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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원재 유교문화 해설 83 (문자의 기원) 가림토문자

이순락기자 0 3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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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 박사ㆍ전안동문화원장 
 


글자는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 사람이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이 말이고 말을 표현하는 것이 글자이다. 말은 말하는 순간 사라지지만 말을 글자로 기록하게 되면 영원히 남게되며 이 기록이 역사가 되는 것이다.

글자로 역사를 기록한 이후를 역사(歷史)시대라 하니 글자는 역사와 함께 만들어 진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고대의 암각화나 암각서, 상형문자(象形文字)는 고대인들의 의사소통을 표시한 것이며 이것이 역사기록으로 볼 수는 없다.

우리나라 상고 “환인(桓因) 시대에는 의사소통을 말로 전하였는데 환인으로부터 배달국 1대환웅(桓雄)임금이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 (三一神誥)를 말로 전수 받고 왕권을 물려 받았는데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녹도문을 만들게 하여 이것을 문자로 기록하였다 (天符經天帝桓國口傳之書也 桓雄大聖尊天降後 命神誌赫德以鹿圖文記之)”라고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나라의 글자는 환웅 배달국시대에 글자의 근원이 되는 녹도문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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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도문(鹿圖文)은 “기원전 3890년경 1대환웅(커발한)이 어느날 사냥중에 모래에 사슴 발자국이 찍힌 것을 보고 신지혁덕에게 문자를 만들게 하였다. 신지씨는 그 명을 받아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문자 만드는 법을 깨달았다” (태백일사).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으로 지금의 중국 동북지방 곳곳의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한반도에서는 남해군 이동면 양아리의 계곡 및 경박호의 선춘령과 오소리 사이의 바깥쪽 암석에 고대의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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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군 암각화(고대문자) 

문자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약 5천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발견된 쐐기문자(楔形文字)가 인류 최초의 문자라고 하지만, 녹도문자 (鹿圖文字)는 이보다 1천년 앞선 6천년전 인류 최초의 문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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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창힐의 창성조적비 

 중국의 한자(漢字)는 3,800년전 동이족(東夷族)의 은(殷)나라 갑골문자에서 기원하고 있으며, 중국에서 문자의 기원으로 주장하는 창성조적비(倉聖鳥跡碑)는 문자의 시조 창힐(倉頡)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고 하며 창힐은 황제 헌훤(軒轅)의 사관(史官)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삼성기』『태백일사』의 기록에 의하면 배달국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紫府,BC2800) 선사는 헌원(軒轅)에게 〈삼황내문〉을 전하고, 창힐은 부도(符都)의 글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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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도문자 천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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篆字 천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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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字 천부경 

결론적으로 우리의 역사서 『부도지』와 『삼성기』, 『단군세기』, 『태백일사』등의 기록으로 추상해 보면 한민족의 철학사상이 담긴 천부경(天符經)이 문자가 없던 시대에 왕권의 상징으로 구전해 오다가 6,000년전 배달국시대 상형문자인 녹도문으로 기록되어 전하게 되었는데 당시 4,800년전 치우천황 당시 국사(國師)인 자부(紫府) 선사는 창힐에게 전해 준 부도(符都)의 글자가 바로 바로 천부경인 것이며 이를 중국의 문자의 기원으로 삼고 있는 조적문자(鳥跡文字)가 바로 녹도문자(鹿圖文字)와 동일하며 천부경의 원형으로 밝혀지고 있다.

지금 전세계가 쓰고 있는 알파벳 글자는 4천년전 레바논 근방의 페니키아 민족이 사용하던 22개의 자음으로 된 페니키아 문자가 알파벳의 원형이라고 하며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 문자에서 자신들의 모음 글자인 a e i o u를 더하여 사용하게 되었고, 이로서 최초의 알파벳인 그리스 문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알파벳이라는 이름은 그리스 문자 첫 번째 글자(알파)와 두 번째 글자(베타)를 이은 단어에서 기원하였다.

복희씨에 대해서는 『주역』 〈계사전〉 하편에 “복희씨는 위로 우러러서는 하늘의 상을 관찰하고 아래로 구부려서는 땅의 법칙을 살피며 (仰則觀象於天 俯則觀法於地) 새와 짐승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살피고 땅의 마땅한 바를 살펴 보면서 (觀鳥獸之文 與地之宜) 가까이는 자기 몸에서 취하고 멀리서는 모든 물건에서 취하여 (近取諸身 遠取諸物) 이에 비로소 처음으로 복희씨가 팔괘를 지음으로써 (於是 始作八卦) 신명의 덕에 통달하고 이로써 만물의 정상을 유추하니라(以通神明之德 以類萬物之情)

옛날에 노끈을 매어서 의사를 전달하더니 후세에 성인이 글자를 만들어 기록으로 바꾸어 (上古 結繩而治 後世聖人 易之以書契) 모든 관원들이 이로써 다스리니 만민에게 이로써 자세하게 살피니 대개 저 택천쾌괘에서 취하였다(百官以治 萬民以察 蓋取諸夬)” 라고 하여 2500년전 공자가 고대 결승문자로 의사소통을 하였고 복희씨가 주역의 괘상을 그림으로 그려 길흉을 판단 하였고 그 이후에 문자가 생겨났음을 밝히고 있다.

중국의 복희씨는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배달국 5대 태우의 환웅(5500년전)의 막내아들(五傳而有太虞儀桓雄 敎人 必使黙念淸心 調息保精 是乃長生久視之術也 有子十二人 長曰多儀發桓雄 季曰太皞 復號伏羲)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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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시대 가림토문자 

신지(神誌)의 녹도문은 소리글이 아니라 만물을 형상화한 한자와 같은 뜻 글자라서 일반인들은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그 이후 고조선 3대 가륵단군시대 (4,500년전)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38자를 만들게 하니 이를 가림토(加臨土)라고 하니 그 글자는 다음과 같다(於是 命三郞乙普勒 譔正音三十八字 是爲加臨土 其文 曰(왈)” 라고 《단군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2180년 가륵단군이 신지(神誌)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수케 하였다” 하였으니 이때부터 환웅 배달국 1565년의 역사가 글자로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고래로 전해온 녹도문 천부경을 소리글자로 표현한 것이 가림토문자로 밝혀지고 있다.

그 이후 상형문자(녹도문자)와 가림토문자(소리글자)를 함께 써오다가 3800년전 은나라 갑골문을 기원으로 발전한 한자가 동아시아의 기록문화를 주도하게 되었고 우리의 역사가 모두 한자로 기록되게 되었고 신라때 고운 최치원선생이 ‘가림토천부경’을 갑골문 전자로 바꾸어 ‘천부경81자’로 다시 쓰게 된 것이다.

중세이후로 중국문화가 비대해지고 우리문화가 왜소해지자 외래문화인 불교와 유교문화의 모든 경전과 기록들이 한자에 의존하던 중에 우리의 소리글자는 점차 잊혀지게 되었고 신라시대 설총이 한자(漢字)의 음과 뜻을 빌어서 우리말을 표기하던 이두문자(吏頭文字)를 만들어 조선조 까지 사용되었다.

조선조 1446년 10월 9일 세종임금이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백성들의 뜻을 실어펴지 못할 사람이 많아서 이를 어여삐 여겨 한글을 만들었다" 라고 하면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으로 한글 28자를 반포하게 되었는데 당시 최만리등 사대부들은 중국의 제도를 버리는 것은 부당하다며 엄청난 반대에 부딛쳤지만 세종은 민족자주적인 입장에서 훈민정음을 관리 시험에 쓰고 언문청(諺文廳)을 세워 한글 번역서인 언해본을 펴내는 등 새로운 문자를 보급하는데 힘썼다. 언문(諺文)이란 당시 한글을 낮추어 부르던 이름이라 하였지만 실제는 선비들의 말(彦+言)이란 뜻으로 한글을 높여 지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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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임금 훈민정음28자 

훈민정음 세종임금 어제(御製) 서문에서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 고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엽게 여겨서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으니,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故 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 易習 使於日用 耳) 라고 하였고

​정인지(鄭麟趾)의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서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다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소리에 따라서 글자를 만들어서, 그리하여 온갖 사물의 실상(實相)과 통하게 하였고, 삼재(天地人)의 도리를 책에 싣게 하니, 후세 사람이 능히 바꾸지 못하였다. 

우리 동방은 예악, 문장 등 문물제도가 중국에 비길만하나 다만 각 지방의 말은 중국과 같지 않다. 옛날 신라의 설총이 처음으로 이두(吏讀)글자를 만들었는데, 관청과 민간에서는 이제까지도 그것을 쓰고 있다.

그러나, 모두 한자를 빌어서 사용하므로, 어떤 것은 어색하고 어떤 것은 우리 말에 들어맞지 않는다. 비단 속되고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말을 적는데 이르러서는 그 만분의 일도 통달치 못하는 것이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비로소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지으셨다. 이 글자는 상형해서 만들되 글자 모양은 옛날 고전(古篆)을 본떴고, 소리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였으므로 음은 칠조에 맞고, 삼재의 뜻과 이기(陰陽)의 묘가 다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문자로 칭송받는 한글, 사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처음 창제한 것이 아니다. 한글의 원형이 이미 고조선 시대에 존재하였다. 행촌의 《단군세기》에서는 가림토(加臨土)문자라 하여 이미 3세 가륵 단군(BC 2181)시대에 삼랑 을보륵이 ‘정음正音 38자’를 지었음을 밝히고 있다. 세종은 이를 본떠서 훈민정음 28자를 만들었다.

『세종실록』 26년 2월조에 “언문은 다 옛 글자에 근본한 것이요,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라고 하였고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 “형태를 본뜨되 글자는 고전을 본 받았다(象形而字倣古篆).” 라고 하였다.

세종의 한글창제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단군세기의 저자 행촌 이암(李嵒)의 손자 용헌(容軒) 이원(李原, 1368~1430)이 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어 조부가 저술한 단군세기의 가림토문자와 고조선의 역사를 세종에게 전수하였고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옛 글자를 모방(字倣古篆) 이라고 한 것은 바로 가림토문자를 모방 하였음을 추상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 강단사학자들은 가림토문자를 부정하고 중국과 몽골 등의 옛 글자를 모방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강압에 의해 우리 말과 한글을 빼앗겼지만 그러나 지금은 세계화라는 미명아래 우리 스스로 우리말과 한글을 버리고 기업과 상가의 간판은 외래어 일색이고 방송과 언론 등에서 외래어와 알아듣지 못하는 신조어를 남발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배우기 쉽고 과학적으로 우수한 최고의 문자를 외면하는,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파괴하는 행위가 지속되는 안타까운 실정에 있다.

우리의 한글은 세계문자학회가 주최한 2021년 세계문자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였고, 국보로 지정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1997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되었고,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존맨(John Man)은 한글을 가리켜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 이라고 했다. 또한 옥스포드 대학에서는 세계의 모든 문자에 순위를 매긴 결과 한국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처럼 한글은 인터넷시대에 동일한 의미의 전달체계에서 영어 알파벳은 11분이 걸리고 한글은 7분이 걸리는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언어체계로 인식되어 세계공식언어로 채택되었으니 자랑스러운 우리한글이다.


-- 2022년 10월9일 한글날 불원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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