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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락의 ‘옛날 이야기’

이순락기자 0 16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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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본지 발행인, 대표 이순락 ~


뒷집 할배는 소 침쟁이

앞집 어른은 겨드랑에 날개

우리 아버지는 맷돌 중쇠물고 집 두 바퀴 돌기

 

1. 소 침쟁이(침술사) 정촌 어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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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이순락)의 고향은 경주이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경주에서 다녔다. 필자의 뒷집 할배는 정촌 어른택호를 가진 소 침쟁이(침술사)였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앞, 뒷집에 살았기에 흔한 말로 서로 간에 밥숟가락 숫자도 훤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뒷집 할배 정촌 어른은 소 침쟁이로 경주 일대에 소문이 나있었다. 어릴 적 일이었지만 심지어 영천까지도 소 침주러(고치러) 가신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 

 

정촌 어른의 병든 소를 고치는 침술은 그렇게 유명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살림살이도 웬만한 농사짓는 집 보다 훨씬 잘살았던 것이다. 그 어른은 소가 병들어 일어나지 못해도 별 말씀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종류의 침 몇 방으로 누워 있던 소를 벌떡 일어서게 하는 등의 신비한 의술인지 침술인지를 자랑했었다.

 

~ 우리 역사에서도 보면 마의(馬醫) 백광현에 관한 자료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즉 과거 드라마에서도 마의는 천민의 신분으로 말을 고치는 동물의사에서 임금을 치료하는 어의가 된 실존인물 백광현의 삶을 다룬 한방 의학드라마가 있었다. 백광현은 글자를 전혀 몰랐지만 그의 침술로 모진 역병을 이겨낸 숙종 임금이 그를 신의(神醫) 허준과 같은 종1품 벼슬까지 오르게 했다고 하지 않던가.~

 

어찌됐던 그 소 침쟁이 정촌 어른 역시도 필자가 알기에는 학문적 수준은 전혀 없다 시피한 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분의 침술 내력 같은 것은 전혀 몰랐지만 여하튼 관습적으로 전래된 경험칙의 지식으로 오늘날의 수의사 역할을 아무 이상 없이 감당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침술(鍼術)의 신비함을 필자가 직접적으로 체험한 경험도 있었다. 1970년도 연말경에 필자는 곧 군 입대(19711)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극심한 관절염(류마치스 관절염)으로 인해 특히 밤마다 잠을 이루기가 힘들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원인은 권투였다. 69년도에 대학을 입학하였고, 입학 후에는 학교 다니는 것에 회의를 느껴 거의 아침부터 학교 가는 대신에 2년여 가까이 권투체육관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권투는 스피드가 생명이다. 스피드를 위해서는 줄넘기가 최고였고. 권투운동은 줄넘기가 아마 거의 60~70%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너무 격렬한 줄넘기로 관절염을 앓게 되었고...

 

그 당시에 관절염의 통증에서 나를 해방시켜 준 것은 침술에 의한 치료였다. 당시 부산의 변두리 동네인 당감동 산 밑 동네는 이북에서 피난 온 피난민들의 집단촌으로 서울의 청계천 난민촌과 같은 정도였다. 그런 동네에 신기에 가까운 침술을 가진 할아버지가 계셨다. 그 분의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인근 암자의 스님을 통해 알게 된 그 할아버지 침술 덕분에 침을 맞고 아마 거의 1년여 동안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침술사 할아버지는 대략 10여 종류의 침은 되어 보이는 듯 한 자그마한 삼지(?)를 두루마리처럼 주르르 펼쳐 보였다. 그 중에 나에겐 가장 굵은 구리 침 이면서 뒷부분이 무슨 쇠를 연마하는 쇠줄처럼 된 것이었는데 아픈 무릎에 술술 돌리며 꽂은 다음 뭉툭한 엄지손가락의 때 낀 손톱으로 드르륵 드르륵 긁는데 얼마나 아팠던지 기절할 것 같았다. 하도 아파 고함을 지르니까 , 학생놈아 엄살이 와이래 심하노? 천정 무너지겠다.”고 웃으시면서 핀잔을 하셨던 기억이 선하다. 여하튼 나는 이상하게도 피도 흘린 기억이 없이 침술로 그 극심한 관절염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직도 이 땅에 침술사 자격증이나 면허증도 없지만 그런 신기(神技)에 가까운 침술사들이 있을는지 궁금하고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아마도 그런 좋은 침술(의술)은 틀림없이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날은 더욱 과학적으로 발전되어 잘 전해져 오고 있으리라는 상상을 해본다. 그것은 이번 코로나19로 인한 우리 질병관리본부와 의료인들의 탁월한 능력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을 정도였으니 하는 말이다. 그 저변에 깔린 우리의 전통 의학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자부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 때문이다.

 

2. 겨드랑에 날개가 달린 힘이 장사인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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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믿기 힘들겠지만 사람의 겨드랑이에 어른 엄지손가락만한 얇은 날개가 양쪽에 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바로 필자의 앞집 도국어른의 경우다. 그분은 젊었을 때 영남지방 일대에서 씨름장사로 유명세를 떨쳤던 주인공이었다. 씨름판에 나서면 그를 당할 장사가 전국 어디에도 없었다고 한다. 한창 힘이 솟아 오를 무렵엔 힘을 감당하지 못해 부모님(참봉어른)께서 크게 걱정을 하신 나머지 힘을 막기 위해 양 어깨에 혈을 끊었다고 했다. 힘이 너무 세면 나라에서 틀림없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제로 두 어깨 위에 제법 굵고 붉은 대추알 반쪽 정도 크기의 흉터가 볼록하게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 신비함은 더했었다. 더구나 그분의 겨드랑에는 어른 엄지손가락 크기의 날개(?!)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아마 오늘날의 기준으로 말하면 틀림없이 신체의 기형적인 현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으리라.

 

그분과 필자의 아버지는 앞 뒷집에 살고 있었고, 우리 아버지 또한 불가사의한 괴력을 가진 분이셨기에 서로가 특히 많이 통하는 형제지간이상으로 절친한 관계였던 것이다. 그래서 들었던 이야기에 의하면, 그 겨드랑이의 날개가 한창 자라고 있는 즈음 어느 여름 날 초당에서  목침에 팔 베개 베고 누웠는데 이웃의 방정맞은(?) 사람이 앗 저건 날개가 아닌가.” 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었던 순간 도국 어른은 , 나는 끝이구나...’ 하며 절망적인 생각으로 한탄하였다고 하며, 그 뒤로는 날개가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나오는 천사의 날개처럼 이야 되었었겠냐만...). 옛날 삼국지 혹은 중국 무협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분의 아들 중 한 사람은 나의 한 해 후배였고, 그 후배는 경주고등학교 대대장(당시 학생 규율부장)이었으며, 별명이 염라대왕 이었었다. 영천 육군 제3사관학교 1기생으로 훈련을 받았지만 결국 구보성적이 너무 좋지 않아 육군 일병으로 강등 됐다가 하사관으로 군 생활을 마쳤고, 나중엔 경찰관 직업으로...

 

3. 맷돌중쇠 어금니에 물고 집 두 바퀴 돌았던 괴력의 주인공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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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아버지는 젊었을 적(필자가 태어나기 전)에 경주 건천의 서면 조전리(대추밭)에서 상당한 부농으로 살면서 한 마디로 힘이 장사였다고 했다. 필자가 중학교 다녔을 때 아버지와 함께 벌초를 다니다 보면, 그곳 고향의 어르신들을 들판에서 만나면 반갑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쉬는 동안 주고받은 얘기들에서 얻은 사실들이었다. 그분들은 마치 지나간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듯 추억담으로 담소하면서 얘기를 하셨다. 주제는 언제나 우리 아버지의 젊었을 때의 전설적(?)인 힘쓴 얘기들이었다.

 

모심기 철 보()를 막을 때 가장 무겁고 큰 바위는 언제나 아버지 혼자 독차지 했다는 데서부터 무거운 맷돌중쇠를 어금니에 물고 집을 두 바퀴 씩 이나 돌았다는 놀라운 괴력의 이야기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경주 소전(우시장)에서 사나운 황소가 코뚜레를 망가뜨리고 난동을 부리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죽는 줄 알고 공포에 질려 있을 때, 아버지 혼자서 황소와 마주하여 황소의 목을 껴안고 코뚜레를 끼웠다는 이야기 등은 그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우리 아버지였지만 당신이 가히 노랑 오줌을 사다시피 놀라운 충격을 받았을 정도의 사건담도 있었던 것이다. 어느 봄 날 경주 장터에서 장 보러 온 몸매도 대단히 나약해 보이는 시골 청년이 장터를 구경 다니는 모습에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유인 즉 그 청년이 빨래 돌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모습이 마치 책 보자기 끼고 있듯이 다니는데 팔 한번 바꾸지 않으며 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근 한 시간 여 동안 그 청년의 뒤를 밟듯이 따라 다녔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두 번 다시 당신이 함부로 힘 좀 쓴다고 겁 없이 나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으며, 그 후 실제로 여생 동안 힘 자랑 한 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신명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말씀(얘기)을 빌자면, 당신이 평소에 영덕의 신돌석 장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다. 신돌석 장군이 왜놈 병사들을 맨 몸으로 덮쳐 수십 명씩 때려 죽이셨다는 것이며, 왜놈 군인들이 총을 쏴대며 장군을 덮칠 때 초가집 지붕을 한 손만 짚고 훌쩍 뛰어 나는 듯이 도망쳤다는 등 마치 당신이 신돌석 장군과 동고동락한 것처럼 실감 있게 얘기하시기도 하셨다. 또한 차력이라는 무슨 도술과도 같은 신비하고도 불가사의한 힘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곤 하셨는데 신돌석 장군이 차력을 하셨다고 했다.  

 

위에서 열거한 몇 가지 이야기도 사실 불과 50~60여 년 전에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 있었던 엄연한 사실들인 것이다. 필자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전우치전()같은 소설을 읽을 때는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 속된 이야기로 이스라엘 무협지라는 표현을 하지만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부분이 대단히 많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 않는가.  또한 중국의 역사소설이며, 우리나라의 임꺽정전이나 홍길동전 같은 소설도 사실은 결코 허구적인 스토리만은 아닐 것이라는 상상도 해본다.

 

아무튼 우리 민족은 뛰어난 기상과 조상의 얼을 이어받아 세계 속에서 그 어떤 난관도 기어이 헤쳐 가며 세계무대를 리더하고 위상을 크게 떨칠 것이라 확신하는 바이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전 세계가 우리 한국을 격찬하고 있음을 보고 있지 않은가.


2020.4.26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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