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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원재 유교문화 해설 (89) 칠곡 지천면 진주강씨 혜사정(蕙社亭)

이순락기자 0 2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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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 박사ㆍ전안동문화원장  



○ 일가 친척이란 같은 성씨 후손으로 8촌이내 당내(堂內)를 친척이라 한다. 당내를 벗어난 10대 이내의 일가(一家)를 일반적으로 동파지친(同派之親) 문내(門內)라 하고, 10대 이상의 대문중을 일가라 한다.

당내(堂內)란 고조부를 같이(同高祖)하는 친척을 말하고 촌수는 8촌(三從兄弟)간으로 ‘한집안’이라 하여 아주 가까운 친척이다.

 고조부는 대략 150년간의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촌수로는 아주 가까운 4촌지간으로 4대봉사(四代奉祀)라 하여 고조부모의 신주를 모시고 그 후손들이 함께 기일(忌日)에 제사 모시고, 그 이전의 조상은 신주를 조매(祧埋)한 후 묘소에 성묘로 대신하였다.

자기를 기준으로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부모-조부모-증조부모-고조부모가 있게 되는데 직계(直系)뿐만 아니라 모계(母系)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8고조부와 8고조모가 있게 된다.

옛사람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 있게 해 준 4촌간의 아주 가까운 조상 8고조부모(16명)의 내력과 삶을 소중히 하고 그 후손들과 아주 친밀한 인간 관계를 가졌다.

동고조 이하 한 가정이 보통 30~50명이라면 8고조 가문의 8촌이내 친척은 300~400명이 된다. 옛날에는 고조(高祖)의 윗대 5대조를 현조(玄祖) - 6대조를 열조(烈祖)- 7대조를 태조(太祖)- 8대조를 원조(遠祖)- 9대조를 비조(鼻祖)라 칭하였고 아래로는 손- 증손(曾孫)- 현손(玄孫)- 5대손을 내손(來孫)- 6대손을 곤손(晜孫)- 7대손을 잉손(仍孫)- 8대손을 운손(雲孫)- 9대손을 이손(耳孫) 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 나의 고조부 치암(恥巖) 이만현(李晩鉉,1832~1911) 공의 선대이자 나의 5대조부는 이휘면(1807~ 1858) 이고 5대 조모는 칠곡(漆谷)에서 부자로 이름난 진주강씨 강옥성(姜玉成)의 따님이다.

진주강씨(晋州姜氏)의 시조(始祖)는 강이식(姜以式)이다. 강이식은 고구려 영양왕(597년) 때 도원수(都元帥)로 수나라 문제(文帝)가 이끈 30만 수군을 정병 5만으로 대파한 명장이다.

수년 후 수나라 문제(文帝)의 아들 양제(煬帝)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할 때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과 함께 살수대첩으로 승리하였다. 이후 신라 태중대부판내이령 강진(姜縉)이 진양후에 봉해지며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강씨의 본관은 문헌상으로는 진주, 금천, 안동, 백천, 해미, 동북, 광주 등 7본(本)이다. 모두 진주의 지파로 강씨는 유일본을 내세우고 있어 강이식(姜以式)이 모든 강씨의 도시조(都始祖)가 된다.

 칠곡의 진주강씨는 고려조 박사공파의 후손인 강맹경(姜孟卿)의 종질 우락당(憂樂堂) 강의정(姜儀貞)이 포산(苞山) 곽씨와 결혼하여 1458년경 칠곡에 입향한 후 지천면 창평리를 세거지로 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청송·영천·청도·군위 등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후 1790년경 성균관 사예(士藝) 강백준(姜百濬)이 아들이 없자 경남 사천에 살던 동생 강백의(姜百懿)의 둘째아들 강옥성(姜玉成, 1777~)을 양자로 삼아 광주이씨 석담 이윤우(李潤雨, 1569~1634)의 6대손 만각재(晩覺齋) 이동급(李東汲)의 딸과 혼인시켜 칠곡군 지천면 신동에 이주하게 되었다.

금년은 석담 이윤우선생의 매원입향 400주년이 되는 해로 광주이씨 석담종중에서 2022. 10.7일 기념식과 학술발표회를 가진바 있다.

칠곡군 지천면 신리에 세거하고 있는 진주강씨는 박사공파(博士公派), 통계공파(通溪公派)·

, 참판공파(參判公派), 영선공파(永善公派) 등의 자손들이다. 영선군 강이찬(姜利纘)은 박사공의 9세손이고 입향조인 강백준은 박사공의 20세손이다.

 칠곡에 처음 입향한 청하현감을 지낸 우락당 강의정의 아들 강지해(姜之海)는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5명의 손자 강효손(姜孝孫) 강계손(姜繼孫) 강충손(姜忠孫) 강신손(姜信孫) 강종손(姜終孫) 모두 급제를 하여 가세(家世)를 떨쳤다. 이들 강지해(姜之海)의 다섯 아들이 큰 잔치를 베풀고 자신들의 관인(官印)을 마당에 있는 다섯 개의 크고 작은 바위 위에 올려 놓았다고 해서, 다섯 개의 바위들을 오인석(五印石) 이라고 부른다. 현재 그 후손들은 칠곡(漆谷)·영천(永川)·군위·청송·청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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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경 진주강씨는 박사공의 후손 강백준이 구슬정(九瑟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칠곡 웃갓에 문호를 이루고 살았는데 그의 손녀를 도산 원촌 퇴계선생의 10대손 이휘면(李彙礻+冕)에게 출가시켜 원촌에 있던 이 집을 ‘칠곡고택’이라 하여 2006년 문화재로 지정하여 안동시 성곡동으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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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사 강원형 기념비 

강옥성(姜玉成)의 증손자 강원형(姜遠馨,1862~1914) 은 칠곡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백하 강의영(白下 姜宜英)의 아들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성윤(聖允), 호는 혜사(蕙社) 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10세에 지은 시 ‘큰 들의 풍광은 풍요로운 세상이요, 높은 산 구름 기세는 비가 내려 만물을 생장함이라, 여러어르신네 가득한 자리에 시 한수로 찬탄하지 않을 수 없네’(大野風光烟世界/ 高山雲氣雨精神/ 句滿座莫不嗟歎)

1890년(고종 27)에 문과로 출사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홍문관 시강(侍講), 봉상시전사(奉常寺典司), 비서랑(秘書郞)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격렬한 구국상소를 올렸다.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무력으로 제1차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함으로써 노골적인 침략정책을 감행하자,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수좌(首座)가 되어 항일투쟁을 본격화하였다.

먼저 일본공사관에 내정간섭과 침략정책의 부당성을 규탄하는 공개장을 보내어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였고, 만일 계속 내정간섭을 자행할 경우에는 우리 민족도 결사적으로 그에 맞서 싸울 결의를 통고하였다.

1905년 3월에 일본헌병대가 전판서 김학진(金鶴鎭), 전참판 최익현(崔益鉉), 비서승 허위(許蔿) 등 3인을 일본의 침략에 대한 규탄의 격문을 돌렸다는 이유로 구속하자, 일본군사령부에 항의공개장을 보내어 일본의 불법을 힐문하고, 3인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대한십삼도유약소의 대표로서 동지를 규합하고, 2천만 민족의 대표로 각국 공사관에 공한을 보내어 일본의 야만성을 지적한 뒤, 3인에 대한 공개담판을 개최할 것 등을 요청하였다. 그러한 운동의 결과로 3인은 석방되었으나, 그는 일본헌병대에 잡혀 45일간 구속당하였다.

1905년 5월 석방된 뒤 계속하여 일본의 배신적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항의공개장을 여러 차례 일본공사관에 발송하였다. 또한, 11월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십삼도유생연명소 十三道儒生聯名疏〉의 소수(疏首)가 되어, 을사조약의 파기,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 일본공사의 횡포와 무례를 엄징할 것 등의 상소를 올렸다. 동시에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국내외에 공표하여 국민들의 궐기와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하였고, 그로 인하여 1905년 11월 28일 일본경찰에 잡혀 4개월간 투옥된 뒤 1906년 3월 20일 출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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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사정 

1914년 9월 서울에서 동지들과 국권회복을 모의하던 중 분사(憤死)하였다. 고향 지천면 창평리(심천리 입구)에 혜사정이란 재실이 지어지고, 지천면 신동교회 옆에는 대통령 박정희가 쓴 혜사 강원형 선생 의사비(義士碑)가 있고, 1980년에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칠곡 애국동산에 강원형의 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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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사정 

1956년 혜사(惠社) 강원형을 추모하는 혜사정(蕙社亭)이 칠곡군 지천면 심천리 산103번지에 세워졌다.

 강옥성의 주손 강계형(姜桂馨)이 아들이 없자 혜사 강원형의 맏아들 강용희(姜龍熙)가 뒤를 이어 고택을 지키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 후손이 모두 객지로 떠나고 혜사정 만이 언덕위에 유적으로 남아있다.

○ 혜사정(蕙社亭)은 지천면 신동 마을 동쪽 언덕위에 5간 겹집 형태에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좌측 온돌방 앞에 1칸 크기의 계자각 난간의 누마루가 돌출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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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월문 

입구에 노송과 청죽이 울창하고 뒤편에도 대나무가 심겨져 있다. 대지 주위에 방형의 토석담을 쌓고 입구에 3간 솟을대문위에 풍월문(風月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종도리 밑면에 “단기(檀紀) 4289년 병신 3월 19일 오시(午時) 입주상량(立柱上樑)”이란 기록이 있어 1956년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전면기둥에는 10개의 주련이 붙어있고 정면에 초서체 혜사정, 누마루에는 이수헌(二水軒), 중앙 마루에는 기문(記文)과 권상규(權相圭)의 상량문, 혜사정이라는 해서체 현판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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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대바위(신동입석) 

혜사정 바로 뒤편에는 국내 최고(4.5×2.0m)의 선사시대의 유적인 신동입석(경북기념룰 29호)이 우뚝하다. 이 입석은 신동마을 동쪽 언덕이 배모양이고 그 앞에 창평저수지가 있고, 언덕위에 우뚝하게 선돌이 세워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배가 돛을 달고 바다로 나아가는 모양을 한다고 하여 ‘돛대바위’라고도 한다. 입석에는 고려시대에 불교의 영향으로 ‘남무아미타불’이라 암각서가 새겨져 있다. 


2022.11.20. 불원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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