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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원재 유교문화 해설 81 (단군신화의 진실)

이순락기자 0 2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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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 박사ㆍ전안동문화원장 


○ 인간의 삶의 기록이 없던 시대를 선사시대(先史時代)라 하여 역사학자들은 유물이나 유적으로 고대인들의 역사와 삶을 유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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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의 역사는 동아시아에 남겨진 유물과 유적 의 고유한 특성을 연구하여 고대인들의 삶과 문화를 추정하게 된다. 한민족의 조상들은 카자흐스탄 천산(天山)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적석유적 (積石遺迹), 즐문토기 (櫛文土器), 고인돌 등 삶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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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적문자

 동이족은 이미 문자의 시초인 조적문(鳥跡文), 녹도문(鹿圖文), 은나라 갑골문(甲骨文) 으로 발전하였고 BC2181년 가륵단군 (BC2182~2138) 시대에 가림토문자 38글자를 만들어 쓴 세계에서 가장 앞선 문명민족이었다. 기원전 1500년경에 쓰여진 구약성경 기록보다 680년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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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토문자 

 이 가림토문자 38글자가 고대 한민족의 우주론인 천부경(天符經)이며 이를 보고 신라때 고운최치원 (857~908)이 천부경 81자를 만들었고, 조선 세종(1397~1450) 시대에 이 가림토문자를 보고 한글 28글자를 만들어 세상에 반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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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성기 전편 

 기원후 100년경에 쓰여진 신약성경은 AD 400년경에 필사본이 발견되었고, 반야심경은 AD629년 신라 현장법사 (602~664)에 의해 번역 전래되었는데, 이보다 앞선 시기에 신라스님 안함로 (579~640)에 의해 우리의 상고사 삼성기(三聖記)가 기술되었다. 

 삼국시대의 기록인 김부식 (1075~1151)의 삼국사기와 일연스님 (1206~1289)의 삼국유사는 한민족 정사로 인정하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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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보다 앞선 시대 신라때 쓰여진 삼성기와 고려때 행촌 이암 (1297~1364)이 쓴 단군시대의 47대임금 2096년의 역년을 기록한 단군세기는 역사성이나 사료적 중요성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비견될 수 없는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한민족의 정사(正史)로 인정받지 못하고 

 중국에 의존하여 날조된 단군신화를 아직까지 후대에 교육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실정으로 허구의 단군신화를 삼성기와 단군세기에 기록된 단군역사를 함께 읽어 보면서 한민족의 역사복원에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갖게 하고자 한다.

○ 일연(1206~1289) 스님의 〈삼국유사〉

〈삼국유사〉를 기술한 일연스님이 살았던 고려 후기 역사는 AD1231년 23대 고종때 최초의 몽골 침입을 시작으로 28년 동안 7차례에 걸친 몽골 침입을 맞아 전쟁을 치러야 했다.

1259년 화의 조약을 맺음으로써 비로소 안정국면이 되기는 했지만 이후 25대 충렬왕부터 30대 충정왕까지 원나라의 사위국으로써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게 된다. 

 왕의 시호에 반드시 충성을 다짐하는 ‘충’자를 붙여야 했고, 왕의 이름마저도 몽골 이름을 가졌으며 머리를 땋는 변발이나 호복의 복장이나 결혼 풍습에 이르기까지 근 100년간이나 원나라 제도를 따라야 했던 불행한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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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함스님 

 당시 우리는 이미 신라의 안함로(579~640) 스님이 쓴 삼성기에 환국 환인시대 3301년, 신시 배달국 환웅시대 1565년, 47대 단군시대 2096년의 생생한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우리의 오랜 역사를 중국의 요순시대 (BC2333년)에 앞세울 수가 없어서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환인 3301년과 환웅 1565년을 ‘환인의 아들 환웅’으로 기술하고 ‘환웅과 웅녀가 혼인하여 낳은 아들이 단군이며 1908세까지 수(壽)를 누렸다’고 신화로 기술하여, 

 47대 실존의 단군(壇君)의 역사를 한 사람의 단군이 1908세의 수를 누린 허구적 신화로 날조하여 단군을 막연한 종교적 숭배대상으로 추락시켜 6,962년의 역사를 말살시킨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가장 오랜 역사서로 일컬어지는 김부식 (金富軾, 1075~1151) 의 〈삼국사기〉는 일연의 〈삼국유사〉 이전에 편찬된 것이지만 고조선에 대해서는 일체 서술하지 않았다.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초기의 문헌은〈삼국유사〉와 〈제왕운기〉를 들 수 있다. 일연스님은 김부식과 같은 유학자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여러 신화와 설화로써 우리나라 고대사를 서술하였는데, 그〈삼국유사〉

의 내용을 보면

첫째 유학자, 역사가들이 논평한 바와 같이 허탄한 기사가 많다.

둘째, 저자가 불교승려라는 신분으로 인해 이 책의 절반부분이 불교적 색채로 쓰여졌다.

셋째, 역사전문가가 아닌 선승의 손으로 집필되었던 만큼 사료의 정리면에서 연대의 착오와 인용기사의 소루한 점등 전문성, 책임성의 결여로부터 나온 결함들이 있다.

넷째, 그 취급기사의 범위와 시각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에 균형적 시각이 아니라 심하게 신라의 사적에 편중하고 있다. 

이렇게 『삼국유사』의 내용은 그 사료의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저자의 취향이나 편향된 지식에 근거하여 기술된 것으로 신라 중심의 ‘유사’, 또는 불교중심의 ‘유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일제 암흑기에 기술된 우리의 고대사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 〈삼국유사〉중 허구의 단군신화

 옛날, 하느님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니 삼위태백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弘益人間)’ 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여겨지므로, 아들 환웅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며 인간 세상에 내려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자 환웅이 풍백(風伯) · 우사(雨師) · 운사(雲師)를 비롯한 삼천 명의 수하를 이끌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고 일컬으며 다스렸다.

그는 곡식 · 생명 · 질병 · 형벌 · 선악 등 360여 가지 일을 맡아 인간 세상을 다스렸다. 그 때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들의 간청을 들은 환웅은 쑥 한 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그것을 먹고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곰은 시키는 대로 하여 삼칠일 만에 여자로 변하였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곰 여인(熊女)은 혼인할 상대가 없자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 갖기를 기원하였다. 그러자 환웅은 잠시 인간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였다. 그 후 웅녀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이다. 

 당(唐)의 요(堯)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년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의 호왕(虎王=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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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촌 이암 단군세기
 

○ 〈단군세기〉의 저자 행촌 이암

행촌 이암(李嵒,1297~1364) 은 고려말 원나라 간섭시기의 5대 국왕을 모신 문신으로 성균관 대사성, 수문하시중, 서북면 병마도원수로 홍건적 난을 평정한 공이 있다. 

 그는 고려조 공신이자 문벌가의 후손으로 조선개국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10세때에 강화도 마니산에 들어가 유가 경전과 우리 고대사를 공부하고 단군의 역사를 가슴에 새기고 단군시대에 쌓은 참성단에 올라 시를 읊었다.

情趣何嫌煙火寰 (정취하혐연화환) 

仙風猶烈塹城壇 (선풍유열참성단)/ 깊은 정취 어린 강화섬 불탔다하여 어찌 버릴수 있으리요, 단군님 세운 참성단 위에 선풍이 휘몰아쳐 오네

江山依舊非吾俗 (강산의구비오속) 

日月方新多僑官 (일월방신다교관)/ 산천은 의구하지만 우리 동방의 미풍은 어디가고, 해와 달은 언제나 새로운데 타국 관리만 와글거리네

陟岵嘗憶孔登泰 (척호상억고등태) 

臨海思源孟觀瀾 (임해사원맹관란)/ 옛 조상이 그리워 산에 올랐다가 그 옛날 태산에 오른 공자님 생각하네, 바다로 고개돌려 맹자처럼 물결을 보고 근원을 생각하네

孰將燭喝昏衢志 (숙장촉갈혼구지) 

求我自今天下安 (구아자금천하안)/ 어두운 거리에 누가 뜻을 두고 등불 밝혀 외칠 것인가, 우리 동방 세계의 평안을 위해 지금 내가 나서리라

 이암은 17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18세에 비서성(秘書省)의 관료가 되어 많은 고서를 탐독하였다. 27세 충숙왕 당시 류청신과 오잠등 간신배들이 고려를 폐하고 원나라에 귀속하기를 청하자 이때 이암은 “우리나라는 환단시대 이래로 모두 천상 상제님의 아들(天帝子)이라 칭하였고, 하늘에 제사 지냈습니다,

 우리나라가 작다고 하지만 어찌 국호를 폐하려 하는가! 세력이 약하다 한들 위호를 어찌 깎고 낮추려 하는가! 이러한 행동거지는 모두 간사한 소인배의 망동이니 마땅히 도당(都堂)에 청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릴진저.”라는 통분의 상소를 올리고 간신배를 처단하기를 주청하다가 36세에 강화도에 귀양가게 된다.

 1335년 39세에 유배에서 풀려난 후 경기도 양천 천보산 태소암에 머물면서 청평산인 이명(李茗)과 복애거사 범장 (范樟,?~1395)을 만나 소전거사(素佺居士)로부터 비전의 사서(史書)를 전달받아 읽고 민족사의 집필을 결심하고 그후 이암은 《태백진훈(太白眞訓)》과 《단군세기(檀君世紀)》를 기술하고 범장은 《북부여기》 이명은 《진역유기》를 저술하게 된다.

 이암은 67세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강화도 해운당에 머물면서 그해 10월 3일 개천절에 《단군세기》를 완성하고 이듬해에 서세하였다. 이렇듯 행촌 이암선생의 전 생애는 100년에 가까운 원나라의 간섭시기에 오직 이를 극복하여 자주 독립국 고려를 세우려는 애국의 일념으로 《단군세기》 완성에 여생을 모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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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단군세기》의 저술은 객관적이고 확실한 사료를 근거로 민족의 정통사를 정리하여 후세에 전승하였는데, 한 책은 후손인 평북 이동의 이형식(李亨栻)의 집에서 나왔고, 또 한 책은 평북태천의 진사 백관묵(白寬黙)에게서 나왔는데 1911년 환단고기 편저자 운초 계연수가 두본을 대조하니 한자도 틀림이 없었다고 한다.

○ 행촌 이암의 고대사 《단군세기》

《단군세기》는 고려때 행촌 이암(李嵒,1297~1364)이 강화도 해운당에서 저술한 역사서로, 1세 단군왕검으로 부터 47세 단군고열가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재위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한 정사이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과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세수에 대하여 여러 고사의 기록이 상이하지만 각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단군세기」의 기록이 가장 정확하다.

국호로 보면 서기전 2333년 무진년부터 제44대 단군 구물이 반란군 우화충의 난을 멸하고 국호를 대부여로 바꾼 때인 서기전 425년까지 존속하였으니 1908년이 된다. 그리하여 「삼국유사」와 「동국문헌비고」의 기록이 이에 부합된다.

제위 계승으로 보면 서기전 2333부터 서기전 238년 47대 고열가단군이 오가에게 나라를 맡기고 아사달산에 입산수도하러 가기까지 2096년이 되는데 비록 제 44대 구물단군이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었다라고 하더라도 어명을 받고 반란을 진압하고 추대되어 단군에 즉위하였으므로 단군조선(檀君朝鮮)을 계승한 것으로 보아 2096년으로 본 것이다.

행촌 이암선생은 지식인의 양심으로 『단군세기』를 필생의 사업으로 저술하고 후세들에게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그 서문에 밝히고 있다.

“나라에는 모습이 있고 역사에는 혼이 깃들어 있을진대,

어찌 모습이 혼을 잃고도 나라를 보존할 수가 있겠는가!

역사가 바른 길로 가게 만드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일이요.

모습과 혼을 함께 갖추는 것도 역시 내 스스로 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을 알려고 한다면 무엇부터

알아야 하는가! 이는 곧 내 역사를 먼저 아는 데에 있다.”

○ 《단군세기》중 단군기사

〈고기〉에 말하기를 “단군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요, 어머니는 웅씨국의 왕녀이며 신묘(B.C2370)년 5월2일 인시(寅時)에 신전(神殿)의 거룩한 나무아래서 태어났고 신인(神人)의 덕이 있으므로 멀고 가까운 곳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복종하더니 

 나이 14살이 되던 갑진 (B.C2357)년에 웅씨(檀國)국의 왕이 왕검(王儉)의 신성(神聖)함을 듣고 비왕(裨王)으로 삼아 대읍의 다스림을 섭행(攝行)하도록 하더니 무진(단기1년 BC2333)년 당요(唐堯)때에 단국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檀木)의 터에 이르니, 

 온나라 사람들이 천제의 아들로 받드니 구환(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고 온전한 진리의 교화가 멀리까지 미치도록 하니 이를 단군왕검이라고 한다.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이요, 제위에 있기를 93년이며 130까지 사셨다.” 세기에 재위 93년의 기록이 아주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 신라 안함로(579~640) 의 상고사(삼성기 상편)

우리 한(桓)의 건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사백력(斯白力: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 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氣)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 없이 볼 수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黑水:흑룡강) 백산 (중국의太白山)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한님(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했다. 한님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뒤에 한웅(桓雄)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天神)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그 곳을 청구(靑邱)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이라 불렀다. 3.7일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지내고 밖의 물건을 꺼리고 근신하며, 문을 걸어 잠그사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라.​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니, 팔괘를 그으시고 올 것을 알며 상을 잡으시고 신을 움직였다. 또 여러 영험 스러운 이들과 뭇 철인들이 보살피도록 하시더니 웅씨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하매, 짐승 가죽으로써 폐물을 삼았다.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하니, 온 세상이 조공을 바치며 새와 짐승도 덩달아 춤추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지상 최고의 신이라고 받들어 세세토록 제사가 끊임이 없었다. 신시의 말기에 치우천왕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누리더라.

뒤에 신인왕검께서 불함산의 박달 나무 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갖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백두산)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이라고 불렀다.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生靈)들을 두루 교화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시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와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회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에겐 군대를 관장케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단군왕검은 무진(B.C.2333)년부터 나라를 다스려서 47세를 전 하니 그 햇수가 2096년을 헤아렸다.

○ 원동중(1330∼?)의 상고사(삼성기 하편)

인류의 조상은 나반(那般)이시다. 나반께서 아만(阿曼)과 처음 만나신 곳은 아이사비(阿耳斯首)이다. 두 분이 꿈에 천신(상제님)의 가르침을 받고 스스로 혼례를 올리시니 환족의 모든 족속[九桓族]이 그 후손이다.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昔有桓國]. 백성들은 풍요로웠고 인구도 많았다. 

 처음에 환인께서 천산에 머무시며 도를 깨쳐 장생하시니 몸에는 병이 없으셨다. 하늘(삼신상제님)을 대행하여 널리 교화를 베풀어 사람들로 하여금 싸움이 없게 하셨다. 모두 힘을 합해 열심히 일하여 스스로 굶주림과 추위를 사라지게 하였다.

환국 말기에 안파견께서 삼위산(三危山)과 태백산(太白山)을 내려다 보시며 이렇게 물으셨다. “두 곳 모두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弘益人間)수 있는 곳이다. 과연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은가?” 오가의 우두머리가 모두 대답하였다. 

 “서자(庶子)에 환웅이란 인물이 있는데 용기와 어짊과 지혜를 겸비하고, 일찍이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세상을 개혁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그를 동방의 태백산으로 보내 다스리게 하십시오.” 이에 환인께서 환웅에게 천부(天符)와 인(印) 세 종류를 주시며 명하셨다. “이제 인간과 만물이 이미 제자리를 잡아 다 만들어졌으니, 그대는 노고를 아끼지 말고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가서, 새 시대를 열어 가르침을 세우고(開天立敎)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리고 깨우쳐서(在世理化) 이를 만세 자손의 큰 규범으로 삼을지어다.”

환웅께서는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태백산 마루,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오시어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시니, 이분이 바로 환웅천황이시다. 

 환웅께서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거느리시고, 오가(五加)에게 농사·왕명·형벌·질병·선악을 주장하게 하시고,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써 다스려 깨우쳐서(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셨다(弘益人間). 이때 웅족과 호족(一熊一虎)이 이웃하여 함께 살았다.

일찍이 이 족속들은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기도 드리는 신단수에 가서 “삼신의 계율을 따르는 백성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하고 빌었다. 환웅께서 이 소식을 듣고 “가히 가르칠 만하도다” 하시고, 신령한 도술로써 환골(換骨)케 하여 정신을 개조시키셨다. 

 이때 먼저 삼신께서 전해 주신 정해법(靜解法)으로 그렇게 하셨는데, 쑥 한 묶음과 마늘 스무 줄기를 영험하게 여겨 이를 주시며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이것을 먹을지어다.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기도하라. 그리하면 참된 인간이 되리라.”

이에 웅족과 호족 두 족속이 함께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삼칠일(21일)을 지내더니, 웅족은 능히 굶주림과 추위를 참아 내고 계율을 지켜 인간의 참모습(儀容)을 얻었으나, 호족은 방종하고 게을러 계율을 지키지 못하여 좋은 결과(善業)를 얻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두 족속의 성정(性情)이 서로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에 웅족 여인(熊女)들이 시집갈 곳이 없어 매일 신단수 아래에 와서 주문을 외우며 아이 갖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께서 이들을 임시로 환족으로 받아들여 환족 남자들과 혼인하게 하셨는데, 임신하여 아이를 낳으면 환(桓)의 핏줄을 이은 자손으로 입적시키셨다.

환웅천황께서 처음으로 동방 배달민족의 새 역사 시대를 열고(開天) 백성에게 교화를 베푸실 때, 『천부경(天符經)』을 풀어 설명하시고 『삼일신고(三一神誥)』를 강론하여 뭇 백성에게 큰 가르침을 베푸셨다. 이후에 14세 치우천황께서 영토를 개척하고, 구리와 철을 캐어 무기를 제조하는 한편 병사를 훈련시키고 산업을 일으키셨다. 

 이때에 구환족이 모두 삼신을 한뿌리의 조상으로 삼았다. 천황께서 소도(蘇塗)와 관경(管境)과 책화(責禍)를 주관하고, 백성의 의견을 모아 하나로 통일하는 화백제도를 두셨다. 또한 백성으로 하여금 지혜와 생명력을 함께 닦아(智生雙修) 전(佺)의 도에 머물게 하셨다.그 후 구환족이 관경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리시는 천제의 아들(天帝子)에 의해 모두 통일되니, 이분이 단군왕검이시다.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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