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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칼럼

【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경은 이맹전(耕隱 李孟專)의 삶은 역사가 기억하며, 유유히 흐르는 강이 되었다.

이순락기자 0 2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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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필자는 젊은 시절 구미형곡시립도서관 공원 내에 있는 큰 비석 하나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곤 했다. 그 때는 우리 고장의 역사에 대한 것보다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려고 하던 때였다.

당시 도서관에서 그 많던 사람들 중 그 비문을 읽어 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쉬는 시간 필자는 몇 번 읽은 본 인연이 있었다. 바로 그것은 1686년(숙종22년)에 선산부사 김만증(金萬增)이 세운 경은선생유허비(耕隱先生遺墟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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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형곡시립도서관 공원내의 경은이맹전 선생 유허비>


 필자는 역사와 인물 칼럼에서 사육신 단계 하위지(丹溪 河緯地)를 과거를 거슬러 올라  만나 보았다. 이후 생육신 경은 이맹전(耕隱 李孟專)의 칼럼을 써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끼며, 형곡동 구미 시립도서관 이맹전 유허비에서 과거 역사 속의 생육신으로 기록된 경은 이맹전을 찾아 출발하려고 한다. 


우리 고장에서 배출된 사육신(死六臣) 중 한분인 단계 하위지와 마찬가지로 570년 전 당시 세조(世祖)가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여 많은 선비가 죽거나 벼슬을 버릴 때, 이맹전 역시 속세와 세상을 등지며 눈 멀고, 귀가 먹었다는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와 장님과 귀머거리 행세를 하며 가족마저 속이며, 30년을 숨어 살았던 경은 이맹전을 만나 보기로 하겠다.


하위지 편에서 세조 즉위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지역 역사를 조금 아는 사람들은 생육신 경은 이맹전 정도는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맹전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 자료를 찾아 보았지만,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미미하고 희미하지만, 이맹전의 과거 흔적을 더듬어 가겠다.


조선왕조는 시작할 때부터 격동과 수많은 사건들이 전개되는데, 이맹전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태어나 성장한다. 이맹전은 과거에 급제한 이후 승문원 정자의 관직을 받은 이후 25년 동안 한림원과 집현전, 사간원 정언, 지제교 등의 세종 때에 주로 인재들이 거치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다.

이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려는 의도가 노골화되어가자, 이맹전은 지방의 외직을 자청하여 거창현감을 맡아 청백리로서 백성들에게 많은 존경과 신뢰를 받고 본격적으로 세조가 즉위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눈 멀고 귀먹은 장님과 귀머거리 행세를 30년 하며 산다. 


이맹전의 예감대로 1453년, 단종 1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고, 2년 뒤인 1455년 단종은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난다. 이 비극으로 인해 조선사회는 많은 시간 동안 끝임없는 문제가 생겨난다.

이맹전은 63세로 1454년 거창현감에서 물러나 고향 선산의 망장(網場)에 은둔하며, 자신의 호(號)를 밭갈 경(耕) 숨길 은 (隱) 써서 “숨어서 밭을 가는 선비”란 뜻으로 경은(耕隱)이라 짓는다. 망장은 구미시 고아읍 대망리를 예전에는 망장 또는 망정이라 했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여 세조(世祖)가 되자, 많은 선비들이 벼슬을 버리고 세상과 속세를 떠나 은거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을 역사는 생육신(生六臣)이라 정의한다. 생육신은 김시습(金時習), 이맹전(李孟專), 원호(元昊),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또는 권절(權節)등 이다. 


사실 사육신에 비해 살아남은 생육신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사실 “사육신”이니 “생육신”이니 하는 말들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할 당시에는 이런 말이 없었다.

사육신과 생육신에 대한 언급은 조선사회의 왕조체제 그리고 왕통(王統)을 부정하는 것으로 내비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 어느 시기를 불문하고 조심스러운 이야기던 것이 역사의 진실이었다. 사실 사육신과 생육신들은 오랫동안 조선왕조의 반역자 취급을 당했는 것이 사실이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손자 성종 때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성종에게 성삼문은 “충신”이라고 말했다가 성종의 얼굴 색깔이 바뀌는 것을 보고, 점필재는 위기를 모면하려고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신은 전하의 성삼문이 되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봤을 때 세조이후 조선왕조에서는 사육신과 생육신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지 못했고, 금기시되었다.


단종이나 사육신과 관련하여 신원회복을 최초로 언급한 인물은『육신전(六臣傳)』을 쓴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이다. 남효온은 김종직에게 김굉필·정여창과 함께 수학을 했던 인물이다. 남효온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소릉의 복위 문제와 세조 즉위 과정에서 공신이 된 훈구대신에 대한 비판 상소를 올렸는데, 당시로서는 목숨을 내놓는 일과 같았다. 


성종은 남효온의 이러한 상소를 “미친 선비 남효온”의 말도 안된다면서 성종은 남효온을 미치광이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훈구대신들 특히 임사홍(任士洪)과 정창손(鄭昌孫) 등은 그를 역적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대 조정에 파란을 몰고 왔다.

이후 남효온은 세상을 한탄하며 술과 시로써 마음의 울분을 달랬다. 남효온은 전국을 유람하며, 그의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천하를 떠도는 방랑객이 되었다. 


그 이후 선조는 남효온의『육신전』을 읽어 보고,『육신전』에 나오는 사육신을 “이들은 아조(我祖, 나의 조상)의 불공대천의 역적”이라 크게 화를 내면서『육신전』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라는 명을 내리고, 앞으로 누구든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면 중죄로 다스릴 것을 명한다.


이러한 조선왕조에서의 분위기와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지 150년 후에 생육신 이맹전에 대한 평가와 기록을 쓴 사람이 있었다. 명종과 선조, 그리고 인조 때의 문신(文臣)이자, 홍문관 부제학과 강원도관찰사, 좌찬성을 역임한 인재 최현(訒齋 崔晛)이다. 


인재 최현은 우리고장 출신으로 선산 해평의 전주최씨(全州崔氏)로 당시 선산에 관한 지리와 풍속·인물 등을 기록한『일선지(一善志)』를 저술한 인물이다. 인재 최현이 없었다면, 당시의 인물과 지리·풍속 등을 자세히 기록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일선지』는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현은 말년에『일선지』인물 편에 이맹전을 사육신 하위지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아마 위험천만 일이 아닐 수 없다. 숙종 때 와서 사육신과 생육신에 대한 복권되고, 신원회복이 되는 것을 봤을 때, 최현은 숙종 이전에『일선지』를 저술하였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저술한 것으로 봐야 한다. 


최현은 본인의 문집에 “경은선생사적발(耕隱先生事蹟跋)”과 “삼인사적(三仁事蹟)”에 기록하였다. 이러한 최현의 기록 덕분에 우리 구미·선산 출신의 생육신 이맹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최현이 이맹전에 대해 이렇게 줄기차게 노력한 것은 첫 번째 본인의 어머니가 이맹전의 증손녀였다는 것과 고향이 같은 선산이라는 것 때문에 이맹전에 대한 집착과 존경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겠다. 


개인적으로 최현의 어머니가 이맹전의 증손녀였고, 어머니가 일찍 죽으면서 이모의 손에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장님과 귀머거리”로 30년을 산 이맹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어렸을 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지만 최현이 성장하고, 관직에 나아가 이맹전의 위대함을 느끼고 알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성장한 최현은 퇴계 이황의 수제자들인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와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을 만나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권문해와 류성룡은 “일선(一善)은 참으로 충현(忠賢)의 고을로 보통 사람보다 몇 등급 높은 군자가 여러 분 계시는데, 수재(秀才)는 알고 있는가?” 최현은 모른다고 답한다. 


그러자 권문해와 류성룡은 “고려 말에 김주(金澍)는 사신의 명을 받들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천명이 조선으로 돌아갔음을 듣고 다시 중원으로 들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세종 말년에 경은(耕隱)선생이 중요한 관직에 있으면서 세상일이 날로 잘 못될 것을 알고 벽촌에 물러나 지내며 늙었다. 세조가 양위 받은 후 예닐곱의 신하가 죽었으나, 경은선생은 홀로 장님과 귀머거리를 핑계로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아 형벌로 죽임을 당하지 않았으니, 그 기미를 보는 명철함과 은거하는 굳은 의지는 비록 당시의 여러 현인이라도 쉽게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최현은 권문해와 류성룡에게 다시 물었다. “두 분 현인께서 이 같은 절의가 있는데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그 절의를 온전히 하면서도 자취를 감추어 사람들이 그 뜻을 알 수 없게 했으니, 이것이 보통 사람보다 몇 등급 높은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최현이 듣게 되면서  아마 이맹전에 대한 기록을 반드시 남겨야 되겠다는 다짐을 했을 것이다.  


최현은 1630년 인조 8년을 전후하여 이맹전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 노력을 시작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맹전의 동생 이계전(李季專, 세종 때 이조참판)이 그의 형 이맹전의 삶을 자세히 기록한 행장과 유고가 있었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이맹전의 행장과 유고를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을 최현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최현은 이맹전의 삶을 기록한 자료가 없자, 최현은 선산 해평 출신의 용암 박운(龍巖 朴雲)이 이맹전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하여 증손자 와유당 박진경(臥遊堂 朴晋慶)에 의해 완성되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최현은『해동명현록(海東明賢錄)』에 주목하고, 이것은 참고 자료로 삼아 이맹전에 대해 저술하기 시작한다. 최현의 끝없는 노력은 30년을 숨어 살며 장님과 귀머거리로 행세를 한 이맹전을 세상 밖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용암 박운은 안동 도산서원에 있던 퇴계 이황과 편지로 교류를 많이 했는데, 박운이 이황에게 『해동명현록』에 이맹전을 수록해도 되겠는지 자문을 구하자, 퇴계는 아직 때가 아니며 성급하다는 입장을 보인다. 퇴계 역시 아주 민감한 문제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박운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박운은 퇴계의 입장과 생각을 수용하여 집필활동을 중단한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마저 사육신과 생육신에 대한 평가를 함구했을 정도니, 당시 얼마나 민감한 문제였겠는가? 퇴계가 박운에게 성급하고, 때가 아닌 것 같다고 한 것을 볼 때, 사육신과 생육신에 대한 언급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적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박운의 생육신 이맹전에 대한 저술활동이 성급하다는 것이었다. 사육신과 생육신에 대한 거론 자체는 누구에게는 충신으로 느껴지지만, 누구에게는 반역자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박운에서 시작한『해동명현록』은 완성되지 못하다가 시간이 흘러 증손자 박진경 때에 와서 완성된다.


사육신과 생육신에 대한 신원회복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시간으로부터 250년이 흐른 1691년, 숙종17년에 육신이라고 불리던 사육신이 공식적으로 복권되었고, 1698년 숙종 24년에 노산군(魯山君)마저 단종으로 복위되어져 정식으로 단종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단종 복위와 함께 사육신이외에 살아서 절의를 지킨 인물들이 공식적으로 우리가 생육신이라고 알고 있는 김시습(金時習)과 원호(元昊)가 처음 거론되어지면서 조려(趙旅), 권절(權節)에 대한 포상 상소가 이어졌다. 


이것을 계기로 1703년, 숙종 29년 경상도 유생 곽억령(郭億齡)등이 원호·김시습·남효온·이맹전·성담수를 조려가 있는 함안에 있는 서산서원에 배향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공식적으로 생육신이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숙종 전까지 단종이 폐위와 관계된 인물이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부정하는 어떠한 평가도 제대로 내릴 수 없는 정치적 환경이었다. 


한마디로 250년 동안 사육신과 생육신에 대한 언급은 자칫 잘 못하면, 본인의 목숨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는 아주 극도의 민감한 문제였던 것이다. 


숙종은 동서붕당(東西朋黨)이 가장 치열 할 때를 살아 간 왕이었다. 숙종은 남인(南人)으로 서인(西人)을 견제하다가, 다시 남인으로 서인을 견제하는 정치를 하였다. 1680년(숙종 6년)에 조정에서 남인들을 대거 숙청·실각시키고, 서인의 손을 들어 주면서 서인세력에게 조정을 맡긴다. 이 사건이 바로 경신환국(庚申換局)이다. 


숙종은 당쟁 속에서 정치를 해야 했기 때문에 비록 조정에서 몰아 낸 남인일지라도 자신에게 충성하게 만들어야 했고, 서인에게는 사육신과 같이 목숨을 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숙종 이전까지 금기시 되어 오던 사육신에 대한 신원과 관직을 복권하고, 생육신에 대한 서원 배향을 허락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숙종 이전에 박운·박진경·최현 등이 이맹전에 대한 기록을 남겨 놓은 것에 힘입어, 이맹전은 경상도 유림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681년, 숙종 7년 단종이 복위되고, 영조 때에 와서 이맹전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되면서 이맹전의 위상은 극대화되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맹전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았는지 이제부터 알아보자. 이맹전의 본관은 벽진이씨(碧珍李氏)이며, 지금의 성주의 옛 지명이 벽진(碧珍)이다. 이맹전의 5대조인 산화 이견간(山花 李堅幹)은 고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3대를 걸쳐 명신이며,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이견간은 충숙왕 때 사신으로 원나라에 가면서 두견시(杜鵑時)를 지었는데, 이 두견시에 나오는 “네 울음에 진 산꽃이 몇 겹이나 쌓였을까” 구절 속에 나오는 산꽃, 즉 산에 피는 꽃(山花) 때문에 사람들은 이견간을 산화선생이라 불렀고, 이견간은 자신의 호(號)를 산화(山花)라고 짓는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벽진이씨를 산화이씨(山花李氏)로 부르기 시작했다.


원나라 사신으로 간 이견간에게 원나라 황제가 이견간이 살고 있는 마을과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지시한다. 이견간이 그린 그림을 황제가 보고, 이 마을에는 물이 모자라는 것 같구나! 하면서 “물을 나무 홈통으로 끌어 온다”는 뜻에서 흠통 명(椧)자를 붙여 명곡(椧谷)이라 지명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주군 초전면 명곡리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명곡리를 흠실이라하였고, 세월을 거치다 보면서 홈실이라 사람들이 부르게 되었다.


이견간의 자손들은 홈실에서 번성하게 지냈다가 이견간의 4세손으로 내려와서 즉 이맹전의 아버지 형제들 때에 성주 초전면 홈실에 큰 물난리가 일어나 모두들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5형제 중 첫째와 셋째는 칠곡으로, 둘째는 선산으로, 넷째는 창녕으로, 다섯째는 밀양으로 각각 이주하게 되었다. 처가가 있는 선산으로 이주한 둘째가 바로 이맹전의 아버지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지낸 이심지( 李審之)이다. 이심지는 죽은 이후 병조판서를 추증된다.


처가가 있는 선산으로 이주한 이심지는 금오산 아래 형곡리 사창(지금 구미시 형곡동)에 정착하여, 1392년 조선건국(태조1년)하던 해에 이맹전이 태어난다. 이맹전이 태어났을 때, 아기가 단 한번만 울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맹전의 아버지 이심지는 한번만 울었던 이맹전의 장래를 태어날 때부터 걱정을 했다고 한다.


이맹전이 태어나기 2년 전부터 선산 금오산에 은거한 야은 길재(冶隱 吉再)는 이미 자기의 문하에 여러 명의 제자를 길러내고 있었던 상황이다. 이맹전은 길재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는 과정에서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를 만나 평생 절친한 벗으로 사귀며 서로를 존경하는 사이가 되었다. 


길재 문하에는 기라성 같은 제자가 많았지만, 특히 강호 김숙자는 길재의 학맥을 이어가고 ,나중에는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아들 김종직에게 이어 준 인물이었다. 이맹전은 이러한 김숙자를 가장 친하게 지내는 교류하는 벗으로 사귄다. 

이맹전은 길재가 사망한 해인 1419년(세종1년)에 28세의 나이로 성균관 생원에 합격하고, 1427년(세종9년)에 36세에 비교적 늦은 나이로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첫 관직에 나간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이맹전은 25년간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마지막으로 61세의 나이로 자청하여 거창현감으로 벼슬을 63세로 관직생활을 마감한다. 그리고 선산 망장(지금의 고아읍 대망리)으로 돌아와 장님과 귀머거리 행세를 하며 89세까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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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전이 은둔하며 장님과 귀머거리 행세를 하며 산 대망리의 위성사진>
 

이맹전이 선산으로 돌아 올  무렵, 이맹전의 평생 동지이자 절친한 벗인 강호 김숙자가 역시 세조의 왕위 찬탈에 고령현감을 거쳐 정4품의 성균관 사예(成均館 司藝)에 제수되었지만, 벼슬을 버리고 밀양으로 내려가 부모 봉양과 제자들을 길러낸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성리학의 꽃봉우리들이 하나씩 맺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1456년(세조1년)에 68세의 나이로 김숙자가 죽으면서, 이맹전 또한 많은 심적 충격을 받고 병까지 얻는다. 이맹전이 은둔한 망장, 지금의 대망리는 이맹전의 장인인 오로재 김성미(吾老齋 金成美)가 은둔한 오로촌(吾老村)과 바로 옆 동네이다. 


이맹전의 처가가 일선김씨(一善金氏)였고, 장인이 오로재 김성미였다. 이맹전이 특별히 가장 친하게 지냈으며,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 부자간인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와 장인인 오로재 김성미였다. 이들은 모두 일선김씨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하자면 절의파(節義派) 선비들이라는 공통점을 이들은 가지고 있었다. 일선김씨는 고려 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들이라는 두문동 72현(賢)에 들어가는 백암 김제(白巖 金濟)와 농암 김주(籠巖 金澍)를 배출한 가문이다. 자연적으로 일선김씨 가문에서 배출되어진 선비들은 김제와 김주의 영향을 받아 절의정신이 남달랐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조선시대에 주자학의 도통(道統)을 잇는 가교역할을 했으며, 한편 절의(節義)정신을 강조하여 조선의 주자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 길재의 외가 역시 일선김씨였다는 것은 상당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맹전의 장인인 김성미는 고려 우왕 1378년에 선산에서 태어나 사위 이맹전보다 16살이 많고,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직제학 겸 군기시판사를 지낸 인물이다. 1455년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낙향하여 오로촌에 정착한다. 이맹전과 장인 김성미는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이다.


오로촌(지금 구미시 고아읍 오로리)의 뜻은 “내가 늙어 가는 마을”이란 뜻에서 김성미가 붙였다고 한다. 80세가 된 김성미는 매일 아침 뒷산에 올라 단종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을 향하여 절을 하며 곡소리를 냈다고 한다. 김성미의 이러한 행동은 이맹전 역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사람들은 그곳을 직학곡(直學谷)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김성미는 오로재를 짓고, 자신의 호(號)마저 오로재(吾老齋)로 하였다. 그래서 현재 구미시 고아읍 오로리란 지명이 김성미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이맹전은 계유정난 그 이듬해 “눈멀고, 귀먹었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린다. 이맹전의 눈멀고, 귀먹었다는 이 표현 속에는 도의(道義)가 무너진 세상일을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찾아오는 손님은 사절하고, 매월 초하루에 해가 뜨는 동쪽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무덤인 장릉을 향해 절을 하였다고 한다. 왜 동쪽으로 절을 하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수양한다.” 혹은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드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맹전이 정말 장님과 귀머거리라고 사람들을 속인 행위들이 있었는데, 마당에 펼쳐 놓은 곡식에 닭과 새들이 다 쪼아 먹어도 마루에 앉아 새들을 쫒지 않고 마냥 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보고 가족뿐만 아니라 동네사람들까지 정말 장님과 귀머거리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나서 전국에 많은 인재를 선발한다는 것이 공표되자, 사람들은 자식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한 스승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선산지역도 마찬가지로 익히 사람들이 이맹전의 명성은 들어왔던 터라 이맹전을 모셔다 자식들을 교육시켜 과거시험을 보게 하려고 했다.

사람들이 이맹전을 찾아가 자식들의 스승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하러 가자, 마당의 곡식들을 새가 먹는 것을 마루에 앉아 보고 있으니, 모든 사람들이 이맹전이 정말 장님과 귀머거리라고 믿게 되면서 이맹전은 이때부터 공식적인 장님과 귀머거리로 소문이 난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왕위에 오르고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세조는 국정동력을 얻고자 인재 등용의 문을 활짝 연다. 특히 세종·문종·단종 때에 집현전의 유능한 학자 출신들을 찾아 세조의 곁에 두고, 훌륭한 정치를 하려고 노력한다.  


낙향해 있던 인재들을 등용하고, 그들이 벼슬길로 나가면 그들을 따르던 유생들이 앞 다투어 출사를 한다는데 착안하여 조정에서는 세조에게 생육신들인 성담수, 김시습, 원호, 이맹전을 천거한다. 세조는 성담수는 역적 성삼문의 일족이라는 이유로 거부하고, 세조는 곧고 청백리였던 이맹전을 선택하여 조정의 관리를 이맹전에게 보낸다. 


그래서 이맹전을 데려가기 위해 조정의 관리들이 선산 망장에 왔을 때, 이맹전은 앞을 못 보는 영락없는 장님과 귀머거리 행세를 한다. 아마 이맹전이 벼슬을 그만두면서 장님과 귀머거리 행세를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조가 혹시나 자기를 부르고 찾았을 때, 나가지 않을 명분을 오래전부터 쌓아 장님과 귀머거리 행세를 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장님과 귀머거리 행세를 하고 있던 이맹전은 오래전부터 강호 김숙자와는 아주 특별한 사이였다. 그래서 김숙자의 아들 김종직이 이맹전을 찾아가면 장님과 귀머거리 행세를 하지 않고, “자네 같은 젊은이가 배운 학문을 세상에 널리 펼쳐야 하는 것이네”라고 관직에 출사하기를 권유했다고 한다. 


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왕위에 오르지만 14개월 만에 죽는다. 이렇게 되자 세조의 왕비였던 인수대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자을산대군(者乙山大君)을 적극적으로 후원·지원하여 1468년 13세의 자을산대군이 왕위에 오른다. 이 자을산대군이 바로 성종이다. 1474년 경국대전(經國大典) 수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갑오대전(甲午大典)을 반포 시행한다. 


그래서 조선 역사 상 세종대왕 다음으로 태평성대를 이룬 임금이 바로 성종이다. 성종은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를 조정의 요직에 기용하여 훈구대신들의 전횡을 한편 견제하였다. 특히 성종은 학문이 높은 김종직뿐만 아니라, 사림파를 등용하고 매우 아끼고 항상 요직에 기용하는 정치를 펼치자 훈구파 대신들의 불만은 높아져 갔다. 


1459년 세조 5년에 김종직은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1471년 함양군수로 갔다가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여 있다가, 훈구파 대신들의 견제를 받아 1476년(성종7년) 김종직이 당시 46세로 선산부사로 부임하게 되었고, 김종직은 곧바로 아버지의 친구이자, 평소 존경했던 이맹전을 찾아간다. 


그러나 이맹전은 벌써 85세의 나이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노인이었다. 그런데 보고 싶고, 만나고 싶었던 친구의 아들 김종직을 만나자, 그 이전까지 하던 장님과 귀머거리 행세를 하지 않는다. 당시 김종직에게 만큼은 이맹전이 마음속을 드러내 보이며 이야기를 하자, 김종직이 이맹전에게 “우리 선생님의 병환이 거의 나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맹전이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초가 오두막에서 죽어갈 것이라 했는데, 이렇게 군자를 만나 보니 저절로 마음에 쌓인 것이 모두 풀린 것 같아서 그렇다네.” 라고 했을 정도로 김종직에게 만큼은 이맹전 본인의 속마음과 뜻을 털어놓았다. 김씨부인이 이 모습을 보고 남편이 눈이 어둡고, 귀머거리라는 것이 거짓인 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맹전은 철저히 가족도 속였던 것이다.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이맹전에게 젊은 15세의 소년 선비가 찾아오는데, 그가 바로 청도 출신의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이다. 김일손은 처가가 단양우씨(丹陽禹氏)였기 때문에 처가인 단양을 들렀다가 고향 청도로 내려가는 길에 선산에 살고 계시던 외할아버지인 어은 정중건(漁隱 鄭仲虔)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정중건과 막역하게 지내던 이맹전을 함게 찾은 것이다. 


탁영 김일손이 누구인가? 바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으며, 연산군 때 스승 김종직의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했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기록하여 무오사화(戊午史禍)를 일으키게 만든 직필(直筆) 사관(史官)이 아니었던가?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기록함으로서 훈구파 이극돈(李克墩)과 류자광(柳子光)의 모함을 받으면서 연산군 때의 사림파 선비들이 대거 숙청되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김일손의 붓끝에서 시작된 것이다. 곧고 강직한 사림파의 절의를 보여 준 그의 기록은 비록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명성은 조선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김일손의 외할아버지 정중건 역시 집현전 전한(集賢殿典翰)의 벼슬을 하다가 비안현감을 자청하여 내려와 있다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이맹전과 비슷한 시기에 고향 선산에 내려와 몸을 숨기며, 이맹전과 시(詩)로서 교류하던 절의파 선비였다.

젊은 김일손이 절의파(節義派) 선비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교류했던 것이 결과 적으로 나중에 본인의 운명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일손의 아버지 김맹(孟) 역시 김숙자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인물이고, 김일손은 김숙자의 아들인 김종직에게 공부했던 인물임으로 어찌 보면 이들의 관계는 공동운명체인지도 모른다.


이맹전은 15세의 젊은 선비 김일손에게 자기를 찾아 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젊은 선비를 격려하고 칭찬하는 시를 지어주었고, 김일손 역시 그에 대한 감사함에 대한 답으로 시를 지어 주었다. 김일손은 정중건과 이맹전을 두 마리의 기러기에 비유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가장 훌륭한 선비를 기러기에 비유했다.


이맹전의 삶은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집안사람들이 말을 타고, 종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금지 시키겼다. 이맹전은 자식들에게 “어버이의 병이 이렇게 깊은데, 너희들이 말을 타고 종을 따르게 하는 것이 진정 어떻게 편안 할 수 있겠는가?”라며 말을 타고 다니는 자식들을 꾸짖었다. 집안사람들과 자손들이 백리 먼 길이 아니면 말을 타지 못하게 했다. 


아들들의 효도 또한 대단했는데, 셋째 아들 돈(惇)이 처가인 군위를 갔다 오는데 한 농부가 노루를 잡아 오는 것을 보고, 이맹전의 병에 노루가 좋다고 하여 노루를 구해 망장까지 20리 길을 등에 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노루 아니라, 토끼 한 마리도 들고 오지 못하는데, 무거운 노루를 20리 길을 등에 지고 오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효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맹전은 너무 검소하여 기록에 보면 거적자리 하나 없고, 밥 먹을 때 숟가락 하나 없었어도 개의치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맹전에게 “선생께서 산 아래에서 평생을 보내느라, 집이 이렇게 가난하니, 자손들에게 걱정이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자, 이맹전은 “청빈(淸貧)함을 자손에게 물려주는데, 무엇이 나쁘고 꺼릴 것이 있겠는가?”라고 답했을 정도로 검소하고, 청빈한 것을 집안사람들과 자손들에게 강조했다고 한다. 


절의를 지키고 검소하며, 청빈하게 살던 이맹전은 1480년(성종11년)에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맹전은 아들들에게 “내가 죽은 뒤에 비갈의 문자를 새기지 말라”하였다. 그래서 지금 이맹전의 묘소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비문이 없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을 뿐이다.

그의 무덤은 구미시 해평면 미석산 입구에 있는데, 일선김씨 시조 김선궁(金宣弓)의 묘소로 진입하는 입구 쪽에 있다. 이맹전은 죽어서도 일선김씨와 인연이 많은 것 같다. 이맹전은 살았을 때 일선김씨 집안과 각별했기 때문에 일선김씨 가문에서 이맹전의 묘소 자리를 허락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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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전의 유언에 따라 묘소 중간에 글자가 없는 작은 비석가 있다 >

 

안타까운 것은 선산에 거주하던 이맹전의 종가(宗家)가 9대째에서 대가 끊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영천에서 번성한 지손(支孫)들이 이맹전의 기일에 제수를 갖추고,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영천에 있었던 이맹전의 지손들이 이맹전을 용계서원을 지어 생육신으로 모시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한 것이다.

영천의 용계서원(龍溪書院)에 1786년(정조10년)에 생육신인 이맹전·조려·원호·김시습·성담수·남효온 등이 배향되어진다. 이맹전은 정조에게 정간(靖簡)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이렇게 됨으로서 생육신에 대한 명예회복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때부터 사육신과 생육신에 대한 평가와 이야기뿐만 아니라 저술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이맹전의 지손출신인 영천의 이유룡(李猶龍)이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에게 “선조의 묘에 묘석은 있으나 글이 없습니다. 인재공(訒齋公, 최현)이 빗돌 하나를 다듬어 묘 아래에 묻어 놓았으니, 이것은 진정 후인을 기다린 것입니다. 어떻게 한마디 써 주시지 않겠습니까?”라 이유룡이 당대 퇴계학을 잇는 대학자인 이상정에게 이맹전의 묘갈명(墓碣銘)을 써 달라고 부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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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비석이 대산 이상정이 쓴 이맹전 묘갈명 비석>


그래서 이맹전의 묘 앞에는 원래 글자가 없는 비석이 하나 있었다. 영천 이유룡의 부탁으로 이상정이 묘갈명을 쓴 비석이 후대에 하나 더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상정이 쓴 묘갈명을 내용을 살펴보면 “계유, 병자년 사이 죽은 자 여섯 신하요. 산 자도 여섯 신하요. 죽은 자는 진정 본성을 다한 셈이나 살아서 그 뜻 이루기 더욱 어렵네. 장님, 귀머거리 노릇 30년에 흔적 없어 아는 사람 없었으니, 어려운 가운데 더욱 어려운 일 아니겠는가.”라고 적혀 있다.


이맹전은 살아 생전에 높은 벼슬은 하지 못했지만, 그의 학식과 경륜이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이맹전이 죽고 난 이후 이맹전의 높은 절개와 인품을 알아 본 조선사회에서 내놓으라 하는 선비들은 이맹전에 대한 찬사의 글을 남긴다. 이맹전은 선산 도개면에 있는 월암서원(月巖書院)에 충절이 가장 높았던 농암 김주와 단계 하위지와 함께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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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도개면 월림리에 있는 낙동강 앞의 월암서원>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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