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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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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자기자 0 2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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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재 홍

 

# 아침 운동 길

오늘도 예외 없이 그녀와 마주친다. 검은 체육복에 검은 안경. 큰 키만큼 넓은 보폭에 직각으로 흔드는 팔. 이어폰만 없으면 전쟁터를 향해가는 여전사가 따로 없다. 자기를 손톱만큼도 내보이지 않으려는 완강함은, 자의식 없이 회로를 따라 움직이는 로봇과 많이도 닮았다.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는 그녀 등 뒤로 싸늘한 그림자가 길게 꼬리를 문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모자와 마스크로 단단히 무장했다.

한 떼의 여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지나간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습지에 생태견학이라도 가는 모양이다. 상큼한 공기가 뒤를 따른다. 뒷줄에 처져가던 학생이 앞의 친구한테 다가가며 쫑알거린다.

하늘 한 번 봐봐, 참 예쁘다.”

그 말 따라 나도 고개를 젖힌다. 이건 하늘이 아니라 숫제 바다다. 망망대해에 기러기 몇 마리. 금방이라도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를 것 같다. 귀 기울이면 끼룩끼룩 저들끼리의 대화도 들릴 듯하다.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린다. 수없이 걷고 걸으면서도 어찌 마음먹고 하늘 한 번 올려다보지 못했을까. 생각하는 것보다 살아가는 습관을 먼저 배우고 익히는 게 인간이라더니. 바쁜 것도 없으면서 왜 그리 앞만 보고 걸었는지 모를 일이다.

반환점 근처 길거리 카페에 오늘따라 사람들이 북적인다. 카페라지만, 길 가장자리에 돗자리를 펴놓고 커피와 삶은 달걀 컵라면이 전부다. 그곳에는 제대로 앉을만한 의자 하나 없어도 늘 시끌벅적하다. 아침 운동 나온 늙수그레한 아저씨들이 대부분인데, 가끔은 지팡이에 의지한 할머니와 젊은 부부도 눈에 띈다. 라디오를 들으며 시국을 논하는가 하면, 며느리와 시어머니 흉이 질펀하게 펼쳐지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어려운 이웃을 걱정하는 소리도 들린다. 반환점이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해지는 것은, 사람 사는 냄새가 좋아서일까.


 

# 시외버스 안

부부 모임이 있어 남편 사무실로 가는 길. 한 시간은 족히 걸리겠다. 그동안 음악이나 듣자. 클래식 음악에 주파수를 맞추며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는다. 십여 분 지났을까. 누군가 말 거는 것 같아 힐끗 돌아본다.

그거 오래 하고 있으면 귀에 좋지 않다던데요

중년의 여인이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건넨다. 별 참견이야 싶으면서도 이어폰을 내려놓고 전화기를 끈다. 창밖 가로수가 짙푸른 몸통을 자랑하며 휙휙 지나간다.

운동 많이 하세요?”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오지랖도 넓다. 남이야 운동하건 말건 귀찮게 시리. 대충 대답하며 눈은 여전히 창밖에 둔다.

지금 병원 갔다 오는 길인데 건강에는 뭐니 뭐니 해도 운동이 최고래요.”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가 남편 흉으로까지 이어진다. 수다도 이만하면 고수다.

작년부터 몸이 아팠어요. 허리가 바늘로 콕콕 찌르듯이요. 한참 동안 병원을 돌아다녔지요. 병원에서 주는 약을 먹었는데 그때뿐이더라고요. 때때로 통증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며칠씩 누워 지내기도 했어요. 그러더니 거짓말처럼 말짱한 거예요. 얼마나 좋던지요. 룰루랄라 했는데 지난달부터 또 그렇지 뭡니까. 우연히 나와 비슷한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만났어요. 자기도 오만가지 약을 써 봤지만, 효험이 없더래요. 통증과 함께 사는 수밖에 없다면서 마음 편히 먹고 운동이나 부지런히 하라네요.

하지만 원인도 모른 채 속수무책 당할 수만은 없죠. 오늘 대학병원에서 사진을 수십 장 찍었는데 결과는 일주일 후라야 나온다나 봐요. 결과보다 당장 집에 들어갈 일이 더 걱정인 거 있죠. 보험처리 돼도 검사비가 장난 아니더라고요. 쫀쫀한 우리 남편, 별것도 아닌 것에 돈 많이 썼다고 난리 날 것 같아서요. 그이는 아픈 사람보다 돈이 더 중한 사람이거든요.

전화벨 소리에 여인의 이야기는 끊어졌다. 버스가 내 고향 초등학교 앞을 막 지나고 있다. 저녁놀을 받아 몽환적으로 앉아있는 조그만 시골 학교. 저쯤에 느티나무와 아카시아가 즐비했었지. 그곳에서 동화책도 읽고 땅따먹기도 했었는데. 함께 놀던 친구와 시원했던 나무 그늘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

옛날에는 저 운동장이 참 넓었는데 요즘은 왜 이리 좁아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화들짝 추억에서 빠져나온다. 여인도 나처럼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던가. 새삼스레 돌아보며 이 학교를 아느냐고 물어본다. 세상에, 모교란다. 기수를 꼽아보니 딱 십 년 후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저리주저리 이어지는 이야기에 둘 다 녹아든다.

 

 

 

작가소개: 2009에세이스트등단. 수필집 그들에게 길을 묻다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달구벌수필문학회. 수미문학회 회원.





기사등록 : 조은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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