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따뜻한 사람
류 재 홍
걸신들린 듯 마신 물이 일 리터는 족히 되지 싶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물에도 통하는 것이던가. 물이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
상복부 컴퓨터 단층촬영(CT)한다고 열두 시간 넘게 물 한 방울 못 마셨다. 사진의 선명도를 위해 조영제를 삼키고 찍었는데 그게 부작용이 만만찮은 모양이다. 무조건 물을 많이 마셔 빨리 배출시켜라 했다. 몸속에 조영제가 남아있으면 구토 호흡곤란 어지럼증이 일어날 수 있으며, 심하면 쇼크로 인한 사망에도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갈증은 둘째 치고 약품 때문에라도 물을 많이 마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죽집에 들어가서도 물부터 찾았다. 선참에 몇 잔을 들이켜고도 모자라 컵에 넘칠 듯 부어서 자리에 앉았다. 물로 가득 찬 배속에 죽이 들어갈 자리나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갈증은 벌써 사라지고 없는데 무슨 욕심이람. 혹여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겁이 난 것인가.
무연히 물컵을 바라보노라니 물의 상처를 읊은 시인이 생각난다. 물은 흐르면서 또 끓으면서 내내 상처를 입는데, 그중에서 제일 큰 상처는 컴컴한 자기 배속에 들어가는 일일 것이라 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지독한 향수와 위장병으로 이승을 떠났던 그녀는, 분명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한 번도 내 속에 들어간 물의 사정을 물어보지 않았다. 내 속의 것들로 많이 다치지는 않았는지, 그 상처가 얼마나 클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갈증 나면 찾았고 지금처럼 필요하면 마셔댔다. 내 손톱 밑의 가시만 들여다보았지, 남의 아픔은 돌아보지 못한 격이다.
물이 내 몸속을 돌고 돌다 만나는 게 어디 조영제 같은 약품뿐이겠는가. 켜켜이 쌓여있을 아집과 욕심 덩어리를 더 많이 볼 것인즉. 그런데도 기어이 또 한 컵의 물을 들이켜고 있으니. 나는 언제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되어 보려나.
작가소개: 2009년《에세이스트》등단. 수필집『그들에게 길을 묻다』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달구벌수필문학회. 수미문학회 회원.
기사등록 : 조은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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