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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400년 동안 잠들지 않은 두곡 고응척(杜谷 高應陟)을 찾아서...

이순락기자 0 19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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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 박사, 구미회 이사>

 

2019년 1월 30일 구미시 해평면 금산리 일대에 구미시 국가5공단 부지를 조성하기 위해 안동고씨(安東高氏) 묘소를 옮기던 중 400년 전 모습 그대로의 미라가 발견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확인 결과 그 시신은 조선 중종 때에 태어나 명종과 선조 때의 선산의 성리학자 두곡 고응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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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전 두곡 고응척이 미라로 발견되는 모습>


사실 그 전까지 필자를 비롯하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두곡 고응척이 누구인지 잘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 고응척은 조선 1646년 (인조 24년)에 구미시 해평면에 건립되어진 낙봉서원(駱峯書院)에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용암 박운(龍巖 朴雲) 세 분이 배향되어져 있다가 이후 조선 3대 청백리에 였던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과 함께 배향되어 졌다는 것 밖에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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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자, 김취성, 김취문, 박운, 고응척이 배향된 낙봉서원>

 

고응척이라는 학자는 구미·선산지역에서 사실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특히 조선시대 높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상황은 학문의 경지가 높아 걸출한 제자가 나왔던지, 아니면 관직에 출사하여 높은 벼슬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하게 되고, 이것은 오랜 시간 전승과정을 거쳐 역사 속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또한 후손들 중에서 걸출한 자손들이 나와 조상을 빛나게 하고, 더 높이는 과정과 행위를 조선시대는 누구 할 것 없이 대체적으로 했고, 이것은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스승 밑에서, 소위 잘 나가는 제자들이 많이 나오면, 자연적으로 그 스승의 인격과 학문은 높아지고, 숭배되어지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그리고 자손들이 번성하여 그 시대를 이끌고 정치적·사회적 중심에 섰을 때 그들의 조상은 한결 더 높은 명성을 얻는 것이 당연한 사회적 현상이었다.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두곡 고응척은 걸출한 제자, 걸출한 후손이 없음에도 훌륭한 학자로서 구미·선산 지역에 자리매김 되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곡 고응척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문화적으로 너무 간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필자는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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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전 고응척의 묘소에서 나온 우복 정경세의 만장>


한 시대를 살아 간 당대의 선비들의 흔적을 찾아 종(縱)과 횡(橫)으로 자료를 찾다보면, 역사적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시문학(詩文學)의 대가이며,『대학』의 대가였던, 400년 동안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던 고응척을 만나보기로 하겠다. 


자료도 문헌도 그렇게 많지 않지만, 최대한 한 시대를 뜻있고, 치열하게 살다 간 우국충정의 선비 고응척을 400년 된 미라로  세상 밖에 나왔듯이, 그의 학문과 선비·관료로서 살다 간 흔적들을 찾아 되짚어 보고자 한다. 


두곡 고응척은 본관이 안동고씨라고 하는데, 더 자세히 말하면 제주고씨(濟州高氏)들이 안동에 정착하면서 분관(分貫)되어 안동고씨라고 하게 된다. 고응척의 본관을 더 자세히 말하면 제주고씨 감무공파(監務公派)이다.

고응척은 고려시대 감무(監務) 벼슬을 한 고인우(高仁祐)의 5대손으로 고응척의 증조부 고석동(高錫東)이 무과에 급제하여 종4품의 만호(萬戶) 벼슬을 했으며, 무관(武官)집안이다. 그리고 고응척의 증조부 고석동이 선산 해평 문량리에 자리 잡으면서, 당시 선산지역에 안동고씨들이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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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곡 고응척의 문집인 두곡집>


고응척은 당대의『대학(大學)』의 대가였으며, 조선시대의 시조문학의 대가였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고응척의 업적은 조선시대 군사정책을 활발하게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응척의 이러한 업적을 가졌음에도 우리는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응척의 제자로는 선산 해평의 전주최씨 인재 최현(訒齋 崔晛) 말고는 특별하게 드러나는 제자가 없다. 그래서 일까 400년 동안 고응척은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고응척은『대학(大學)』의 대가였다. 그리고 시조의 대가로서 국문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이하게 조선시대 구미·선산에서는 사서(四書) 중『대학』을 강조하고, 공부하는 열풍이 불었던 고장이다. 이 지역에서『대학』을 강조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 신당 정붕(新堂 鄭鵬)으로 이어지는 도통(道統)과 학문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강호 김숙자는『소학(小學)』을 강조하게 되었고, 이후 그의 문하에서 나오는 후학들은 모두『소학』을 무조건으로 수학해야 다음단계의 학문으로 나갈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소학』은 조선시대 사림파(士林派) 선비들의 바이블이었다.

신당 정붕의 스승 김굉필은 소학동자(小學童子)라 불릴 만큼『소학』을 강조했다. 자연스럽게『소학』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서 중『대학』을 중심으로 배우는 분위기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대학』을 강조한 대표적인 학자들은 신당 정붕(新堂 鄭鵬), 송당 박영(松堂 朴英),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 용암 박운(龍巖 朴雲), 송당 노수함(松堂 盧守諴),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등이 강조했다. 이러한 배경과 원인으로 고응척 역시 지역의 학풍에 영향을 받아『대학』의 대가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고응척의 제자 인재 최현은 어렸을 때 고응척에게『대학』과 시조를 배웠고, 이후 안동의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에게 수학하였으며, 또한 성주의 한강 정구(寒岡 鄭逑)에게 예학(禮學)을 배웠다. 고응척의 제자 최현은 인조 때 홍문관 부제학과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죽은 이후에는 좌찬성에 증직되었던 인물이다. 최현은 고응척의 제자였던 관계로『두곡언행록(杜谷言行錄)』을 제자의 예로써 집필하여 기록에 남긴다.


성리학은 조선의 지배 이념이자 문화 형성의 핵심 도구였다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은 인간 심성의 올바른 도(道)를 탐구하고, 그 도(道)를 생활 속에 실천하는 것이 성리학의 궁극적 목표였다. 그래서 성리학을 흔히 넓은 의미에서 도학(道學)이라 하였다. 그래서 성리학자를 도학자(道學者)라 불렀다.


고응척은 선산 해평에서 태어나 성장하다가 가난으로 11세에 부모님을 따라 동래정씨(東萊鄭氏) 외가인 상주 구도곡(求道谷)으로 이사를 한다. 구도곡(求道谷)은 한자 그대로 뜻으로 보면 구도(求道)는 즉, 종교적 깨달음이나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 구도를 쓰는 고응척의 외가가 구도곡(求道谷)이었다면 고응척의 외가 마을은 역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적 분위기가 높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상주에서 옛날 이 지역을 서당리(書堂里)로 불렀다고 한다. 서당(書堂)은 옛날에 훈장(訓長)선생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공부를 가르쳤던 곳이다. 따라서 고응척은 외가의 지명(地名)들을 봤을 때, 고응척의 외가는 학문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동네였던 것이다. 이러한 학문하는 분위기 속에서 고응척은 자랐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외가의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고응척은 12살에, 평생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고, 독학으로 자신만의 학문 세계를 구축하고 정립한 16세기 영남의 성리학자 상주(尙州)의 후계 김범(后溪 金範)을 찾아간다. 12살의 고응척이 사서(四書) 중 하나인『중용(中庸)』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김범은 고응척이『중용』을 배우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거절한다. 


후계 김범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스스로 완성한 성리학자였다.『성학십도』하면 대체로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떠올릴 것이다. 퇴계는 성리학을 집대성하고 그것을 통하여 『성학십도』를 완성했다. 『성학십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성리학의 최고의 경지 올랐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김범은 독학으로 학문에 몰두하여, 자신만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구축하여 『성학십도』를 완성한 인물이다. 김범의 이러한 학문적 결과물을 봤을 때, 당대의 대단한 성리학자였다는 것은 틀림이 없겠다.


후계 김범에게 퇴짜를 맞은 12세의 고응척은 혼자『중용』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성인들도『중용』의 심오한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데 12살 꼬마가『중용』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도자부(道字賦)』 70여 구를 지었다고 하니, 그의 천재성은 이미 어려서부터 탁월했다고 하겠다. 고응척은 이때부터 스스로 공부하여 스스로 깨닫는 자득(自得)을 한다. 


17세 때 결혼을 한 고응척은 손수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도 없는 집을 짓고, 음식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과 사람에게 대화할 수 있는 작은 문만 내고, 3년 동안 감옥 같은 이곳에서『중용』과『대학』을 공부하고 나오며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끝이 없었다. 기록에는 고응척이 먹는 것도 잊어 가며 공부했다고 전한다. 


고응척은 38세 때에는『주역』을 좋아하여 음양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였다. 이 같은 학문에 대한 열정과 몰입이라도 최고의 경지까지 올라가기에는 많은 애로사항이 반드시 존재한다. 아마 고응척 역시 최고 경지의 학문을 위해서는 훌륭한 스승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응척은 퇴계 이황을 찾아간다.


성리학이란 학문은 하면 할수록 어려운 부분이 많아 반드시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 학문이다. 그래서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학문이다. 그래서 고응척은 28세에 풍기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을 찾아가 글을 올리고, 제자가 되기를 퇴계 이황에게 청한다. 


퇴계 이황은 학문의 열의가 대단한 고응척을 제자를 받아 주었고, 이황은 고응척에게 병풍을 써 줬다는 기록을 봤을 때 고응척을 매우 아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퇴계 이황의 문하생들을 기록한『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 에 고응척은 퇴계 이황의 초기 제자로 올라가 있는 것으로 봐서, 고응척은 퇴계 이황의 영향을 심도 있게 받았을 것이다.


당시 구미·선산지역에서 퇴계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두곡 고응척 그리고 이들보다 선배인 해평 전주최씨 송정 최응룡(松亭 龍)은 송당 박영(松堂 朴英)의 문하에 들어가 글을 배웠고, 나중에는 퇴계를 찾아가 글을 배웠다. 

그리고 용암 박운(龍巖 朴雲)의 손자 건재 박수일(建齋 朴遂一)이 퇴계 이황에게 글을 배웠다. 이렇게 해서 당시 구미·선산지역에서 퇴계에게 공부를 배웠던 사람은 최응룡, 고응척, 박수일 단 3명밖에는 없었다.

박수일이 퇴계 이황에게 글을 배울 수 있었던 계기는 아마도 할아버지는 박운과 이황의 인연 때문으로 보여진다.  박운은 안동 도산서원의 퇴계이황과 서신으로 학문에 대해 서로 주고받은 인연으로 퇴계 문하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겠다. 


 박수일의 할아버지는 박운은 이황보다 8살이 많았음에도 잘 모르겠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퇴계에게 편지로 의견을 구했다고 한다. 박운은 비록 나이 8살이나 많았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퇴계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의 의견을 따랐다. 이러한 퇴계 이황와 용암 박운의 인연으로 퇴계 이황이 박운이 죽었을 때, 묘갈명(墓碣銘) 써 준다.

조선시대 누구에게 묘갈명을 받느냐에 따라,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 집안의 위상과 지위·명성이 달라진다. 따라서 퇴계 이황의 묘갈명을 받은 박운과 그 집안 후손들은 당연히 선산지역 뿐만아니라 영남에서 최고의 위상과 지위·명성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퇴계 이황은 박운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묘갈명을 써주지 않았다. 이러한 인연을 봤을 때, 고응척은 같은 고향 선배인 박운뿐만 아니라 그의 손자 박수일과도 막역한 관계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조선후기 되면 조선에서도 실학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풍요로운 경제를 통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는데, 이들을 당시 북학파(北學派)라는 실학자들이었다. 이덕무(李德懋)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한 실학자였다. 


이덕무는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과 함께 청나라에서까지 그들의 학문이 알려질 정도로 대단한 학자들이었으며, 실학자들이었다. 이덕무는 학식이 뛰어났지만, 서자(庶子)였기 때문에 많은 제약받아 벼슬길로 나가지 못했지만, 그의 학문이 높다는 것을 알아 본 정조(正祖)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이덕무를 검서관으로 기용하여, 그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해 준다.


이러한 학식이 뛰어난 이덕무가 고응척의『중용』·『대학』에 대한 깨달은 정도가 상당히 높다는 것을 알고는 고응척을 굉장히 존경했다는 평가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했으니, 고응척의 학문은 정말 상당히 높은 단계에까지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고응척은 주변사람들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마다 『대학』을 이야기하고, 중요한 부분은 외우게 했다고 하니, 당시 상당히 피곤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고응척은 3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흥교수(咸興敎授)와 안동교수(安東敎授)에 제수 받아 향교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벼슬로 출발하여 회덕현감(懷德縣監), 하양현감(河陽縣監), 강원도사(江原都事),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 교서교리(校書校理), 예안현감(禮安縣監), 상주제독(尙州提督), 안동제독(安東提督) 이후 풍기군수와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제수 받았으나, 벼슬  길에 나가지 않는다. 75세로 조정에서 경주제독에 임명하지만, 그는 이때 죽는다.


고응척의 벼슬에는 교수(敎授)와 제독(提督)이 유독 많다. 교수는 향교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벼슬이고, 제독은 교육의 장려와 감독을 위해 각 도에 한명씩 두는 관직이었다. 대체로 고응척이 역임한 벼슬들은 교육과 관계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봤을 때 당시 조정에서 고응척의 학문이 높다는 것을 인정해 교육과 관련된 관직을 제수한 것으로 하겠다.


고응척의 학문의 경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1561년 (명종16년) 회덕현감일 때, "임금과 군자가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하고, 군자와 군자가 어울리지 못하는 세태"를 우려하는 밀봉된 글을 올린다. 이는 고응척은 외척들의 과도한 정치관여와 사림(士林)의 동서붕당은 결국 정치를 파국으로 이끌 것이라는 훈계의 글이었다. 이런 글을 올릴 때는 항상 목숨을 내놓아야만 가능했다. 


당시 명종은 형인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1년 만에 죽는다. 인종의 동생인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종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어머니 문정왕후가 정치를 좌지우지 하게 되면서 정치는 말 그대로 여인천하(女人天下)였다. 그래서 문정왕후의 동생들인 윤원형(尹元衡)·윤원로(尹元老) 형제의 부정부패는 일일이 말로 다 못할 정도로 정치가 문란한 시대였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명종은 심강(沈鋼)의 딸을 왕비로 맞는데, 이 여인이 인순왕후(仁順王后)이다. 명종은 심씨(沈氏) 처가를 이용해 부정부패를 일삼는 외삼촌인 윤원형을 견제하고자 심의겸(沈義謙)을 요직에 기용하면서 조정의 무게 중심은 윤원형에게서 심의겸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이동이 진행되면서 사림파(士林派) 선비들 속에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누어지는 동서붕당(東西朋黨)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고응척은 상소에서 “임금의 판단력이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기면 편향된 시각을 지닐 것이고, 편향된 시각을 지닌 순간 국가는 전복할 것”이라며 경고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이것은 임금은 동인과 서인 들 중 어느 한쪽을 편들기보다는 균형적·객관적인 시작으로 양자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잘 조정·보완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동서붕당의 원인이 바로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의 이조전랑(吏曹銓郎) 자리를 놓고 갈등·대립한 것이 결국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조선이 망할 때까지 갈등과 대립을 이어 나간다. 


고응척은 문관(文官)이었음에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에 특히 국방에 대해 많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문무병용론(文武竝用論)·병농분리론(兵農分離論)·고급무관양성론(高級武官養成論)이 고응척이 제시한 국방정책이다. 


고응척이 이러한 국방정책을 제시한 이유에는 그의 집안이 무관(武官)집안이었고, 당시 북쪽의 여진족이 자주 국경을 침범을 하였으며, 남쪽에서는 왜구들의 약탈과 노략질이 빈번히 발생하면서 고응척은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임으로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국방정책을 제시하였다.


고응척이 주장한 첫 번째, 문무병용론은 문(文)과 무(武)는 각자의 기능과 역할이 다르게 주어져 있음으로 서로 대립하지 말고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상생(相生)·협력(協力)하는 관계를 형성해야만 국가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병농분리론은 정병을 선발하여 훈련에 매진하게 하고, 보인(保人)과 솔정(率丁)으로 하여금 정병에게 부담된 가사, 농사, 군의 행정업무를 전담하게 하여 정병들이 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셋째, 고급무관양성론은 각 지역마다 강무당(講武堂)을 세운 후에 농지를 마련하여, 이 농지에서 나는 소득으로 무인(武人)과 말을 기르게 한다. 그리고 실력과 용기가 출중한 사람을 선발하여 활을 쏘고, 수레 모는 법을 충분히 가르치며, 전투와 진법에 관련된 서적을 공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군사훈련에서 출중한 자를 선발하여 평시에는 금위(禁衛)에 배치하여 궁궐수비를 맡기다가 위기 시에는 대장의 임무를 맡겨 적이 침략하면 싸우게 한다는 것이다.


60세의 고응척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590년(선조 23년)에 난(亂)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고응척은 경상 감사 김수(金晬)에게 유생들을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히게 하고, 각 지역에 강무당을 설치하여 무(武)와 관련된 강의를 할 수 있도록 의견을 편지로 전달한다. 


고응척의 의견은 경상감사 김수에게 그냥 걱정많은 한 선비의 의견으로 치부되어졌다. 그래서 경상감사 김수는 고응척이 제시한 군사정책을 실행은 하지 않는다. 고응척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응척은 땅을 치며 통탄했다. 


여기서 당시 경상감사였다는 김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남지방의 의병장들, 특히 홍의장군 곽재우(紅衣將軍 郭再祐)와 사이가 몹시 좋지 않은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4월 25일, 선조는 각 지방에 교서를 내린다. 선조의 교서는 전쟁을 대비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책망과 각 지역의 선비와 유림들이 의병을 모아 전쟁에 나가 줄 것을 요구하는 교서였다.


선조의 교서 내용 중 “생각건대 너희 선비들은 그 조부 그 아비 때로부터 국가의 후한 은혜를 입어 온 지가 오래인데, (중략) 느끼는 바가 있으면 오히려 과감하고 굳센 마음을 내어 의병들을 규합하여 나의 장수들이 시키는 바에 따라 적을 섬멸할 것을 기약 한다.”는 내용이었다.


선조의 교서는 한마디로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선조 본인이 보낸 군사적 책임을 지고 있는 장수들 밑으로 의병장들이 들어와 정규군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 용감하게 나라를 구하라는 뜻이다. 


영남 의병장들 중 대표적인 의병장 곽재우는 경상감사 김수와 아주 적대적이었으며 곽재우는 경상감사 김수의 목을 벨 것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띄운다. 반대로 김수는 곽재우를 역적으로까지 모함하였다.

김수와 곽재우의 갈등과 대립은 초유사(招諭使)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이 두 사람 사이에 개입하면서 어느 정도 일단락되어진다. 김수와 곽재우와 불협화음은 당시 임진왜란에 참여한 의병장들의 상황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임진왜란에 참여한 의병장들은 선조와 조정의 작태를 보고 대단한 실망과 분개를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목숨받쳐 싸웠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히려 숨어지냈다고 한다. 전쟁 중에 이순신 장군을 계급장을 떼고, 백의종군시킨 것만 봐도 임금과 조정에 있던 벼슬아치들의 행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곽재우와 김수의 이러한 관계를 봤을 때, 고응척이 경상감사 김수에게 올린 군사적 제시안은 무시당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는 의병장들에게 벼슬을 내리지만, 대부분 벼슬 길에 나가지 않는다. 의병장들은 자칫 잘 못하면 역적의 죄를 뒤집어 쓰고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의 참여한 대부분의 의병장들이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문하에서 나왔다. 조식이 출사하지 않고 처사(處士)로 지낸 것처럼, 그의 문하에서 나온 의병장들도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가 부르지만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아마도 김덕령(金德齡)장군 때문일 것이다. 


25세의 김덕령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고, 전라도 담양에서 5000명의 의병을 규합한다. 형인 김덕룡이 충청도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였음에도, 의병을 수습하고 정돈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권율(權慄)장군 휘하에서 들어가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한다. 이러한 김덕령의 활약 덕분에 왜군의 호남진출을 막았고, 1594년 남해의 진해·고성 일대에서 상륙하는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1596년 전란 중에 충청도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킨다. 김덕령은 이몽학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을 모아 진압하러 가던 중 반란군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오데, 김덕령과 이몽학이 내통하였다는 신경행(辛景行)의 고변으로 김덕령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는다.


목숨 걸고 싸웠던 의병장에게 역적죄를 씌어 죽이는 선조 임금과 조정의 작태에 임진왜란에 참전한 의병장들은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선조가 의병장들에게 벼슬을 내려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는 정서가 생기게 되고, 전쟁의 와중에도 동인과 서인의 당쟁은 멈추지를 않았고, 전쟁이 끝나자 공(公)을 자기편의 편당(偏黨) 사람들이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다. 


60세 고응척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 1590년 5월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이 정승인 우의정(右議政)에 오르자, 고응척이 직접 쓴『전인보감(銓人寶鑑)』을 11년 후배 류성룡에게 보낸다.

고응척이 쓴『전인보감』은 특히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사람 보는 눈과 사람을 잘 알아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운 사람들이 성공했다는 것을 정리한 책이었다. 한마디로 류성룡에게『전인보감』을 보고, 사람을 잘 선발하고, 기용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응척은 훌륭한 인재를 발탁하여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잘 배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한다. 고응척과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선후배 사이였다. 그리고 고응척은 류성룡의 고향 안동의 교육을 장려하고 감독하던 안동 제독관을 맡고 있었음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보지 않아도 막역한 관계였다.


이러한 고응척이 쓴『전인보감』은 류성룡의 인재발탁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류성룡의 최고의 업적은 뭐라 해도 이순신(李舜臣)장군과 권율(權慄)장군의 발탁이다.

류성룡은 고응척의 뜻대로 임진왜란이 있기 1년 전인, 1591년(선조24년)에 당시 형조좌랑(刑曹佐郎)이던 권율을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정읍현감(井邑縣監)이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全羅 左水使)로 천거하고 발탁한다. 


이순신은 류성룡 때문에 정읍현감에서 전라 좌수사로 고속 승진한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위관급 장교 대위에서 장군급 소장(小將)으로 진급한 것이나 같다. 한 고을 사또를 하던 이순신을 바로 조선 해군 최고의 사령관으로 발탁한 것이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인사발탁이다.

따라서 이순신은 군내에 적이 많았을 수밖에 없었다. 류성룡의 이러한 이순신과 권율의 발탁은 곧 다가올 임진왜란을 예측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여튼 류성룡에게 전달된 고응척의『전인보감』은 조정의 모든 인사권을 쥔 류성룡에게 귀중하게 작용하였다.


62세의 고응척은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임진의상소(壬辰擬上疏)」를 올려 하루 빨리 무과를 실시하고 병사를 기르고, 군량미를 내놓는 사람에게는 벼슬을 내리고,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다.

1594년에는 류성룡에게 병농분리(兵農分離) 주장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1598년에는 경상 감사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에게 병사가 농사 짓는 것을 금하고, 오로지 병사가 농사 짓는 것을 분리하여 군사적 목적으로만 훈련되어 강한 병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병농분리(兵農分離)를 재차 강조한다.


고응척의 이러한 국방관련 의견들은 조선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려 한 실학의 비조(鼻祖)라 일컬어지는 조선후기 반계 류형원(磻溪 柳馨遠)에게 깊은 영향과 감명을 준다. 류형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회 전체에 여러 가지 모순과 폐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이를 개혁하고자 한다.

즉, 조선 후기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었던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인 삼정(三政)의 문란이 노골화·극대화되면서 국가의 기초인 농민층이 붕괴되어 갔다. 류형원은 이러한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 사회의 폐단을 개혁하고자『반계수록(磻溪隧錄)』을 집필한다. 고응척의 고급무관양성론을 류형원은『반계수록』에「군현제(郡縣制)·역대제(歷代制)」 수록하면서 국방관련 제도를 개혁하고자 기록했다.  


류형원은 “만력 중에 영남의 고응척은 변방에 환란이 발생할 것을 알아서 감사에게 편지를 올려 열읍(列邑)에 강무당(講武堂)을 세워 무재(武才)를 기를 것을 청하였다. 당시에는 살피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 그의 논의가 마침내 떨치고 일어나 조정에서 이에 열읍에 명하여 강무당을 세우도록 하였다.” 기록하고 있다.


고응척은 1605년 (선조 38년)에 75세로 생을 마감한다. 고응척은 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의 모든 백성이 전란으로 고통 받고 있을 때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군사적 정책을 내놓았다.

전란으로 도망가기 바쁜 위정자들에게는 백성은 없었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고응척은 나라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자기가 배운 것을  그대로 세상에 펼쳤고, 그 나름대의 개혁안을 제시한 시대의 명현(明賢)이었다. 


고응척은 젊어서는 학문 탐구에 식음을 전폐하며 몰입했고, 벼슬길에 나가서는 나라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깊은 통찰력으로 개혁과 타개책을 제시하였다. 두곡 고응척은 시대가 당면한 문제 앞에 항상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한 학자이자, 관료였으며, 시를 좋아했던 선비였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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