 길재의 문하에서 박서생(朴瑞生)·김숙자(金叔滋)와 함께 학문을 익혔으며, 1402년 태종 2년에 문과에 2등으로 합격한 인물이다. 하담은 슬하에 첫째, 하강지(河綱地), 둘째 하위지(河緯地), 셋째 하기지(河紀地), 넷째 하소지(河紹地) 네명을 아들을 두었다. 4형제 모두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하위지의 형인 하강지는 세종11년, 1429년에 문과에 급제를 하였다.


하위지 아버지 하담이 길재의 제자였던 관계로 어찌 보면 하위지의 학문도 길재를 거쳐 하담에게 전수되었고, 하담은 하위지에게 길재의 학문을 가르쳤던 것이다. 하위지는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병을 치료하고자 집현전 직제학을 사직하고, 고향 선산에서 치료와 휴식을 하던 중 집현전 부제학의 관직에 제수되자 치료를 멈추고, 한양으로 상경하기 전 길재의 묘소를 찾아 절의(節義)를 지킨 야은 길재의 충절을 되새기고, 단종이 있는 한양으로 급히 올라간다. 


 하위지가 태어나던 날로부터 하위지의 집 앞 시냇가가 사흘 동안 붉게 물들어 사람들은 괴이하고 이상하게 느끼고, 그 때부터 시냇가를 붉은 단(丹)을 넣어 붉은 계천이라는 뜻에서 단계천(丹溪川)으로 이름 붙였다고 한다. 하위지가 훗날 본인의 호(號)를 고향 집 앞의 시냇가의 이름을 따 단계(丹溪)로 지었다. 


단계천은 아직도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며 선산읍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낙동강으로 유유히 흘러 들어가고 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단계천을 콘크리트로 포장하여 주자장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5일마다 선산장날이 서 5일마다 사람들로 들끓고 있다. 단계천의 물이 마르지 않는 이상, 역사 속의  단계 하위지를 단계천은 오늘도, 내일도 기억하며 유유히 흐를 것이다.


하위지는 아버지 하담의 DNA를 그대로 물려받아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다. 1435년 세종17년 생원시에 17명 중 2등으로 합격하고, 세종 20년 1438년 문과에 3명 중 장원으로 급제를 한다. 하위지의 동생인 하기지 역시 문과 병과에 7명중 1등으로 형제가 동시에 급제하여 하위지 집안에 경사 중에 경사가 났다고 한다.


조선의 기틀과 초석을 다지기 위해 인재발탁에 많은 공을 들이던, 세종은 하위지를 한 눈에 알아봤다. 그래서 세종은 가장 심혈을 쏟고 있던 집현전에 하위지를 부수찬으로 임명한다. 이것은 당시 엄청난 파격적인 세종의 인사였다. 세종의 인사로 인해 단계 하위지는 집현전과 조정대신들 속에서 한 순간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성삼문(成三問)은 문과 정과에 23명 중 1등으로 신숙주(申叔舟)는 소과에 급제를 하였다. 하위지가 장원급제 할 때 과거의 총책임자가 영의정 황희(黃喜)와 예조판서 허조(許稠)가 하위지를 장원으로 선발하였다. 


과거시험의 문제는 태조 이성계가 신덕황후(神德王后) 강씨를 위해 건립한 흥천사 목탑이 기울어져 무너질 상황이 생기자 세종은 대대적으로 수리하도록 명을 내린다. 시험문제는 흥천사 목탑 수리의 폐단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라는 것이었다.

하위지의 답안지는 “흥천사 사리각 목탑 수리”의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였다. 하위지가 “흥천사 사리각 수리”에 조정의 대간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잘 못했다는 의견을 답안지에 기술했다. 이 소식을 접하고 들은 사헌부와 사간원 대간들이 집단 사직상소를 세종에게 올렸다. 


세종이 다시 대간들을 달래고 업무에 복귀시키자, 대간들이 영의정 황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황희가 사직상소를 올렸다. 하위지가 답안지에 기술한 대책문은 조정의 많은 대신들에게 일파만파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하위지는 세종뿐만 아니라 많은 신하들에게 깊은 인상과 조명을 받기 시작한다. 하위지의 탁월한 문장력으로 무사안일의 시류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조정을 발칵 뒤집었던 것이다. 과거시험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장원에 합격한 하위지를 세종은 항상 중책의 자리에 기용하게 된다. 


조정을 발칵 뒤집은 하위지를 세종은 곧바로 집현전 부수찬 종 6품에 제수한다. 함께 급제한 성삼문을 집현전 정자(正字) 정9품에 제수되는 것을 보면, 당시 하위지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당시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역사와 문학, 지리, 의약 등 모든 분야에 걸친 서적을 편찬하게 하고 연구하게 했다. 이러한 일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집현전 학자들에게 재능과 문학적 능력인 재주(才), 경전에 대한 박학한 학문(學),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현실 비판 의식의 식(識)인 “삼장지재(三長之才)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당시 집현전 학사들은 대단한 당대 명문가 후손들이었다. 하위지는 한양을 배경으로 하는 당대 명문가 후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처음 출발부터 집현전의 중요 요직인 부수찬에 임명했다는 것은 세종이 하위지를 얼마나 좋아하고 아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위지는 관직생활 출발부터 세종의 사랑과 배려를 받으며 출발했던 것이다. 


1439년 세종 21년 하위지는 병이 심하여 고향으로 치료와 휴식을 취하려고 사직상소를 올린다. 세종은 하위지의 사직을 수용하지 않고, 고향에 가서 치료하는 것을 허락한다. 세종은 직접 음식과 약을 하사하고, 경상감사에게 하위지가 질병을 치료하는데 적극적으로 도와주도록 명을 내려서 하위지의 치료를 돕게 한다.

그래서 하위지는 다음해에 집현전부수찬으로 복직하여 세종이 정사를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보좌한다. 이렇게 해서 하위지는 세종으로부터 “인재 중에서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세종으로부터 인재 중에서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던 하위지도 벼슬살이에 위기가 닥치는데 그것은 바로 하위지의 형인 동복현감으로 있던 하강지(河綱地)가 사헌부로부터의 탄핵을 받는 일이 일어난다.  하강지가 지방관으로 있을 때 잘 못과 본분을 잃는 행동으로 감옥에 가자, 하위지는 동생 하기지와 함께 옥살이를 하고 있는 형을 뒷바라지를 위해 사직 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사직은 수용되지 않고 오히려 세종은 역마(驛馬)를 내주어 다녀올 수 있도록 배려를 한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를 않고, 형님의 옥살이를 뒷바라지 하던 동생 하기지가 갑자기 죽는다. 가문에 닥친 위기에 낙심한 하위지는 또 세종에게 사직 상소를 올린다. 세종은 안타까워하면서 하위지의 사직을 비로소 허락한다. 이렇게 되면서 하위지가 사직한 그 해에 있는 문과 중시에 응시를 하지 못하게 된다. 


이 문과 중시에서 성삼문(成三問)이 장원을 차지하고,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등 집현전 학사들이 대거 상위에 오른다. 하위지는 형 하강지의 죄를 대신 받을 것이니, 형을 사면해 달라는 상소를 올려지만, 세종은 형님의 죄를 대신 받겠다는 하위지의 청을 윤허하지 않는다. 이처럼 천하제일의 인재라고 평가받던 하위지에게도 시련과 고난이 찾아와 하위지의 벼슬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하위지는 관료생활 출발점부터 세종에게 너무도 과한 사랑을 받고 출발했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은 집현전에서나 중요한 정책과 연구에 항상 하위지를 참여시켰다. 하위지로서는 개인적으로 너무도 과한 사랑과 대접이라고 느꼈다. 세종의 이러한 과한 사랑과 대접 때문에 세종이 죽으면서 손자 단종을 끝까지 지켜달라는 유훈을 지키고자 하위지는 목숨을 걸었는지 모른다. 


하위지는 기록에 보면 업무에 대한 지나친 열정과 과중한 업무로 병을 얻어 고향으로 내려와 있으면 세종은 직접 약을 보내고, 경상도관찰사에게 “하위지를 잘 보살펴라”는 어명을 내렸다고 할 정도로 세종의 하위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대단했다.


하위지는 어린 단종에게 학문을 가르쳤기 때문에 단종과도 각별한 관계였다. 1449년 겨울 세종은 죽음을 예감하고, 죽기 전에 집현전 학자들인 하위지·성삼문·신숙주·박팽년·유성원·이개 뿐만 아니라 김종서·황보인 등 원로대신을 불러 모은다. 그 자리에서 세종은 아들 문종(文宗)이 병약하니, 세손인 단종이 걱정되니, 문종이 왕위에 오르더라도 세손을 잘 지키고, 보필하라는 당부와 부탁을 한다. 


또한 세종은 본인의 아들들인 수양대군,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왕실의 종친들을 소집하여  병약한 문종과 어린 단종을 걱정하며, 아들들에게 만약 문종이 일찍 죽게 되면 왕위를 이어받을 단종의 안위를 돌봐 줄 것과 단종을 지켜 달라는 다짐을 받는다. 


세종은 큰 아들 문종이 병약하다는 것과 둘째 아들 수양대군의 성격이 세종의 아버지 태종의 성격을 닮은 것이 항상 걱정되었다. 세종은 문종이 병약하여 일찍 죽으면,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라야 하는 것과 왕위에 올라도 수양대군이 혹시 왕위를 찬탈하는 것에 대해 걱정 때문에 신하들과 대군들로부터 다짐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죽기 전 세종은 하위지뿐만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신하들에게 “과인이 죽은 뒤에도 그대들은 모름지기 이 아이를 보호하라.”는 유훈을 남긴다.


세종은 신하들과 대군들에게 어린 단종 지켜달라고 한 것은 수양대군의 성격을 보았을 때 왕통(王統)에 반드시 문제가 발생 할 수 있다는 것을 세종은 예측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이러한 신하들과 대군들에게 단종에 대한 당부와 부탁 그리고 다짐을 받고 1450년 2월 54세의 나이로 병약한 문종과 어린 단종, 그리고 야망에 찬 수양대군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난다.


세종은 죽어가면서 본인의 아들인 대군들과 신하들이 손자 단종을 잘 지켜 주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자 바램이었다. 그러나 세종의 당부와 유훈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을 계기로 물거품이 되고, 계유정난은 세종이 부탁한 유훈을 지키고자 했던  유능한 많은 신하들이 한순간에 죽는 참변이었다.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문종은 의정부(議政府)가 육조(六曹)를 지휘하면서 국정운영은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실시한다. 이것은 곧 의정부의 힘이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왕권(王權)을 약화시키고, 신권(臣權)이 강화되는 정치적 상황을 만들었다.  


의정부사서제 실시로 수양대군과 왕족들의 불만은 노골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당시 권람은 1450년 세종이 죽는 해 35세에 문종 즉위년 과거에 장원급제한 인물이다. 세종이 죽기 전 수양대군과 하위지·성삼문 함께 중국과 조선의 역대의 전쟁을 기록한 병서인『역대병요(歷代兵要)』 편찬하게 하는데, 이 과정에 집현전 교리로 권람이 동참하면서 수양대군과 가까워졌다. 그래서 권람(權擥)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일지감치 수양대군의 사람이 되었다. 


권람은 책 보따리를 말에 싣고,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면서 책을 읽다가 한명회(韓明澮)를 만나 함께 글과 시를 지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이 둘은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라고 약속했을 정도니 얼마나 친한 사이였겠는가? 


따라서 한명회는 권람 때문에 자연히 수양대군과 친해 질 수밖에 없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만날 때 경덕궁지기의 아주 한미한 벼슬자리를 하고 있었다. 야망에 찬 한명회와 왕위 찬탈을 꿈꾸던 수양대군과는 만남과 동시에 호흡이 척척 맞았다.


권람과 한명회는 자신들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수양대군의 좌장과 책사가 된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얻고자 하는 것을 이루게 해드리면, 본인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라고 묻는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그 자리에서 “나도 그대가 얻고자 하는 것을 주겠네.”했다고 한다. 당시 조정의 권한을 좌지우지하던 김종서와 왕위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수양대군은 서로 항상 감시와 견제를 하고 있었다.


세종이 죽으면서 걱정하던 일이 오래지 않아 발생한다. 문종은 즉위한지 2년 3개월 만에 죽는다. 조정은 3부류의 세력이 경쟁하고 있었는데,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 김종서와 황보인으로 하는 원로대신들, 수양대군과 금성대군으로 하는 종친들이 서로를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를 하며 긴장감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문종이 죽는다.


문종 역시 세종과 마찬가지로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 그리고 수양대군과 금성대군에게 어린 단종을 지켜주며, 잘 보필해 달라는 유훈을 남기고 죽는다. 단종은 1441년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3일 만에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죽는다. 그래서 할아버지 세종의 후궁인 혜빈양씨의 손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세종의 죽음, 아버지 문종의 죽음으로 단종은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문종 때부터 실시되던 의정부 사서제로 인해 조정의 모든 결정이 신하들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되면서 수양대군과 왕실 종친들은 불만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여기에다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의정부 대신들은 황표정사(黃標政事)로 모든 것을 결정하자, 어린 단종은 서류에 왕의 옥새만 찍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린다. 


황표정사(黃標政事)란 의정부 대신들이 낙점한 사람의 이름에 누런 노란색 종이(황표)를 붙이면 임금이 그대로 사람을 임명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제도였다. 이것은 문종이 죽으면서 어린 단종이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할 것 같아 김종서와 황보인에게 유훈을 남김으로서 어린 단종은 20세까지 이런 황표정사를 결정해야 했다.


당시 인사권은 육조에서 이조(吏曹)의 권한이었는데, 황표정사를 실시하자 인사권이 의정부로 넘어 간 것이다. 따라서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 삼정승의 권력이 왕 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왕에 야망을 가지고 있던 수양대군은 이 황표정사를 실시하는 것을 드디어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만다.


당시 역사를 기록하던 사관이던 이승소(李承召)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군주는 그 손을 요동하지도 못하였고, 백관들은 명을 받을 겨를도 없이 턱으로 가리키고 눈치로 시켜도 감히 누가 무어라 하지 못하였으며, 사람들이 정부가 있는 줄은 알아도 군주가 있는 줄은 모른 지가 오래였다.”라고 묘사했다. .


황표정사로 심기가 불편하던 수양대군에게 한명회는 중국에 사은사(謝恩使)로 갈 것을 제의한다. 조선시대에 중국 명나라가 조선에 베푼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보내는 사신이 사은사였다. 한명회가 사은사로 수양대군에게 다녀오라는 뜻은 치열한 권력경쟁에서 한발 물러나 김종서의 경계심을 늦추자는 것을 수양대군에게 제의한 것이다. 


수양대군은 한명회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한명회는 사은사로 갈 때 집현전의 신숙주(申叔舟)를 데려 가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간다고 하니, 조정을 좌지우지 하던 김종서와 황보인은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승낙한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신숙주와 함께 사은사로 다녀오면서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가 된다. 


여기서 신숙주라는 인물을 잠깐 살펴보겠다. 신숙주는 자기를 그토록 아끼던 세종과 문종의 당부와 다짐을 헌신짝 버리고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신숙주는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데 적극적이었다.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금성대군이 처형되고 단종마저 죽는다. 신숙주는 수양대군이 세조에 즉위하자 승승장구하여 영의정까지 오른다. 


그리고 신숙주는 세조의 아들 예종 때 간신 류자광(柳子光)이 일으킨 “남이의 옥사” 때 남이 장군을 처형하자는데 적극적이었다. 이후 사림파가 등장하자 신숙주는 배신자와 변절자로 비판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신숙주는 그 이후 역사에서 배신의 아이콘으로 낙인찍힌다. 


신숙주가 집협전 학사들을 배신하고, 수양대군의 편에 섰을 때 많은 사람들은 신숙주를 비난하고 혐오했다. 그래서 신숙주를 사람들은 짓이기고 싶어, 만두 속에 녹두로 키운 숙주나물을 넣어 짓이겼다고 한다. 또한 숙주나물이 빨리 시거나 상해서 변절했던 신숙주와 비슷하다 해서 숙주나물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때부터 녹두로 키운 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했다고 한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은 상왕(上王)의 신분으로 되고 숨만 쉬고 사는 존재로 전락한다. 세조 2년 집현전 출신 관료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자, 1457년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신분이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고, 왕비의 신분도 “군부인(君夫人)”으로 강등되어 궁궐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간지 몇 달 뒤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하자, 단종의 신분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해 10월 스스로 영월강물에 뛰어 들어 자살하였다. 그리고 단종의 비는 군부인에서 신분이 강등되어, 노비로 전락하는 참혹함을 당한다.


변절자·배신자의 아이콘 신숙주는 세조에게 단종의 비 송씨를 본인에게 달라고 까지 한다. 그러나 세조는 송씨를 “신분은 노비이지만, 노비로 부리지 못하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세종과 문종이 신숙주를 그렇게 신뢰하고 아꼈는데, 은혜도 모르고 본인이 모시던 왕의 비가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했다고 해서 세조에게 왕비 송씨를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고 하니, 참으로 신숙주의 인격이 의심스럽다. 이후 성종 때부터 등장하는 사림파 선비들은 신숙주 같은 인물을 가장 경멸하고 수치스러운 인간으로 치부했다고 한다.


의정부 삼정승들은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를 갔을 때, 수양대군이 돌아오면 힘을 완전히 빼기 위해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손을 잡고 지지를 얻어낸다. 이렇게 됨으로서 권력이 비대해지는 의정부 삼정승에 대한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의 비판과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이로써 조정에서의 권력의 역학관계는 분명하고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집현전의 젊고 유능한 학자출신의 관료들을 자기 세력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데, 그 중 대상인물이 하위지·성삼문·박팽년 등 세종이 지나칠 정도로 좋아했던 젊고 유능한 인물들 위주로 회유하고 포섭했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역대병요를 편찬했다는 이유를 들어 단종에게 하위지와 성삼문의 직급과 품계를 올려 줄 것을 제안한다. 


당연히 단종은 좋다고 허락하지만, 하위지는 역대병요는 당연히 신하로서 해야 할 일이며, 또 왕실의 종친(수양대군)이 정사에 관여하고, 간언한 벼슬은 받지 않겠다고 단종에게 아뢴다. 그리고 하위지는 몸이 좋지 않다며 사직을 청한다. 


사직을 청한 하위지에게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한 단계 더 높은 집현전 직제학의 벼슬을 내리라고 제의한다. 어린 단종은 하위지가 자기를 가르쳤던 스승이라며 좋다고 수양대군이 시킨대로 직제학의 벼슬을 내린다.

하위지는 단종에게 사직의 상소를 올렸으며, 사직이 되지 않자 단종을 직접 찾아가 직제학을 사직하겠다는 뜻을 전하려 하자, 단종이 만나주질 않았으며, 하위지의 사직을 단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하위지는 뼈가 쑤시고 아파 다리를 저는 병에 걸려서 정말 관직생활을 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1453년 7월 하위지는 단종에게 직제학을 사직하겠다는 간절한 상소를 올린다. 하위지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 본 단종은 하위지의 사직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위지는 고향으로 돌아와 휴식과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영산의 온천을 오가며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 수양대군과 신숙주가 친하게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된 김종서는 신숙주를 외직으로 보낸다. 신숙주를 외직으로 보내는 것에 위기감과 불안감을 느낀 수양대군과 한명회는 결국 계유정난을 일으키기로 한다.

홍달손(洪達孫)과 양정(楊汀)은 수양대군의 최고의 무사들이었고, 수양대군의 측근에서 활약하던 최정예 무사들이 항상 30여명이 있었다고 한다. 1453년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은 유숙(柳淑)‧양정‧어을운(於乙云) 등 무예가 출중한 무사들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을 직접 찾아가 그를 죽인 뒤 입궐해서 단종에게 김종서가 역모를 일으켜 척살했다고 단종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왕이 측근 인사를 비밀리에 부르는 밀소(密召)를 이용해 영의정 황보인‧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우찬성 이양(李穰) 등을 궁궐로 불러 대신들이 궁궐 문에서 바로 죽였다. 병조판서 민신(閔伸)은 궁궐 밖에서 척살되었다. 우의정 정분(鄭苯)은 잡아서 유배를 보냈다. 안평대군은 유배를 보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사시킨다.


수양대군은 궁궐에 들어와 어린 단종 앞에서 정권과 병권을 장악할 수 있는 모든 관직을 장악하고,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에 오른다. 단종은 모든 서무와 정사는 수양대군이 알아서 하라는 명을 내린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성공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였다. 


수양대군과 한명회는 단종이 즉위하는 그 순간부터 거사를 준비한 것이다.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부터 한명회는 모든 계획과 살생부(殺生簿)를 이미 준비한 것이었다.   


당시 계유정난으로 죽은 대신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고, 처와 딸은 공신에게 관비로 분배되었으며, 16세 이상의 아들들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15세 이하의 아들들은 관노가 되었다. 조선사회에서 자의건 타의건 역모에 연루된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들이 버러졌다. 


직제학을 사직하고, 고향 선산에 내려와 있던 하위지는 집현전 부제학으로 임명한다는 명을 받고, 급하게 한양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하위지는 어린 단종을 위하여 왕비를 맞아드려 한다고 주장하자, 수양대군은 단종은 왕비로 송씨부인을 선택하여 결혼시킨다. 


그리고 수양대군의 공포정치는 최고조에 달해 옳은 말과 바른 말을 하는 신하는 옥에 가두어 버리거나 유배를 보냈다. 이러한 공포정국 속에서 하위지는 목을 내놓고 수양대군에게 직언을 올리고, 1455년 4월 하위지는 병을 이유로 사직 상소를 올리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있었다.


1455년 수양대군은 금성대군을 모반혐의로 유배를 보내고, 계속되는 공포 분위기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준다. 이 해에 수양대군은 왕에 즉위하여 세조(世祖)가 되었다. 천하의 뜻 있는 선비라면 모두가 한탄하고 통곡할 일이었다. 


하위지 역시 치료를 위해 고향에 있는 동안 이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고 있었다. 세조는 하위지 같은 유능한 인재가 있어야 집권초기 정국을 안정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예조참판으로 임명한다. 하위지는 뒷일(단종복위거사)을 생각하며 세조의 명한 예조참판의 벼슬에 나간다. 그리고 하위지는 곧장 세조를 찾아가지 않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는 단종을 찾아가 인사를 올린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특히 하위지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하위지의 곧고, 사심 없이 바른 말을 하기 때문에 집권초기에 필요한 훌륭한 인재라고 생각했다. 입신출세보다 명분과 사리에 맞는 것에 대해 한 치의 물러남이 없는 것이 세조가 하위지를 좋아하는 첫 번째이며, 두 번째가 하위지의 높은 학문때문이다. 


하위지의 학문은 이미 학문을 좋아했던 호학(好學)군주 세종이 인정했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하위지를 따라 갈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하위지는 절대적으로 거부하지만, 세조는 본인의 아들 세자의 우부빈객(右副賓客)에 임명한다. 우부빈객은 세자시강원의 종2품 관직으로 미래 권력인 세자를 가르치는 자리였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의정부사서제를 폐지하고, 육조에서 관장하던 사무를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啟制)를 시행한다. 신하들은 지나친 왕권강화와 모든 업무가 독선적으로 흐를 수 있다고 상소를 올린다. 상소의 대표자는 단연 하위지였다. 


1455년 8월 하위지는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고 하옥되었다. 당시 왕에게 직언을 하는 신하가 별로 없어 세조는 겉으로는 싫어하면서도 내심 신하들의 직언을 좋아했다. 그래서 세조는 옥에 갇힌 하위지에게 좋은 대접을 하라고 특별히 명을 내린다.


당시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많은 선비들이 벼슬을 버리고 세상과 속세를 떠나 은거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생육신(生六臣)들이다. 생육신은 김시습(金時習)을 비롯하여 이맹전(李孟專), 원호(元昊), 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 또는 권절(權節)이었다. 그리고 길재의 제자 강호 김숙자 역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접하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부모봉양과 후학양성에 뜻을 두고 숨어 살아간다. 


생육신과 정반대로 사육신(死六臣)들인 하위지(河緯地)·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은 본인들의 왕이었던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는 위험천만한 “단종복위거사”를 계획한다. 


수양대군시절에는 하위지에게 품계와 직급을 높일 때 하위지는 한사코 거부하기 일 수였는데, 세조가 즉위하고 나서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벼슬을 받는 것을 세조의 책사인 한명회가 의심의 눈초리로 항상 지켜보고 있었다. 한명회는 집현전 학자들과 하위지를 조심스럽게 뒷조사를 하고 있었다.  

  

유응부는 무관으로 세조의 호위관인 별운검(別雲劍)이었다. 별운검은 나라에 큰 잔치나 화합이 있을 때 임금이 믿는 사람 중 무예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여 호위하게 하는 벼슬이었다. 마침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들이 있어 세조가 축하연을 창덕궁에서 연다고 유응부는 별운검에 임명되었다.


사육신들은 창덕궁에서 연회가 열릴 때 유응부가 세조를 죽이면, 뜻을 같이하는 무사들이 한명회와 권람 그리고 육조의 중요 요직의 벼슬을 한 자들을 죽인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눈치와 감각이 탁월한 한명회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세조에게 창덕궁은 너무 좁고 별운검을 두지 말 것을 제안하자, 세조는 한명회의 말에 다라 별운검을 취소하게 된다. 


그런데 뒷날 사육신이 되는 회의에 집현전 수찬의 벼슬을 하는 김질(金礩)이라는 자가 있었다. 세조의 별운검 취소로 단종복위거사가 한치 앞을 알 수 없게 되자 김질은 불안감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자,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달려가 그동안에 있었던 단종복위거사를 폭로한다. 이에 정창손은 지체하지 않고 세조에게 달려가 역모가 있다고 고변한다.


이로써 단종복위거사를 꿈꾸던 6명의 훌륭한 선비들은 1456년 6월 2일 의금부로 압송되어 하옥되었다. 세조는 직접 하옥된 감옥으로 찾아와 하위지에게 “역모를 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하위지 너만큼은 강직하고 바른 말을 잘 하여 곁에 두려했다.”라고 말하고, 하위지에게 바른대로 말하면 용서하며 살려 주겠다고 하지만, 하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세조는 국문을 직접 하기 시작한다. 세조는 역모의 사실을 숨김없이 실토하라고 단종복위거사를 계획한 6명을 윽박질렀다. 사육신들은 역모를 꾀한 일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는 옛 임금을 다시 모시고자 했을 뿐 역모를 도모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하늘에 해가 둘이 없음을 밝히고자 했을 뿐"이라고 했다. 세조는 내가 왕위에 오를 때는 어찌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역적이 된 것이야? 묻는다. 그 때는 개죽음을 당하기 때문에 참고 때를 기다린 것이라고 했다. 세조는 이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는데 죄를 뉘우치고 세조 자신을 왕으로 받아들이면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했다. 


국문을 당하던 이들은 하늘에 해가 하나이듯 백성들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인데 어찌 대군나리를 따르겠습니까? 차라리 빨리 참수하라는 답을 한다. 다시 세조는 과인이 내린 녹을 먹고, 과인의 신하로 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나리라고 하느냐, 하니 우리 모두 나리가 내린 녹을 먹은 일이 없다고 답한다. 그리고 모두 녹봉을 먹지 않고 그대로 두었으니, 가져가라고 했다.


세조는 단종복위거사에 참여한 유성원은 자살을 선택하고, 박팽년은 고문을 당하다 옥에서 죽었다. 그리고 나머지 4명의 사육신들에게 모든 대소신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을 당한다. 6명의 사육신의 머리를 잘라 3일 동안 저잣거리에 효수하라고 명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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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지의 시신을 김시습이 수습하여 서울 노량진 언덕에 묻었다는 하위지의 묘>
 

그리고 세조는 사육신들이 대부분 집현전 출신임으로 집현전을 없앤다. 사육신들이 처형된 이후 시신을 아무도 손대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 것을 생육신 김시습(金時習)이 몰래 수습하여 서울 노량진 언덕에 안장했다고 전한다. 지금 선산에 있는 하위지의 묘는 의복과 갓을 묻은 의관묘(衣冠墓)이다. 노량진에 있는 하위지의 묘 역시 가묘(假墓)라고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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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고방산에 있는 하위지의 의관묘>


성상문은 국문과정에서 시를 남기는데,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이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남긴다. 그리고 박팽년은 “까마귀 눈비 맞아 희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신이야 변할 줄 있으랴.” 


세조는 “역적의 자손은 모두 극형에 처하고, 여자들은 관노비로 분배하라”는 명도 함께 내린다. 사육신의 가족들은 역적죄로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어야 한다. 하위지의 가족들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사육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하위지의 두 아들 하호와 하박은 세조의 명대로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하위지의 형과 아우 역시 참수형을 받아 비참하게 죽는다. 살아남은 사육신의 가족들은 죽거나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하위지의 둘째 아들 하박이 형을 집행하러 온 금부도사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죽기 전에 어머님께 하직 인사를 올 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하위지의 두 아들들은 “당당하게 아버지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누이동생이 관노가 되더라도 개돼지 같은 행실은 하지 말게 하십시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정실부인답게 신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를 아뢰고 처형당하러 갔다. 하위지의 부인 김씨와 딸 목금(木今)은 지병조사(知兵曹事) 권언(權躽)의 노비가 되었다.


하위지는 가족이 죽거나 노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을 걸었다. 하위지와 사육신들은 본인이 잘못되면 가족 모두가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본인이 죽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가족마저 죽거나 노비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들이 뜻한대로 행동하고 죽음을 선택했다. 


결과는 비록 실패하여 가족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죽기보다 싫은 노비로 전락했음에도, 그들이 배운 충(忠)을 실천하고, 절의(節義)를 지켜야 한다는 것에 본인들의 목숨뿐만 아니라 가족의 불행마저 주저하지 않고 용감하게 그들의 길을 갔다고 하겠다. 사육신의 충과 절의 정신은 성종 때 등장하는 사림파 선비들에게 많은 영향과 교훈을 주게 된다.


사육신의 단종복위거사 이후, 순흥(지금의 영주)으로 유배를 갔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 탈로나 금성대군마저 사사된다.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는 단종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난다. 


그 중심에 관료들 속에서는 신숙주, 왕실 쪽에서는 양녕대군이 여론을 주도했다. 이렇게 되자 세조는 단종을 죽이는 결정을 하고 금부도사 왕망연(王邦衍)을 보내었다. 당시 영월에 있던 단종의 나이는 17세였다. 


1457년 10월 24일, 세조의 명을 받고 금부도사가 영월에 있는 단종에게 간다. 그리고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운동이 실패하여 금성대군이 사사되었다는 소식과 단종의 신분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단종이 스스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영월 강에 뛰어들어 물에 빠져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단종의 죽음에는 또 다른 설이 있다. 


금부도사가 단종의 목을 줄로 묶고, 창밖을 통해 밖에서 잡아당겨 목 졸라 죽였다는 설이다. 지금으로 봐서는 후자가 설득력이 더 있다고 하겠다. 금부도사가 단종을 사사하라는 세조의 어명을 받고 갔던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쉽게 자살하도록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금부도사는 단종을 어떻게든 죽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추측하자면 목 졸라 숨지게 하고, 시신을 영월 강물 던졌을 것이다.


세조가 명을 내려 죽였다는 것보다, 단종 스스로 강물로 뛰어 들어 자살했다는 것으로 날조할 때 세조 입장에서는 더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세조와 당시 조정대신들의 입장에서는, 첫 번째 단종을 본인들이 죽였다는 것을 회피할 수 있고, 두 번째 세조가 단종을 직접 죽이지 않고, 스스로 자살했다는 것이 여론을 조금은 피해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신도 없는 무덤을 만들어 줬을 것이다.


목졸라 죽인 단종의 시신을 영월 강에 던졌다면 단종의 시신은 없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강원도 영월군 영월면 영흥리에 단종 능(장릉)에는 단종의 시신이 없는 채 단종 능이 조성된 것이다. 시신이 없는데 왜 능을 만들었을까? 이것은 세조가 단종이 스스로 자살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조카의 묘는 만들어 줬다는 명분을 얻기 위해서라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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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


단종애사(端宗哀史)를 지켜보면 사람들이 이렇게 모질고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조선왕조는 도덕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성리학을 강조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카를 왕위에서 내쫓고, 많은 훌륭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이고, 유배를 보낸다. 단종애사를 보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잔혹함을 엿볼 수 있다.


또 기막힌 사실 하나는 세종의 큰형인 양녕대군이 세조가 단종을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할 때 세조에게 단종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녕대군이 누구인가? 동생 충녕대군에게 왕세자 자리를 내 준 세종의 큰형님이 아닌가! 동생 세종의 손자 단종의 목숨만은 살려달고 하는 것이 왕실의 어른으로서, 세종의 형으로서 도리가 아닌가? 


아무도 단종을 지켜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목숨을 바쳐 단종을 다시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실패한 사육신과 단종의 폐위와 단종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세상과 속세를 떠나 방랑객이 되어 살아 간 생육신만이 불행한 단종에 대한 절의를 져버리지 않았다. 


하위지는 단종복위거사가 변절자 김질의 고변으로 누설되자, 유서를 부인 김씨에게 맡기면서 “모든 식솔들이 잡혀갈 것이지만 귀동(龜童)은 아직 어리므로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적고 귀동국(龜童國)을 적고, 귀동의 이름을 “국”으로 하여 후사를 부탁하는 유서를 부인에게 남긴다. 하위지의 아들 하호과 하박은 처형당하였으나, 16세 미만이었던 하위지의 조카 하포, 하분은 다행히 처형당하지 않고 유배를 갔다. 


귀동은 하위지의 막내 동생인 하소지의 둘째 아들로 당시 일곱 살이었다. 일곱 살인 하귀동은 이후 하원(河源)으로 이름을 고치고 하원의 외가가 있는 경상도 봉화로 피신하여 살아남는다. 이후 하원은 안동의 권개(權愷)의 사위가 되어 안동에 정착한다. 그래서 하위지의 종가(宗家)는 현재 안동에 있다.

하원은 이후 1705년 숙종 31년에 하원을 하위지의 양자로 삼아 후사를 잇게 한다는 교지를 내림으로써 하원은 하위지의 공식적인 아들이 되어 후사를 잇는다. ​그리고 영조​ 34년에 단계 하위지에게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충렬공(忠烈公)이란 시호가 내려진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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